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 노다지 터진 블루칼라...‘빈익빈 부익부’가 허물어진다2024.01.07 PM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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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고령화로 젊은 일손 부족해지고, AI 발전은 화이트칼라 ‘해고 광풍’ 일으켜


 




미국 북동부 뉴햄프셔주(州)의 항구 도시 포츠머스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는 재닛 데즈먼드씨는 시간당 14달러(약 1만8000원)를 주고 아르바이트생을 쓴다. 뉴햄프셔주의 경우 최저임금이 시간당 7.25달러(약 9400원)인데, 아이스크림을 퍼내거나 덩어리 빵을 자르는 단순 노동을 하는 아르바이트에게 최저임금의 거의 두 배가량을 지불하는 셈이다. 데즈먼드씨는 뉴욕타임스(NYT)에 “시간당 7.25달러로는 어떤 누구도 고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만큼 단순 육체 노동자를 고용하는 데 임금 압박이 심해졌다는 얘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들은 더 부유해지고, 서민들의 삶은 갈수록 각박해진다는 사실은 너무 당연한 명제처럼 여겨져왔다. 그러나 최근 소득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의 임금 격차가 빠르게 줄어들어 오히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완화됐다는 내용의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선진국에서 코로나 팬데믹 이후 저소득층의 소득이 가파르게 올라, 실제 서민들의 벌이가 빠르게 좋아지는 현상을 여러 군데서 목격할 수 있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두고 “블루칼라(생산직 노동자)에게 ‘노다지(bonanza)’가 터졌다”고 표현했다.

 


그래픽=김의균

 



◇몸값 폭등하는 단순직 노동자들


코로나를 거치면서 생산·서비스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가파르게 올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노동부 통계를 분석, 레저·접객업에 종사하는 일반 노동자들의 시간당 임금이 2019년 4월부터 지난해 4월 사이 30% 가까이 치솟아 같은 기간 전체 노동자 임금 상승률 20%를 훨씬 웃돌았다고 보도했다. 레스토랑 종업원의 시간당 임금 중간값은 14달러로 미 연방정부 최저임금(7.25달러)의 거의 2배에 육박했다.


대학 학위가 필요 없는 대신 도제식 견습 교육을 받아야 하는 일자리의 임금은 더 높아졌다. 기계공은 시간당 23.32달러(약 3만원), 목수는 시간당 24.71달러(약 3만2000원)를 각각 버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지가 미국의 한 구직 사이트를 검색해 본 결과,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시의 전체 구직 게시물 4941개 중 시간당 15달러 아래의 시급을 제시한 게시물은 34개(0.7%)뿐이었다. NYT는 “정부 데이터를 자체 조사한 결과 작년(7월 기준) 미국 전역에서 6만8000명만이 연방 최저임금에 해당하는 시급을 받았고, 이는 전체 시간제 근로자 1000명당 1명이 안 되는 수준이다”라고 전했다. 2013년만 해도 최저임금 수준의 시급을 받는 노동자가 150만명이 넘었는데, 10년 만에 그 수가 95%가량 대폭 줄어든 것이다.


미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11월 미국의 평균 시간당 임금은 34.1달러(약 4만5000원)로 지난 12개월 동안 4% 증가했다. 저임금 소매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의 임금도 꾸준히 인상돼 시간당 평균 23.86달러(약 3만1000원)를 받는 것으로 집계됐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임금이 솟구쳤을까. 미 상공회의소에 따르면 2023년 12월 기준 미 전역에서 신규 일자리가 940만개가량 새로 열렸는데, 실업자는 630만명에 불과했다. 실업자를 모두 새로운 일자리에 강제로 취직시킨다는 가정을 하더라도 300만개 넘는 일자리가 남는 수준이다. 결국 일자리는 넘치는데 사람이 부족하다보니 임금이 자연스럽게 오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래픽=김하경

 


특히 인구 고령화로 젊은 인력을 찾기 어려운 선진국일수록 몸을 많이 써야 하는 직종에서 구인난이 심화되고 있다. 글로벌 인력 공급 업체 맨파워그룹이 지난해 41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77%의 기업이 직원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대답했다. 불과 8년 전인 2015년만 해도 인력난을 호소한 기업은 약 절반 정도인 38%에 그쳤는데 거의 두 배 수준으로 오른 셈이다. 특히 산업 동력 고갈로 지난해 선진국 중 유일하게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되는 독일에서조차 노동 수요만큼은 강력하게 유지됐다. 2005년 11%를 기록했던 독일 실업률은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해 현재 3%까지 떨어졌다. 새로운 일자리도 월 73만3000개가량(2023년 11월 기준) 공급돼, 2013년 11월(45만 8000개)과 비교하면 60% 증가했다.


◇빈익부 부익빈 시대 열리나


저숙련·저임금 노동자들의 소득이 크게 오르자, 경제학자들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퇴조에도 주목하고 있다. 전미경제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6월 임금 하위 10% 노동자들의 실질 소득(시급)은 코로나가 막 터졌던 2020년 1월과 견주어 8.1% 늘었다. 이에 비해 임금 분포의 정중앙(50%)에 위치했던 노동자들 소득은 1%만 증가했고, 상위 10%는 오히려 1.5% 줄었다. 이 같은 분석을 바탕으로 논문을 쓴 데이비드 오터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경제학과 교수는 “2020년 이후 저소득층의 가파른 임금 증가는, 지난 40년 동안 쌓여 온 임금 불평등의 약 5분의 2를 사라지게 할 정도”라고 했다.


다른 연구에서도 엇비슷한 결론이 나왔다. 미 경제정책연구소 연구에 따르면, 소득 계층을 다섯 단계로 나눠 코로나 팬데믹 기간 3년(2019~2022년) 동안 임금이 얼마나 늘었는지 조사해 본 결과 소득 하위 10% 계층이 9% 오르며 1위를 차지했다. 소득 상위 10% 계층(4.9%)과 비교해 보면 훨씬 가파른 성장세다. 하위 10% 계층의 소득이 이처럼 가파르게 오른 것은 조사 시작점인 1979년 이래 처음이었다.



그래픽=김하경

 


앞서 글로벌 금융 위기 땐(2007~2009년) 블루칼라에게 타격이 컸다. 기업들은 생산 감축 카드로 생산직 노동자부터 잘라냈다. 임금 상승도 더뎠고 소득 불평등도 더 커질 것이 자명해 보였다. 그러나 이제 대역전극이 시작된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같은 현상에 대해 “부유한 세계에서 노동자들은 이제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다. 사회가 고령화되면서 노동력은 점점 희소해지는 데다, 기술로 대체하기 어려운 육체 노동에 대한 보상이 더 좋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인구 구조의 변화


블루칼라 대반전의 원인으로 첫손에 꼽히는 것은 ‘생산 가능 인구(15~64세)’ 감소다. 선진국 위주로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일할 사람이 점점 줄자, 노동력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이다. 선진국들의 생산 가능 인구는 역사상 가장 느린 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10년 뒤엔 감소세로 돌아설 것이란 게 전문가들 예측이다.


이코노미스트는 “부유한 세계의 실업률은 5% 미만으로 역사상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절반 이상에서 생산 가능 인구의 고용률은 사상 최고치에 근접하고 있다”며 “인구 감소가 두드러지면서 이민자들로 노동력 감소를 메우기에도 어려운 지경”이라고 전했다.


특히 ‘세계의 공장’으로 통하던 중국의 생산 가능 인구 감소는 글로벌 노동력 품귀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인해(人海)전술’로 선진국의 제조업을 모두 흡수해 오던 중국도 생산 가능 인구가 2015년 9억9800만명의 정점을 찍은 이후 가파르게 줄면서 점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더구나 중국을 대체할 만한 다른 개발도상국들 역시 중국에 버금가는 산업 역량 구축엔 아직 어려움을 겪는 상태다.



그래픽=김하경

 


미·중 갈등이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등 지정학적 불안정도 커지면서 글로벌 기업들은 결국 자국의 노동자들을 다시 찾는 현상도 빈발하고 있다. 이에 주요국들은 중국에 대한 노동 의존도를 줄이고 자국에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는 상황이다. 이 같은 이유로 한때 중국에 일자리를 뺏겼다며 아우성치던 선진국 노동자들 몸값이 최근 천정부지로 솟고 ‘부인부 빈익빈’이 ‘빈익부 부익빈’으로 경로를 트는, 예전과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지게 됐다는 것이다.


◇AI, 화이트칼라부터 덮친다


최근 생성형 인공지능(AI)의 급격한 발전도 부익부 빈익빈에 브레이크 페달을 밟는 요소다. 대학 졸업장을 가지고 대기업 등에 사무직으로 입사한 ‘넥타이 부대’들이 생산직·서비스직 노동자들에 비해 안정되고 벌이가 낫다는 게 오래된 통념이지만, AI의 등장으로 이런 추세가 뒤집히고 있는 것이다.


AI 기술이 보편화되면서 저숙련 단순 노동자들이 아닌 대기업 관리직이나 사무직 종사자들이 먼저 ‘해고 광풍’을 맞고 있다는 것이다.


비영리단체 ‘임플로이 아메리카’는 따르면 2022년 3월에서 2023년 3월까지 1년 동안 미국에서 직장을 잃은 화이트칼라 실업자는 15만명에 달한다. 특히 IT(정보기술) 분야의 대규모 정리 해고가 대폭 늘었다. WSJ는 미 노동부 통계를 분석, 지난해 3월 기준 IT 분야의 정리 해고가 1년 전에 비해 88%나 늘었고 금융과 보험 업계의 정리 해고는 55%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시장조사 기관 퓨리서치센터도 AI 물결에 화이트칼라 타격이 클 것으로 분석했다. 이 센터는 미국 노동부 직업 정보 데이터베이스와 인구 통계를 분석해 AI가 발전하더라도 덜 위협받을 직업으로 이발사, 소방관, 승무원, 경비원, 정비공, 피부관리사 등을 꼽았다. 근로자들 직무가 AI에 적게 노출되는 비율을 따져보니, 유지·보수나 가사 서비스가 48%로 높아 안전한 직군에 속했다. 이어 숙박·요식업도 43%를 기록해 AI의 습격으로부터 안전한 직군으로 분류됐다.


반면 화이트칼라가 많은 교육(9%), 정보(8%), 금융(4%), 과학·기술(3%) 분야에서는 AI 노출도가 낮은 근로자의 비율이 한 자릿수에 불과했다. 그만큼 AI로 대체 가능한 인력이 많다는 의미다. 퓨리서치센터는 “사람의 ‘지능’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AI는 전문직이나 사무직 일자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그래픽=김하경

 


화이트칼라 직종의 진입 장벽 역할을 했던 ‘대학교 졸업장’ 프리미엄이 사라지면서, 대학에 4년을 투자하느니 차라리 고등학교 졸업 이후 취업 시장에 곧장 뛰어드는 것이 유리하다는 인식도 확산되기 시작했다. 미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 고교를 졸업한 16∼24세 연령층의 대학 진학률은 2009년 70.1%로 정점을 찍은 뒤 2019년 66.2%, 2022년 62%로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중이다. 싱크탱크 ‘어번 인스티튜트’의 경제학자 로버트 레먼은 WSJ에 “2023년 현재 대학에는 1500만명의 학부생이 등록돼 있고 기업은 약 80만명의 견습생을 고용하고 있는데, 지난 10년간 대학 등록은 약 15% 감소한 반면 견습생 수는 50% 이상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갤럽에 따르면 지난해 대학교 이상의 고등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은 전체 설문조사 응답자의 36%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2013년 설문조사에서 대학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답한 미국인들이 70%에 달했는데, 불과 10년 만에 생각이 크게 변한 것이다.


◇블루칼라 전성시대, 영원할까





저임금 블루칼라의 소득이 늘어 경제 양극화가 개선된다는 분석이 잇따라 나오고 있지만, 노동자들 실제 생각은 이런 통계치와는 사뭇 다르다는 점은 문제점으로 꼽힌다. 코넬대 노사관계대학원의 ‘노동운동 추적기’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선 413번의 파업에 약 50만명의 노동자가 참여한 것으로 분석됐다. 노동운동이 활발했던 1980년대 초 이후 이처럼 많은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한 것은 처음이다. 워싱턴포스트는 “미국 노동자의 파업 참여 증가는, 노동자 스스로의 경제적 지위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이자, 1980년대처럼 파업을 자신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유용한 도구로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블루칼라 임금이 크게 늘어났지만, 노동자들 스스로는 코로나 이후 경제적 과실을 기업과 일부 경영진이 독점한다는 인식이 여전히 강하다는 뜻이다.


여기에 올해 ‘선거의 해’를 맞아 정치권에서 “갈수록 심해지는 경제적 양극화를 타파하자”고 포퓰리즘 수사를 쏟아내는 것도 노동자를 자극하는 발화점이 될 수 있다는 우려다. 노동자들의 임금이 가장 많이 오른 미국에서조차 여야를 막론하고 “핍박받는 블루칼라 노동자가 최우선의 보호 대상”이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다. 예컨대 민주당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시장 개입과 막대한 재정 투입으로 자국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만든 것을 성과로 자랑하고 있고, 공화당의 유력 대선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여전히 ‘레드넥(red neck)’이라 불리는 미국 백인 노동자들을 향한 포퓰리즘을 정치 행위 전면에 내세운다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관념은 노동자들에게 너무 널리 퍼져 있어, 경제적 상황이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본인의 상황에 불만을 품게 만든다”며 “부의 분배를 놓고 너무 많이 싸우게 되면 결국 경제성장을 깎아먹고 ‘블루칼라 황금시대’를 빨리 저물게 할 위험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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