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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소설을 가장한 야구소설] 컨트롤왕 김속구] [좀비소설을 가장한 야구소설] 컨트롤왕 김속구2013.07.25 PM 11:29
약속 장소를 향해 달려가는 두 발이 둥둥 날았다.
수많은 좀비들의 머리를 깨버린 전설의 '돌팔매 부대', K부대의 수장이자 전쟁 후 처음 열린 프로야구 경기에서 대통령을 제치고 첫 시구자로 나선 두 말하면 입아픈 애프터 좀비 시대의 야구 아이콘, '컨트롤왕 김속구'를 인터뷰할 수 있다니!
전쟁 전에는 야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단 필자도 그의 활약에 야구 광팬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전쟁 당시에는 인쇄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매일 매일 있었던 일들을 호외 형식의 찌라시로 뿌릴 수 밖에 없었는데 이들 K부대의 활약상은 무미건조한 종이 쪼가리가 독자들에게 안겨줄 수 있는 유일한 엔터테인먼트이자 삶의 활력소였다.
전날 전투에서 김속구 대위가 좀비 10마리의 머리를 날리기라도 하면
`김속구! 인천 차이나 타운 전투에서 10K!`(10스트라이크)
라는 큼지막한 헤드라인이 실렸다.
그는 일반적인 전쟁 영웅과는 다른 독특한 감성을 국민들에게 안겨주었다.
총으로 좀비 수천마리의 머리를 날린 영웅은 많았지만 돌팔매질로 수천마리를 해치운 김속구는 그야말로 실존하는 '아이언맨'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160킬로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던지던 고교 야구 최대 유망주에서 피치 못할 부상으로 은퇴,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좀비 전쟁을 계기로 다시 화려하게 부활한 그는 연작 [좀비 시대의 생존자들]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삶의 주인공일 것이다.
바다가 보이는 근사한 저택이었다.
과연 유명인사답게 제일 먼저 반겨준 건 검은 양복의 경비 요원들이었다.
널찍한 응접실에서 이제 막 40대를 맞이하는 '캡틴 코리언'이 기다리고 있었다.
좀비 전쟁 시의 고생을 말해주는 깊은 주름이 얼굴 곳곳에 패여 있었지만 사람 좋은 웃음으로 맞이해주었다.
- 선수시절에는 90킬로도 넘게 나갔는데 말이죠.
전쟁 때 먹지를 못해 지금은 75킬로를 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은근히 느껴지는 날카로움은 지금이라도 당장 좀비 수십마리 정도는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먼저 이번에 개막식에서 시구 맡으신 거 축하드립니다.
- 고맙습니다. 섹시한 여자 간호사(좀비 전쟁 때 간호사는 아이돌적인 존재였다.)가 시구하지 않아서 남자들은 실망했겠지만. (웃음) 어쨌든 다시 야구를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새롭게 시작하는데 무려 3년이나 걸렸네요. 국민들이 야구를 통해 조금이나마 괴로운 현실을 잊을 수 있다면 하는 바램입니다.
- 현재 KBO총재이시기도 하니까요.
- 프로야구 홍보 위해서 인터뷰에 응했다고 보셔도 될 겁니다.(웃음)
-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시기적으로도 잘 맞았던 거 같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됐지만 전쟁 끝나고 야구 협회와 각 구단 재정비하는 작업 때문에 눈코 뜰새없이 바빴거든요. 각종 행사다 뭐다 해서 불려가기도 많이 했으니까.?
- 현재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웅이시니까요. 세간에는 대위님께서 경공술로 나뭇잎을 밟으면서 돌을 던져 좀비들의 머리를 깨부쉈다. 혹은 초능력으로 돌을 날려 좀비들을 해치웠다. 라는 소문도 있다는 거 알고 계십니까? (웃음)
- 말도 마십쇼. 무슨 위대한 수령동지도 아니고. (웃음) 좋게 말씀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너무 과장이 들어간 소문은 저도 참 부담스러워요. 정부에서 아이들과 일반 시민들에게 희망을 줘야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부정은 하지 말라고 해서 지금까지 노코멘트로 있었지만 오늘은 가능한 있었던 그대로 말씀드리고 싶네요.
- 잘 부탁드립니다. 먼저 예전 얘기를 해볼까요? 지금은 컨트롤왕으로 유명하시지만 고교 시절에는 성함에 걸맞게 엄청난 파이어 볼러(강속구 투수)로 먼저 알려지셨죠?
- 그 때는 이름값한다는 소리 많이 들었죠. (웃음) 정말 무서울게 없었죠. 기고만장했었고.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150킬로를 넘게 던졌으니까. 신입생 때부터 주전은 물론이고 좀 잘한다는 고교 야구부랑 붙어도 제 공은 거의 맞추지도 못 했죠.
- 실질적인 에이스였군요.
- 안하무인이었지. 감독이고 선배고 말은 귓등으로도 안들었으니까. 나쁜 짓도 많이 했어요. 후배애들도 많이 패고. 여자애들도 많이 쫓아다녔고 해서 세상에 저만 최고라고 생각했지요.
- 영웅의 어두운 과거군요.(웃음) 스카우트 전쟁도 대단했을 거 같은데요.
- 그랬죠. 역대 최대 계약금은 물론이고 공개된 계약금 외에 아파트를 얹어주겠다 라고 한 구단까지 있었으니까요. 메이저리그나 일본에서도 오퍼는 있었고.
- 부상은 프로에 입단하고 생긴 건가요?
- 뭐, 강속구 고교 유망주가 흔히 그러듯이 봉황대기 본선에서 무리하게 던진게 화근이 됐죠. 결승까지 한경기 거의 평균 170개를 던졌으니까. 말그대로 팔빠지게 던진거지. (웃음)
- 프로 무대에서는 어떠셨는지요?
- 프로 무대는 무슨... 프로에서의 활약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되요. 입단하고 나서 제일 처음 한 일은 재활이었어요. 이미 어깨와 팔꿈치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구단 측에서 배려를 해줬던 거죠. 전반기는 등판 못 해도 되니까 휴식과 치료에 전념하자고. 하지만 그 때는 저도 빨리 성공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고여전히 구속은 150 후반을 찍었으니까 던질 수 있다고 고집을 피웠죠. 마음 한 켠에서는 고장이 날 거 같다는 불안감이 있었음에도요. 그 때 배려해주셨던 구단 프런트 분들께는 참 죄송하죠.
- 입단하시고 언제쯤 처음 부상을 당하신 건가요?
- 시즌 시작하고 두 달쯤 지나서인가?등판하게 해달라고 떼를 썼죠.원래 전반기 내내 치료받는 걸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걸 무시한 거에요. 실제로 통증같은 건 없었으니까요. 보통 신인은 1군 경기에서 처음부터 선발로 등판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전 처음부터 선발로 뛰었죠. 제 입으로 이런 말씀드리기는 쑥쓰럽지만 그만큼 구단이나 언론에서 기대가 컸었던 거겠죠. 첫 3경기에는 괜찮았어요. 구속은 여전히 평균 153킬로 가까이 나왔고 평균 6~7이닝 던져서 방어율도 2점대가 나왔으니까요. 그 때는 건방지게도 '헹, 프로란게 이정도야?'라고 생각했었지요. 고등학생보다 잘 친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제가 더 낫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우직'하고 어깨가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 시합 중이었나요?
- 우습게도 시합도 아니고 네 번째 등판하려고 연습 투구를 하던 중이었어요. 하기사 시합 때 팬들 앞에서 부상 안 당해서 다행이었어요. 아무도 모르게 다쳐서 덜 쪽팔렸거든.(웃음) 처음에는 별거 아닌 부상으로 생각했는데 날이 갈수록 팔을 어깨 위로 들지도 못 할 정도로 통증이 심해졌어요. 결국 처음 언론에 경미한 부상이라 금방 돌아올 것이다 라고 밝혔던 구단에서도 결국 시즌을 접어야 한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죠. 6개월만 얌전히 쉬면 되었을 것을 결국 1년 이상을 다 날리고만 셈이죠.
- 수술은 어땠습니까?
- 잘 됐다면 제가 여기 있진 않겠죠. (웃음) 첫 수술 후 재활에 1년 6개월이 걸렸어요. 그리고 2군에서 실전 감각을 익히고 있었는데 또 부상을 당하고야 말았죠. 이번엔 팔꿈치였어요. 토미 존 수술(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고 또 1년 6개월이 날아갔죠. 아무 것도 못하고 3년이 날아간 거에요. 그리고 볼을 던졌는데 예전같은 속도가 나오지 않았죠.
- 보통 토미 존 수술을 받으면 구속이 더 증가하는 케이스가 많지 않나요? 전쟁 전 오승환 선수나 류현진 선수 같은 경우를 봐도...
-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죠. 아마 재활치료를 제대로 받지 않은 탓도 있을거에요. 그 때의 전 재활치료를 견딜 인내심조차 없는 놈이었으니까요. 항상 의사 선생님 눈을 피해 술마시기 일쑤였죠.
- 구속이 안나와서 쇼크였겠군요.
- 컨트롤을 포기하고 있는 힘껏 던졌는데도 140 밖에 안 나왔죠. 그렇다고 변화구가 좋은 투수도 아니었으니까 펑펑 얻어터졌죠. 2군 경기인가 그랬는데 상대편에 제가 고등학교 때 자주 맞붙었던 다른 학교 선배가 있었죠. 그 선배한테만 홈런 포함 3안타를 맞았어요. 엄청난 충격이었죠. 그 선배한테는 죄송하지만 고등학교 때도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선수였고 학생 때는 저한테 안타 하나도 뽑아내지 못한 선수였거든요. 그 때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 아직 구단에 소속되어 있을 때 투구 성향을 바꿔보실 생각은 안 하셨었나요? 변화구 위주의 피칭이라던가.
- 그 때는 아직 어렸으니까 150킬로를 못 던지면 투수가 아니라고 생각했었죠. 솔직히 기교파 투수로 바꾸려는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에요. 코치들도 많이 도와 줬었고. 웬만한 변화구 그립은 다 잡을 수 있었지. 그러자 이젠 타자들이 직구만 노려치는 겁니다. 변화구가 아무리 각이 커도 직구가 밋밋했으니까 도무지 상대를 할 수가 없었죠. 그 때는 아직 컨트롤이 지금만큼 좋지도 않았고. 아마 할 수만 있었다면 원포인트 릴리프로 선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을 거에요. 하지만 그 놈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어요. 그 때부터 매일 술만 펐죠.구단의 인내심은 슬슬 바닥나기 시작했고 팬들도 떠나가고 역대 최고의 황금팔에서 폐인으로 떨어지는 속도는 정말... 무시무시하더라고요.
- 야구 얘기가 길었네요. 이제 좀비 얘기를 해볼까하는데요. 아마 제가 알기로 은퇴하시고 2년쯤 지나서 좀비가 나타났다고?
- 그랬을겁니다. 매일 작은 원룸에 틀어 박혀서 술마시고 있었죠. 부모님도 절 포기하시고 계약금만 조금씩 까먹고 있는 생활이었죠. 하루는 밤에 집 근처 자주 가는 슈퍼를 갔는데 문은 열려 있고 불은 꺼져 있었죠. 불러도 대답이 없었어요. 명절 때도 장사하는 양반인데 이상하다 싶었죠. 그래도 술은 마셔야 했으니까 술 꺼내고 돈은 카운터 위에 놔뒀죠. 메모 하나 놔두고. (워낙 단골이었으니까요.) 알아서 봉지에 술 담고 나오는데 누가 그르렁 하는 소리를 내면서 들어오더군요. 그 슈퍼 주인장이었어요.
- 좀비가 된 거군요.
- 처음에는 장난인줄 알았어요. 점잖으신 분이 할로윈도 아닌데 웬 좀비 흉내? 싱거운 양반이라고 생각했죠.
- 보통 처음 좀비를 봤을 때 영문을 모르고 당하는 겨우도 많았는데 운이 좋으셨군요.
- 그 양반이 그렇게 운동 신경이 좋으신 분은 아니었어서.(웃음) 처음에는 몇 번 제 팔을 물려고 했어요. 장난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저도 왜 이러시냐고 한 두 번 밀쳤죠. 그러자 입에서 거품 비슷한 침을 흘리면서 달겨드는 거에요. 전 그 때서야 이 양반이 정말 미쳤구나 하고 생각했었죠.결국에는 저도 열을 받아서 그만 맥주병을 그 양반 머리로 던지고 말았어요. 퍽! 소리가 들리더니 머리에서 검붉은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죠.
- 제일 첫 좀비는 돌이 아니라 맥주병으로 잡으셨군요. (웃음)
- 지금이야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만 그 때는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었죠. 사람 죽였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막장인생, 퇴물 투수가 사람까지 죽이다. 신문 1면이 눈에 그려지지 않습니까? 정말 눈 앞이 캄캄해진다는 느낌을 알겠더라고요. 없는 정신에도 119를 눌렀죠. 안 받더라고요. 112도 안 나오고. 아니 구급차도 경찰도 왜 안 받는거야! 하고 화낼 정신도 없었어요. 근처 파출소로 무작정 달렸죠. 그런데 거기서도 순경들이 퍼런 피부에 침을 질질 흘리는 주정뱅이를 제압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더라고요. 그제서야 상황이 파악되더군요.제가 집안에 틀어박혀서 티비도 안보고 술만 퍼마셔서 소식이 늦었던 거죠. 이미 세상은 바껴 있었던 거에요.
- 상황을 파악하시고는 어떻게 하셨나요?
- 제일 먼저 부모님 생각이 나더군요. 부모님 집으로 달려가서 문을 막 두드렸어요. 반응이 없었죠. 담을 넘어서 창문으로 안방을 봤는데 이미 좀비로 변한 두분이 방안을 쉬지 않고 돌아 걸어 다니고 계셨어요. 마당에 주저 앉아서 한나절 울었을 거에요. 너무 슬펐고 죄송했죠.
- 유감입니다.
- 그런 아픔을 겪은 사람이 저만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생각해보니 저대로 두면 다른 놈들이 부모님 몸에 손을 댈 거 같더라고요. 그건 정말 싫었어요. 한참 고민하다 결국에 제가 직접 부모님 몸에 손을 대야 했을 때는 정말... 제 자신이 저주스럽더라고요.
- 그 다음 부터는 어떻게 하셨나요? 피난을 가셨나요? 아니면 도심 어딘가에 숨으셔서?
- 피난을 가긴 갔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배를 타려고 인천이나 부산 같은 항구가 있는 곳으로 가진 않았어요.
- 그렇다면?
- 산으로 갔어요. 그 때 왜 산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살고 싶은 생각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었던거 같아요. 아무도 없는 곳에 틀어 박혀서 그냥 조용히 죽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었죠. 좀비고 뭐고 간에 그냥 이 세상이 싫었거든요.
- 그렇다면 혹시...
- 아, 자살 시도라도 했냐고요? 했었죠, 몇 번. 그런데 나무에 목을 매니까 가지가 부러지고 폭포 밑으로 몸을 던지니까 용오름이 내 몸을 끌어 올립디다. 흘러 가는 강물을 보면서 생각했죠. 아... 인생 참 뭐같구나. 마음대로 죽지도 못 하고. 그러다가 신께서 어떤 메시지를 내려 주셨죠. 아니 정확히는 좀비를 내려 주셨지만.
- 좀비를 내려 주셨다고요?
- 네, 제가 신세 한탄하면서 강에 조약돌이나 던지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나길래 돌아 봤더니 좀비였어요. 그 깊은 산골까지 어떻게 들어 왔나 모르겠는데 한 마리가 터덜터덜 걸어 오고 있더라고요. 주변에 후려칠 만한게 아무 것도 없어서 돌을 던졌어요. 그래도 명색이 투수 였는데 저 놈 머리 하나 못 맞히랴 했는데 영 안 맞더라고요. 옛날 버릇으로 쎄게만 던지니 뭐 맞겠습니까? 놈은 점점 다가오고, 이러다가는 정말 죽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한 편으로는 또 이런 생각도 드는 거에요. '이미 죽기로 마음 먹은 놈이 죽은 게 뭐가 두렵다고.' 그런 생각이 미치자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뭔가 마음이 홀가분해지더라고요. 그제서야 뭔가 알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몸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던졌죠. 좀비의 머리에 정확히 꽂혔어요. 제가 선수 시절에도 못 던졌던 완벽한 컨트롤이었습니다. 그건 정말... 제가 알지 못했던 미지의 존재가 내 몸에 들어온 느낌이었어요.
- 이른 바 신내림을 받은 거로군요.
- 과장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랬어요. 제 일화를 전설처럼 부풀려서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제가 처음부터 부모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산에서 지옥훈련을 통해 돌팔매질을 배웠다고 말하지만 그건 순전히 우연이었죠. 그 전에 전 절망에 빠져 있었지 부모님의 복수를 대신 갚아 주겠다 라는 그런 영화에나 나올 법한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있었어요. (제 팬들은 실망하겠죠. 웃음) 하지만 그 좀비놈을 통해서 제가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건 사실이에요. 훈련은 그 다음에 이루어 졌죠.
- 독자들이 그 훈련법을 매우 궁금해 하던데요. 어떤 훈련을 하셨나요?
- 소문처럼 나뭇잎 타는 경공술을 수련한 건 아니고요. 볼 던지는 연습을 한거죠.. 아, 돌로 나뭇잎을 맞추는 연습은 했으니까 아예 상관없지는 않겠네요. (웃음) 그 전처럼 속구를 던지는 연습보다는 핀포인트로 맞추는 연습을 한거죠. 좀비에게 던졌던 그 때의 느낌을 기억하면서 던지려고 노력했어요. 그제서야 전에 코치들이 '하체를 이용해서 던져라.'라는 말을 알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뭐랄까. 좀 더 자연스럽게 던진다는 느낌? 몸에 부담도 덜했고요.
- 그 때부터 좀비에게 던지는 걸 상정하고 던지신 건가요?
- 아뇨. 그렇진 않아요. 그저 좀비에게 던졌을 때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그냥 던졌던 거 같아요. 오랜만에 다시 고교 시절의 열정이 돌아온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요. 뭔가 투구할 때 새로운 경지에 이른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걸 몸에 붙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던질 때는 죽고 싶다 같은 잡생각도 안 들었었고요.
- 부상당했던 어깨와 팔꿈치는 괜찮으셨나요?
- 네. 술은 마셨지만 2년동안 안 쓴 탓인지 쌩쌩하더라고요. 스피드 건이 없어서 찍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최고 140 이상은 나왔다고 생각해요. 다만 체력적인 부분에서 몸이 많이 부실해졌으니까 산 타면서 체력 훈련을 했죠.
- 대위님께서 납득하실 정도의 날카로운 컨트롤이 되기 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셨나요? 그리고 특이한 훈련법같은 것도 소개해 주신다면?
- 글쎄요. 달력이 없어서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한 6개월 정도? 는 산에 틀어 박혀서 수염도 안 깎고 계속 돌만 던졌죠. 훈련법은 뭐 특별할 것도 없는데요. 산에 있는 것들 맞추는 거죠. 처음에는 나무 기둥부터 시작해서 나뭇가지, 나뭇잎, 작은 돌... 점점 작은 걸 맞췄죠. 이제 멈춰 있는 건 대부분 맞출 정도가 되자 움직이는 걸 맞춰보고 싶더라고요. 식량이 떨어져서 배도 고팠고. (웃음) 그래서 토끼나 다람쥐 같은 걸 노렸죠. 처음에는 허탕도 많이 쳤어요. 아 고놈들이 어찌나 빠르던지. 움직이는 걸 맞추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것도 쫓아 가면서 던져야 하니까. 나중에 깨달았지만 그 사냥이 좀비놈들 잡을 때 엄청나게 도움이 됐었어요. 운 좋을 때는 고라니 같은 것도 잡고요. 가끔은 물고기도 돌 던져서 잡기도 하고. 새도 잡고.?
- 새도 잡으셨다고요? 놀라운데요.
- 아... (한숨) 새는 진짜 어려워요. 제가 치킨을 좋아해서(웃음) 꼭 한 번 쯤은 새를 잡아 먹고 싶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요. 날아가는 새들은 너무 멀고 가지 위에 앉아 있는 새들은 눈치가 너무 빨라서 돌이 날아가는 순간에 휙하고 날아 가버리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한게 앉아 있는 새가 날아갈 방향을 예측해서 던지는 거에요. 그럼 새가 날아가려고 도약하다가 공중에서 돌을 맞는 거죠. 그렇다고 100퍼센트 다 되는 방법도 아닙니다만 저 나름대로 터득한 방법이에요.
- 치킨 먹기 정말 힘들군요. (웃음) 다른 에피소드 같은 건 없었습니까? 혹시나 다른 사람을 만났다던지?
-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은 없고 가끔 좀비놈들을 만난 적은 있죠. 물론 길 잃은 좀비들이 산에 올라오는 경우도 있지만 저도 가끔 아무도 없는 읍내에 내려가거나 했거든요. 혹시라도 있을 식량이나 생필품을 찾으러. 그 중에서도 라이터나 휴대용 가스렌지를 찾을 수 있으면 정말 좋았죠. 산에서는 식량 조달은 할 수 있어도 불피우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거든요. 당시에 읍내는 다 대피해서 거의 유령 도시 상태 였는데 가끔 4~5마리쯤 떼를 지어 몰려 다니는 좀비들도 나오곤 했어요. 그 때만 해도 좀비를 잡아야 겠다는 생각은 안 했었고 좀비 만나서 살아야 겠다는 생각에 놈들 머리에 돌을 던졌는데 제 생각 이상으로 효과가 있는 거에요. 좀비가 토끼나 고라니처럼 빠르진 않았으니까 맞추는 건 문제도 아녔죠. 물론 산 속과 읍내는 지형이 다르니까 골목 구석에 몰리거나 하는 고생은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 자신이 붙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깨달은 거에요. '아, 내가 야구로는 실패했을지 모르겠지만 좀비놈들을 다 해치울 수는 있겠구나.' 하고. 그 때부터 좀비 놈들의 대가리가 스트라이크 존으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웃음) 그리고 산을 내려갈 준비를 했죠.
- 드디어 하산을 하신 거군요. 서울을 가시기 전에 춘천에 먼저 들리셨죠?
- 그렇죠. 가는 길이었으니까. 물론 산골에서 춘천까지 가는 중간에도 좀비들은 계속 나왔어요. 조금씩 실전 연습을 하면서 제가 이미지 트레이닝 했던 것과 실제 상황과의 갭을 줄여나갔죠. 읍내 작은 마을도 그렇지만 춘천 시내 같은 도심은 정말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강이나 계곡에서는 작은 조약돌을 구하기가 쉬웠지만 콘크리트 바닥에서 던질 걸 찾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어요. 물론 돌은 여유있게 갖고 다니긴 했지만 좀비가 너무 많을 경우 돌이 떨어질 때가 있었죠. 그럴 땐 주변에 있는 것 중에서 제일 단단한 것부터 던지는 거에요. 병, 캔, 벽돌, 아이폰, 갤럭시...(피난가거나 좀비가 되면서 핸드폰 떨어뜨린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스마트폰은 정말 사람들의 '머리 속에 박힌' 제품이었어요. 웃음) 제가 군대에 있었을 때 부하들에게 강조한 것도 실전 시 생길 수 있는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법이었어요. 조금 있다 다시 설명드리겠지만 부하들이 그걸 잘 지켜줘서 우리 부대는 전 국군을 통틀어 가장 생존율이 높은 부대가 되었죠.
- 그렇군요. 그 외에 또 다른 점은 없었습니까?
- 건물들을 잘 이용했어야 했죠. 의외로 도심은 시야를 확보하기 정말 힘든 곳이에요. 산에서는 탁 트여 있는 곳이고 좀비 역시 소리를 내니까 어디에 뭐가 있는지 보기 좋죠. 하지만 건물이 빽빽한 도시 한복판은 코너를 돌면 뭐가 나올지, 한 층 올라가면 또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방심해서는 안됐죠. 또 좀비놈들이 건드린 자동차 경보음 때문에 좀비의 울음소리가 안 들릴 때도 있고요. 높은 곳에서 돌을 던지면 안전할 거 같아 건물 옥상에 함부러 올라갔다가 계단을 타고 좀비들이 올라오는 바람에 큰일날 뻔도 했죠. 뭐 그래도 제 생각에는 부지런히 계속 움직이면서 좀비들을 사냥하는게 제일 좋은 방법인 거 같아요.
- 계속 좀비를 잡으시면서 서울을 거쳐 인천까지 가셨죠?
- 중간에 만난 몇 안되는 생존자들에게서 사람들이 좀비를 피해 바다로 피난했다는 소문을 들었으니까요. 서울에 남아 있더라도 좀비들을 잡을 자신은 있었지만 식량 문제도 있었고 그걸 몇년동안 계속 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으니까요.
- 그 때 쯤부터 였을 겁니다. 생존자들 캠프에서 대위님의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게.
- 아무래도 제가 구해준 사람들 중에 그런 캠프까지 당도해서 제 얘기를 한 사람이 있었던 거 같아요. 전 그런 사실은 전혀 모르고 계속 서로 향하고 있었죠.
- 그 때 죽인 좀비 수가 정확히 몇이나 되는지 기억하십니까?
- 글쎄... 하루에 평균적으로 적으면 3마리 정도에서 많으면 2~30마리? 가끔 아예 없는 날도 있었고요. 가장 많은 날은 제 기억으로 76마리인가? 였던 거 같아요. (목격자들의 증언 및 좀비 사체를 토대로 파악한 숫자에 의하면 김속구가 춘천에서 인천까지 오면서 죽인 좀비의 수는 약 860마리를 넘어서는 것으로 추정한다.)
- 군대는 어떻게 들어가게 된 건가요?
- 그것도 상당한 우연이었어요. 제가 인천 시내를 들어와서 해안 쪽으로 계속 가고 있는데 어느 날 저 멀리서 총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나중에 알았는데 제가 인천에 도착했을 때가 무슨 창독트린? 인가 하는 작전을 시행해서 바닷가에서부터 도심 쪽으로 좀비 놈들에게 반격을 가하는 시기와 맞아 떨어진 거에요. 저도 근처 건물 옥상에서 전투 장면을 몇 번 지켜 봤죠. 그 대좀비 맞춤 전략이라고 하는게 확실히 효과는 있지만 가끔 실패를 하기도 했어요. 100퍼센트 성공을 보장하는 전략이란 건 세상에 없잖아요? 전열이 무너지거나 총알이 바닥나거나 하는 경우가 생겼죠. 그럴 때 몇몇 병사들을 구해줬어요. 그것 때문에 군대에서도 제 얘기가 전해지기 시작했죠.
- 하지만 처음에는 군 수뇌부에서 대위님의 입대를 인정해주지 않았었죠.?
- 이해는 해요. 왜냐하면 병사가 열거할 수 있는 수많은 특기들 중 돌팔매질은 없었거든요.(웃음) 총을 잘 쏘는 것도 아니고 총검술을 잘 해서 백병전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간부들은 총을 쏘는 부대에 제가 들어간다면 부대의 조화가 깨어지는 걸 염려했었죠. 그들에게 전 그저 '좀비를 잘 잡고 돌 잘 던지는 민간인'에 불과했어요. 그건 저도 솔직히 같은 생각이었고요. 그래서 전 저 같이 잘 던지는 사람들을 모아서 따로 소규모 부대를 만드는 걸 제의했어요.
- 그리고 군에서는 그것도 반대를 했었죠.
- 말도 안된다고 했죠. 군대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도 유분수라고. 제가 '아무런 지원 안 해줘도 된다. 훈련도 제가 시키고 장비나 무기도 공급해줄 필요가 없다.'라고 설득했는데도 도통 말을 듣지 않더라고요. 좀비가 대한민국을 뒤덮고 세상이 멸망할 지경이었어도 여전히 군에게는 체면과 위신이 더 중요했던 거였어요.
- 제가 알기로는 그러고도 부대를 창설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고 알고 있습니다.
- 몇 개월 더 걸렸죠.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진 않았어요. 월미도에 있는 생존자 캠프에 지내면서 거기 있는 민간인들에게 던지는 법을 가르쳤죠. 의외로 재능이 있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육안으로 봤을 때 얼추 135킬로 이상 나오는 친구도 있었고. 제 소문을 듣고 배우겠다고 자청한 친구들도 있었고 전쟁 전에 사회인 야구나 고등학교에서 야구를 했었던 친구도 있었죠. 그렇게 묵묵히 연습하고 있으니 기회가 오더군요.
- 그 유명한 '월미도 대첩' 이군요.
- 네, 어느 날 밤 군의 방어망을 뚫고 한 무리의 좀비 떼들이 생존자 캠프로 들이닥친 거에요.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바다에서도 평소보다 많은 숫자들의 좀비들이 올라오고 있었죠. 군대는 방어선을 재구축하느라고 빨리 병력을 보낼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죠. 우리가 뭔가 해야겠다고 느꼈어요. 당시에 제가 가르친 친구들이 10명 정도 있었죠. 하지만 연습과 실전은 다른 것이었고 그 실전은 그 친구들에게 너무 큰 것이었어요. 저도 첫 실전에서는 실수를 많이 했었죠. 그 친구들 중에 몇 명은 입으로는 자신 있다고 말하면서도 손이 벌벌 떨리고 있는 게 보였어요. 재빨리 판단했어야 했죠. 바로 실전에 투입해도 괜찮을 친구들 3명 정도와 저를 합해서 정예군을 만들고 나머지는 등대나 망루 같은 높은 곳에서 엄호를 하라고 지시했어요. 그리고 무조건 2명 이상이 같이 다니면서 서로의 후방을 책임져 주기로 했죠. 밤부터 새벽까지 불도 별로 없는 어두운 시야 속에서도 정말 정신없이 돌을 던졌던 거 같아요. 새벽이 오고 눈이 적응되자 주변이 온통 좀비 시체들의 밭이더군요.
- 얼마나 죽였는지 기억하시나요?
- 글쎄요? 300? 400? (추후 확인된 좀비 사체의 숫자는 420마리였다.) 캠프의 피난민들 중에서 피해자가 생긴 건 정말 안된 일이지만 제 부대원 중에서 전사자가 없었다는 건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죠. 그 이후로 군대에서도 'K부대' 창설이 공론화가 되었구요.
- 엄청난 사건이었죠. 저도 그 때 그 소식을 실은 호외를 인쇄했지만 정말 쇼킹했었습니다. 군대도 아니고 민간인들이 그 많은 좀비를 잡다니.
- 아 각 신문사들의 힘이 컸죠. 그걸 본 국민들이 우리 부대를 인정해줘야 한다는 요청을 군 당국에 많이 했었고요. 그 정도로 국민들에게 이미지가 좋아지니 군에서의 태도가 싹 바뀌더라고요. 언제 반대했었냐는 듯이. 바로 다음 날 제 면전에 소리치던 그 양반이랑 제가 어깨동무를 하면서 K부대 창설 기자회견을 했죠.
- 이하 [ ?] 안의 내용은 군 당국의 사후 검열에 따라 편집 된 미공개 인터뷰 내용 -
[- 나중에 알았는데 그 사건이 없었어도 군에서 저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고 하더군요. 전에 반대한 것 때문에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고심하고 있던 찰나에 국민 여론이 형성되니까 거기에 편승해 모르는 척 K부대를 인정한 것이지요.
- 군에서 사전에 도움을 요청할 계획이었다고요?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 자기들 사정이 아쉬워졌거든요. 무슨 말인가 하면 처음 반대했을 때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물자가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거에요. 좀비들은 끊이지 않고 몰려오지, 좀비들에게 효과있는 소총과 총알의 보급에는 한계가 있지, 생산 기지에서의 무기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고 있는 실정이었죠. 그에 반면 우리 K부대는 상당히 경제적이었죠. 무기도 자연에서 얻고 좀비 머리에 박힌 돌도 빼서 새로 쓸 수 있으니까. (웃음) 한 푼이 아쉬운 군에서 저희를 이용할 필요성이 생긴거죠. 웃긴 건 각 가정의 쇠붙이란 쇠붙이는 다 끌어모아서 총알을 만들면서 정작 군 간부들은 자기들 스포츠카 같은 사적 재산은 꽁꽁 숨겨 놓고 있었죠. 기름도 못 구하는 주제에 말입니다.]
- K부대가 창설되고 첫 실전까지 얼마나 걸렸나요? 그리고 훈련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 한 2~3개월? 생각보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그동안 훈련시키면서 노하우도 쌓였고 다른 부대 군인 중에서도 어깨 좋은 지원병 몇 명을 받았는데 빨리 적응하더군요. 하기사 잘 달리고 잘 던지기만 하면 되니까. 훈련은 군부대와 산을 왔다 갔다 하면서 했어요. 기본적인 멀리 던지기 훈련, 핀 포인트로 맞추는 훈련, 움직이는 물체 맞히는 훈련 등을 했죠. 제가 했던 것 처럼 사냥도 하고. 그래도 보통 시가전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서 시가지 전투 훈련 구역에서 많이 훈련을 했어요. 각 상황에 맞는 대형이나 전술 훈련은 제가 잘 모르니까 군의 전투 교관과 상의해서 매뉴얼을 만들었고요.
- 다른 부대에서의 반발은 없었나요? 차별을 받거나 하는 일은?
- 처음에는 비웃는 친구들도 많았죠. 특히 간부들이 심했는데 저희들을 '21세기의 구석기인들'이라고 불렀죠. 하지만 막상 전투가 시작되고 K부대가 몇 번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주는 일이 있자 조금씩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어요. 말 그대로 구석기인에서 구세주 다윗을 보는 눈으로 바뀌었죠. (웃음)
- K부대의 복장은 좀 특이하다고 들었습니다.
- 네, 저희는 군화가 아니라 런닝화를 신어요. 잘 달려야 하니까. 시가전을 할 때마다 항상 마트나 신발파는 가게에서 런닝화를 보충하죠. 그리고 나머지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장비와 돌을 담을 작은 스포츠백 하나만 있으면 되요. 뭐 겉모습만 보면 말 그대로 외인구단이네요. (웃음)
- K부대의 경우 다양한 작전에 투입됐다고 들었습니다.
- 그렇죠. 저희는 소규모이고 일반 보병들 중에서도 스피드가 빠른 편이니까 다양한 임무를 맡았죠. 정찰부터 시작해서 좀비 떼들의 일부를 끌어들이는 일, 주력 부대의 엄호, 소규모의 좀비 떼를 처리하는 단독 임무까지. 부대원들이 총 21명이었는데 7명 씩 3개조로 운영을 했죠. (부대원들 숫자가 생각보다 적은가요? 130킬로 이상으로 정확히 던질 수 있는 친구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까요.)
- 다른 부대와 합동 작전을 펼 때 트러블은 없었나요?
- 솔직히 처음에는 많이 걱정을 했었어요. 호흡이 맞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지만 대부분의 작전에서 K부대에게 맡겨진 임무는 엄호 및 지원이었죠. 즉, 그 부대 안에 섞여 돌을 던지거나 하지는 않았던 거에요. 고정되어 있는 상태라면 돌보다는 확실히 총이 더 빠르니까. (웃음) 주력 부대가 사각형 꼴로 대형을 만들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좀비들을 퇴치하는 동안 저희들은 주변 건물 옥상이나 창가에서 계속 엄호를 했어요. 좀비들은 사람들이 많은 쪽으로 몰리는 경향이 있으니까 K부대가 위험에 노출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죠. 그리고 본 부대가 작전 후 이탈하거나 혹은 총알이 떨어지는 등의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K부대는 엄호 및 이탈 경로를 확보해주는 임무를 했죠. 뭐 그런 점에서는 상당히 궁합이 잘 맞았어요. 직접 전투에 참가한 다른 부대 간부나 병사들도 그 점은 인정을 해주고 있고요.
- 단독 작전 때는 어땠나요?
- 음, 보통 정찰 임무 시에는 좀비들의 수를 파악하는 게 목적이라서 스스로를 보호하는데 가장 중점을 두었죠. 그 외에는 소규모 좀비들을 잡는 임무였는데 처음에는 엄호 임무가 많았지만 물자가 부족해지자 점점 단독 임무도 많아졌죠.(물자가 보급될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하니까) 저도 그렇고 부대원들도 가장 신나했을 때가 소규모의 좀비 떼들을 척살할 때 였던거 같아요. 그 때는 도심의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상당히 자유스럽게 작전을 짰죠. 2~3명이 조를 이뤄서 서로 서로 너무 떨어지지도 않고 너무 붙어있지도 않은 거리 내에서 계속 이동하면서 좀비들을 사냥하는 거에요. 정말 신출귀몰이라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도로에서 한 마리 잡고 어느 순간에 건물 3층 창에서 또 한 마리 잡고. 부대원 중에 변화구 잘 던지는 친구가 있었는데 커브를 던져서 코너 뒤쪽에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좀비를 잡더라니까요. (이 친구는 전역하고 지금은 한화의 제1선발투수죠. 웃음) 제일 재미있을 때가 공원이나 공장 지대에 있는 철조망에 걸린 좀비들을 잡는 일이었죠. 좀비들이 우리를 잡을려고 철조망 앞에 모여 있고 우리들은 저 뒤에서 철조망의 그 좁은 틈 사이로 돌을 던져서 한마리 씩 쓰러뜨렸죠. 이렇게 말하면 너무 당나라 군대 같은가요? 하지만 이런 경우는 실제론 별로 없었고 대부분 진지하게 작전만 수행하고 이탈하는 게릴라 전이 많았어요. 물론 가끔 실수도 많이 했죠.
- 이를테면?
- 3명의 정찰 부대가 좀비의 숫자를 파악하고 돌아왔는데 숫자가 11마리 밖에 안 됐어요. 그 정도면 우리 부대에서 처리하기 충분한 숫자니까 본부에 보고하고 저희끼리 처리하려고 했죠. 처음에는 정말 11마리만 있었어요. 그런데 5마리 쯤 처리했을 때인가? 주변 건물과 지하철 입구에서 수백마리의 좀비들이 튀어 나오는 거에요. 정찰이 부족했던 것도 있었고 지하철 입구가 무언가에 막혀 있었는데 그게 재수없게 무너지는 바람에 지하철 역에서 좀비가 된 사람들이 갑자기 쏟아져 나온 거였어요.
- 엄청난 위기였군요.
- 대핀치였죠. 광장 같은 곳이었는데 우리 팀 7명은 수 백 마리의 좀비 떼에 둘러 쌓이게 됐죠. 많은 경험을 했지만 그 때는 정말...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해요. 가끔 꿈에도 나오죠. 어쩔 수 없이 가장 얇아 보이는 좀비 층을 뚫고 갈 수 밖에 없었어요. 제가 앞장 섰죠. 달리면서 길을 뚫었어요. 너무 가까이까지 온 놈들은 군용 칼을 머리에 쑤셔 넣었고요. 하지만 부대원 중 몇 명은 운이 없었죠. 실전에서 그렇게 까지 좀비 놈들과 접근해서 싸운 적은 없었으니까 그에 대한 대비가 되지 않았던 거에요. 거기서 제 부대원 세 명이 목숨을 잃었죠.
- K부대에서 최고로 많은 인명 피해가 일어난 사건이었죠. 군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 인종과 계급을 막론하고 생명을 잃는다는 건 정말 슬픈 일입니다. 며칠 동안 밥도 못 먹고 작전도 수행 못 할 정도로 괴로웠죠. 저와 친했던 다른 부대 간부들이 많이 위로를 해주었어요. 물론 처음부터 계속 우리 부대에 비판적인 개자식들은 여전히 비꼬는 말투로 얘기했지만. 전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죠. 저희 부대는 다른 부대보다 생존자 수가 많은 편이었거든요.
- 전쟁 후반 인간의 군대가 좀비의 군대에 역전했을 때를 여쭤보고 싶은데요. 언제 쯤 인류의 승리를 확신하게 되셨습니까?
- 뭐, 인천과 서울을 수복했을 때만 하더라도 아직 대한민국에 남은 땅이 많으니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밀고 밀고 하다 보니 어느 새 강원도까지 가게 되었죠. 제가 예전에 산 속에서 수련하던 그 곳까지 말입니다. 그 때의 계곡을 바라보면서 실감을 했죠. '아, 내가 먼 길을 돌아서 다시 이 곳까지 왔구나. 그동안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구나.' 하고.
- 긴 인터뷰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 글쎄요.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것 만큼 전 위대한 사람은 아닙니다. 바닥까지 내려 갔었고 거기서 엉금엉금 기어 올라온 것 뿐이라고 생각해요. 운도 좋았고요. 생각해보면 인생을 완벽하게 살려고 하는 건 너무 큰 욕심인 거 같아요. 제가 선수 시절 통틀어서 던진 최고 시속이 159킬로에요. 미국 기준으로 99마일이죠. 꿈의 160킬로, 100마일에 1킬로 모자란 속도죠. 하루는 160킬로를 던질 수 없을까 하고 스피드 건을 놓고 맘먹고 던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수백구를 던져도 도무지 159킬로 이상은 안나오는 거에요.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그 때의 제 인생에도 1% 모자란 부분이 있었던 거죠. 그 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어요. 어떻게 보면 굳이 100마일을 던질 필요도 없었는데. 조금 모자라도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었는데 그 때는 그걸 몰랐었어요. 어깨 무너지고 폐인되고 좀비 잡고 하는 긴 여정을 거쳐서 전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잘 되지 않더라도 그걸 실패한 인생이라고 바로 단정짓지 마셨으면 해요. 처음 바랬던 그 인생이 여러분 인생에서 반드시 정답은 아닐 수도 있죠. 넓게 보시길. 160킬로 공으로 전력투구 하다가도 가끔은 100킬로짜리 느린 커브 공을 던져야 하는 게 바로 인생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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