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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이 사람이 궁금하다... 일본 우익의 거물, 코다마 요시오(?玉?士夫)2015.08.19 PM 07:30
박정희 정권과 일본 우익, 야쿠자들 간의 유착 관계에 대해 알아 보다 이 양반 이름이 자주 거론되길래, 일본 위키를 통해 찾아봤더니 이딴 인간이 튀어나왔네요. 출처는 일본 위키피디아입니다.
코다마 요시요(1911~1984).
일본의 우익 운동가. CIA 에이전트였다고 한다. 폭력단인 킨세이카이(錦政?)의 고문.「정재계의 흑막」「픽서(fixer)」라 불리웠다. 1960년에 생전장(生前葬: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신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을 치렀다. 코노 이치로(河野一?), 오오노 반보쿠(大野伴睦) 같은 거물 정치가가 코다마를 위해 장례식에 참여해 향을 올렸다. 셋째 아들은 TBS 서비스 사장인 코다마 모리히로(?玉守弘).
승공우익(勝共右翼)
호적상으로는 후쿠시마 현(福島?) 아다치 군(安達郡) 모토미야 쵸(本宮町: 현재의 모토미야 시) 츄죠 45번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부친인 유시로(酉四?)의 옛 성(姓)은 야마다(山田)라 하며, 선조들은 대대로 닛폰마츠한(二本松藩)의 한시(藩士)였다. 조부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닛폰마츠의 부산지(副?事)가 되었는데, 부친의 시대 때 닛폰마츠한의 어전의였던 코다마 가문으로부터의 요청으로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코다마로 성을 고쳤다. 하지만, 이러한 가계(家系)는 코다마 요시오에 의해 후대에 조작된「설정」이었던 듯 하다. 실제로 코다마 요시오의 출신은 완전 불명이다. 어릴적에는 무척 가난하여 부친과 둘이서 판잣집에서 살았다고 여겨진다. 일곱살 때 모친을 잃었으며, 여덟살 때 조선에 살던 친척집에 맡겨졌으며, 경성 상업전문 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무코지마()에 있던 철공소에 취직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여러 우익단체를 전전하게 된다.
처음에는 사회주의에 심취했으나 그후에 초국가주의(超?家主義)로 전환, 겐요샤(玄洋社: 현양사)의 토야마 미츠루(頭山?)에게 사숙한다. 1929년에는 아카오 빈(赤尾敏)과 츠쿠이 타츠오(津久井龍雄) 등... 타카바타케 모토유키(高?素之) 문하에 의해 창설된 급진적 우익단체인「켄고쿠카이(建??: 건국회/ 회장은 우에스기 신키치, 고문은 토야마 미츠루)」에 가담했다. 그 직후 쇼와 텐노(昭和天皇: 히로히토 텐노)에게 직소하려다 체포당한다. 이 텐노 직소 사건으로 반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후, 켄고쿠카이를 탈퇴해 츠쿠이 타츠오의 급진애국당을 거쳐 1931년에 츠쿠이와 카노 빈(狩野敏)이 만든 전일본애국자공동투쟁협의회에 참가. 그곳에서 국회 삐라 살포 사건이나 이노우에 쥰노스케(井上準之助) 재무장관 협박 사건을 일으켜 투옥된다.
1932년에 석방되어 만주(?州)로 건너가 오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문하인 카사기 요시아키(笠木良明) 등이 이끄는 다이유호카이(大雄峯?: 대웅봉회)에 참가. 같은 해, 귀국하자마자「독립청년사」를 설립. 토야마 미츠루의 셋째 아들인 토야마 슈조(頭山秀三)가 주재하는 텐코카이(天行?: 천행회)와 함께 육군 특별 대연습에 수행한 사이토 마코토(?藤?) 수상이나 각료를 암살하고 발전소를 파괴해 정전을 일으켜 황도파(皇道派)의 쿠데타를 유발하려고 계획(텐코카이, 독립청년자 사건)했으나, 발각되어 3년형을 받았다. 그후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가 결성한 우익단체 코쿠스이타이슈토(??大衆?: 국수대중당)에 참가.
1937년, 외무성 정보부장인 카와이 타츠오(河相達夫)의 인정을 받아 중국 각지를 시찰하게 된다. 1938년에 해군의 촉탁(?託)이 되어 1941년부터 상해(上海)에서 코다마 기관을 운영, 그것을 계기로 흑막으로 성장해 갔다.
60년대 초기에는 15만명 이상의 회원을 가졌던 일본 최대의 우익단체 전일본 애국자 단체 회의(줄여서 전애회의)를 지탱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1961년, 이 전애회의 안에서 코다마에게 충성하며 활동하는 그룹 청년 사상 연구회(줄여서 청사연)이 탄생한다. 60년대 말에는 청사연을 전애회의로부터 탈퇴시켰다.
1967년 7월, 사사카와 료이치의 주선으로,「제 1회 아시아 반공 연맹 결성 준비회」가 개최된다. 이때, 이치쿠라 토쿠자부로(市倉?三?), 통일교회의 유효지(劉孝之) 등이 모였는데, 코다마도 자신의 대리인으로 시로이 타메오(白井?雄)를 참가시켰다.
1969년, 청사연으로부터 독립한 우익단체 니혼세이넨샤(日本?年社: 일본청년사)가 결성. 이 단체는 야쿠자와 분간하기 힘든 입협우익(任?右翼)의 시작이었다.
코다마 기관
- 1938년에 중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익년인 1939년, 외무성 정보부의 사사카와 료이치의 소개로 채용되어 해군항공본부의 촉탁이 되었다. 1941년 진주만 공격 직전, 해군행공본부의 독자적인 물자 조달을 위해 사사카와 료이치가 야마가타 마사쿠니(山縣正?) 소장(少?)에게 소개, 그 후임자가 오오니시 타키지로(大西瀧治?) 소장(당시)로, 나중에 오오니시 중장이 자결하는 날까지 친밀한 사이가 된다. 이런 인연으로 상해에서 코다마 기관이라 불리운 점포를 열었다. 이는 텅스텐이나 라듐, 코발트, 니켈 등... 전략 물자를 사들여, 해군항공본부에 납품하는 독점계약을 맺고 있었다. 코다마는 이 일로 다이아몬드나 플래티나 등... 7500만 달러 상당의 자금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고 여겨지고 있다. 미국 육군정보국의 보고에 따르면, 코다마 기관은 철과 소금 및 몰리브덴 광산을 관할하에 두고서 농장이나 양식어장, 비밀병기공장도 운영. 전략물자... 특히 텅스텐을 얻기 위해 일본의 헤로인을 팔고 있었다.
코다마의 행동에 대한 헌병 측의 감시는 있었지만, 오오니시 타키지로 같은 거물이 비호를 해줬기 때문에 체포당하더라도 금방 석방되는 식의 결과만 있었다. 이러는 사이, 1942년 4월 30일에 치러진 제 2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이른바 익찬 선거)에서 다섯명의 당선자를 낸 토쿄 5구에서 입후보했다가 8위로 낙선했다.
「역(逆)코스」
종전후, 강화 내각의 수반으로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오(東久邇宮稔彦王)가 조각(組閣)했을 때에는 히가시쿠니노미야는 코다마를 알지 못 했지만, 내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1946년 초, A급 전범 혐의로 점령군에게 체포, 스가모 구치소로 이송된다. 그러는 동안, 저팬 로비라는 암약에 의해 우익을 숙청한 SCAP의 방침이 비판을 받았고, 미국의 점령정책은 협력적인 전범을 반공을 위해 이용하는「역(逆) 코스」를 취하게 되었다. 1948년 12월 24일에 석방된 코다마는 그 즉시, CIA에게 협력하게 되었다고 오늘날에도 논의되고 있다. 확실한 것은, 구류 중에 쇼와 통상과의 관계를 폭로당했다는 것과, 석방된 후에도 이어진 조사에서 요시다 히코타로()가 코다마 기관이 소유한 국내 광산을 밝혔다는 것, 그리고 나중에 CIA가 코다마를 반공사상, 군벌구상()의 소유주였다고 분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픽서(fixer)」로...
코다마는 코다마 기관이 관리해 왔던 옛 해군의 재류 자산(在留資産)으로 상해에서 성장했다. 코다마는, 스가모 구치소에서 함께 지냈던 츠지 카로쿠(?嘉六)에게 권유를 받아 1946년 초, 체포되기 직전에 이 자금의 일부를 일본 민주당(일명 하토야마 민주당)의 결당 자금으로 제공한다.
1950년, 유바리 탄광의 노조 탄압을 위해 메이라쿠구미(明?組)를 조직해 파견했다. G2와 다수의 폭력단의 중심적인 중개자로서의 지위를 쌓았으며, 10년 뒤에 코다마는 다가올 전쟁에 대비해 우익 결집을 목표로 했다. 폭력단과의 중개에는 코다마 기관에 있던 무라오카 켄지(村岡健次)가 큰 역할을 맡게 된다.
키시 노부스케(岸信介)
1954년에는 코노 이치로를 총리대신으로 만드는 계획에 힘을 빌려준다. 1955년에는 자유당(일명 오가타 자유당)과 합병해 자유민주당(자민당)이 된 뒤에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 오랜동안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픽서(흑막)으로서 군림한다. 키시 노부스케(岸信介)가 수상이 되었을 대에도 그 힘을 행사했다.
키시 노부스케의 제 1차 FX 문제를 둘러싼 오직을 사회당의 이마즈미 이사무(今澄勇)가 추급했을 때에는, 토도로키에 있던 코다마의 저택에 두번이나 불려갔으며, 코다마는 추급을 관두도록 설득했다. 하지만 이마즈미 이사무가 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신상조서를 건냈다. 거기에는 이마즈미의 정치 자금의 출처, 그 액수, 돈을 사용한 요리점, 만나고 있는 여자에 대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코다마는 토쿄 스포츠를 소유한 것 이외에 몇개의 잡지사에 심복들을 심어두고 있었다. 그러한 잡지사를 통해 관련 기사를 쓰게 하는 것은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미일 안보 조약 개정을 위해 당내부의 협력이 필요했던 키시 노부스케는 1959년 1월 16일, 차기 총리대신자리를 당인파(?人派)였던 오오노 반보쿠에게 양도한다고 계약했다. 그때의 입회인이 코다마였으며, 코노 이치로나 사토 에이사쿠(佐藤?作)도 여기에 서명한 계약서가 현재에도 남겨져 있다. 개정에 반대한 안보투쟁을 저지하기 위해, 키시 노부스케 수상은 자민당의 키무라 아츠타로(木村篤太?)들에게 야쿠자나 우익을 동원시키게 했는데, 코다마는 그때도 도움을 줬다.
1962년 여름무렵부터,「(안보투쟁 같은) 유사시에 대비해 전국의 바쿠토(博徒: 도박꾼으로서 폭력단의 한 부류이다)들의 친목과 대동단결 아래, 반공을 위한 방파제가 되는 견고한 조직을 만든다」라는 구상을 바탕으로, 코다마 요시오는 동아동우회(東?同友?) 결성을 시도했다. 결국, 동아동우회는 결성되지 못 했다. 하지만, 킨세이카이의 이나가와 세이죠(?川聖城) 회장, 호쿠세이카이(北星?)의 오카무라 고이치(岡村吾一) 회장, 토세이카이(東??)의 마치이 히사유키(町井久之: 정건영) 회장들의 동의를 얻었다. 1963년에는, 칸토(?東)와 칸사이(?西)의 폭력단의 거래를 진행, 3대째 야마구치구미(山口組)의 쿠미쵸(組長)였던 타오카 카즈오(田岡一雄)와 마치이 회장과의「쿄다이사카즈키(兄弟盃: 야쿠자들 간의 형제결의를 맺는 의식)」를 실현시켰다.
픽서
코다마 요시오는 1965년의 한일 국교 회복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다. 국교회복이 실현되고, 5억 달러라는 배상금이 한국 정부에 지급되자, 한국에 일본 기업이 진출, 이권이 소용돌이치게 된다. 코다마 뿐만 아니라, 옛 만주국의 군장교에서 후에 한국의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와는 만주시절 인맥이 형성되어 있어, 키시 노부스케, 시이나 에츠사부로 등의 정치가나 옛 대본영 참모로 상사 임원인 세지마 류조 등이 한일 협력 위원회까지 만들어 한국에서 발생하는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일본 안에서는 기업간의 분쟁에 자주 개입한다. 1972년에 카와모토 토시오(河本敏夫)가 이끄는 산코 기선 저팬 라인을 빼았을 계획으로 동사의 주식 매점을 진행했다. 곤혹스러웠던 저팬 라인의 츠치야 켄이치(土屋?一)는 코다마에게 사건 해결을 의뢰한다. 하지만, 코다마가 아무리 압력을 가해도 카와모토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코다마는 SOGO 회장인 미즈시마 히로오(水島廣雄)에게 조정을 의뢰. 미즈시마의 협력에 의해, 카와모토는 매점하고 있던 주식의 매각에 동의한다. 이때 코다마는 감사의 표시로 미즈시마 회장에게 1억원 상당의 다이아몬드를 선물했다. 이리하여 코다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저팬 라인은, 쇼와 석유의 자회사였던 일본정납(日本精?)을 1974년 여름에 매수했다.
코다마가 압력을 가했을 때는 이마즈미 때와 마찬가지로 휘하에 있던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구사했다. 이때 이용당한 거대 미디어로는 하쿠호당(博報堂)이 있다. 그러던 중에 코다마는 다음 두가지 목적을 가진 섹션을 만들었다. 하나는 하쿠호당의 거래처를 코다마 계열에 넣는 것. 또 하나는 그렇게 계열화된 기업에 들어오는 클레임을 이용해 매스컴을 조작,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미디어에게는 광고 의뢰를 넣지 않았다. 이 섹션은 광고회사로서 품위가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당시 하쿠호당의 지주회사였던 신와(伸和)라는 상호를, 1975년에 하쿠호당 컨설턴트로 바꿨으며, 또, 정관(定款)에도「기업경영 및 인사에 관한 컨설턴트 업무」항목을 더해, 이 모회사에게 업무를 맡겼다. 임원으로는 히로타 류이치로(?田隆一?) 사장 외에 마치다 킨이치(町田欣一), 야마모토 벤스케(山本弁介), 타도카와 츠네오(太刀川恒夫)가 중역으로서 이름을 올렸다. 히로타는 후쿠이 쥰이치(福井純一) 하쿠호당 사장의 학창시절 럭비 관계자로, 경시청이 칸사이계 폭력단의 준구성원으로서 마크하고 있던 인물. 마치다는 전 경시청 형사부 주임. 야마모토는 전 NHK 정치부 기자. 타도카와는 츠카모토소잔 빌딩의 토도로키 산업 사장으로 코다마의 측근 중 일인자였다.
록히드 사건
록히드 대리인
~ 코다마는 이미 1959년부터 록히드사의 비밀 대리인이 되어 일본 정부에 동사의 F-104 스타파이터 전투기를 선정토록 공작을 벌이고 있었다. 코다마가 움직인 정부 측 인간은 자민당의 오오노 반보쿠, 코노 이치로, 키시 노부스케 등이었다. 1960년대말의 계약이 갱신되고, 한국도 포함시키게 되었다. 코다마는 친밀한 사이였던 한국의 박정희 정권에게 록히드사의 전투기를 선정토록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무렵의 오오노나 코노는 이미 세상을 뜨고 없어, 새로운 총리대신인 사토 에이사쿠나 타나카 카쿠에이()에게는 그다지 영향력을 끼치지 못 했었다.
그래서 코다마는 타나카와 공통된 친구인 오사노 켄지(小佐野賢治)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오사노는 일본항공이나 전일본공수의 대주주이기도 해, 록히드사가 제작한 여객기 판로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이미 일본항공은 맥도널 더글라스사에서 제작한 DC-10형 구입을 결정했던 것도 있어서, 그의 창끝은 전일본공수로 향하게 되었다.
이 무렵 깊은 관계를 만들어 두었던 타나카 카쿠에이가 1972년에 수상이 되자, 코다마의 공작은 효과를 발휘, 전일본공수는 이미 결정해뒀던 맥도널 더글라스사의 DC-10 구입계획을 후에 뇌물 문제로 체포된 전 운수차관인 와카사 토쿠지 사장의 지시로 파기, 록히드사의 L-1011 트라이스타 구입을 결정. 그후 전일본공수는 같은 기종을 21기 구입했으며, 그 결과 록히드사의 일본에서의 매상이 확대된다. 거기다 전일본공수는 록히드사로부터 얻은 자금을 자사의 권익 확대를 도모하려 항공족 의원이나 운수관료에 대한 뇌물로 사용, 그후 이 일은 록히드 사건에 뒤따른 전일본공수 루트로서 추급받게 되었다.
록히드 재판
하지만, 1976년에 미국 상원에서 치러진 공청회에서 「록히드사가 일본의 초국가주의자를 비밀 대리인으로 고용, 거액의 현금을 지불하고 있다」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고, 일본은 이로 인해 대소동이 일어났다. 그후 미키 타케오(三木武夫) 수상에 의해 이 사건의 조사가 개시, 이미 이 사건의 중심인물로 지목되었던 예순다섯살의 코다마 요시오는 중의원에서의 증언을 하기 직전에 「발작」을 일으켜 병석에 눞고만다.
하지만, 머지 않아 코다마는 탈세와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재판에 서게 되었다. 1977년에 1차 공판에 출석한 뒤에는 병이라 하여 자택을 벗어나지 않았다. 전 총리인 타나카 카쿠에이는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되어, 1983년 10월에 유죄판결을 받았다. 코다마는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나는 CIA의 대일공작원이었다」라고 고백했다. 일흔두살의 코다마는 판결이 나기 직전인 1984년 1월에 재발작을 일으켜 죽고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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