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번역] 시대극의 오류 찾기 #402017.09.13 AM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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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03장 -말(言葉)에 관한 거짓과 진실

 

 

◎ 서민이나 하급 무사의 집에는 현관이 없었다

~ 「에도시대(江戸時代), 일반 서민은「현관에 자물쇠를 채우는 관습이 없었다」는 등... 터무니 없는 오류를 읽은 적이 있다.

 애당초 일반 서민은, 현관을 만들고 싶어도 집에 현관을 두는 게 허락되지 않았었다.

 현관은 무사... 그것도 말을 타는 게 허락되었던 죠시 신분(上士身分)인 무사 뿐으로, 말을 탈 수 없는 카치(徒士)인 무사는 같은 무사 신분이라도 현관을 둘 수 없었다.

 현관이라는 것은 시대극에서는 가마를 붙여 대고 지면에 발을 내딛지 않고 가마에 오르는 구조로 된 것으로, 시키다이(式台: 현관 마루)가 집에 있는지가 필수조건이다.

 일반 서민의 집에는 시키다이가 없고, 아주 약간 올라간 상인방 정도 뿐이었다.

 현관문을 열면 넓은 토방(土間)이 있으며(여기에 가마를 댄다), 거기에 시키다이가 설치되어 있고, 그 맞은 편에는 타타미 여섯장, 혹은 여덟장의 <현관의 켄(間)>이 있다.

 이「현관문 + 토방 + 시키다이 + 현관의 켄」이라는 네개 소를 통틀어「현관」이라 부르는 게 에도시대까지의 현관이었다.

 메이지시대(明治時代)가 된 이후는 형식을 불문하고, 주거의 출입구를 가르키는 개념으로 바뀌어 갔는데, 이것은 메이지 정부가 수립되면서「에도시대와는 달리, 만인이 평등하다」라는 의식을 심어주고 싶어 한 세뇌 교육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에도시대의 현관은 서민일지라도 묘지타이토(苗字帯刀)가 허락된 나누시(名主), 쇼야(庄屋), 혼진(本陣)급인 이들에게는 현관을 갖추는 게 허락되었다.

 이러한 자들은 천하통일이 되기 이전인 센고쿠시대(戦国時代)에는 대다수가 말을 탈 수 있는 무사 신분이었기에 그대로 당시의 생활 습관을 유지할 수 있게 토쿠가와 바쿠후(徳川幕府)가 용인해 준 것이다. 

 예를 들자면 마치부교쇼(町奉行所)의 도신(同心)급이라면 현관을 갖추는 게 허락되지 못했는데, 가령 현관을 갖추었다가 그게 발각될 경우에는 처벌받았다. 이를 허락받은 것은 요리키(与力) 이상이다.

 때문에, 가령 마치부교쇼의 도신이 상관에게「현관을 설치해 두고 싶습니다만...」하고 부탁하면, 이는「슬슬 요리키로 승진시켜 주시지 않겠습니까?」라며 완곡하게 부탁한다는 뜻이다.

 현관을 설치했다가 처벌받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5대째 이치카와 에비조(市川海老蔵: 훗날의 7대째 이치카와 단쥬로)가 있다.

 후카가와 키바(深川木場)에 저택을 두고있었지만, 현관 시키다이에 흑칠을 해서 현관의 켄에 있는 고텐죠(格天井: 들보와 횡목 아래에 두터운 나무로 격자를 짠 천정으로, 격식이 가장 높은 천정 양식이라 일컬어진다)를 킨데이(金泥: 순금을 가루로 만들어 접착제인 니카와스이로 녹인 화구)로 칠을 하고서 저택 안에 후도도(不動堂)를 세워서 캬라목(伽羅木)으로 부동명왕상을 안치하는 등... 다이묘(大名) 저택에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사치를 부렸다.

 아무리 인기있는 극단을 이끌고 있다고 해도, 정도가 지나쳤기에 미나미마치부교(南町奉行)인 토리이 카이노카미 요조(鳥居甲斐守耀蔵)의 눈에 띄게 되면서 켓쇼(闕所: 전답, 가택, 가재 등을 몰수하여 바쿠후의 재산으로 징수하는 형벌)한 데다, 에도 추방령에 처해졌다. 

 저택에 현관을 두고있던 예외적인 인물로는, 망나니로 유명했던 야마다 아사에몬(山田浅右衛門)이 있다. 

 아사에몬은 일개 로닌(浪人)이었으면서도 에도 성(江戸城) 출입이 허락되었는데, 이는 야마다 아사에몬의 혈통에 의거한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奥川家康)의 여섯째 아들이자 형인 2대 쇼군(将軍) 히데타다(秀忠)와 뜻이 맞지 않아 쫓겨난 마츠다이라 타다테루(松平忠輝)의 생모인 챠아노츠보네(茶阿局)와 인연이 있는 가계(家系)이다. 

 챠아노츠보네는 조카(오빠인 야마다 코즈케노스케의 아들)인 야마다 하야토노쇼(山田隼人正)를 타다테루의 가로(家老)로 삼았는데, 하야토노쇼는 타다테루가 실각했을 때에 책임을 지고 할복. 아사에몬은 이 하야토노쇼의 직계 자손에 해당한다. 토쿠가와 가문은 이처럼「토쿠가와 가문의 인척(縁続き)」이라는 이유로 야마다 가문을 후대했던 것이다. 현대인과는「친척의 멀고 가까움」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달랐다. 현대인이라면「생판 남」이다. 

 이야기가 잠깐 본론에서 벗어나겠지만, 타다테루의 7대째 후손 중에 마츠다이라 치카라노스케 타다토시(松平主税助忠敏: 치카라노스케는 훗날 즈료나를 카즈사노스케를 칭한다)가 있다. 

 타다토시는 류고류(柳剛流)라는 유파의 검을 익힌 검객으로 유명했으며, 타다테루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안세이(安政) 3년(1856)에 바쿠후가 국방의 제일환으로서 코부쇼(講武所)를 개설할 때에 검술 교수로 임명되었다.

 코부쇼라는 것은 하타모토 고케닌(旗本御家人)들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무예 훈련 기관으로, 검술, 양식 조련(洋式調練), 포술 등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츠키지(築地) 텟포즈(鉄砲洲)에 있다가 후에 칸다(神田) 오가와 쵸(小川町)로 이전했다.

 타다토시는 분큐(文久) 2년(1862) 연말에 코부쇼 검술 교수를 겸임한 채로 로시토리아츠카이(浪士取扱)로 임명되었으며, 요리아이세키(寄合席: 상급 하타모토)가 되어 300 섬을 지급받았다. 익 분큐 3년에는 검술 사범역으로 승진하여 카즈사노스케(上総介)를 수령받아 80명 분의 후치(扶持)가 되었다.

 로시토리아츠카이는, 훗날의 신센구미(新選組)나 신쵸구미(新徴組) 결성으로 이어지는... 뜻을 품은 로닌을 모아서 에도나 쿄토(京都)의 치안유지에 종사시킨다는 기획의 추진 책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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