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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일기] 독서 일기2011.05.23 PM 04:29
2011.05.23 월 16:26
※ 파시즘 p.273 ~ p.333 제5장 권력행사
앞서 일단 먼저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파시즘의 권력 획득 과정이다. 파시즘은 집권 세력으로 나아가기 위해 초기의 지지계층이었던 노동조합 등으로 대표되는 급진적 경향의 민중파를 배격하고, 당대의 집권세력이었던 보수 엘리트 계층과 점진적으로 손잡았다. 보수 엘리트층은 불어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폭풍 속에서 자신의 집권을 고수하기 위해 파시즘과 손잡았으나 이는 결과적으로 오산이었다. 시골뜨기라 폄하했던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대중 장악력을 가늠하기엔 그들이 대중과 소통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5장에서는 파시즘의 권력행사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이런 권력행사의 근간에는 대중의 묵인과 또 묵인을 조율해낸 파시스트의 역량에 대해 논의되어 있다. 우선 저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순수한 파시즘 체제는 존재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파시즘 정권들은 당과 강력한 보수 세력 사이에 맺어진 모종의 협약이나 동맹관계에 의지했다. 파시즘의 태생 자체가 ‘안티테제’의 총합으로 당대 고전적인 자유주의적 국가관에서 버림받은, 일탈한 계층의 분노를 기반 했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일종의 타협이며 진화라 할 수 있다.
파시즘 체제의 복합적인 성격은 망명 학자 에른스트 프랭켈의 ‘이중 국가(dual state)’라고 표현한 대목에서 잘 나타나 있다. 히틀러 정권 때의 합법적으로 구성된 정부 당국과 기존의 관료조직으로 구성된 ‘표준국가(normative state)’와 당의 동형 기구로 만들어진 ‘특권국가(prerogative)’가 권력다툼을 벌였다고 썼다. 프랭켈의 나치 통치 분석 모델에 따르면, 파시즘 정권의 ‘표준 영역’은 계속해서 정당한 절차에 따라 법을 집행했으며 관리의 임명이나 승진 기준도 능력과 근속년수라는 관료주의적 기준을 따랐다. 반면, ‘특권적 영영’에서는 지배자의 변덕이나 당 활동가들에 대한 보상 혹은 ‘선택된 민족(Volk, razza)’에게 예정되어 있다고 가정된 ‘운명’외에 특별한 규칙이 없었다고 한다. 표준국가와 특권국가는 갈등을 빚으면서도 어느 정도 손발이 맞는 협력 속에서 공존하였으며, 그 결과 관료주의적 형식주의와 독단적인 폭력이 혼합된 기묘한 형태를 띠었다. 이에 대한 실례로 히틀러는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을 위해 마련된 헌법을 공식적으로 한 번도 폐지하지 않았으며, 독일에서 표준 국가를 완전히 해체해버린 적도 없었다.
지도자 ‘개인’으로 집중하여 분석한 부분에서 무척 흥미로운 건, 히틀러의 ‘악명높은 게으름’이 나치즘의 열기를 식혀버리기는커녕 하급자들이 유례없는 극단적 급진주의로 치닫게 하는 토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최고지도자의 ‘나태’가 파시즘 체제 내의 끝없는 긴장, 다시말해 파시즘 통치를 ‘폴리오크라시(polyocracy)’ 즉,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여러 세력이 권력 중심을 이루어 항구적인 경쟁과 긴장관계 속에서 협력하는 통치 형태라고 보는 해석이 존재한다. 한스 몸젠은 그를 ‘허약한 독재다’라 부르기 까지 했다. 몸젠은 나치 정권이 관료주의적 효율성이라는 합리적인 원칙을 토대로 조직되지 않았으며, 정권이 보여주었던 어마어마한 살인적 에너지의 분출은 히틀러의 지휘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찾아냈다.
그러나, 위와같은 ‘이중국가’ 모델은 여론을 배제해버린다는 약점이 있다. 파시즘 정권에 대해 위로부터 권위를 행사하는 방식의 연구로만은 충분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나치 독일과 파시즘 이탈리아 양쪽 모두에서 정권에 대한 국민의지지 및 협조 수준이 매우 높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다. 파시스트들의 공공연한 폭력행사는 대다수 독일인들의 미움의 대상이었던 유대인, 마르크스주의자, 그리고 ‘반사회집단(동성애자, 집시, 선천적 심신장애자, 상습 범죄자)’을 겨냥했기 때문에, 독일인은 폭력을 두려워하기보다 만족스럽게 여기는 경우가 더 많았다. - 이에 대해 현 한국사회에 시사점이 크다. 특히나 무리 짓기의 유용성을 역사적으로 학습해 온 한국 사회에서, 개인은 집단의 범주에서 타 무리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갖는 것은 쉬운 일이며, 또한 이가 종교적으로 결합할 경우 파시즘의 방아쇠가 될 수 있다. 또 그런 조짐이 보인다.
파시스트들이 원하는 것은 ‘영혼의 혁명’, 다시 말해 이탈리아의 로마니타, 독일 민족 담론, 헝가리즘처럼, 공동체의 운명과 그 특권에 대해 거듭 강조하고자 했다. 파시스트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군, 생산능력, 질서, 부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파시스트들은 선거 정치와 특히 좌익의 계급투쟁 및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도 때문에 공동체의 분열과 쇠퇴가 야기되었다고 주장했다. 현재 공동체들이 처한 위기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이 신봉하는 ‘자연스럽고 조화로운 인간 이해관계의 작용’만으로는 단결을 이룰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적극적 행동을 통해(테러를 불사하더라도) 공동체를 단합시켜야 하며, 국가적 행동에는 가능하다면 설득과 조직화, 필요하다면 강제력을 동원해야 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이를 ‘기계적 결속(기계적 결속은 구성원들이 동일한 가치와 규범을 기반으로 결속된 상태이며, 그 반대인 ‘유기적 결속’은 전문화된 개인들이 상호의존성을 기반으로 결속된 상태라 말했다)’이라 정의했다. - 그러하기에 현재 한국에서 위와 같은 행태를 보이는 집단에 대해 냉소에만 그치지 말고 관심을 가지고 견제할 필요성이 있다.
파시즘이 복지 체제를 특정인종을 혜택 대상에서 배제하는 방법으로 왜곡 · 축소하려 했으나, 복지국가에 대한 해체를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Ps. ‘파시즘’ 읽으면서 새삼 느끼는 점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파시즘의 토양이 될 만한 요소가 소름끼칠 정도로 많다는 겁니다. 비판성을 유지하는 현명한 개인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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