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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 철학] 공공성보다 사적인 번식에 집착하는 사회, ‘저출생 세대’를 낳는다2024.07.16 AM 12:04
(13) 진짜 멋진 신세계
부모도, 자식도 행복하지 않은 한국식 ‘가족 사랑’은 아이 낳기 싫은 환경을 만들고 있다. 빠르게 발전하는 유전자 기술과 인공자궁 기술을 감안하면 생물학적 생식과 가족이 없는 세상은 더 이상 가능성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을 수도 있다. 사진은 인공자궁인 ‘팟’을 통해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는 환경을 공상한 영화 <팟 제너레이션>의 한 장면이다. 왓챠 제공
인간 유전자의 투자 전략은 부모·자식 사이에서 첨예…때론 번식 욕구가 사적 영역 넘어 공적 활동 잠식
공교육 삼키는 사교육 바탕에는 사적 번식 집착·과도한 자식 사랑…너도나도 ‘부의 축적’에 매몰
이런 사회를 반면교사 삼는 2세들은 출산 기피…헉슬리가 풍자한 ‘멋진 신세계’가 현실화할 수도
우리 인류의 존속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 요소는 무엇일까? 혹자는 인공지능과 로봇의 지배라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기후위기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종종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더 이상 자식을 낳고 싶어하지 않으며, 앞으로 더더욱 그럴 것이다. 유엔의 통계에 따르면 출생률이 인구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기준인 2.1명을 밑도는 나라의 수는 가파르게 증가하여 현재 100여개에 이르고, 2100년까지 200개에 다다를 것으로 예측된다. 월스트리트저널의 분석에 따르면 소득, 교육, 노동력 참여 수준과 관계없이 거의 모든 국가에서 출생률은 감소하고 있다.
이러한 출생률 감소는 본 저자가 최근 출간한 <유전자 지배 사회>에서 상세히 묘사한 바와 같이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출산과 양육 역시 유전자의 냉철한 계산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누군가는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며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의 세계에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는 개념은 애당초 없기 때문에, 인간은 누군가 혹은 어떤 대의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다. 즉 번식 욕구와 배치되지만 않는다면, 특히 자식을 위해서라면, 유전자는 당신이 죽는 것을 말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유전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자원의 투자와 배분이다. 진화생물학자 존 홀데인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정도가 중요하다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형제 한 명을 위해서는 안 되지만 두 명 이상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 사촌이면 여덟 명 이상이어야 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여기에는 심각한 오해의 여지가 있다. 유전자의 세계에서 더 현실적인 표현은 “형제 한 명을 위해서 쓸 돈이 있다면, 사촌에게는 그중 4분의 1만 쓸 수 있다”일 것이다.
유전자의 투자 전략은 부모 자식 간에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다. 어머니들은 전혀 느끼지 못했겠지만, 본인의 몸은 임신 중에 배 속의 자식과 포도당을 놓고 줄다리기를 했으며, 부유한 환경이었다면 아들에게, 어려운 형편이었다면 딸에게 더 좋은 모유를 제공했다. 유전자의 조종은 생리학적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의식에까지 미친다.
예를 들어, 부유한 가정에서는 아들이 딸보다, 가난한 가정에서는 딸이 아들보다 경제적으로 더 많은 투자를 받는다는 것이 통계로 드러난다. 그것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남자가 결혼에 성공할 확률이 더 높고, 어려운 형편이라면 차라리 딸을 낳아 남자의 선택을 받게 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자식 살해(filicide)’는 산업화된 사회를 포함하여 전 세계 모든 문화권에 걸쳐 발생한다. 특히 경제적 여건을 비롯한 주변 상황이 좋지 않거나, 아기가 기형이나 장애 등 결함이 있을 때, 그리고 아이가 어려 아직 투자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나 어머니가 젊어 다음 임신 기회가 많을 때 살해 가능성이 높아진다.
유전학적으로 냉정하게 말하자면, 지금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아이들이 애지중지 키워지는 이유는 그들의 투자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한 가정의 아이 수를 10명 가까이로 늘리거나 어린이의 생존율이 매우 낮은 사회로 이주해서 살게 된다면 당장 이 말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
인간 유전자의 번식욕은 문화에 의해 뒷받침되기도 한다. 한나 아렌트는 생물학적 생명 자체가 근대 정치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는 과정을 <인간의 조건>에서 분석한 바 있다. 아렌트는 인간 사회에는 생물학적 욕구와 필요가 충족되는 사적 영역과, 말과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공간인 공론 영역이 있다고 보았다. 사적 영역의 중심은 생계를 유지하고 출산과 양육을 담당하는 가정이며, 공론 영역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 공간이었던 ‘폴리스(polis)’가 있었다. 그런데 정치 행위에 비해 자연 생명의 유지가 중요성에 있어 우위를 점하게 되면서 공적 영역은 쇠퇴를 거듭하게 되었다. 즉 모든 공적 활동이 생물학적 필연성을 충족하는 사적인 가정 영역으로 흡수되어, 결국 국가의 경제라는 것이 각 가족의 생계 유지와 ‘부의 축적’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미셸 푸코
이것은 근대의 ‘생명관리정치’ 혹은 ‘생체정치’로 이어진다.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1권 - 지식의 의지> 마지막 부분에서, 과거 전제군주의 권력이 백성을 죽임으로써, 즉 생살여탈권으로서 발휘되었다면, 근대에 이르러 이제는 생물학적인 생명과 국민의 건강이 권력의 핵심 문제로 부상했다는 통찰을 제시했다. 즉 근대적 인간은 생명 자체가 정치에 의해 문제시되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후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의에서 푸코는 노동자로서의 생체 그 자체가 자본이 된다는 인적자본론을 생명관리정치의 맥락에 도입한다. 당연히도, 유전이라는 선천적인 요소와 교육이라는 후천적인 요소로 이루어진 인적자본의 육성은 생명관리정치의 주된 관심사가 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는 개개의 가정에 맡겨져 자유경쟁 체제하에 이루어진다. 자연 상태에서의 가열찬 번식 경쟁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아렌트가 지적했던 부의 축적이 유전학적으로도 중요한 함의를 갖게 된다. 개체의 수명을 넘어서려는 유전자의 번식 욕구가 후대의 인적자본인 자식에 대한 무한정의 투자로 실현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적 영역이 모든 공적 활동을 잠식해버린 적나라한 사례 중 하나가 사교육의 그늘 속에 매몰된 대한민국의 공교육이다. 학부모의 교권침해 속에 지난해 교사 여러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충격을 안겼지만, 자기 자식 털끝 하나라도 다칠까 눈을 시퍼렇게 뜨고 달려들 태세를 갖춘 학부모들의 유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학교란, 부자 많은 동네에서는 고소·고발, 학벌 좋은 지역에서는 학부모 간 싸움, 공무원 많은 곳에서는 민원폭탄의 현장이라고 한다. 어떤 교사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만의 비눗방울 안에 들어 있어요.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터져버릴 수 있으니 서로 각별히 주의하도록 해요.” 일부 교사들은 인성 교육이라는 사명조차 포기한 채 학부모들의 대리인으로 스스로를 전락시켰다. 아이들 간의 갈등을 교육의 기회로 삼는 대신 피해 아동 학부모의 신고를 받고 가해 아동 학부모에게 훈계를 당부하는 식이다. 결국 사교육으로 무장된 아이들의 줄세우기만이 공교육의 책무로 남았다.
대한민국으로 대표되는, 공공성이 쇠퇴하고 사적인 생명 번식에만 집착하는 생체정치 사회에서, 인간 부모들은 직업의 사명 따위는 내동댕이치고 시뻘게진 눈으로 돈을 좇아 동분서주한다. 자신이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살고도 넘치도록 남을 부를 축적하기 위해 아등바등 바쁘게 살아간다. 그들이 쌓아 올리는 부의 대부분은 교육열의 불구덩이 속에 시커멓게 타버린다. 공부에서 실패할지도 모를 자식들을 위한 금융자산과 부동산 확보는 보험이다.
역설적으로, 과도한 자식 사랑으로 뭉친 가족 중심의 사회가 오히려 애 낳기 싫은 환경을 만들고 있다. 아직 아이가 없는 젊은 세대들의 눈에 기성세대의 이런 삶은 결코 따르고 싶지 않은 반면교사와 같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사회에서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현명한 선택이다. 자식을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헌신적으로 키우는 데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 민족이 보이는 독보적인 출생률 0.7명이 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결국 애지중지 키워지고 있는 기성세대의 자식들은 후에 수많은 노인들을 힘겹게 부양해야 할 이 사회의 마지막 인적자본으로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인간 유전자의 번식욕은 문화적 환경에 의해 약화되기도 한다. 2016년 학술지 ‘네이처 유전학’에 발표된 연구는 초산의 나이와 평생 낳는 아이의 수를 결정짓는 유전자들로서 CADM2와 ESR1 등을 지목했다. 그런데 2023년 ‘네이처 인간행동’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이 유전자 변이들은 진화적으로 항상 유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환경에 따라 유불리가 달라지는 균형선택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특히 CADM2는 위험을 감수하는 성향이나 충동성과 같은 행동 양상에 영향을 주는 유전자로서, 이런 성향이 때로는 번식에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오히려 불리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현대인의 번식 역시 생물학적으로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여러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같은 나이대 남성의 남성호르몬은 1년에 1% 비율로 줄어들었다. 예를 들어 2000년대 40세 남성의 혈중 테스토스테론은 1980년대 40세 남성보다 무려 20%나 적게 나타났다. 정자 수의 감소도 주목할 만하다. 연구결과마다 차이가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그동안의 데이터를 종합한 2022년과 2023년의 대규모 메타분석 결과에 따르면 남성의 정자 수는 지난 50년간 무려 50%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호르몬의 감소와 일치하는 비율이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이 지점에서 1970년에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발표한 급진적 페미니즘의 고전 <성의 변증법>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른 페미니스트들과 달리 파이어스톤은 여성 억압의 궁극적 원인을 사회적 구조보다는 임신, 출산, 양육을 둘러싼 생물학적 가족의 속박에서 찾았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 역시 생물학적 숙명을 벗어던지는 것에서 찾았다. 그것은 ‘야만적인’ 자연 생식도, 결혼, 가족, 부모와 자식도 없으며, 인공수정으로 만들어진 배아들이 인공자궁에서 태어나고 공동육아를 통해 길러지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이제 높은 정확도의 배아 유전자 검사 기술, ‘크리스퍼(CRISPR)’를 통한 유전자 조작, 크레이그 벤터 등의 과학자가 성공해낸 인공유전체 합성, ‘유도 만능 줄기세포(iPSC)’를 통한 정자와 난자의 생산, 조산아를 위한 임상시험을 앞둔 인공자궁 기술 등의 과학 발전은 이러한 세상을 가능성이 아닌 현실로 우리 앞에 이끌어오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
파이어스톤은 여성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생물학적 생식과 가족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요구는 유전자의 사적인 번식 욕구가 사회의 모든 공공성을 집어삼키면서 점점 더 자식 낳기를 꺼리는 호모 사피엔스의 존속을 위한 대안으로서 더 긴박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1932년에 발표한 풍자적인 제목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이러한 세상을 디스토피아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부모가 없는 신세계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차라리 ‘비눗방울에 둘러싸여’ 공부하는 기계로 자라가는 현재의 아이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지도 모르겠다. 그 신세계는 진짜로 멋진 신세계가 될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 세상에 비하면 말이다.
- 악캬
- 2024/07/16 AM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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