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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시대극의 오류 찾기 #172017.07.19 PM 07:16
제 01장 -사람에 관한 거짓과 진실
◎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검호(剣豪)였다?
~ 검호 쇼군(剣豪将軍)이라 하면, 그 검기(剣技)를 스스로 떨치다 죽은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제 1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가 유명하다. 바로 그 유명한 검성(剣聖)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伝)으로부터 극의(極意)인「이치노타치(一ノ太刀)」를 전수받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의외로 이런 쪽으로 주목받고 있지 못하긴 하지만,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그렇게 평가하는 전문가도 많다.
이에야스는 오쿠야마류(奥山流: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의 제자인 오쿠야마 큐가사이가 일으킨 유파), 신토류(新当流: 아리마 다이젠, 마츠오카 효고노스케)를 배웠는데, 무술을 좋아해서 마술(馬術)이나 텟포술(鉄砲術)은 명인급이었던 듯 하다.
특히나, 텟포로 5~60간(間: 약 90~108m)이나 멀리 있는 학을 쏴서 떨어트렸다고도 하는데, 이는 화승총의 실용적인 유효 사정거리의 배 정도이기에, 놀라울만큼의 명사수였다고 할 수 있다.
검술에도 열심히라, 신카게류(新陰流)의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나 히키타카게류(疋田陰流)의 히키타 분고로(疋田豊後郎)를 초빙하여 그들의 실제 기술을 본다거나 검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거나 했다.
세키슈사이의 무토도리(無刀取り)를 스스로 상대를 맡아서 경험해 보면서, 그 자리에서 입문을 요청했다는 것도 유명한 이야기지만, 검호다운 탁견(卓見)을 평가받은 것은 히키타 분고로와 얽힌 이야기이다.
검술에 관한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질문하던 이에야스는, 히키타가 물러난 뒤에「히키타는 명인일지도 모르겠지만, 검기가 별다른지에 대해서는 판별할 수 없다」며, 자신의 감상을 이야기했던 듯 하다.
검에 대한 이에야스의 생각은,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의 대병법(大の兵法)과 소병법(小の兵法)에 가까울 것이다.
「쇼군씩이나 되는 자는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벨 필요는 없다. 만에 하나, 위기를 벗어날 정도의 기술만 배우면 된다. 그 뒤는 가신(家臣)이 적을 처치해 주는 것이다. 대장이 스스로 검을 쥐고서 열심히 싸우면 그 싸움은 진 싸움이다」라는 게 이에야스의 생각이다.
이것은, 엄청난 분투를 보여주었으면서도 암살당해버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염두에 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텟포의 명수이기도 한 이에야스에게 있어서, 검기에 집착하는 게 바보같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승부에 집착하다 보면, 보다 합리적인 무기나 전법을 고르는 게 상식이다.
일개 무술가는, 명인이나 달인이라 불리울 정도만 되어도 아무래도 기술에 얽메이는 버릇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좀 더 싸움의 본질(本質)을 생각하고 합리적인 발상을 할 수 있는 자를 상대로 한다면, 질 게 뻔하다.
오늘날에도, 무도(武道)의 유단자가 싸움에 익숙한 사람에게 간단하게 패배해버리는 이야기를 때때로 듣곤 하는데, 싸움이라는 것은 그러한 것이다. 일면적인 강함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그런 이에야스의 눈에 적합했던 야규의 검은, 신카게류이다. 속된 말로 야규 신카게류(柳生新陰流)라 불리우는 유파인데,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上泉伊勢守)의 직계 기술과 체계를 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배운 자는 신카게류라 부르는 게 습관화 되어 있다.
신카게류는 오와리 야규(尾張柳生)와 에도 야규(江戸柳生)로 나뉘어지는데, 몇명의 검호 다이묘(剣豪大名)를 배출해냈다.
오와리 야규는 세키슈사이의 직계이자, 그의 손자인 효고노스케 토시토시(兵庫助利厳) 때부터 오와리 한(尾張藩)의 개조(開祖)인 토쿠가와 요시나오(徳川義直)에게 종가(宗家)를 양도하였다.
그후에는 효고노스케의 아들인 렌야 토시카네(連也厳包)가 계승했고, 렌야로부터 또, 토쿠가와 미츠토모(徳川光友)에게 양도되었다. 오와리 야규는 한슈(藩主)와 집안의 정통을 교환하는 것에 의해서 명맥을 유지, 오늘날까지 도통(道統: 기예의 도를 전하는 계통)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신카게류를 전하는 단체 대부분이 오와리 야규 계통이다.
에도 야규는, 세키슈사이의 아들인 무네노리(宗矩)가 다이묘가 되었다가 한번은 하타모토(旗本)로 격하되긴 했지만, 그 후에 무네후유(宗冬)가 다이묘로 복귀했다. 하지만, 에도 야규의 그 후는 쇠퇴 일변도를 걸어갔고, 기술의 전통도 단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야규 무네노리의 제자들 중에는, 사가(佐賀)의 나베시마 모토시게(鍋島元茂),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의 호소카와 타다토시(細川忠利)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검호 다이묘로서 신카게류의 전수자라는 이름을 남기고 있다. 적어도, 에도시대 초기부터 중기에 걸쳐서 야규 무네노리가 전국에 뿌린 신카게류의 씨앗은 타류(他流)를 압도하고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 파워돌
- 2017/07/19 PM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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