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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402017.04.02 PM 06:35
제 4 장 또 하나의 야규(柳生) 가문 -「오와리 야규(尾張柳生)」와 신카게류(新陰流)
◎「오와리의 기린아」야규 렌야(柳生連也)
~ 쇼와(昭和) 35년(1955) 무렵부터 시작된 검호 소설 붐에 휩쓸리며 이를 견인한 작가 고미 야스스케(五味康祐)의 작품 중에『柳生連也斎(야규렌야사이)』라는 단편이 있다. 나고야(名古屋)로 가서 제자를 추천한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가, 결국은 자신의 검이 큰 한(藩)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떠날 때에 남긴 스즈키 츠나시로(鈴木綱四郎)라는 애제자와, 오와리 야규(尾張柳生)를 짊어진「야규 렌야사이(柳生連也斎)」의 숙명적인 대결을 묘사한 새로운 감각의 검호 소설이다. 모리 오가이(森鴎外)의... 예를 들자면『阿部一族(아베 일족)』의 필치를 방불케 하는... 조탁(彫琢)이 잘 된 경질의 문체에 의한 이런 검호 소설은 일찍이 없던 스타일이었다.
그 연대는 특정할 수 없지만, 무사시가 나고야에 오래 체류한 것은 사실이며, 당시 그의 유의(流儀)인 엔메이류(円明流)는 제자들에 의해 맥을 이어오며 나고야에 전해졌다. 그것이 스즈키 츠나시로라는 가공의 인물이 생겨난 토양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츠나시로와 렌야(連也: 소설에서는「렌야사이」)의 결투의 결말(?)은 소설의 백미이다. 소설은, 누가 이겼는지를 명확히 묘사하지 않은 채로 끝나며, 그것이 항간에 화제가 된 것이다. 실제 렌야는 일흔살까지 살았기 때문에, 진검승부의 승패의 행방은 자명하겠지만, 그런 고증은 논외라 여겨질 만큼의 압도적인 필력을 느끼게 하는... 신시대 검호물의 금자탑이라 해야 할 작품이다
「오와리 야규의 기린아(麒麟児)」라며 세간의 평판을 받은 야규 렌야 토시카네(柳生連也厳包)에게는, 그 언행이 풍부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치카마츠 시게노리(近松茂矩)의『昔咄(무카시바나시)』나 나가오카 후사시게(長岡房成)의『連也翁一代記(렌야오이치다이키)』등이 그의 검 이야기와 일화를 남겼기 때문인데, 여기서 그 중 몇가지를 소개해 보도록 한다.
어느날, 밤 중에 숙면 중일 때에 자객에게 습격당할 경우의 마음가짐에 대해 제자들에게 질문을 받자, 렌야는 이렇게 답했다.
【그야 나라면 적절한 대응에 나설 수 있겠으나, 취침 전의 주의는 기울일 필요가 있다. 첫째로 문단속을 제대로 해 두고, 두번째로 옆을 바라 보는 자세로 잠드는 것이다. 고개를 위로 한 채 잔다는 것은, 자객에게 "여기를 찔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약간의 상처야 입겠지만, 방어전에 나서는 게 손 쉽겠지. 세번째로는, 마쿠라가타나(枕刀: 머리맡에 두는 호신용 칼)를 항상 같은 장소에 두는 것이다. 이는 위급할 때에 순식간에 손에 쥘 수 있게 하기 위한 마음가짐이다.
코를 고는 것은 즉 방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입을 다물고 자야만 한다. 이 이외에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은, 술을 많이 마셨을 때, 멀리 외출하고 돌아왔을 때, 열심히 일한 날, 공복에 포식한 뒤에 잠드는 경우도 조심해야한다. 이러한 경우, 사람은 죽은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에 빠지기 쉽상이기에, 폭식, 또, 정해진 시간 외의 노동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하며 일상처럼 마음에 새겨두어야 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나 깨나 모름지기 마음을 단련하고, 기를 숨기는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숙면 중이라도 만약의 사태에 직면하더라도 각성하게 된다. 거기다 늘 방심하지 않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자신이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을 어떤 상황에서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설령, 매일 같은 시각에 들려오는 종 소리에도, 이를 적용할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은, 자칫 상당히 번거롭다 여길지도 모르겠으나, 수련에 의해 조금이라도 고생을 덜어줄 것이다. 이런식으로 방심하지 않는 습관을 기른다면, 깊은 잠에 빠져있는 도중이라도, 아주 작은 소리에도, 아주 작은 기척에도 눈이 떠질 것이며,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검사로서의 자각하기에 이른 렌야의 치밀한 성격, 진지한 수행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는 답변이다.
다음으로 소개할 일화도 그의 그런 됨됨이를 잘 보여준다.
렌야는 중년이 된 뒤로 바둑을 좋아하게 되어서, 제자인 마츠이 아무개라는 바둑 실력이 뛰어난 이를 상대로 자주 바둑을 두었다. 어느날, 스승이 방심한 틈을 찔러보고자 평소부터 때를 봐왔던 마츠이는 렌야가 바둑판에서 눈을 떼고 장시간 생각에 빠져있는 것을 호기라 보고 바둑판 밑에서 주먹을 꽉 쥐고 한 대 치려했다.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뜻밖에 렌야가 얼굴을 들어 마츠이를 슬쩍 보자, 간파당했나 싶어서 꽉 쥐었던 주먹을 풀고「다음 수를 어디에 둬야할지 아직 정하지 못하셨습니까?」라고 제촉하면서 다시 주먹을 쥐었을 때,
「자네, 쓸데 없는 장난은 그만 두게」
라며 렌야가 말했다. 그것이 자신의 노림수를 꿰뚫어 본 한 마디인지, 이후에 마츠이는 신경이 쓰여 좀이 쑤셨지만, 1년 정도 세월이 흘러 스승을 시험해 볼 좋은 기회가 찾아 온 것이다.
그날, 하이카이시(俳諧師: 하이쿠를 짓는 사람)와 두, 세명의 제자와 함께 들놀이에 나선 렌야가, 강변에서 소변을 누고 있었을 때이다. 마치 빈틈 투성이인 것 처럼 보이는 렌야에게, 뒤에서 몰래 다가가 마츠이가 밀어서 넘어뜨리려 했다. 하지만, 공중제비를 하며 강에 빠진 것은 오히려 마츠이 쪽이다.
「검호(剣豪)」의 일화로 이런 이야기는 그다지 진귀한 게 아니긴 해도, 그후에 렌야가 고얀 제자를 타일렀다는 점이 재미있다. 대강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며,『렌야오이치다이키』에 기록되어 있다.
「만사에 "조짐(兆し)"이라는 게 있다. "기(機)"라는 것보다 약간 빠른... 그야말로 미묘한 것이 "조짐"이다. 앞서 네가 바둑을 두던 도중에 나를 치려한 것, 방금 강변에서 나를 밀어서 넘어뜨리려 한 것에는 모두 "조짐"이 있었다. 즉, 두 번 모두 네 얼굴을 보면서 "무슨 짓을 하겠구나"라고 느꼈다. "조짐"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탓에, 네가 불시의 습격을 할 생각이었다 해도, 내게는 불시의 공격도 무엇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렇게 타일렀다.
「자나깨나 마음을 단련해 둔다면, 외부로부터 작용하는 게 선한 의도로 작용되는지, 악한 의도로 작용되는지가 마음 속에 비춰지는 것이다」
이러한 렌야의 언행록을 통해 떠오르는 인물상은, 검사로서의 자각이 철저했던 완전주의자의 그것일 것이다.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를 증조부로, 시마 사콘(島左近)을 외조부로 두었다는 긍지... 그리고, 서자(庶子)라는 입장에서 싹튼 헝그리 정신이, 그를 완전무결한 구도자(求道者)의 길로 향하게 했던걸까?
렌야는 생애 독신을 고수했다. 그 뿐만 아니다. 여성을 일절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의 그런 삶에 대해 치카마츠 시게노리의『무카시바나시』는 이렇게 기록한다.
【렌야는 젊었을 때 두, 세번은 여성을 가까이 한 적이 있었고, 나중에 젊은이들을 좋아하기도 했으나, 이것도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수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검의 기량이 늘어남에 따라, 렌야는 완강할 정로도 음란한 행위를 멀리했던 것이다.
강건한 남자가, 오히려 불섭생(不養生)이 아닌가... 하며 의사로부터 충고를 받았다. 자손이 끊기는 것도, 주군에게는 죄송한 일이 될꺼라며, 제자들 중에는 어울리는 아내를 맞이하거나 첩을 들이라 권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렌야는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러한 것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옛날 수행을 위해 불음(不淫)을 고수해왔는데, 중년이 되고나서는 오히려 신중함 때문에 더욱 더 그렇게 되었다. 신중함이란 다른 것도 아닌, 음행(淫行)을 치른 다음날에 나와 호각의 기량을 가진 자가 당번으로 와서 시합을 요청할 경우, 나는 패하게 될 것이다. 패배한다는 것은 유의(流儀)의 치욕보다도, 주군의 치욕이 된다. 세상은 넓어서, 언제 어느때에 실력이 뛰어난 자가 찾아올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보다도 기량이 뛰어난 상대에게는 지게 된다. 기량이 낮은 자에게 이기는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호각인 상대에게서 이기려면, 이쪽은 음행을 신중히 해야한다"
렌야는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이었는데, 힘만은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았다. 이렇게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세상을 뜬 것은, 불음이 섭생을 방해했기 때문이리라】
치카마츠 시게노리는 이렇게 평가했는데, 향년 일흔살은 나름 장수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평론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성이 바느질한 것은 절대 몸에 걸치지 않았던 데다, 친어머니 조차도 자신의 방에 드나드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상당한 금욕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친인 토시토시(利厳)가 죽은 해(케이안 3년 = 1650), 스물여섯살이었던 렌야는 망부의 은거령 300석을 물려받았고, 나중에 두 번의 가증을 받아 600석을 영유하게 되었다. 마흔네살 때인 칸분(寛文) 8년(1668)에는, 그 600석을 반납하는 대신에 쿠라마이(蔵米) 200석을 봉급으로 받았다. 은거한 것은 예순한살 때(죠쿄 2년 = 1685)로, 은거한 이후에는「우라렌야(浦連也)」라는 이름을 썼다. 세상 사람들은「렌야 화상(連也和尚)」, 혹은 그의 집이 있었던 마에츠(前津) 코바야시 무라(小林村)를 따서「코바야시 화상(小林和尚)」이라 불렀다.
코바야시 무라는 센고쿠시대(戦国時代)에 오와리(尾張)의 슈고(守護)였던 시바(斯波) 씨의 케닌(家人)인 마키 시모츠케노카미 요시나가(牧下野守義長)의 아들인 마키 나가키요(牧長清)가 4천석을 받았던 땅이다. 나가키요는 이곳에 성을 쌓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녀를「코바야시도노(小林殿)」라 불렀다. 현재의 나고야 시(名古屋市) 나카 구(中区) 오오스(大須) 4쵸메에「야바 지장존(矢場地蔵尊)」이란 이름으로 친숙한 토쿠쥬산 쇼죠지(徳寿山清浄寺)라는 사원이 있으며, 이곳은 렌야가 은거해서 살던 집터라 한다.
은거한 뒤부터 렌야는, 그야말로 청빈한 생활을 이 저택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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