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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소설] 웹소설) 10,000회차 연재 후 끝장나는 세계 - 52021.09.23 PM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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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설의 검의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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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제 연결됐네. 나라니? 맞아. 언니야. 메를렌이야. 정말 오랜만이다 얘. 잘 지냈어? 나? 나는 말이지…….”
나라가 미르와의 첫 데이트에 입고 갈 옷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날 갑자기 걸려온 전화.
메를렌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
뭐……. 유럽 E국의 아서왕 전설에 나오는 아서왕이 남자냐 여자냐, 레즈냐 게이냐 하는 이야기는 다 제끼고.
한때 그랜드 위치의 조수였던 메를렌은 아서왕 전설 중에서도 성검 엑스칼리버에 대한 부분을 좋아했다.
“그냥 칼리번이었던가? 뭐 그건 제끼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성검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도 ‘바위에 박혀 나오질 않는 검’ 부분이 메를렌의 로망을 자극했다.
그래서 ‘마법에 재능이 없다’라는 이유로 그랜드 위치에게 파문당한 뒤, 메를렌은 자기가 만드는 물건 중 거의 대부분에 성검의 디자인을 적용했다.
예를 들자면 연필꽂이. 예를 들자면 책 커버. 예를 들자면 전기 파리채 손잡이.
그리고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던 자동차 디자인에 이르러선, 의외로 천재적인 디자인 재능과 성검의 수려한 모티프가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수준에 도달했다.
덕분에 메를렌은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그녀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역시 손수 디자인했던 그 차였다.
“응. 그러니까 언니가 이번에 골치 아프게 된 게 그 자동차 때문인데…….”
메를렌은 말을 더듬었다. 파문당하긴 했지만, 한때 스승으로 모셨던 그랜드 위치의 손녀에게 자기 치부를 말하려 하니 속이 쓰려왔다.
그녀가 그랜드 위치에게 파문당한 까닭과 차가 문제가 된 것은 의외의 연결점이 존재했다.
그랜드 위치에게 있어 마법이란 ‘좋아하는 것을 현실로 끌어내는 마음’이었다.
메를렌에겐 그 ‘마음’이 없었다. 사이코패스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잡지 못했던 게 ‘재능이 없다’라는 평가를 받은 원인이었다.
다른 부분은 오히려 그랜드 위치의 문하 중 최고 수준이었다. 메를렌은 마법이나 주문은 물론이고, 각종 인을 맺는 법이나 마도구 사용법까지 통달하고 있는 인재였다.
그리고 메를렌은 파문당한 뒤에야 자신이 ‘성검 전설’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법에서 멀어진 뒤에야 마법을 다루는데 가장 기초적이고 필수인 재능을 습득한 것이다.
여기까지 침착하게 듣고 있던 나라는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저기, 언니. 그래서 언니의 성검 마법하고 자동차하고 무슨 연관이 있는 거예요?”
“나라야, 너 혹시 바위에 꽂힌 성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니?”
“잘은 몰라요. 바위에 꽂힌 검을 뽑은 괴력남이 고대 E국의 왕이 됐다는 것 정도?”
“괴력남 아니거든. 작고 예쁘장하고 귀여운 소년이거든.”
“언니 취향을 그렇게 말하셔도……. 게다가 검을 뽑은 뒤에 휘두르긴 했을 테니까 괴력도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야! 내 아서는 작고 소중하고 아껴줘야 하는 금발소년이라고!”
“언니. 제발. 본론이요.”
“으음. 미안. 언니가 좀 흥분했나 보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방향으로요.”
“어쨌든 그 전설에서 중요한 건, 아서가 바위에서 검을 뽑았다는 부분이야. 그걸 차하고 연관 지어봐.”
“연관 지어요? 차하고 바위를? 무슨 선택받은 사람이 차를 타면 핸들이 뽑히기라도 해요? 헤헤, 이건 너무 바보 같으려나.”
“ ”
“언니. 왜 반응이 없어요? 설마, 진짜로? 뽑혀요?”
“핸들은 아니고. 변속기가 그만…….”
그녀가 말한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퇴근하던 중 아서왕을 본뜬 피규어 신상품이 입하되었다는 첩보를 입수한 메를렌은 적당한 길가에 차를 세우고는 빗자루를 꺼내 쇼핑몰까지 급히 날아갔다.
“차는 어쩌고요?”
“급할 때는 빗자루가 더 빨라.”
“ ”
“네가 아직 고등학생이라 모르는 거야. K국 교통이 얼마나 개판인데.”
마녀로서 욕망에 충실한 건 귀감이 될 일.
하지만 그렇다고 차를 버려둔 것처럼 방치한 건 전혀 칭찬할 요소가 아니었다.
이렇게 버려져 있던 차는 지나가던 건달이 발견했고,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망설임 없이 운전석에 올라탔다고 한다.
그리고 메를렌이 디자인하면서 얼결에 마법을 걸어버린 성검, 아니 성차(聖車)는 이 건달을 왕의 자질이 있는 자로 인정했다.
“스스로 변속기를 뽑아버린 건 왕으로 인정했다는 표식 같은 거였겠지.”
“그래서, 차는요?”
“하필이면 그 근처에 악마가 운영하는 회사가 있어서, 거기에 전속력으로 들이박았다지 뭐니.”
“성(聖)은 마(魔)에게 끌리는 법이니까요.”
“그렇게 되는 대로 말할 게 아니야. 악마만 죽었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사람까지 죽었다지 뭐니. 너희 학교 교사라던데.”
“언니, 혹시 그 사람 성이 장 씨예요?”
“응? 어, 맞아. 어떻게 알았니?”
“그럼 그 선생님은 신경 안 써도 돼요. 그보다 나머지 뒤처리는요?”
“어제까지 해서 급한 불은 껐는데……. 본사 어르신 중에 마법에 대해 아시는 분들이 있더라고. 리콜 대신 차에 걸린 마법을 전부 풀 방법을 찾아오래.”
“어머, 리콜 안 해요?”
“현대에 왕이 될만한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걸 전부 리콜하냐고 하던데.”
“어, 으음.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거 같기도 한데…….”
“그래서 말인데 나라야, 그랜드 위치님께 다시 제자로 들여달라고 대신 말 좀 해주지 않을래? 한동안 너희 집에서 살면서 그랜드 위치님께 속성으로 배우는 게 일을 가장 빨리 해결할 수 있을 거 같거든. 응? 부탁 좀 할게.”
“으음, 할머니가 들어주실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물어나 볼게요.”
열흘 후, 악마들 사이에서 마녀 한 명이 S시에 와서 살게 되었다는 소문이 알게 모르게 퍼졌다.
그녀가 악마만 보면 폭주하는 저주받은 차를 몰고 다닌다는 기묘한 괴담과 함께…….
***
이곳은 K국의 S시.
거대 운석이 낙하하다 허공에서 멈춘 기묘한 도시.
이것은 S시에 사는 사람들의 혼돈과, 혼돈의 이야기다.
세계가 끝나기까지.
앞으로 9,9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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