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역할평등론2019.05.23 PM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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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평등론

 

 

 

오늘날 무엇이 진정한 평등입니까? 신분제가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옛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는 신분제가 불평등을 낳는다고 주장하며 시민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평등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치판단기준이 혈통에서 자본으로 옮겨진 것이었을 뿐입니다. 자본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걸 지켜본 프롤레타리아는 자본가 계급이 불평등을 낳는다고 주장하며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냉전을 만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진정한 평등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치판단기준이 자본에서 독재자로 옮겨진 것일 뿐이었습니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질서를 재편해야 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독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났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지 못한 채 독재를 계속하게 된 것입니다.

 

혈통과 독재, 신분제와 공산주의는 결국 지배라는 틀에서 궤가 같아집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평등한 체제는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는 자유라는 틀에서 궤를 같이하는 자본주의와 사민주의가 되겠습니다. 뭐, 이건 상대적일 뿐입니다. 이들도 온전한 평등을 가져오진 못합니다. 자본이 계급화되는 현상을 막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상속으로 부의 대물림이 진행되고 있는 요즈음엔 부가 또 다른 신분제가 되어가는 추세라 미래에는 현재만큼의 자유와 평등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어디에도 진정한 평등은 없었던 겁니다.

 

평등이 오지 않았던 까닭, 저는 그 이유를 가치관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 체제들의 공통점은 가치판단기준이 서열입니다. 신분제는 혈통으로 서열을 매겼고 자본주의는 자본으로 서열을 매겼으며 공산주의는 노동자 계급을 지배하는 독재자들이 서열을 매겼습니다. 평등을 주장하며 새로운 체제들이 등장했지만, 가치판단기준은 여전히 서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불평등했습니다.

 

민주주의는 분명 국민에게 권력이 있는 평등한 정치체제입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는 가치판단기준이 서열이었던 경제체제였습니다. 저는 그래서 우리나라가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한 평등한 가치관이 필요합니다. 수직적 가치판단기준이 아닌 수평적 가치판단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번에 주장할 역할평등입니다. 그럼 시작해보겠습니다.

 

 

 

발상의 시초

 

우리는 불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본으로 서열을 매기고 연령으로 서열을 매기고 학력으로 서열을 매깁니다. 서열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아파트 평수로 서열을 매기고 차별을 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평등을 바랐던 것이 맞습니까? 평등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손해를 감수하고 부당한 이익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정당한 손해에 항의하고 부당한 이익을 모른 척을 합니다. 자신의 이기주의에 평등이란 이름을 붙여 이용하는 사람들까지 생기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평등을 바랐던 것이 아니라 평등이 가져오는 이익만을 바랬던 것이 아닐까 하는 슬픈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평등하다고 가르치는 어른들을 보십시오. 어떤 어른은 불리한 상황에 닥치면 위계질서를 핑계로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 오면 평등을 핑계로 책임을 똑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무엇이 평등이고 무엇이 책임인지 명확히 구분 지을 줄 모릅니다. 평등하다고 교육받은 아이들을 보십시오. 어떤 아이는 평등이란 이유로 의무를 외면하고 권리만 바랍니다. 어른의 보호는 따르지 아니하면서 권리는 보장해달라고 합니다. 무엇이 평등이고 어디까지 평등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평등하기 위해서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다름을 인정해서 평등이 왔습니까? 인종차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동양인이 서양에 가면 눈을 찢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역차별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역을 갈라가며 싸우고 있습니다. 연령차별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청년은 노인복지에 반대하고 노인은 청년복지에 반대합니다. 성별차별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비율에 맞춘 인위적인 평등을 만들려고 하다 보니 오히려 역차별까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학력차별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능력으로 똑같은 일을 해도 학력이 높은 쪽이 더 대우를 받습니다.

 

이런 차별들을 보고도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계속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차별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인정해도 차별은 발생했습니다. 그러면 관점을 달리해야 합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서 차별이 발생했던 것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했기 때문에 차별이 발생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다름을 인정해도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평등하기 위해서는 다름이 없는 어떤 특정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름이 없는 환경 속의 평등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인터넷 익명 커뮤니티에서 외국의 인종차별주의자와 외국어로 대화를 나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가 저를 차별하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제가 누군지 알고 차별합니까? 차별할 수가 없습니다. 다름을 인정해야 차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름이 없어야만 차별이 사라지는 거였던 겁니다. 다르니까 차별하는 거란 말입니다. 이외 다른 사례를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모르면 차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대화가 통하는 익명의 인터넷 커뮤니티라면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걸 그대로 현실에 대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다름이 없을 수 있는 어떤 특정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역할입니다. 저는 이 생각을 역할이 필요한 익명의 Role-play game 에서 착안했습니다. 거기서는 상대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냥 오로지 어떤 특정 역할만 수행할 수 있으면 존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종도, 지역도, 연령도, 성별도, 학력도 상관없습니다. 가치판단기준은 오로지 역할수행여부입니다. 제 역할을 수행하면 누구라도 존중하고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면 누구라도 존중 받지 못합니다. 그걸 보고 저는 ‘아, 현실에서도 역할을 가치판단기준으로 삼으면 차별이 있을 수가 없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역할을 수행하면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고, 수행하지 못하면 존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자본이 많든, 지위가 높든, 권위가 높든,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할입니다. 사장과 신입사원을 나란히 세운다음 역할수행여부로만 가치를 판단해봅시다. 사장이라도 제 역할을 못하면 존중을 받지 못하고 신입사원이라도 제 역할을 다하면 존중을 받습니다. 이렇게 역할을 가치판단기준으로 삼으면 수평적으로 가치판단이 가능해집니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모든 역할을 수평으로 나란히 세워보십시오. 어떤 역할이라도 좋습니다. 그 다음 역할수행여부로만 존중유무를 결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역할수행]이라는 수평적 기준으로 모두가 평등해집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수직적 가치판단기준이 아닌, 수평적 가치판단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평등한 가치관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한 저는 수년 전 [역할존중, 나는 너를 모른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지금 정리한 것이 그때 쓴 글과는 조금 다르지만, 기본은 같습니다. 이것이 역할평등론의 시초입니다.

 

 

 

불평등 기원

 

간단하게 무엇 때문에 불평등했는지에 대해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진화]

 

인간이 진화했다면, 모든 개체가 한번에 모두 진화했을 리는 없습니다. 아마 어떤 특정 개체 또는 개체의 새끼가 진화를 하여 지능이 높아졌을 겁니다. 그러면 그 개체는 다른 개체와 달리 우수해지게 됩니다. 우수한 개체는 자연스럽게 인간 무리를 이끌었을 겁니다. 이것이 신분제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전자 자체가 달랐던 것입니다. 옛사람들이 혈통을 중시했던 까닭은 이처럼 진화 때문에 발생했던 유전자 차이가 만든 관습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우수한 개체는 다양한 이성개체와 짝짓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태어난 새끼들은 우수한 개체의 유전자를 이어 지능이 높게 태어나게 됩니다. 왕과 왕족의 시작입니다. 이런 식의 반복이 지능이 높은 개체와 지능이 낮은 개체의 차이를 만들었을 겁니다. 왕과 왕족과 귀족, 그리고 평민의 차이의 시작입니다. 이런 차이는 모든 개체가 우수한 유전자를 공유하여 호모사피엔스가 되었음에도 관습으로 남아 신분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에서 노예를 허용한 까닭에는 편의가 크겠지만, 이런 관습적인 측면이 강하게 작용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분명 과거에는 유전자의 차이로 인한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모든 개체가 우수한 유전자를 공유하여 호모사피엔스가 된 현시점에서 신분제는 불평등한 나쁜 관습에 불과합니다.

 

 

[보호]

 

인간은 보호가 필요한 아이를 낳는 동물입니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불평등한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보호를 위해 불평등한 지시를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보호자와 피보호자, 이 관계는 인간이 동물로 남아있는 이상 없어질 수가 없는 불평등이 되겠습니다. 이런 점은 이후 설명할 불평등 기준에서 좀 더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역할의 기준

 

모든 역할이 존중 받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범죄자 역할을 수행했다고 존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준을 통해 필요한 역할을 골라내야 합니다. 그 기준이 바로 인간이 추구 해야 할 선인 인류의 생존과 번영입니다.

 

동물의 선은 살아남는 겁니다. 그리고 같은 종을 늘리는 겁니다. 이들에게 이것 이외의 올바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동물의 최고선은 생존과 번영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동물이라는 아주 당연한 진실을 알게 된다면 인간의 선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이 동물이라면, 인간도 마찬가지로 최고선은 인류의 생존과 번영입니다. 첨언하자면 번영에 행복도 포함됩니다. 행복이 없는 번영은 불완전한 번영입니다.

 

인간이 최고선이 인류의 생존과 번영이라면, 역할도 그걸 기준으로 하여 골라낼 수 있습니다.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도움이 되는 역할들을 골라내면 됩니다.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걸 일일이 설명하긴 그렇고,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돕는 기본단위인 국가를 기준으로 시작해봅시다. 사회의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고 운영하는 역할들, 사회의 생존을 돕는 역할들, 사회의 번영을 돕는 역할들, 사회의 행복을 만드는 역할들, 사회의 희망을 만드는 역할들, 사회의 지성을 만드는 역할들, 사회의 편리를 만드는 역할들 등. 이렇게 생존과 번영에 도움이 되는 역할들을 수평으로 나란히 세운 다음 수행여부로 존중유무를 결정하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크게 이익이 되면 존중(유)을 넘어 귀한 존재가 되고, 크게 손해가 되면 존중(무)을 넘어 천한 존재가 되겠습니다. 우리 세상에서 자본이 많거나 지위가 높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이 귀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이익이 되어야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본이 적거나 지위가 낮거나 권력이 없는 사람이 천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손해가 되어야 천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건 특별히 이상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냥 가치관만 약간 바꾸면 됩니다.

 

 

 

평등의 기준

 

차별은 다름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 다름을 알 수가 없는 어떤 공통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면 몰개성화가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이건 가치판단기준일 뿐입니다. 존중유무를 결정할 때에만 작용되는 것이니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류]

 

인종이나 민족이나 국적이 아닌 인간으로만 접근하면 차별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종을 구분했으니까 차별이 발생했던 겁니다. 흔히 어떤 특정 인종의 잘못을 비판하는 걸 인종차별로 착각하여 논란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인종으로 비판하지 말고 같은 인류로서 비판하면 그런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종차별은 인종의 특성을 가지고 비하하거나 비아냥 하는 걸 의미하지 잘못을 비판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국민]

 

피부색이 달라도 문화가 달라도 한국인 역할을 해내면 모두 한국인이 됩니다. 설령 다른 체제에 살던 사람이라도 한국인이 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적 시민의식이 필요합니다. 같은 민족이라고 하더라도 한국인 역할을 못하면 존중을 받을 수 없고 다른 민족이라고 하더라도 한국인 역할을 다하면 존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를 갖춘 민족주의자가 아닌,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이은 민주주의자입니다. 우리가 민주주의자니까 독재자를 좋아할 수 없는 건 아주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게 설령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도 말입니다. 그건 독재자의 지배를 통해 모든 노동자가 평등한 구역질 나는 가짜 평등입니다. 지주와 농노의 관계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직업]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도움이 되는 직업들을 수평으로 나란히 세운다음, 그 역할의 수행유무에 따라 존중유무를 결정하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수평적 가치판단기준입니다. 이거면 차별이 발생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역할수행]이라는 공통된 기준으로만 존중유무를 결정하기 때문에 인종, 지역, 성별, 연령, 학력 등으로 차별이 발생할 수가 없습니다. 인종이 뭐든 무슨 상관입니까? 성별이 뭐든 무슨 상관입니까? 연령이 뭐든 무슨 상관입니까? 학력이 뭐든 무슨 상관입니까? 역할만 수행하면 됩니다.

 

흔히 차별의 요소라고 생각되는 외모나 인맥도 어떤 역할에서는 필요한 능력일 수가 있습니다. 배우나 서비스업은 외모가 필요한 역할입니다. 영업은 인맥이 필요한 역할입니다. 이런 식으로 어떤 특성도 예외는 없습니다. 반대로 외모나 인맥을 필요 없는 역할임에도 외모를 자격요소로 내세우는 건 불평등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격의 기준

 

저는 역할과 관계없는 모든 가산점에 반대합니다. 군가산점, 성별가산점, 유공자가산점, 지역균등가산점 등. 전부 반대합니다. 이것은 평등을 이유로 역할과 관계없는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역할을 맡게 하여 국가 능력의 하향 평준화를 부르는 나쁜 평등입니다. 진짜 평등하길 바란다면, 다른 방법으로 혜택을 줘야 합니다. 군가산점 대신 다른 대가를 주십시오. 성별가산점 대신 좀 더 평등하게 인사가 결정되게 만들도록 하십시오. 유공자가산점 대신 다른 대가를 주십시오. 지역균등가산점 대신 우수한 인재를 수도권이나 해외로 유학 보내도록 하십시오. 그게 더 공정하고 평등합니다.

 

모든 자격은 역할의 수행능력으로만 결정해야 합니다. 학력이 무슨 상관입니까? 간혹 학력을 얻기 위해 노력한 기간이 있으니까 그만큼 가산점을 줘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도대체 학교는 왜 간 겁니까? 학력이 낮은 사람과 공정한 경쟁을 해서 이길 자신도 없습니까?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명문대학생들이 뽑힌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편법은 제외하겠습니다) 이게 당연한 겁니다. 명문대에서 열심히 공부해놓고 일반대나 전문대나 고졸하고 공정한 경쟁해서 이길 자신도 없다면 학력을 날로 먹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평가과목도 역할의 수행능력으로만 결정해야 합니다. 영어가 필요 없는 역할에 영어는 왜보는 겁니까? 그건 해당 역할을 목표로 삼고 있던 사람에게 무의미한 노력을 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전문성이 뒤쳐지는 겁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를 전문적으로 알아야 하는 역할을 제외하고는, 도대체 역사 년도가 왜 중요했던 겁니까? 몇 년도에 무엇이 일어났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왜 일어났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반성해야 될 역사에서 배워야 하는 건 년도도 아니고 감정도 아닙니다. 반성입니다. 같은 일을 반복하지 말아야 되겠다는 반성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야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에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이하 다른 것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역할에 맞는 평가과목을 중요시 해야 합니다. 전문성을 중시하는 것을 보고 편향된 사람들만 양산되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이 있을까 첨언해둡니다. 중점은 전문성이 아니라 역할에 맞는 평가과목입니다. 다양한 것을 알아야 하는 역할은 다양한 과목으로 평가해야 될 것입니다.

 

 

 

대우의 기준

 

동일노동 동일임금. 이건 우스운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학력이 낮으면, 정규직이 아니면 임금을 적게 받습니다. 이런 불공평함은 어떤 다른 평등함을 기준으로 평등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학력을 기준으로 서열화하여 평등을 매기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기준으로 서열화하여 평등을 매겼으니까 이런 불평등함이 나타난 겁니다. 대우의 기준은 오로지 하나면 됩니다. [역할수행에 따른 일의 기여도] 이러면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이 가능해집니다. 이런 기반에서 경력자들은 기여도의 축적도나 비상시 대처능력 등을 고려해 추가금을 지급하면 되겠습니다.

 

역할수행에 따른 일의 기여도는 사실 제대로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걸 판단해주는 직업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부의 분배 건전성 측정(가칭)입니다. 회계사들이 주로 이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해당 역할이 정당한 임금을 받고 있는지 회계를 통해 판단해보는 겁니다. 이것이 가능해지면 회사와 노조갈등도 객관적으로 판결이 가능해집니다. 부의 분배 건전성이 좋을수록 회사가 올바른 것이고 나쁠수록 노조가 올바르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누가 부의 분배 건전성을 판단하느냐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는 있으니 다수의 제삼자가 하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합니다.

 

 

 

불평등 기준

 

인간은 보호가 필요한 아이를 낳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보호하기 위한 불평등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점 또한 역할을 통해 완화할 수 있습니다. 어떤 보호자도 보호를 할 때에만 불평등한 지시를 내릴 수 있고, 어떤 피보호자도 보호를 받을 때에만 불평등한 지시를 감수하면 됩니다. 역할평등은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도움이 되는 역할의 수행유무로 존중유무를 결정합니다. 보호자와 피보호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호자는 보호를 해야 존중을 받고 피보호자는 보호를 받아야 존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보호는 정당할 때에만 적용이 되겠습니다.

 

 

[보호자]

 

보호자는 부모 또는 부모를 대신하는 사람, 교사, 정부, 경찰, 군인, 경호원 등이 있겠습니다. 남성중심사회였던 과거엔 남성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보호자는 보호를 할 때에만 불평등한 지시를 내릴 수 있음을 알아야 불평등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호자는 피보호자의 모든 것에 간섭할 것이 아니라 보호할 때에만 간섭할 수 있습니다. 장래희망에 간섭하여 보호자 마음대로 결정하는 건 보호이상의 영역임을 말해두겠습니다. 그건 보호자가 피보호자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것일 뿐입니다.

 

 

[피보호자]

 

피보호자는 아이, 학생, 국민 등이 있겠습니다. 남성중심사회였던 과거엔 여성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피보호자는 보호를 받을 때에만 불평등한 지시를 감수해야 됨을 알아야 불평등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호자가 피보호자보고 어디 위험한데 가지 말라고 할 때 불평등하다고 반대할 것이 아니라 보호받는 이상 정당한 보호라면 수긍해야 할 것입니다.

 

 

[계급]

 

효율적인 사회구조를 위해 계급이 있는 곳이 있습니다. 회사나 군대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계급에 의한 불평등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할로 불평등을 최소화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역할평등을 통해 모두가 수평적으로 평등하지만, 효율적인 업무를 위한 지시나 명령을 내릴 때에만 불평등이 적용되면 되겠습니다. 그 외엔 역할을 하고 있을 때도 평등하고, 하지 않을 때에도 평등하며, 역할에서 벗어날 때도 평등하게 되겠습니다.

 

 

 

가치의 기준

 

물질가치의 기준도 역할로 판단하면 됩니다.

 

[기차]

 

“추석 명절날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 좌석을 여러 장 사도 되는가?” 라는 물음에 논쟁이 발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자본으로 보면 사도 됩니다. 그런데 역할로 보면 사면 안됩니다. 사물이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으면 기차를 타지 말고 비행기를 타는 편이 낫습니다.

 

 

[음식]

 

“음식을 주문할 때 고객이 어떤 재료를 좀 더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때 재료를 엄청 주어 음식의 맛이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그걸 본 고객은 못 먹겠다고 환불을 요청한다. 음식점은 고객의 요구를 들어준 것일 뿐이라고 그 요청을 거부한다. 이때 어느 쪽이 정당한가?” 라는 물음에 논쟁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이 상황을 자본으로 보면 음식점이 정당합니다. 재료를 많이 제공하여 금전적인 손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할로 보면 고객이 정당합니다. 고객은 엄청 많이 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좀 더’ 달라고 했는데 음식의 맛이 달라질 정도로 엄청 주었던 겁니다. 그러니 서비스 역할(고객의 요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과 음식의 역할(고객이 먹기 어려울 정도가 됨)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고객의 환불은 정당합니다.

 

이외 다양한 사물을 역할(용도)로 접근하면 평등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책임의 기준

 

[힘이 책임을 진다. 지지 않으면 책임에게 힘을 준다.]

 

우리는 힘이 책임을 지는 사회적 어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진 힘이 있음에도 사회적 아이들 같은 측면이 있었습니다. 자본의 크기와 관계없이 사회를 책임지는 사람이 적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본주의가 건강하게 작동되기 위해서는 도덕이 필수불가결하다고 합니다. 특히 신자유주의 같이 시장의 원리에 맡기는 경우는 더더욱 그것이 강조됩니다. 자본가가 도덕적이지 못하면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몇몇 자본가는 도덕적일지 몰라도 대부분은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를 지향했던 대부분의 나라는 불평등이 심해졌습니다. 그 결과 정부는 규제와 간섭을 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자본가들이 자초한 측면이 큽니다. 자본가의 자율규제가 되지 않는 자본주의는 사회를 구성하는 지지대가 불평등으로 붕괴되기 때문에 정부는 강제규제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사회가 죽음으로 향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저출산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천천히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이론이 없다는 낙수효과도 이러한 자본가의 자율규제를 통한 사회적 책임이 뒤따를 때나 가능합니다. 자본가가 자신의 자본을 분배해 위에서 아래로 돈을 내려 보내야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물론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강제규제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소득중심성장입니다.  자본가가 위에서 아래로 돈을 내려 보내지 않으니까 정부가 최저임금 상승을 통해 강제로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기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대기업이 사회를 책임을 지지 않은 상태에서 최저임금이 상승하니 중간에 있는 소상공인이 커다란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보고 생산성과 비례하지 않는 최저임금 증가 때문이라며 소득중심성장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최저임금상승은 저출산으로 죽어가고 있는 사회를 살리기 위해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생산성 관점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부의 분배 정상화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자본가들이 자신의 자본을 분배하여 사회 곳곳에 건강하게 돈이 흐르게 하지 않는 이상 강제규제를 통해 건강하게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최저임금을 올리되, 그 임금으로 부담을 짊어지게 되는 사람들은 부자에게 징수한 세금으로 지원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물론 이건 자연스러운 방법은 아닙니다. 그러나 힘이 책임을 지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이대로 죽어가는걸 지켜만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사회가 자연스럽게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사회를 책임지는 사회적 어른들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강제규제를 하더라도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면 규제의 허점을 통해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더더욱 규제를 강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이 책임을 지지 않는 이상 악화일로로 걸을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번에 나이 먹은 부자가 상속세를 내기 싫다며 이민을 가고 싶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슬펐습니다. 사회를 책임지기는커녕, 자신을 책임지고 싶지 않다는 표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회가 제공한 국방, 치안, 은행, 서비스, 교육 등에서 성장하여 힘을 얻은 사람들이 사회가 무엇을 해주었냐고 말하는 것은, 보호자의 도움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보호자가 무엇을 해주었냐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자본가들에게 도덕을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강제규제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결국 부자연스러운 규제를 통해 성장둔화를 불러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자율규제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책임에게 힘을 준다]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책임을 지는 도덕적인 자본가에게 힘을 주면 사회가 자연스럽게 건강해질 수 있다고 봅니다. 자본가의 역할에 [도덕]이 포함되는 사람에게 힘을 주자는 겁니다. 국민들은 책임을 지는 기업의 제품을 구매하고 정부는 책임을 지는 기업을 지원합니다. 이런 식으로 책임에게 힘을 주어 힘이 책임을 지게 만드는 사회적 풍토가 마련된다면, 강제규제는 점차 적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힘을 가진 사람이 책임을 지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책임을 지는 사람에게 힘을 주도록 하여 힘이 책임을 지는 역할을 맡게끔 해야 한다.] 이것이 역할로 힘과 책임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법이 되겠습니다.

 

 

 

마무리

 

우리들에게 진정한 평등이 오길 바라며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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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지식이 많이 부족합니다. 더욱 더 배워야겠습니다.

 

게임이 질병 등록한다지요. 다들 똑같은 문화인데 게임만 차별 받는 건, 여러 이유가 붙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저 주류문화편입을 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겁니다. 올림픽 종목이 되거나, 새로운 마인드 올림픽을 개최하여 건전한 문화라는 걸 세계에 널리 인정받았으면 달라졌을 텐데. 아쉽습니다. 뭐, 업계 분들 힘내시길.

 

 

그럼 또 봐요.

 

댓글 : 1 개
다름을 인정한 사람들은 차별을 하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 최근에 논란이 많은 성별논쟁만 보더라도 다름을 인정하는 사람을 대상으로는 갈등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다름을 인정함으로서 서로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역할대로 간다고 말하니까요.
성별갈등은 일부 페미처럼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그룹으로 인해 생겨난 논쟁이라고 봅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사람들이 여전히 차별을 하고 이로인해 인종차별을 비롯한 여러가지 차별이 생기는거라고 봅니다.
전 차별은 다름을 인정함으로서 사라진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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