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日常)] 나에 아버지 그리고 가족이야기.2014.07.04 PM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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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에 의존해서 아버지와 살아왔던 삶을 써볼까 한다.

전부 맞다고는 안하겠지만 어느정도 맞을거라 생각된다.

누군가에 살아왔던 이야기는 작은 역사이며 체험할수 없는 또 다른 경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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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48년생이며 5남 2녀의 장남으로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셨다.

아버지가 애기였던 시절 6.25을 경험 하셨다.

전쟁으로 페허가 된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셨다.

그 시대 아이들은 놀기보다는 집안일 도우면서 살아갔었다.

과거엔 농업이 대분이라서 남아 선호 사상[男兒選好思想]이 강해졌던 이유이기도 했다.
(남아선호사상: 여자보다 남자 아이를 선호 하던 사상)

집안이 어려워서 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 밖에 못 나오셨다.

그래도 마을 서당[書堂]에 다니셔서 한문은 잘 아셨다.
(서당:일반 민가에서 훈장[訓長]이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던곳)

어려운 집안을 할아버지랑 함께 이끌어 가시다가 그때 당시에는 늦은 나이에 결혼 하셨다.

28살에 어머니를 만나 결혼해 바로 나와 여동생둘을 연년생[連年/年年生]으로 낳았다.
(연년생: 아이들을 한살 터울로 낳는것)

그러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2살때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5남 2녀와 할머니 그리고 자신에 가족까지 돌봐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그게 아버지 나이 30살때 일이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가난을 벗어 나기위해 이 악물고 일을 하셨다.

특히 아버지는 셋째 삼촌에게 기대가 컸었다.

셋째 삼촌은 나름 공부도 잘했고 아버지 남매중에서 유일하게 고등학교까지 다니셨다.

아버지는 삼촌을 대학까지 보내고 싶으셨지만 삼촌은 대학을 가는것을 포기했었다.

집안 평편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공부가 싫었는지는 모르겠다.

셋째 삼촌에게 많은 실망을 하셨었다.그러나 어떻하게는가 자신에 인생을 가겠다는데.

아마 아버지에 강압적인 교육방식이 삼촌을 질리게 만든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예전 시골집에는 광[庫房]이라곳에 부서진 TV가 많았다.
(광: 지금말로 하면 창고)

모두 아버지가 삼촌이 공부 안하다고 부셔버린것이다.

지금보다 그때 당시 TV는 굉장히 바싼 물품이었다.

그마큼 아버지는 삼촌에게 기대감이 엄청난던것 같았다.

덕분에 TV부속품들이 내 장난감 이었다.그래서 하루종일 광에서 논적도 있었다.

결국 삼촌은 대학을 포기 하고 서울로 취직했다.

그렇게 삼촌과 고모들은 결혼과 취직으로 집을 떠나갔다.

그래서 아버지는 새로운 결심을 하셨다.

빚을 내어 땅을 사서 소작인[小作人]이 아닌 자신에 농사를 짖기로 하셨다.
(소작인: 남에땅을 빌려서 임대료를 내면서 농사짓는 사람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운이 안따라 주었다.

수박농사를 하자 그해 홍수로 수박이 썩어 가는것을 지켜볼수 밖에 없었다.

다시 빚을 내서 고추 농사를 지었지만 그해 병충해로 본전도 못 건지고 빚만 늘어갔다.

그러다 할머니가 돌아 가셨다.

아직도 그날을 잊을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마당을 쓸고 어머니에 아침식사가 모두 준비되면 할머니를 깨우셨다.

그러나 할머니는 일어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목 놓아 우시는 장면을 그때 처음 보았다.내 나이 7살때 일이었다.

난 철이 없게도 집에 제사를 한다고 온동네 방네 돌아 다니면서 자랑을 하며 좋아 했다.

철도 없고 죽음이 먼지를 모를 나이였었다.

할머니도 죽음보다 맛있는것을 많이 먹는다는게 좋았던 것이었다.

할머니에 장례[葬禮]를 치르시고 아버지는 또 한번 결심을 하셨다.

바로 서울로 이사하기로 결정 하셨다.

이미 삼촌과 고모들은 모두 출가했으니 시골에는 미련이 없었고 자식을 위해 서울로 이사하기로 결정하셨다.

이사하던날 몇년을 산 집인데 2톤 트럭에 짐을 채우지도 못 할정도로 짐이 별로 없었다.

처음으로 트럭에 타봤고 처음으로 바나나 우유를 먹어봤던 시기였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처음 맛본 바나나 우유맛은 정말 별로였다.

처음 맛본 색깔우유 맛은 너무 낯설고 달았다.

다 먹지도 못하고 그냥 버렸던것 같다.여동생들도 마찮가지 였다.

서울에 시작은 단칸방 월세부터 시작했었다.

월세방도 서울에 친척분이 빌려주셔서 얻을정도로 집안 형편이 안좋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자식들 자기 마누라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이 부셔지거라 건설현장 막노동꾼으로 일하셨다.

힘든 일이라서 그런가 아버지께서는 시골에 있을때 보다 약주[藥酒]를 많이 드셨다.
(약주: 어른이 드시는 술을 점잖게 이리는 말)

어럴적 아버지가 약주 드시고 들어오면 우리 남매는 공포에 시간이었다.

원래 평상시에도 엄하지만 약주 드시면 더 엄하고 무서웠다.

약주드시면 꼭 우리 남매를 찾으셨다.자고있는 우리 남매를 깨워불러 놓고 항상 일장연설 하셨다.

그럴때마다 어머니는 그냥 주무시라고 말리다가 아버지에게 맞거나 발길질 당하기 일쑤였다.

요즘말로 하면 가정폭력이 심할때였다.

시골에 살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난 위축되고 소심해졌다.

그리고 시골에서 왔다는 꼬리표 덕분에 국민학교 아니 초등학교 4학년 될때까지 친구가 없었다.

초등학교 성적표 인적 사항[人的事項] 란에는 이런 글이 떠나지 않았다.
(인적사항: 특정한 사람에 대한 여러 사항)

학습도구 준비물이 부족합니다.매사[每事]에 자신감이 없어 합니다.적극성이 부족합니다.
(매사 :낱낱의 모든 일들)

어느날 학교 준비를 사게 돈 달라는 말에 어머니는 옆집에서 빌려서 준적이 있었다.

일용직[日傭職] 집안은 그렇게 돈이 항상 부족했다.
(일용직: 하루에 얼마씩의 일정한 품삯을 받고 일하는 직종)

자연스럽게 난 학교에선 내성적이고 시골에서온 촌놈으로 낙인이 찍혔다.

친구도 없었다.학교 갔다오면 여동생이랑 노는것이 유일한 놀이였다.

공기놀이 하고 고무줄놀이나 술래 잡기 하는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지겨우면 곤충을 잡으러 다녔다.

서울이었지만 달동네라서 뒤에 산이나 버려진 텃밭에는 잠자리 풍뎅이등에 곤충이 많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집에서 쫓겨날뻔한 일이 생겼다.

아 글이 너무 길어 져서 다음에 쓸려고 하는데 아 이거 글 한번 쓰기 진짜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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