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담] 한일관계 고찰2019.07.14 PM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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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고찰

 

 

 

미래로 가고 싶다.

 

뭐 적당히 씁니다. 아무래도 좋겠지요. 저는 미래에 대한 호기심으로 냉동인간이 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때가 있어요. 그거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 같으니까요. 물론 냉동인간이 된다고 해서 미래에 살아남을 보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미래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네요. 아니면 불로불사가 되어서라도 미래를 가보고 싶어요. 과연 미래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대부분의 생산을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하게 되는 특이점이 와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게 되는 걸까요?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수수께끼는 풀려있을까요? 리만의 가설이던가 말이죠. 우주탐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아, 달에 가보고 싶어라.

 

우주를 알면 알수록 사람은 겸손해진다고 해요. 우주는 매우 크니까요. 뭔가 오만해지려고 해도 우주의 크기를 접하면 부질없게 느껴지지요. 우주와 비교하면 지구가 티끌보다 작은 존재가 되어버리니 참 무력해지죠. 하지만 이건 일종의 현실도피기도 해요. 광대한 우주를 바라보며 현실의 무력함을 정당화하는 거죠. 우주에 비하면 모두 아무것도 아니잖아?

 

국가간 분쟁도 결국 그런 것 같아요. 미래를 생각해보면 지금의 분쟁은 정말 소소한 것이죠. 의문이 들어요. 한 만년 지나면 지금 분쟁에 대해 한 줄이라도 배우게 될지 말이에요. 아마 거의 신경 쓰지 않는 고대사에 불과하게 되겠죠. 굳이 미래를 가지 않더라도 무력감을 느낄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누군가가 설계한 판에서 체스 말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설령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부 사람들의 언행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니 별차이는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것처럼, 소수의 입김으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내가 뭐 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잖아, 무력감을 느끼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지도 모르죠. 최근 홍콩 시위를 바라보며 개인적으로 응원을 했어요. ‘잘되었으면 좋겠다’라고. 그런데 별로 바뀐 것은 없더라고요. 최초의 목적은 표면적으로 달성했지만, 장관이 바뀐 것도 아니고 선거제도가 바뀐 것도 아니며 일국양제가 바뀐 것도 아니죠. 결국 그들의 불완전한 자유와 평등은 시한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매우 슬펐어요. 왜냐고요? 저는 민주주의자니까요. 전세계에 자유와 평등이 찾아오기를!

 

표면적 목적을 달성한 것만으로 홍콩 시위자들의 수가 많이 줄어든 것을 생각해보면 평화시위로 국가지도자를 끌어내린 건 굉장한 것 같아요.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일정한 수가 유지되었었죠.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걸 폄하하고 싶어하겠지만, 객관적인 사실만 나열해보면 대단한 것이 맞아요. 평화시위로 국가지도자 끌어내림. 보통은 있기 어려운 일이죠. 단지 그걸 시위자들의 공으로만 내세운 건 좀 마이너스예요. 이 부분은 ‘정의는 정치를 할 줄 모른다’에서 후술해보도록 할게요.

 

아무튼 대부분 결국 소수의 입김으로 세상이 움직이는 것은 맞으나 다수의 개개인의 힘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힘은 작지만 뭉치면 커지죠. 최근 높은 교육수준과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평등한 대화, 그리고 개인미디어의 발달은 다수의 개개인의 힘을 응집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강대한 힘에 무력감을 느끼며 현실도피 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특히 민주주의 국가는 자신의 힘을 자각했으면 좋겠어요. 개인에게 권력이 주어진 체제니까 다수의 개개인이 힘을 응집하면 세상은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귀족과 평민, 자본가와 노동자, 공산독재와 노동자, 소수의 강자와 다수의 약자. 최근 한일관계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 갈등은 일견 보면 과거사로부터 시작되었죠. 그래서 과거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그런데 그건 특정 정치인에게 있어 단지 통치자격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공산독재자들에게 있어 민족주의가 체제유지 수단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에요. 그러니까 극우를 기반으로 둔 일본의 정당은 한국에게 일부러 사과를 어중간하게 함으로써 한일갈등을 부추이고, 국민들에게는 사죄피로를 주장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시켰죠. 관계악화가 곧 정치적 입지 강화로 이어지기 때문에 과거사를 이용했다고 생각해요. 소수의 입김으로 다수가 이용당하는 거죠. 그리고 이건 단순히 한쪽만 이익을 보는 건 아니더군요. 공격받은 쪽도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니까요. 북풍이나 영호남지역갈등과 비슷하죠. 이러한 관계로 상생하는 걸 가리켜 이른바 적대적 공생관계라고 해요. 적대적 관계가 체제유지 또는 정권유지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이야기예요. 뭐 우리나라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무리 달콤하더라도 그건 바르지 않으니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에게 자유와 평등이 찾아와야 한일갈등의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해 질 거라 생각해요. 소수에게 다수가 휘둘리지 않아야만 과거사 문제가 정치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이 끝이 나 해결될 수 있을 거란 이야기죠. 정치수단으로 활용되는 한 사과를 하든, 사과를 받든 관계없이 계속 갈등이 일어날 거예요. 정말 일반 국민들에겐 불쾌한 일이죠. 과거사를 이용하고 있다니.

 

많은 사람들은 ‘정치인은 국민이 결정한 것이니 국민의 책임이다.’ 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소수가 다수를 이용하기 위해 저지른 수단들을(언론탄압, 여론오도, 교육(우민화)정책 등) 생각해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뭐 우리나라도 군사독재를 경험해봤으니까 알거라 생각해요. 남일이 아니잖아요. 3S는 대표적인 우민화 정책이죠. 멍청해진 대중의 책임인가, 멍청하게 만든 독재자의 책임인가.

 

독재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요. 혈통독재, 공산독재, 군사독재, 자본독재 음, 일본은 제 생각엔 무관심독재에 속하는 것 같아요. 2009년에는 중의원선거 최종투표율 69%로 높았었는데 2017년 중의원선거 최종투표율은 53%로 우리나라 국회의원 선거 투표율 58%보다 더 낮아졌어요. 뭐 우리나라도 그 동안 군사독재에서 무관심독재로 이어져왔다가 이제야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있으니 남일은 아니지만요. 뭐 결국 지금까지 갈등은 대부분 소수가 다수를 이용하기 위해 만든 갈등들이죠. 외교갈등, 노사갈등, 노노갈등, 지역갈등, 성별갈등, 세대갈등 등. 전부 그렇잖아요? 아 부디 세상에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 찾아와 중요한 외교관계나 소중한 과거사가 정치에 이용당하는 일이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정의는 정치를 할 줄 모른다.

 

음, 이건 예전부터 주장하던 내용 중 하나예요.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올바름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당연히 이길 거라 생각하고 정치적인 접근방식을 택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죠. 그래서 결과적으로 잘 안될 때도 있고, 이용당할 때도 있어요. 권선징악의 폐해 중 하나죠. 선을 권하고 악을 징벌하는 건, 운명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가는 거예요. 선과 악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권선징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정치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촛불시위를 예로 들어보죠. 저는 부도덕한 국가지도자를 끌어내린 공을 시위자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을 정치적이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시위자가 아무리 많아도 국민의 십 분의 일도 안될 겁니다. 대부분은 관망하며 응원하거나 반대했을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그 공을 소수에게만 돌리는 행위를 하다니. 정치의 기본은 수를 늘려 입지를 강화하는 거죠.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등에 업고 대신 행동해야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거예요. 실제 행동했던 시위자들의 공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 공은 모든 국민들에게 돌렸어야 했어요. 그래야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었을 겁니다. 시위자 한 명, 한 명이 겸손하게 모든 국민의 힘으로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이야기했어야 했어요. 그렇게 해서 수를 늘렸어야 했어요. 그게 정치라고 생각해요. 시위자들만 치켜세우면 나머지는 소외되잖아요.

 

암묵적인 동의, 온라인의 응원, 해외에서의 소리 없는 지지 등. 전부 포함시켜야 하죠. 이게 정치고, 정의는 결과죠.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말이죠. 대놓고 말하면, 열성지지가 10명보다 암묵적지자자 100명이 더 가치 있습니다. 자본의 가치와 달리 표의 가치는 동일하니까요. 똑똑하든 어리석든 표의 가치가 동일하기 때문에 중우정치를 경계하며 엘리트 중심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거보다 차라리 모든 국민들을 똑똑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이익입니다. 특히 주요 자원이 인적자원인 우리나라 입장에선 모든 국민이 엘리트가 되어 세계를 누비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죠. 그러니 교육의 상향평준화가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공교육이든 언론이든 인터넷이든 말이죠.

 

우리나라 보수 관점으로도 접근해보죠. 이들은 반북이 정의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민족주의가 만든 친북과 반대되는 과거 군사독재정부를 지지하고 응원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정치적으로 행동할 줄 몰라요. 반북이 목적이에요? 아니면 과거 군사독재정부 지지가 목적이에요? 만약 반북이 목적이라면, 과거 군사독재정부에 피해를 받아 그들을 증오하는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했어야 했어요. 정치적으로 수를 늘리는 방법을 몰랐다는 거예요. 과거 군사독재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동조를 하며 공산독재자를 증오하며 멀리하자고 주장했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의 동조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뭐 상당히 지나서 섞여버렸으니까 이제는 좀 힘들겠지만요.   

 

교황이야기를 잠깐 더 해볼까요? 예전에 현 미국 대통령이 비난을 받고 있을 당시, 교황이 미국대통령과 손을 잡는 걸 거부하는 게 뉴스에 나온 적이 있어요. 뭐 저는 종교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니까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죠. 정치적인 행동을 해서 정치적인 손해를 봤다고 생각했어요. 잘은 모르지만, 종교는 세속적인 것과 거리를 두는 편이 이익이죠. 모든 사람을 신의 어린양으로 대하는 것이 이익이란 이야기에요. 그런데 세속적인 평가에 휘둘려 대통령을 평등하게 대하지 않았죠. 그게 정치적인 행동으로 연결되었어요. 그리고 미국 대통령을 어린양으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를 어린양으로 대하던 위에 있다가 미국 대통령과 대립되는 위치로 내려와버렸죠. 그게 정치적인 손해를 봤다는 거예요. 뭐 과학의 발전으로 종교의 성스러움이 빛을 바래고 있는 시대니 그러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내려왔을 것 같지만요.

 

 

본론으로 들어가죠. 이번 한일갈등 또한 정의가 정치를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의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일본의 행태에 분노하여 감정적인 대응을 하고 있죠. 그런데 그게 결과적으로 분노하게 만든 정치인에게 이익이 되고 있다는 현실은 외면하고 있지요. 아니, 알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분노가 목적인 사람도 있으니까요.

 

저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알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나서는 사람들을 그렇게 나무라고 싶지는 않아요. 자본주의의 침략을 받아 자본과 일본을 미워하게 된 사람, 공산주의의 침략을 받아 공산과 북한을 미워하게 된 사람. 두 부류 다 피해자죠. 굳이 구분하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웬만하면 이해하려고 하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두 차례의 침략 때문에 두 부류의 애국자가 두 부류의 독재자에게 이용당하는 나라니까요.

 

그래도, 가능하면 조금 정치적으로 행동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한국에서 활동 중인 일본 연예인 퇴출을 주장하거나, 일본 물건을 사용한다고 괴롭힘을 가한다거나, 일본과 관계되기만 해도 매국노라고 낙인을 찍는다거나. 너무 지나치죠. 이거 제삼자의 눈으로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다른 나라의 입장에서 이러한 행동에 어떻게 비춰질지는 생각해보셨나요? 우리나라가 당연히 옳기 때문에 당연히 긍정적으로 봐줄 거라 생각하시나요? 권선징악이니까 당연히 선이 승리할거라 생각하시나요? 조금은 정치적으로 행동해줬으면 좋겠어요. 불매운동이나 일본여행반대의 목적이 증오가 아닌 화합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증오라는 부정적인 목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응원할 제삼자는 많기 어려울 거예요. 저야 앞뒤 사정을 아니까 이해하지만, 해외에선 대부분은 이해하기 어렵겠죠. 긍정적인 목적을 위해 행동해야 다수의 지지를 받아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다수의 지지를 받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 그게 정치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사회에 정치가 없는 건 아닌데, 줄잡기 같은 건 평등하질 않으니까요. 아마 평등한 정치는 잘 할 줄 모르는 거 같네요.

 

 

화합을 위해서는 불화의 근원인 과거사 문제를 해결해야겠죠. 그리고 그 문제는 외교관계나 과거사를 정치에 이용하는 사람들이 없어져야 가능하겠죠. 그런데 그게 가능 하려면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 찾아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 자유를 되찾아야 가능할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그들이 정치적 우민화 정책에서 벗어나야만 외교관계건 과거사건 해결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일깨우는 건 우리나라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는 평화시위로 국가지도자를 끌어내린 나라니까요.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한국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을 포용해야겠지요.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일깨워 그들에게 무관심독재자를 끌어내릴 수 있는 힘을 얻게 만들 수 있다면 좋을 거라 생각해요. 시민단체나 환경단체도 힘을 길러 국가의 부도덕한 행위에 제지할 수 있게 되어야 긍정적인 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 거겠죠.

 

 

세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첫째, 품위 있는 불매

 

한국을 좋아하는 일본인을 비난하거나, 일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을 괴롭히거나, 일본과 관계된 사람에게 매국노 낙인을 찍는 행위는 품위 있는 불매라 부르기는 어렵지요. 사드 보복 때 물건 부수고 그런 거 어떤 건지 대충 알잖아요. 품위를 지켜야 제삼자 국가는 물론이고 상대국에게도 어느 정도 이해 받을 수 있는 불매가 될 수 있겠죠. 그게 정치라고 생각해요.

 

둘째, 지지 근거 제거

 

혐한의 가장 큰 지지 근거는 사죄피로라고 하더군요. 언제까지 사죄해야 하는가? 물론 한국의 입장에선 과거 군사독재정부가 피해자와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받아드렸던 것이기 때문에 그걸 이해하기는 어려워요. 오히려 피해자가 받아드려 줄 때까지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걸 지금 일본 정치인이 이용하고 있고요. 정의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피해자가 받아드려 줄 때까지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맞을 거예요. 단순하게 비유하긴 어렵지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되죠. 정의의 관점이라면 그게 맞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정치적으로 바라보면 무작정 사과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사과를 하면 어떤 걸 주겠다는 식의 제스처를 취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피해자가 거래를 할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사죄피로를 이용하는 정치인에게 물 먹이기 위해서는 지지 근거를 박살내야 해요. 요는 진심으로 사과를 한다면 용서해주겠다는 의사를 전달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마지막이다- 라는 제스처를 취해야 된다는 거죠. 그래야 사죄피로를 변명으로 삼지 못하겠죠. 아마 지금 정치인들은 그걸 쉽게 받아드리지 못할 거예요. 이용해먹어야 하니까요. 그러니 그 제스처는 온전하게 일본 국민들에게 어필하게 되겠죠. 청구권 문제도 첫 시작은 우리나라 국민과 일본 기업과의 갈등이니까, 일본 정치권을 상대하되, 일본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가장 강력한 공격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정치인의 가장 큰 약점은 여론이니까요.

 

셋째, Free Japan

 

Free Hong Kong 처럼 Free Japan을 주장하고 다니면 좋을 것 같아요. 정치권에서 그러면 내정간섭이 되겠지만,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응원하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홍콩 시위 응원하는 것에 별 문제 없었잖아요?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설득할 때엔 상대에게 이익이 되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 생각해요. 좋은 말 해주는데 뭐라 할 수도 없고, 그게 틀린 말도 아니니까 반박할 수도 없고, ‘아니, 너희 자유를 응원하는 거야’ 이러는데 어쩌겠어요?

 

 

 

동북아의 발전은 경쟁이 불렀다.

 

시간이 없으니까 빠르게 가죠. 저는 지금까지 유럽의 공동체를 부러워했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경쟁상대가 있는 것도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 같네요. 세상에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 찾아와 소수에게 다수가 이용당하는 일이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민주주의자라면 민족주의자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민주주의자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했으면 좋겠어요. 민주주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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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둘째 셋째가 인공지능이라…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첫째 유전공학 둘째 생명공학 셋째 뇌과학.

 

인공지능의 한계는 누가 봐도 명확합니다. 알파고의 아버지도 결국 알파고에 자아가 없다고 인정했죠. 지능에 자아가 생길 수가 없어요. 자아가 없다면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나긴 어렵다고 생각해요. 변화는 한정적이겠죠. AI발전에 몰두하면 한계에 도달할 때, 유전공학이나 생명공학이나 뇌과학에 투자한 국가에 뒤쳐질지도 모릅니다. 자아의 근원은 세포니까요.

 

하아, 덥고 슬프고 힘들고 귀찮고

 

그럼 또.

 

댓글 : 2 개
잘 읽었습니다. 자야되는데 흥미로워서 쭉 읽었네요 ㅎㅎㅎ 저도 냉동인간이 되어 먼 미래를 보고싶은 생각을 가끔 하고는 합니다 ㅋㅋㅋ 내일 다른 글 읽으러 오겠습니다~!
부담 없이 읽기 편한 문장력과 필력! 깊이 있는 내용! 내용이 많은데도 머리에 쏙 들어오네요.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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