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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 철학] 4000조원 집어삼킬 ‘뜨거운 놈’이 온다2023.06.11 PM 06:09
그래픽=김하경·Midjourney
지난 5월 3일 스위스 제네바의 세계기상기구(WMO) 본부.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윌프란 오키아 WMO 지역기후예측국장은 “9월까지 엘니뇨가 시작될 확률이 80%”라며 “앞으로 2년 동안 지구 기온이 심각하게 상승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페테리 탈라스 WMO 사무총장도 이날 “엘니뇨로 지구 기온 기록이 경신될 가능성이 커질 것”이라며 “세계는 가뭄과 홍수 같은 엘니뇨의 영향에 대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난 3년간 지구 온도가 오르는 현상이 주춤했던 것과 달리 올해는 엘니뇨(El Nino)가 몰려와 지구를 뜨겁게 만들어놓을 것이라는 경고가 쏟아지고 있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NOAA)이 올여름 엘니뇨 발생 가능성을 90%로 내다보는 등 세계 각국의 기상청과 연구 기관들이 앞다퉈 엘니뇨 발생을 예고하고 있다. 엘니뇨는 동태평양의 3개월 평균 해수면 온도가 평년(1991~2020년)보다 0.5도 이상 높은 상태가 5개월 이상 지속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그래픽 = 김의균
특히 올해 들이닥칠 엘니뇨는 역대 4번째 ‘수퍼 엘니뇨’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해수면 온도가 평년 대비 2도 이상 높은 경우를 수퍼 엘니뇨라고 분류하는데, 미국 지구물리유체역학연구소(GFDL), 미국 해양대기연구소(COLA), 호주 기상청 등의 예측 모델이 올여름 이후 수퍼 엘니뇨가 올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기상 관측이 현대화된 1950년대 이후 수퍼 엘니뇨는 1982~1983년, 1997~1998년, 2015~2016년 등 딱 3번 발생했다. 일부 전문가는 올해 다가올 네 번째 수퍼 엘니뇨가 역대 최악이 될 것이라는 예측도 내놓고 있다.
수퍼 엘니뇨가 현실화되면 기상 이변을 일으킬 뿐 아니라 도미노를 넘어뜨리듯 일파만파의 경제적 타격을 입힐 것으로 보인다. 기후에 민감한 천연자원이나 식재료의 가격을 끌어올리는 주범이 엘니뇨다. 전염병 확산 가능성도 높이고 해군의 군사 작전을 바꾸게 하는 등 엘니뇨는 막대한 파급력을 가진 기상 현상이다. 미국 다트머스대 연구진은 올해 발생한 엘니뇨가 2029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3조달러(약 4000조원)의 경제적 손실을 가져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역대 4번째 수퍼 엘니뇨 올 듯
스페인어로 엘니뇨는 ‘남자아이’라는 뜻이다. 대문자로 쓰면 ‘아기 예수’가 된다. 기원은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크리스마스쯤 페루 연안의 수온이 올라 멸치가 잡히지 않자 어민들이 조업을 중단하고 가족과 연휴를 보냈다. 이런 휴식을 예수가 준 선물로 빗대 엘니뇨라고 불렀다가 굳어진 용어가 됐다.
그래픽=김하경
엘니뇨가 최고로 발달하는 겨울에는 북아메리카 서북부 기온이 평상시보다 높아진다. 아프리카 남서부 지역, 호주 서부, 남미 북부 지역도 기온이 올라간다. 강수량은 열대 서·중태평양에서 증가하고 인도네시아 부근과 호주 북부는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엘니뇨가 일부에서는 가뭄, 일부에서는 홍수를 몰고 오는 이유다. 우리나라에는 엘니뇨가 나타난 여름에는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강수량이 늘어나고, 겨울엔 강수량과 기온이 모두 상승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수퍼 엘니뇨 시기엔 이런 기상 변화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1982~1983년 첫 수퍼 엘니뇨 당시 페루와 에콰도르에 평소보다 40배 가까운 폭우가 내렸다. 반면 당시 필리핀, 인도네시아, 호주 등은 극심한 가뭄을 겪었다. 강도가 역대 최강이었다는 두 번째 수퍼 엘니뇨가 발생한 1997~1998년에는 피해가 더 심각했다. 1998년 여름 중국 화남 지방에 수개월 동안 비가 쏟아지는 홍수가 발생해 3000명 이상이 숨졌다. 반면 가뭄에 따른 화재로 인도네시아에선 제주도 넓이 1.6배에 해당하는 30만ha의 열대우림이 불에 탔다. ‘지구의 허파’로 불리는 아마존 열대우림도 61만ha나 소실됐다. 세 번째 수퍼 엘니뇨(2015~2016년) 때는 유난히 폭염이 심했다. 지금까지 NOAA 측정 기준으로 2016년이 역대로 가장 더운 해였다.
올해 역대 네 번째 수퍼 엘니뇨가 오면 파장이 내년이나 후년에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반기성 케이웨더 예보센터장은 “엘니뇨가 발생하고서 2년 뒤쯤 큰 더위가 찾아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금까지 서울의 월평균 기온 최고치는 마지막 수퍼 엘니뇨가 물러간 지 2년이 지난 2018년 8월의 28.8도다.
나비효과로 금융시장까지 영향
수퍼 엘니뇨가 몰고 오는 이상 기후는 인류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타격을 가한다. 우선 식량 위기를 부른다. 날씨 변화로 농산물 출하량이 줄어들고, 그로 인해 가격이 급등하는 ‘애그플레이션(Agflation)’ 현상을 낳기 때문이다. 시카고상업거래소(CME)에 따르면, 첫 번째 수퍼 엘니뇨 시기였던 1982년 9월부터 1년 사이 옥수수 가격이 44.7% 급등했다. 대두(47.5%), 대두유(65.1%), 소맥(10.6%) 등의 가격도 급상승했다.
그래픽=김하경
올해도 수퍼 엘니뇨 탓에 농산물 생산이 큰 지장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딜립 마발란카르 인도 공중보건연구소 소장은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뷰에서 “엘니뇨가 인도의 몬순(계절풍)을 방해하면 농업에, 결국에는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엘니뇨가 인도 곡물 생산량을 좌우하는 6~9월 강수량을 줄일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픽=김의균
이미 곡물 가격 상승세는 심상치 않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한 올해 5월 국제 설탕 가격 지수는 작년 12월보다 34.5% 급등했다. ‘슈거플레이션’이란 표현이 등장하며 설탕 값이 11년 만에 최고치로 뛰어올랐다. 5월 국제 쌀 가격 지수도 전년 대비 17% 올랐다. 눈치 빠른 투자자들은 엘니뇨발 작황 부진이 예상되는 작물에 투자하는 금융 상품에 목돈을 집어넣고 있다. 엘니뇨가 금융시장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셈이다. 설탕에 투자하는 테크리움 설탕 펀드(CANE)가 올해 초 대비 43% 급등했고, 코코아에 투자하는 펀드(NIB)도 24% 올랐다.
그래픽=김하경
엘니뇨는 커피 값도 끌어올릴 전망이다. 대표적인 원두 품종인 로부스타 가격이 지난 5월 1kg당 2.7달러를 기록해 1995년 이후 최고치로 올랐다. 엘니뇨로 인해 생산량이 급감할 수 있다는 우려 탓이다. 역대 세 번째(2015~2016년) 수퍼 엘니뇨 당시 브라질의 로부스타 산지에서 극심한 가뭄이 발생해 생산량이 40% 감소했던 상황이 올해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엘니뇨는 바닷속 생태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대표적인 예가 첫 번째 수퍼 엘니뇨 시기였던 1984년 페루의 멸치 생산량이 급감한 사례다. FAO에 따르면, 1970년 1230만톤으로 전 세계 어획량의 19%를 차지할 정도였던 페루의 멸치 어획량은 1984년에는 500분의 1 이하인 2만3000톤으로 급감했다. 수퍼 엘니뇨로 해수 온도가 급상승한 탓에 멸치 씨가 말랐기 때문이다. 산호초가 하얗게 색깔이 변하는 백화 현상과 주변 물고기들의 떼죽음도 엘니뇨가 다가올 때 나타나곤 한다. 2016년 세 번째 수퍼 엘니뇨 당시 호주 연안 그레이트배리어리프의 산호초 90% 이상에서 백화 현상이 발생했다.
전염병 확률 높이고 軍 작전까지 바꾼다
엘니뇨는 전염병이 퍼질 가능성을 높인다는 점에서도 인류에게 위협적이다. 미 항공우주국(NASA)에 따르면, 세 번째 수퍼 엘니뇨 시기였던 2015~2016년 미국 남서부에서 페스트와 한타바이러스가 창궐했다. 탄자니아에서는 콜레라, 브라질·동남아시아에서 뎅기열이 번졌다. NASA는 “엘니뇨가 나타난 지역의 전염병 발병 확률은 엘니뇨 영향이 없었던 지역보다 최대 28%가량 높았다”고 밝혔다. 이상 기후로 기온이 상승해 바이러스가 활동하기 좋은 여건이 되기 때문이다.
엘니뇨가 해적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도 있다. 미 해군 태평양사령부 해양대기국은 2015년 발표한 논문에서 엘니뇨가 소말리아 해협의 해적 활동을 증가시킬 위험이 있다고 분석했다. 풍속이 17.5노트(초당 9m)를 초과하면 강한 바람을 못 이겨 해적 공격의 94%가 성공하지 못했지만, 엘니뇨가 소말리아 연안의 지표면 풍속을 떨어뜨리면 해적 활동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미 해군대학원은 엘니뇨가 군 작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대표적으로 잠수함의 ‘눈과 귀’인 수중 음파 탐지기(SONAR·소나)의 작동과 성능이 엘니뇨 때문에 변화가 생기는 현상이 나타난다. 음파가 차가운 물보다 따뜻한 물에서 더 빨리 이동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엘니뇨가 일으키는 수온 변화에 맞춰 해저전 전술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게 미 해군대학원의 설명이다.
2023년 4월 파나마시티 아메리카스 브리지 인근에서 한 선박이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고 있다. 최근 강우량 부족으로 파나마 운하를 지나는 선박은 흘수를 줄여야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올해 엘니뇨로 흘수 제한이 더욱 강화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AFP 연합
글로벌 물류 산업도 엘니뇨에 따른 영향을 피하기 어렵다. 미주 대륙의 핵심 루트인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의 파나마운하에서는 엘니뇨가 발생하면 화물 운송량이 줄어든다. 가뭄이 심각해져 운하 바닥의 물이 줄어들고, 이 때문에 통과하는 선박에 화물을 덜 싣는 무게 조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파나마운하청(ACP)은 올해 가뭄의 영향으로 파나마운하의 흘수(吃水·선박이 물 밑에 잠기는 깊이) 제한을 5차례나 강화했다. 물류 비용이 상승하는 요인이다.
엘니뇨에 따른 물 부족이 예상되면 축제가 취소되기도 한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 인근 도시인 산후안은 매년 6월 열리는 물 뿌리기 축제 ‘와타와타’를 올해는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엘니뇨가 임박했다는 점을 고려해 물 부족 사태를 막기 위해서다.
21세기 경제적 손실 11경원
엘니뇨가 연쇄 작용을 일으키며 몰고 오는 경제적 타격은 천문학적 규모다. 지난달 미국 다트머스대 연구팀은 과학 저널 ‘사이언스’에 게재한 논문을 통해 엘니뇨에 따른 21세기 100년간의 경제적 손실이 84조달러(약 11경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연구팀은 “기후 변화로 엘니뇨가 더 잦아지고 세력도 강해졌다”며 이같이 전망했다.
그래픽=김하경
연구팀은 첫 번째(1982~1983년)와 두 번째(1997~1998년) 수퍼 엘니뇨 이후 글로벌 경제 활동을 추적했다. 연구팀은 두 번의 수퍼 엘니뇨가 각 5년간 경제성장을 둔화시키면서 전 세계에 각각 4조1000억달러(약 5400조원), 5조7000억달러(약 7500조원)에 달하는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연구팀은 “엘니뇨가 끝나고 (경제가) 바로 회복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영향이 최대 14년까지 지속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엘니뇨에 따른 영향은 나라별로 편차가 크다. 미국의 경우 수퍼 엘니뇨 발생 5년 뒤인 1988년과 2003년에 수퍼 엘니뇨가 없었다고 가정한 상황과 대비해 국내총생산(GDP)이 각각 3% 줄었지만, 페루·인도네시아 등 열대 태평양 연안국은 GDP가 10%쯤 낮아진 것으로 분석됐다. 연구팀은 “엘니뇨는 회복력이 약하고 준비가 부족한 나라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그래픽=김하경
연구팀은 올해 발생한 엘니뇨는 2029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3조달러(약 4000조원)의 경제적 손실을 발생시킬 것으로 예상했다. 올해 발생한 엘니뇨가 내년까지 이어질 경우 피해 규모가 더 커질 가능성도 작지 않다. 연구팀은 “올해는 정말 강력한 엘니뇨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면서 “열대 연안 국가들의 경제성장을 최대 10년간 방해할 것”이라고 밝혔다.
5년 내에 역대 최고기온 도달 확률 98%
올해는 이미 이상 고온으로 세계 각지에서 몸살을 앓고 있다. 중국 상하이의 5월 기온이 36.7도로 100년 만에 가장 더운 5월을 기록하는가 하면, 일본 역시 역대 가장 따뜻한 봄을 맞았다. 우리나라에서도 5월에 30도를 웃도는 기온이 관측됐다.
중국 상하이의 한 여성이 자외선 차단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고 있다. 상하이 기상청에 따르면 상하이의 5월 기온은 100년만에 가장 더웠다. /AFP 연합
이처럼 더운 날씨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엘니뇨가 강타하면 피해가 적지 않을 전망이다. 함유근 전남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적도 인근에서 수온을 낮게 만드는) 라니냐 현상이 이례적으로 길었던 관계로 열대 지역 해수 내부의 에너지가 많이 축적됐기 때문에 엘니뇨가 발달하기 좋은 상태가 됐다”며 “기후 변화로 엘니뇨의 강도가 증가하고 수퍼 엘니뇨 발생도 잦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WMO는 최근 온실가스와 엘니뇨로 인해 5년 내에 지구 기온이 기록적인 수준으로 급상승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앞으로 5년 내에 2016년 기록했던 역대 최고기온을 경신할 확률이 98%에 달하는 것은 물론, 5년 내에 기온 상승 폭이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이상 오를 확률도 66%에 달한다는 게 WMO의 설명이다.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지구 기온이 산업화 이전과 대비해 1.5도 이상 올라가지 않도록 하자고 결의했지만, 지키지 못할 확률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지난달 페테리 탈라스 WMO 사무총장은 성명을 통해 “엘니뇨는 인간이 유발한 기후 변화와 결합해 지구 온도를 미지의 영역으로 밀어 넣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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