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노동개혁과 정치개혁2021.04.10 PM 02:33
노동의 개인화와 분야별 의석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역사와 외세로 갈기갈기 찢겨진 한국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유국가에 맞는 사상정립이 필요하다. 정립한 사상을 기반으로 체제개혁을 하여 보다 자유롭고 행복한 사회를 만든다. 지금 한국은 불행하다. 낮은 출산율과 높은 자살률 따위의 지표가 증명한다. 불행한 사회가 다른 체제에 대한 희망을 불러 내부
분열을 일으킨다. 불행한 사회가 남북한의 다양한 지표에서 엄청난 격차를
보여줌에도 북한 내부 선동을 지속하게 만든다. 이걸 해결하려면 지금 체제에서 행복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체제 우위를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어야 국내 결속과 국외 결합을 시도할
수 있다.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북한과의 결합을 위해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고 있음을 안다. 진정 민족의 결합을 바란다면 우선 국가의 결속이 시급하다. 순서가 어긋나면 이도 저도 안 된다. 어설픈 동정심으로 그릇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내부를 결속해야 외부와도 결합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걸 위해 사상정립을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우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본질부터
보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고 본다. 자유주의는 이기적인 권리쟁취다. 본인의 이익만을 위해 싸운다. 그렇기 때문에 힘을 가진 자가 권리를 쟁취하는데
유리하다. 강자가 권리를 쟁취하여 약자를 착취한다. 착취의 늪에 빠진다. 이것이 경제적 자유주의의 결함이다. 이런 착취로 약자에 속하는 노동자들이 억압과 빈곤으로
고통 받자 이에 마음이 아파진 사상가들이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노동자에게 각종 혜택을 요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회주의는 이타적인 배려요구다. 모두가 타인의 이익을 위한다. 그렇게 하여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도모한다. 그런데 여기서 배려의 연쇄가 끊기면 공동체는 붕괴한다. 누군가 타인에게 배려를 하지 않고 본인의 이익만
우선시하면 그 사람만 이익을 보고 나머지는 손해를 본다. 그러다가 너도나도 배려를 하지 않게 된다. 배려하는 사람만 호구가 된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결국 배려를 강요하게 된다. 규제의 늪에 빠진다. 이것이 사회주의의 결함이다.
착취의 늪에 빠지면 적자생존의 야만사회가 된다. 규제의 늪에 빠지면 통제감시의 독재사회가 된다. 각각 사상의 일그러진 결말은 제국주의와 공산주의가
있다. 이 두 가지는 지금까지 인류가 겪어온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순환 중 하나다. 욕망에 의한 이기적인 패악이 나타나면 그에 대항하여 도덕에 의한 이타적인 강요가 나타난다. 자연과 사회다. 도덕에 의한 질서가 답답해지면 자유롭길 바라고, 욕망에 의한 자유가 혼란을 부르면 도덕적이길 바란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성직자[1신분]와 귀족[2신분]의 억압으로 자유롭길 바랐던 평민[3신분]이 자유주의를 추구했다. 자본가가 이기적인 욕망으로 노동자를 착취하자 사상가와
노동자는 이타적인 마음으로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이와 같이 이기적인 자유 추구와 이타적인 질서 강요가 지금까지 인류 역사의 순환 흐름이다. 지금까지 나는 좌파와 우파의 구분을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봤다. 십인십색이라고 모두가 다 다른 색을 지녔는데 어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가 싶었다. 그런데 위와 같이 단순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단순함은 학습효과가 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지금은 각국이 이런 순환을 다르게 겪고 있다. 한국은 질서 강요에 답답해져 자유 추구가 늘어났고, 미국은 자유 추구로 혼란스러워 질서 강요가 늘어났다. 두 국가의 정당 지지율을 보면 이 흐름을 유추할
수 있다. 아마 별다른 조치가 없다면 자유 추구와 질서 강요는
다시 한번 반복될 것이다.
한국은 이념적으로 볼 때 특별한 국가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일그러진 결말인 제국주의와
공산주의 침략과 침공을 받았다. 이념으로 민족이 분단된 국가기도 하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이념갈등이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행동원리는 이념보다 유교적 가치관에 더 큰 영향을 받고 있으므로 온전하게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교의 집단적이고 이타적인 특성상 사실 한국은 사회주의에
적합한 국가다. 이런 특성이 있으니까 군부독재의 계획경제나 의료보험
같은 사회주의적 정책이 온전하게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이가 유교적 가치관에 영향을 받아 집단적이고 이타적인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걸 보면 한국 내 정치적 갈등을 이념갈등이라
볼 수 있는 건지 의문이 든다. 한국 내 정치적 갈등은 각 정당이 권력투쟁을 하기 위해 이념을 가지고 국민들을 선동한 끝에 나타난 결과라고 본다. 「공산주의 타도! 군부독재 타도!」 이런 기치를 내세우며 민중의 침략과 침공과 탄압의
트라우마를 자극해 설득이나 선동을 했다는 것이다. 한국 정당의 역사를 보면 초기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은 모두 자유주의 정당이었다. 이승만, 윤치영, 윤보선, 장면 같은 각 정당 인사들도 전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두 정당에 친일 인사도 많았다. 애초에 사회주의자는 대부분 북한으로 갔다. 한국의 사회주의 성향은 군부 쿠데타로 자유당 측
인사들이 권력을 쥐게 되자 대다수 반대세력[민주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이 민주당에 결집되어 사회주의 색채가 나타난 것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립을 통해 색채가 보다 더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자가 군부독재와 적대하고 민족주의자가 북한과
화합하고 일본과 반목하고 사회주의자가 노동자와 화합하고 자본가와 반목했던 것이다. 근본은 둘 다 자유주의 정당이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의 정치적 갈등은 이념이 아니라 정당의 권력투쟁으로 촉발된 것이었다. 최근 들어 여성주의가 포함되었는데 이 또한 권력투쟁의
산물로 보인다. 여성주의의 역사가 생각보다 긴 편이지만, 본격적으로 세력화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 이것으로 「유교에 뿌리를 둔 한국에서 어찌 그렇게
이념갈등이 심했는가?」에 대한 답이 될 거라 본다.
한국은 유교에 사상적 뿌리를 둔 탓에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적은 편이다. 각 정당의 설득과 선동으로 반공주의자와 민족주의자와 민주주의자와 여성주의자와 반여성주의자가 많을 뿐이다. (여기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반제국주의라는 공통점을
지녀 구분 짓기 어려울 때가 있다. 보통 친북 논란에 휩싸이는 다수의 인물이 사회주의보단 민족주의에 가깝다.) 본인의 생각으로 추구하게 된 사상이 아니라 타인의 필요로 만들어진 사상이다. 국민들의 정치적 성향이 정당의 설득과 선동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민중은 본인이나 타인이 겪은 침략, 침공, 탄압, 천대, 역차별 등으로 끊임없이 감정적 자극을 당하며 누군가에게 편한 대로 이용되었다. 유교의 이타적인 위계질서는 정치가의 말을 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하게 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사상이 단편적이고 맹목적이며 종속적인
경우가 많다. 좁은 시야, 감성적인 태도, 맹목적인 지지자와 반대자 따위의 현상은 나라의 정치의
수준을 보여준다. 안타까운 일이다. 강인하고 현명한 인간들이 제 가치를 보이지 못하는
걸 보면 흙 속에 파묻혀 빛을 보지 못하는 보석을 보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받아드리는데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낙관적인 추측을 하게 된다. 현 상황에 대한 분석과 그에 맞춰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걸 받아드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 작은 소망을 가지고 이 글을 작성하는 중이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일그러진 결말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와의 순환을 되풀이하게 할 뿐이었다. 그 순환에서 벗어나 진정 행복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유국가에서는 자유주의에서 그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국민이 자유를 사랑하는 한, 다른 방식으로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아니, 인류가 자유를 사랑하는 한 다른 길은 답이 될 수 없다. 모든 인류는 자유주의에서 길을 찾아야 하고, 찾을 수 있다. 자유주의의 본질은 이기적인 권리쟁취다. 힘을 가진 자가 권리를 쟁취하는데 유리하다. 그래서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일방적인 약자 착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와 같이 노동자 계급이라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약자 또한 자유롭게 이기적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강자가 가지는 권리쟁취의 유리함을 모두가 동등하게
누릴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서 통제하는 것이다. 그걸 가리켜 공정경쟁을 위한 환경조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자유방임주의자는 통제 자체를 꺼려할 수 있다고 본다. 한데 통제되지 않는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지나치게 높다. 법이 없는 무법지대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유를
얻을 수 있겠는가? 강자만 자유로울 확률이 높다. 통제 없는 자유는 모든 이의 자유로 이어지기 어렵다. 모두의 자유를 목표로 한다면 자유를 위해서 국가의 통제를 일정 부분은 받아드려야 한다. 그리고 국가 또한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통제를 해야
한다. 그렇게 모두가 자유로워야 한다. 어떤 이념이 단순한 이기심에서 벗어나 대의를 갖춘
이기심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이익을 볼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개인이 자유를 바란다면, 모두가 자유롭길 바라야 이념으로써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모두가 자유로운 길의 첫 번째는 개인의 소유권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는 것이다. 기술과 노동력은 개인의 고유한 소유가 되어야 한다. 지식재산권과 마찬가지로 노동력 또한 개인의 재산권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노동자는 자신의 기술과 노동력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주인인 노동자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양도가 아닌 대여의 형태로 거래해야 한다. 지금까지 경제적 자유주의는 자본만 자유로운 비정상적 자유주의였다고 본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소유권을 중시한다. 재산권을 쉽게 빼앗기면 노력의 의미가 없어 노력하지
않게 될 거라 말을 한다. 그런데 자본으로 개인의 소유[기술과 노동력]를 쉽게 양도받을 수 있다. 자본만 자유롭다는 것이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다. 예컨대 권력이나 무력으로 개인의 소유를 쉽게 양도받는다고 가정해보자. 그걸 받아드릴 자유주의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재력으로 개인의 소유를 쉽게 양도받는 걸 당연시 한다. 기술과 노동력 또한 쉽게 빼앗기면 노력의 의미가
없다. 기술과 노동력을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내 것이 되지
않은데 뭐 하러 노력하겠는가?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아실현이 아닌 생계를 위해 일하게 되는 것이다. 비정상적이다. 어떤 사람은 재력으로 개인의 소유를 양도받는 것은 돈이란 형태로 대가를 지불하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권력으로 개인의 소유를 양도받은 뒤에 어떤 형태로
대가를 지불하면 괜찮은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라. 권력으로 개인의 고유한 권리인 자유를 받아낸 뒤에 물질적 혜택을 주면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중국 공산당이 기업을 지원하고 그들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복종하지 않으면 중국 공산당 아래에서 그 어떤 기업도
살아남을 수 없다. 권력으로 고유한 권리를 양도받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공산주의 질서 내에서 어떤 혜택을 줬다는 이유로 자유를 양도받는 것과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개인의 소유를 쉽게 양도받는 것은 그리 다르지 않다. 힘의 논리에서 권력과 재력은 동일하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라면 개인이 소유한 고유한 것을 쉽게 양도하는 것에 찬성해서는 안 된다. 지금 자본가가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 기술과 자본을
개인에게 양도받아 소유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 양도받아 소유했기 때문에 잉여가치를 더 많이 얻기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여의 형태로 거래되었다면 노동력의 주인이 노동자이기 때문에 대등한 관계에서 계약서에
명시된 노동력만 요구하였을 것이다. 마치 지주가 농노를 구매하듯, 노동자 자체를 고용했기 때문에 이런 부당한 착취가 발생했던 것이다. 모든 기술과 노동력을 양도할 수 없는 개인의 소유로 만들어야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한
관계에서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있다. 현재 노사관계는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 불공정거래를 하고 있는 셈이다. 개인은 그 어떤 것에도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의 개인화
현대의 노사관계는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와 동일하다. 각종 혜택만 달라졌을 뿐이다. 농노에게 노동시간을 줄이고 급여를 늘리는 것과 같은
배려를 해주면 현대의 노동자가 된다. 이는 노동의 집단화라는 점에서 두 관계가 동일했기 때문이다.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면 집단의 장에게도 종속된다. 노동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에게 종속되고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공산당원에게 종속된다. 종속된 노동자는 자본가와 공산당원에게 지배적인 영향력을
받았다. 노동의 집단화가 노동자를 집단에 종속시켜 차별 당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구조 때문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국가의 노동자는
대부분 억압 받고 차별 받고 천대 받았던 것이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가엾게 여긴 이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노동의 집단화를 가속시켰다. 노동자들을 모아 집단을 형성하여 사회에 다양한 혜택을 요구하게 되었다. 노동자 전체의 이익을 위한 투쟁. 사회주의자 라살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이런 것이
노동자 계급의 윤리라 말하고 있다. 「전체에 헌신하라! 그것은 인륜성의 영원한 근본 개념이다.」 이런 이타적인 집단에 대한 헌신은 개인의 고유성을 말살하여 그들의 의도와 다르게 개인을 집단의 부품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개개인의 결점 또한 개성의 일부임에도 그 결점을
감추기 위해 집단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노동의 집단화를 가속시킨 사회주의는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를 단단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을 뿐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가의 지위가 낮아지는 일이
있던가?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산당원의 지위가 낮아지는 일이
있던가? 사회주의는 계급 구분의 철폐를 지향한다지만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는 한 그것은 요원한 일이다. 어떤 경우에도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면 집단의 장의 지위가 높아진다. 결과가 그렇다. 공산주의 혁명으로 사회를 뒤집어도 집단의 장이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던가? 지금 어느 체제든 종속된 개인은 집단의 장에게 무력하게
배려만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모두의 자유와 평등을 바란다면 개인이 종속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타적으로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면 이기적인 개인의
욕망은 집단에 의해 지워진다. 집단에 의해 개인의 바람이 지워지는데 어찌 그걸 민주적이라 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모든 노동자가 동일하게 전체를 위해 헌신하자는 마음을 갖게 될 수가 있을 거라 보는가?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개성과 생각을 가지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그걸 무시한 채 모두가 전체를
위해 사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 주장한다. 그것이 행복한 길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일정부분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산업혁명 당시 노동자는 성숙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평생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수련공인 도제와 동일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기능장 아래에서 수련 받는 도제는 사회적으로 미숙했다. 그런 도제와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미숙한 임금
노동자는 노동자조차 선거권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평생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빈곤과 함께 차별과 억압과 퇴락에 시달렸다. 사회주의자는 그들을 위해 노동자 계급을 통해 노동의
집단화를 발전시켜 사회적 요구를 통해 정당한 대우와 함께 모든 계급 특권을 폐지하면 노동자들이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행복한 이상을
꿈꿨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안타깝지만 모든 노동자가 계속 같은 가치를 추구할거란 생각은 일종의 신앙에 불과하다고 하고 싶다. 행복의 본질은 바람실현이다. 임금 노동자의 지위가 상승하면 더 큰 것을 바라게
된다. 이는 당연하다. 배만 부르면 바라는 게 사라지는 개돼지도 아니고, 인간이라면 욕망에 근거한 큰 꿈과 바람을 가지는
게 정상이다. 노동자가 정당한 대우를 받는 순간부터 전체에 헌신하는
게 아닌 더 큰 바람을 갖게 될 사람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노동자가 전체를 위해 헌신했는데 어떤 노동자가 전체에서 벗어나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헌신하지 않는 노동자가 발생하는 순간 배려의 연쇄가
끊겨 그 공동체는 파탄이 나고 만다. 그래서 노동자에서 벗어나는 이를 공격하게 된다. 규제! 감시! 통제! 전체를 위해 헌신하게 만들어라! 이타주의 사상이 도달할 곳은 이처럼 독재다. 사회주의의 인류 구원 방식이 작동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더 큰 걸 바라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들은 계속 빈곤과 차별과 억압과 퇴락에 고통 받아야
한다. 마치 북한의 인민들처럼 말이다. 인민들에게 쌀밥에 고깃국을 먹여주겠다는 말을 아직까지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인민들이 쌀밥에 고깃국을 먹어 배가 부르게 되는 순간, 그 체제는 개개인의 욕망에 의해 붕괴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혁명을 통해 계급을 뒤집은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쥐게 되면 그들이야말로 계급 특권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거의 모든 공산주의 국가가 겪은 일이다. 스탈린의 대숙청은 경악할 정도였다. 사회주의로는 다양하게 변화하는 인간의 욕망을 근거로 한 행복을 얻게 해줄 수 없다. 되려 그런 욕망을 가진 이들을 부도덕하다며 비난할 것이다. 당시 가여운 노동자들을 동정하며 그들을 배려해준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진정 그들을 위해서라면 단순히 배려로 끝나서는
안되었다고 본다. 능력과 욕망을 가진 인간은 바람을 실현하기 위한
모두에게 공평한 교육제도를 마련하여 충분한 교육을 통해 계급과 관계없이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하여 계급 특권을 철폐하는 방향이 올바른 길이었다고
본다. 이런 걸 떠올리지 못했던 것은 당시 퇴락한 임금
노동자들이 평균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지성을 갖출 수 있을 거란 예측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시대의 한계다. 그런 관점에서 모든 인간이 모든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역할주의나 개인이 개인으로 남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노동의 개인화는 발전된 현대의 사회에서 평균 이상의 지성을 갖춘 국민들이 존재하는
국가에서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일 것이다. 사회주의는 비참한 환경에 놓인 지식이 부족한 이들을 배려하는 것 이상의 것을 줄 수가 없다. 진정 노동자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까지 가능한 실현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그런 가능한 모두의 바람을 실현해줄 수 있는 환경은
이기적인 자유주의가 마련해줄 수 있다.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거라 보는가? 인간은 타인의 바람을 들어줄 때가 아닌 본인의 바람을
실현할 때 행복하다. 그것은 타인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라 하더라도 같다. 봉사활동이나 기부도 본인의 자유의지로 행한 것이라면 행복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행동은 모두 이기적이다. 본인이 바란 것은 타인에게 어떤 이익을 주더라도
본인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된다. 그런 관점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를 돕는 것 또한 이기적이다. 노동자를 돕는다는 본인의 바람을 이루고 싶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그런 사회주의가 실현된다면 행복하다 여길 것이 아닌가? 이런 이기적인 행위를 모든 노동자가 받아드려야 할
진리마냥 말하면 안 된다. 그것은 오만한 착각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 다른 바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노동자는 전체를 위해 헌신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사회주의자의 이기적인 바람은 올바른 것이
되고 노동자 개인의 이기적인 바람은 그릇된 것이 된다면 이것은 오롯하게 사회주의자의 독선이 된다. 이런 것은 이타주의 사상들이 대체로 그렇다. 유교, 불교, 기독교 같은 종교나 정치적 올바름, 여성주의 같은 사상은 누구보다 타인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누구보다 편협하고 독선적이다. 개인이 전체를 위해 헌신하게 만드는 이타주의 사상은 집단에 개인을 맞춘다. 집단에 맞지 않는 개인은 공격대상이 된다.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을 정의의 철퇴로 내려찍으면서
정의의 일격을 날렸다며 자랑스러워한다. 일격을 맞은 사람은 자신의 개성을 잃고 집단의 일부로 전락해야 공격받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무개성의 시대가 오게 된다. 사회가 일색평면으로 단일화된다. 숨막힐 정도로 답답해진다. 이 얼마나 참혹한가. 진정 인류를 위한 길은 모든 사람이 자유의지에 근거하여 본인의 바람을 이루고 싶어하는
이기적인 존재일거란 전제하에 그들을 위한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이런 자유주의는 노동자를 돕고 싶어하는 사람의 마음도 포용할 수 있다. 자유로운 자유주의 아래에서 돕고 싶은 사람은 도우면
된다.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으면 된다. 사회구조상 복지체계가 마련되어야 사회의 질적 향상이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그들을 돕는 것은 필수적이다. 돕고 싶은 자에게 도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살면 된다. 모든 인간의 바람은 올바르건 그릇되건 이기적임을 잊으면 안 된다. 그래야 교만과 독선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노동의 개인화를 위해서는 우선 노동력을 상품화해야
한다. 모든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여 그 노동력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노동력은 자유권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고유한 소유로 양도되어서는 안 된다. 자유권을 양도한 사람은 양도받은 사람의 노예가 된다. 노동력을 양도한 사람은 양도받은 사람의 높은 잉여가치를
위해 착취당하게 된다. 양도했기 때문에 종속되었고, 종속되었기 대문에 착취당했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이란 상품을 취급하며 그 상품을 대여의 형태로 판매하는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 기업이 상품을 생산하여 고객을 찾듯, 노동자가 노동력을 상품화하여 고객을 찾아야 한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상품 주인과 상품 구매 고객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대등한 거래관계가 되어야 비로소 공정한 거래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지금은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자가 상품이 되어 양도되고 있다. 고용을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이 상품을 구매할 때 일생을 같이할 반려자를 정하는 것마냥 고심하는가? 노동자를 농노처럼 평생 종속되는 존재로 생각하니까
그렇게 고심하는 것이 아닌가?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면 상품화된 노동력의 가치를 명확하게 알 수 있어 그렇게 복잡한 고용절차가 필요가 없다. 노동시간을 생각해보자. 노동환경이 다름에도 대체로 9시부터 18시까지로 노동시간이 규격화되었다. 노동자를 구매한 다음에 노동법에 근거하여 일괄적으로
배려해준 것일 뿐이다. 만약 노동력을 구매했다면 노동시간이 규격화될 필요가 없다. 직무에 따라 시간보다 결과가 중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한 시간 일하고 계약을 많이 따냈다. 어떤 사람이 하루 종일 일하고 계약을 아무것도 따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한 시간 일하고 개발했다. 어떤 사람이 하루 종일 일하고 개발하지 못했다. 누가 더 유능한가? 어떤 노동력이 더 가치 있겠는가?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면 굳이 고정된 고용시간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 임금을 생각해보자. 어째서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의 임금을 알기가 어려운가? 지금은 일방적으로 자본가만 유리한 상황에서 거래를
하여 노동자가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상품을 거래하는데 자본가만 유리하다.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이란 상품의 정보가 명확하게 공개되지 못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상품을 경매에 올렸는데 비슷한 상품이 얼마에 팔려나갔는지 알 수가 없으면 정당한
경매가를 붙이기 어렵다. 그와 마찬가지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고용형태가 노동력이란 상품을 대여의 형태로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라는 인간 자체를 고용하여 종속되게 만들다 보니 이런 불공정한 거래가 나타나는 것이다. 정상적인 시장경제가 활성화되려면 노동력 또한 양도될
수 없는 대여의 형태의 상품으로 거래되어야 된다고 본다. 지금까지 시장경제 속에서 노동자가 착취당했던 것은 노동력이란 상품이 불공정하게 거래되었기 때문이다. 공정거래가 가능하다면 일방적인 착취는 보통 있을
수 없다고 본다.
모든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취급하며, 그 상품을 대여의 형태로 판매하는 사업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노동자는 보통 본인의 노동력만 취급하기 때문에
다수의 상품을 거래하는 자본가와 대등한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갑을 관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슷한 상품을 취급하는 노동자들이 공정거래를 위한 협약을 맺어야 한다. 가령 어떤 고객[자본가]가 부당한 거래를 한다면 비슷한 상품을 취급하는
공급자[노동자]는 노동력 공급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특정 고객에만 공급 제한을 걸기 때문에 공급자가
불이익을 얻을 확률이 적다. 블랙리스트라는 것이다. 부당한 행위를 널리 알려 사회적 공감대를 사게 된다면 다른 고객이 구매를 기피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최근 택배 차량 출입을 금지한 아파트에 배송물품을
아파트 입구 앞에 둬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비스 제한을 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고객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택배회사를 계속 이용한다. 고객이라 할지라도 불공정한 행위를 저지르면 그에 해당하는 제재를 받더라도 정당하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의 대등한 관계를 위해서는 노동자가 분야별로
서로 협약을 할 수 있는 어떤 집단이 필요하다. 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이란 상품을 관리와 가치성장을 하며 공정거래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집단이 있어야 개인이 개인으로 남을 수
있다. 그래야 개인인 노동자가 막강한 재력을 소유한 자본가와
대등해질 수 있다. 계속 어떤 집단이라 부를 수 없으니 임시로 이름을 정하겠다. 처음에는 온라인 게임에서 유저들의 모임인 길드라 가칭했지만, 한국식으로 부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모임을 뜻하는 모꼬지로 임시 가칭하겠다. 실제 뜻은 놀이나 잔치 또는 그 밖의 일로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이라고 한다. 자유국가에서의 노동은 마치 놀이처럼 즐기듯 본인의 바람으로 노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유국가에서는 강요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노동 또한 본인의 의지로 해야 한다. 본인의 바람으로 노동을 한다면 워라밸Work-Life Balance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즐기면서 일하므로 노동시간이 여가시간과 비슷하게
된다. 바라는 노동과 정당한 대가가 주어진다면 시간 관계없이
즐겁게 일할 수 있다. 실제 그런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은 경제적 자유를 얻어 생계걱정이 없는 상황에서도 시간관계 없이 노동을 즐긴다. 그것이 이상적이다. 반복 작업조차 게임을 떠올려보면 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게임 내의 지루한 반복 작업도 캐릭터의 성장을 위해
자발적으로 즐기면서 하는 이들이 많다. 보상설계를 잘 한다면 어떤 노동도 즐겁게 즐기게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꼬지는 적합한 이름이라고 본다. 받침이 없어 해외에서도 발음하기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슬로건은「노동자가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자.」다. 이렇게 모꼬지를 통한 협약으로 노동의 주도권을 노동자가 쥐고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기술의 주도권은 개발한 연구자가 쥐고
있어야 한다. 이는 자본의 주도권을 자본가가 쥐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이래야 시장경제가 자본만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어
일방적인 자본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금 시장경제는 노동과 기술을 자본이 일방적으로 양도받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자본만 가지고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불공정하며 비정상적이다. 기술, 노동, 자본이 모두 이기적으로 힘을 쥔 상태에서 서로를 견제하는 것이 환상처럼 느껴졌던 보이지 않는 손을
작동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 생각한다. 생산을 하는데 필요한 역할이 모두 대등하다. 이것이 바로 역할주의적 사고다. 본래 자본가를 견제해야 할 노동조합은 이런 걸 할 수가 없다. 자본가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택배와 아파트 같은 거래관계라면 다른 고객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아파트의
부당한 행위에 대항할 수 있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대체로 자본가에게 종속되어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노동조합이 자본가의 부당한 행위에 맞서 파업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노동조합이 다른 곳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보는가? 그들에게 파업은 공멸을 전제로 한 무력한 협박이다. 자본가 입장에서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은 정치권 개입이
없는 이상 그냥 해고하면 된다. 노동조합은 정치가의 배려가 없으면 자주적으로 뭘 할 수도 없는 무력한 구조다. 그러니 독립된 노동자의 분야별 집단인 모꼬지에서 노동력이란 상품의 공급을 조절할 수 있어야
노동의 주도권을 잡고 자본가의 부당한 행위에 맞설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기술도 동일하다. 기술이란 상품의 공급을 조절할 수 있어야 기술의 주도권을 잡고 자본가의 부당한 행위에 맞설 수 있다. 연구자는 노동자이자 기술개발자이지만 실상 필요로
하는 것은 노동력보다는 기술이기 때문에 좀 예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 노동자와 같이 모꼬지로 묶도록 하겠다. 노동력의 공급제어나 기술의 공급제어는 방식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모꼬지의 출현은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자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거라 본다. 노동은 체계적인 사상과 복잡한 이해관계를 가진 노동조합과 오랜 시간 뿌리내린 갑을 관계의 노사관계 등으로 개혁을 하는데 있어 어려움이 있을
거란 예측을 하게 된다. 앞장서서 변화를 꾀해야 할 노동조합이 노동자가 자본가의 종속에서 벗어나는 걸 바랄지 의문이 든다. 종속되면 배려 받으며 살 수 있지만 자유를 얻으면
세상과 투쟁을 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여 온라인으로 차량거래가 가능함에도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에 부딪쳐 거래가 어려운 상황이다. 사회가 진보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이 주도적인 변화를 시작하기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고 본다. 사회주의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순환에서 뒤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진보라는 말을 듣지만 사실 누구보다 보수적일 때가 있다. 과거 사회주의자도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을 보며 노동자 개개인은 보수적일 수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사회주의의 본질은 진보가 아니라 이타주의다. 반면 과학은 언제든지 현재의 지식이 부정될 거란
각오아래 끊임없이 완전한 진리를 쫓는 학문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가장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 과학부터 시작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자동화 체계의 발전으로 노동력의 필요성이 점진적으로 감소하면서 앞으로 시장경제는 기술과
자본이 중심이 될 확률이 높다. 그러니 기술이 노동을 잡지 않고 혼자서 개혁해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거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면 대의를 놓치게 된다. 연구자가 손쉬운 기술양도의 부당함을 느끼지 못했을
리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기술을 개발한 개인의 소유가 되게끔 하자는 주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다수의 공감을 살 수 있는
대의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대의가 없으면 개혁할 수 없다. 무슨 대의를 갖춰야 하는가? 자본종속으로부터 인류의 해방. 연구자의 기술독립으로부터 시작해 그 독립성이 다른
분야에도 전파되어 사회전체를 개혁하고, 그 개혁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 본다. 기술독립은 사회의 일방적인 자본종속에서 벗어나 모든 구성원이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이에 따라 모든 구성원은 그들의 기술독립을 응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본다. 실상 연구자가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분야의 동의가 없으면 개혁은 일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모든 분야의 지원이 절실하다. 어떤 사람은 연구만 하고 싶어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어려울 것이 없다. 지금 당장 현존하는 연구자 협회, 재단, 학회 등은 그대로 놔둬도 된다. 모꼬지의 역할은 연구자 개인이 개인으로 있을 수 있는 환경 조성이다. 모든 기술을 개발한 연구자가 소유한다. 소유한 기술의 특허침해는 기술공급 제어를 통해 방비한다. 연구자는 자본가에게 돈을 받고 기술을 헌납하는 존재가
아닌, 거대한 시장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자본가와 대등한 존재다. 막말로 모든 기술의 공급을 차단하면 새로운 기술이
필요 없는 회사를 제외하면 어떤 기업도 살아남을 수 없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기술을 구매할 수 없으면 그 돈은 무용지물이 된다. 자본가에게 돈으로 부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와 대등하게 거래할 수 있다. 기술의 주도권을 개발한 연구자가 쥐는 것으로 일방적인
자본종속에서 회피할 수 있다. 기술을 소유하여 기술의 주도권을 연구자가 잡자는 말로 연구자 사이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면 된다고 본다. 그리하여 시장경제에서 기술이 하는 역할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회에 모범이 되어 다른 분야의 개혁을 촉발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도권은 시장경제뿐만이 아니라 정부와의 관계도 동일하다. 지금 과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정부 관료가 예산을
책정하여 필요한 곳에 예산이 투입되지 못해 예산효율이 낮다고 한다. 기술의 주도권을 잡아 정부와 대등한 관계가 된다면 그런 일이 줄어들거라 본다.
모꼬지는 모든 개인이 개인으로 있을 수 있기 위해
다음과 같은 걸 추구한다. 저번 글에 썼던 걸 재정리해보겠다. 첫째, 분야별 모꼬지 창설. 둘째, 학교는 학업, 모꼬지는 취업. 셋째, 모든 이의 손쉬운 사회참여. 넷째, 민주적인 대표선출. 다섯째, 시장경제의 한 축으로써의 역할 공고. 여섯째, 기술과 노동과 자본에 대한 평가. 일곱째, 개인 능력 향상. 여덟째, 집단지성활용. 아홉째, 사업진출지원 열째, 능동적인 정치참여. 이렇게 분야별로 나눈 것은 역할주의적 가치관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각각 세부적인 사안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까지 해보겠다. 구체적인 정리는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첫째, 분야별 모꼬지 창설. 모꼬지는 기술이나 노동력이란 상품을 취급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그들이 개인이나 집단에
종속되지 않은 상황에서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걸 목적으로 한다. 모든 인간이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각자 상품을 취급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과 노동력 같은 상품은 결코 양도되어서는 안
되는 고유한 소유권에 해당한다. 그래야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고 공정한 거래를 할 수가 있다. 기업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과 달리 분야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각각 분야별로 모꼬지를 창설해야 한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노동조합과 달리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이 모꼬지는 학교기관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공인된 시설로써 자발적으로 소속되며 가입과 탈퇴가 자유롭다. 개인이 기술과 노동력을 관리 및 판매와 함께 상품가치를
올릴 수 있게 돕는다. 모든 인간이 상품을 취급하는 사업자가 되어 노동자와 자본가의 경계를 허문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대여의 형태로 판매하는 사업자이며 자본가는 국민에게 상품을
판매하는 사업자다. 그 관계는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다. 노동자는 노동력이란 상품판매의 이익을 통해 자본을 얻게 되면 자본가가 되어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다. 노동력 판매자가 노동력 구매자가 되어 노동력의 수요를
증가시켜 사회흐름을 유연하게 바꾼다. 이걸 통해 자본가가 바라던 노동유연화도 가능해진다. 개인이 소유할 수 있어야 소유 욕망과 함께 소유물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의식이 나타나는 법이다. 자본가 또한 이런 노동의 개인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길
바라겠다. 무엇을 기준으로 분야를 나누느냐에 따라 매우 복잡해진다. 기술이나 노동력 상품의 연관성에 기준을 두고 분야를
나누는 것이 좋아 보인다. 그래야 모꼬지에 모여 자유롭게 상품을 거래할 수 있을 것이다. 분야는 지금 당장 구체적으로 정하기는 어렵지만, 분야별 의석을 통한 정치참여를 고려해보면 세세한 기준으로 나눠야 할 것이다.
둘째, 학교는 학업, 모꼬지는 취업. 이는 교육개혁에 해당하는 사안이다. 학교에서 취업까지 담당하는 것은 학교가 제 역할 하는 걸 방해한다고 본다. 아무래도 취업에 맞춰서 교육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인간으로서의 성장이 아닌 시장경제의
도구로써 성장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학교는 학생의 인간적 성장에만 몰두해야 한다. 학업에 대한 강요가 줄어드는 시점에서 자발적으로 학업을 하게끔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학업에 집중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 인간적 성장은 그 이유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모꼬지는 취업을 담당하며 학생들의 사회참여를 지원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들에게 문제해결능력을 올려줄 것이다. 교사가 내려주는 것이 아닌 실제 사회 속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면서 능력을 키워나갈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군에서 실수한 경험으로 도전에 대한 두려움을 씻어내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입식으로 가르치다 보면 어떤 학생들은 그 가르침을 완벽하게 수행하려고 하다가 도전을
꺼려하게 된다. 그런 학생들이 실제 사회에서 작은 실수를 경험하면서
도전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마음껏 도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들에게 실패를 경험할 기회를 줘야 한다. 학생의 노동을 가볍게 여기는 문화가 있다. 학생이 일을 하면 그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주지 않는다. 많은 사회활동이 무급의 봉사활동에 그친다. 그것은 노동과 그에 따른 보상을 학습하지 못해 노동에
대한 친숙함을 주기 어려운 잘못된 관행이라 본다. 학생들이 게임에 몰두하는 것은 현실의 보상체계가 형편없기 때문이다. 보상체계가 정립되면 게임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높은 만족도를 느끼며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조기사회활동을 통해 학생의 자립도를 높여 부모의
지나친 간섭으로 인해 피곤한 교육계가 다소 편해질 거라 본다. 실제 사회참여를 돕는 모꼬지는 소속된 인원에게 전부 금융교육을 가르쳐 자산을 불리게 하여 언제든지
자본가가 되어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는 존재로 바꾸게 할 것이다.
셋째, 모든 이의 손쉬운 사회참여. 입사 과정 절차가 복잡한 것은 노동력 품질검증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잡한 절차를 통해 인원을 선별한다. 노동 상품에 대한 품질검증이 끝나 있으면 복잡한
절차 없이 어렵지 않게 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모든 노동자가 노동력이란 상품을 관리하게 된다면 연령이나 성별이나 경력이나 단절시간과 관계없이 능동적인 사회참여가 가능할 거라 본다. 노동력에 대한 구체적인 상세정보를 작성하고 학력과
경력에 따른 관계자의 평가를 통해 어려운 검증절차 없이 대여의 형태로 구매를 결정할 수 있다. 이는 구매자인 자본가에게도 이익이 되는 방식이다. 편리한 구매가 가능하면 구매자가 늘어 판매 또한
수월해진다. 노동과 자본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판매와 구매로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최근 노동시간이 줄어들면서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지는
일이 흔해졌는데, 그것이 당연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롭게 일을
골라할 수 있어야 한다. 손쉬운 사회참여가 가능해지면 모두가 여러 개의 일을 하며 종속된 존재로 남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노동력이란 상품을 취급하는 사업가로서 필요에
따라 노동력을 쉽게 거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중고거래 앱에서 순간적으로 필요한 노동력을 구매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이처럼 이제는 모두가 노동력의 구매자이며 판매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사회에 필요한 노동력이 유연하게 쓰이면서
유기적인 사회구조가 나타나 보다 더 편리하고 만족스러운 생활이 될 것이다.
넷째, 민주적인 대표선출. 모꼬지는 모두 대등한 관계기 때문에 대표를 민주적인 절차로 선출해야 한다. 지금까지 노동의 민주화가 불가능했던 것은 대다수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집단 내에서 민주적인 절차로 분야의 대표를 선출하고 구성원의 의향으로 시장경제에 기술과 노동력의 공급관리가 가능해진다면
그 순간부터 노동의 민주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모든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의 주인이 되는 것. 인력 공급이 아닌 노동력 공급이 되어야 하는 것. 노동의 주도권을 노동자가 쥐는 것. 이런 것이 노동의 민주화라고 생각한다.
다섯째, 시장경제의 한 축으로써의 역할 공고. 기술과 노동은 자본에 종속된 관계가 아니다.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한 축에 속한다.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대등한 관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충성할 필요가 없고 자본가는
노동자의 삶을 책임 질 필요도 없다. 노동자는 대여의 형태로 판매하는 노동력에 대한 품질보증만 하면 되고, 자본가는 그 노동력에 대한 대가만 충분이 제공하면 된다. 회사에 들어온 신입의 실수를 상사가 책임지기 때문에
상사가 높은 급여를 받는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는 걸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개인의 실수는 보험을 통해 처리하면 된다. 노동력이란 상품을 취급하는 모든 사람은 직무에 해당하는 보험가입을 하면 된다. 그에 따라 본래 기업이 짊어져야 하는 위험부담에
따른 금액을 전부 노동력 상품 구매에 쓰여야 한다. 그렇다면 대다수 노동자는 지금 받는 것 이상의 정상적인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개인은 집단에 보호받는 만큼 집단을 위해 희생되었다. 그것이 부당하다. 안정적인 노동력 공급을 위해 모든 노동계약은 반드시
구매해야 하는 기간을 정해두고, 해고 시에는 약정위반에 따른 위약금을 내게끔 해야 한다. 그것이 공정한 거래다. 이외 다양한 절차는 모꼬지에서 지원해줄 수 있는 부분이다.
여섯째, 기술과 노동과 자본에 대한 평가. 기술과 노동과 자본은 모두 평가 받아야 한다. 가치를 평가 받지 않고 어찌 공정한 시장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겠는가? 명확한 가치가 부여되어야 공정한 거래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가치 평가를 통해 노동자는 고객[자본가]을 고르고 자본가는 상품[노동력]을 고른다. 이런 식으로 공정거래를 대등하게 해야 일방적인 갑질이
사라지는 것이다. 한국이 학력사회가 되는 까닭은 자기어필을 할 수
있는 수단이 적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가치를 모르니까 학력으로 예상하게 되는 것이다. 다양한 곳에서 신뢰할 수 있는 구체적인 평가가 있어야 학력중심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공평한 가치평가로 연령과 성별과 학력과 지역과
인맥과 관계없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신입보다 능력이 부족하면서 연차가 높다는 이유로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은 정말 부당한 일이다. 그러면서 노동자 인권을 내세우며 해고도 못하게 한다. 이게 도대체 누구를 위한 노동자 인권인가? 신입 노동자는 노동자도 아닌가? 집단을 중시하면 개인은 말살된다. 노동력이란 상품에 가치가 부족한 노동자는 일거리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특히 자동화 설비가 발전할수록 그럴 것이다. 그런 노동자는 정부의 기초생활보장을 받는 것이 낫다. 괜히 능력도 없는데 높은 자리를 차지하며 생산성을 악화시키는 것보다 훨씬 낫다. 누구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우대받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생활을 보장받는 구조가 이상적이다. 이런 것이 노동의 유연화를 불러 산업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늘려줄 것이다.
일곱째, 개인 능력 향상. 인간은 성장하기 싫은 것이 아니다. 성장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많은 노년세대가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기 어려워한다. 예컨대 키오스크라는 무인주문기계를 이용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어떤 사람은 노년세대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배우기 싫어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이 배우길 싫어하기 때문에 배우지 않겠는가? 배우는 방법을 모르니까 배우는 것이 어려워서 결과적으로
배우길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평생 배워야 한다. 단순 노동 때문만이 아니다. 보다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 새로운 기술을 쉽게 터득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기술 발달을 고려하면 연령과 관계없이 꾸준히 배워야 하는 시대가 왔다. 그걸 모꼬지에서 지원해야 한다. 학교는 미성년까지의 교육을 담당하고 모꼬지는 분야에
맞춰 평생 교육을 담당할 것이다. 모든 인류가 보다 즐겁게 살기 위해. 그런 교육은 게임의 학습과 보상체계가 효율적이라 본다. 게임만큼 효율적으로 만족도를 주는 구조가 많지 않다. 선입견으로 게임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그런 구조를 현실에 적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노동력이란 상품의 정당한 가치평가를 위해 상품의
구체적인 소개가 필요한데, 그걸 게임의 시스템을 활용하면 된다고 본다. 각 직무능력을 단순 상중하 정도로 머무를 것이 아니라 레벨을 도입하여 체계적으로 수준을 명시할 수 있어야 한다. 소유하고 있는 언어의 레벨이나 기술의 레벨을 능력에
맞춰 올리거나 내릴 수 있어야 한다. 노력으로 능력을 키우면 그에 대한 보상이 명확해야 한다. 지루할 정도로 재미없는 반복작업도 게임에서는 즐겁게 할 수 있다. 보상체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성장을 쉽게 알 수 있다. 게임과도 같은 성장구조가 정착하면 게임을 즐기듯
편하게 도전하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경력 또한 레벨에 반영되어야 한다. 장시간 대여의 형태로 판매되는 일반적인 일자리부터 단시간의 거래 또한 세부적으로 작성되어 레벨에 반영된다면 사소한 노동도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빈곤에서 벗어난 국가에서 노동은 단순 생계뿐만이
아니라 노동을 하면서 느끼는 행복도도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행복을 위해서 효과적으로 만족도를 줄 수 있는 게임 시스템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겠다. 이것은 이미 게임의 형태로 증명된 방법이다.
여덟째, 집단지성활용. 완전자동화 사회로 많은 일자리가 사라진다고 해도
분야 자체가 사라지는 일은 드물다. 자율주행차량이 등장하면 대중교통 분야의 일자리는 많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교통 분야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운영관리 할 소수는 남게 된다. 그리고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가 교통 분야에서 일을 하고 싶다면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해야
한다. 교통이란 사람, 화물(화폐포함)등의 장소적 이동 즉 수송 및 전달과 관련된 직접 간접적인 모든 행위와 조직 체계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에 해당하는 새로운 이동 수단을 도입하거나, 교통에 관련된 아이디어를 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런 아이디어는 집단지성을 활용하면 효과적일
거라 본다. 아이디어를 공급하는 사회적 역할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디어 또한 상품화가 되어 그걸 거래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디어 공급자를 싱크탱크에 속하게 만들어 각 분야별로
충분한 아이디어를 동원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대중교통 운전사가 자율주행차량으로 일자리를 잃게 되면 그 동안 일하면서 생각해왔던 교통 관련된 아이디어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 큰 대가는 아니더라도 그걸 즐기면서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외 집단지성을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걸 지원해야 한다고 본다. 온라인으로 가능한 일이 무궁무진하다. 대표적으로 번역은 다들 알 것이다. 어떤 게임이 집단지성으로 번역된 사례도 있을 정도다. 위키 또한 집단지성의 결과물이다. 정보의 질은 상대적으로 낮더라도 접근성과 가독성이
훌륭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정보공급사이트다. 출처만 분명하면 간단한 정보는 위키가, 자세한 정보는 언론이, 깊이 있는 정보는 논문이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 일종의 설계도만 있으면 홈페이지 제작이나 게임도 개발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도면을 받아 각자의 영역만 개발하면 된다. 집단지성은 노동력을 대여의 형태로 판매하는 것과 달리 최소한의 정보로 가벼운 일을 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대가를 받는 구조가 될 것이다. 집단지성활용은 결과물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노동력의 상세정보는 필요가 없다.
아홉째, 사업진출지원. 우수한 노동자가 평생 노동자가 아니게 되어야 한다. 대기업의 직원들이 일정이상 수익을 얻게 되면 이제
공급자가 아닌 고객이 되어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늘어 공급도 원활하게 진행된다. 노동자를 위해 평생 노동을 올바른 것처럼 사회분위기를
조성한 걸로 안다. 평생 일자리가 중요하다는 듯이 말을 했다. 그런 것에 영향을 받아 노동력을 구매할 고객이 될 수 있는 우수한 인재들이 안정적인 직장에 머물렀던 까닭에 노동력 수요 감소를 불러 노동력이란
상품을 취급하는 노동자가 상품을 팔 대상이 줄어드는 손해를 봤던 것이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능력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다른 사람들도 좋은 것이다. 노동력을 대여의 형태로 팔아 자본을 마련한 사람은
누구나 다 사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부당한 자본가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부당한 자본가에 맞서 노동력 공급 차단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면 사업을 해서 그 자본가를
대체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열째, 능동적인 정치참여. 각 분야를 대표해 정치적인 활동을 한다. 이기적일수록 자유롭고 민주적이다. 이타적일수록 지배적이고 독재적이다. 집단 중심이 될수록 개인의 의사는 집단의 의사에 파묻혀 소멸한다. 자유국가에서는 모두가 이기적이어야 자신의 주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모두가 이기적이어도 타인이 이기적임을 받아드릴 수 있다면 질서는 유지된다. 서로의 이기심이 상충되면 누구의 이기심이 정당한지 토론을 통해 결정한다. 만약 이타적이라면 이런 토론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다. 누구는 이익을 보고 누구는 손해를 보는데도 아무런
의사표현도 못하고 지나가버린다. 부당함과 부조리와 부패가 계속된다. 이타주의는 자유국가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기주의야말로 자유국가에 어울린다. 이기적인 주장이 부딪치는 토론이 정치에 영향을 끼쳐 국가가 운영되는 것이 바로 자유롭고 민주적인 것이다. 국민과 국민이 이기적인 주장을 하고 토론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받아 드려진다. 국민과 정부가 이기적인 주장을 하고 토론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받아 드려진다. 부모와 자녀가 이기적인 주장을 하고 토론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받아 드려진다. 이런 식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각 분야의 길드는 모두 자신들의
분야의 이익을 위해 이기적인 주장을 펼치며 정치적인 활동을 한다. 만약 다른 분야와 의견이 충돌할 경우 토론을 통해 우선시할 의견을 선택한다. 길드는 자본을 견제할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들을
견제하는 일도 하게 된다.
분야별 의석
최악을 피해 차악을 뽑는 것이 일반적인 시대에서
과연 한국 정치는 민주적이라 할 수 있는가? 차악을 뽑는 사람들은 선거 후보 중 원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 사람이 많아지는 시점에서 한국의 정치는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양당의 후보가 아니면 선출될 확률이 희박한 시점에서
사실상 한국은 양당독재체제나 다르지 않다. 지금 양당은 적대적 공생관계다. 여당이 실수하면 야당이 지지 받고 야당이 실수하면 여당이 지지 받는다. 그 외의 선택지가 없다. 왜냐하면 국민의 정치성향이 정당의 설득과 선동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고유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정당이
주입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침략, 침공, 탄압, 천대, 역차별 등의 마음의 상처를 자극해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싹 틔게 한 것이 사상으로 형성되었다. 반공주의, 민족주의, 민주주의, 여성주의, 반여성주의 같은 성향은 설득과 선동을 한 정당이
만든 결과물이다. 그렇게 형성된 지지자 밭에 공천권한을 쥔 사람이
공천을 하면 웬만하면 뽑히게 된다. 정치의 주도권이 국민이 아니라 공천권한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정치가는 누구의 의사를 반영하겠는가? 공천권을 쥔 사람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겠는가? 시스템 공천을 도입한다는 얘기도 들은 기억이 난다. 그래 봐야 국민의 민의가 없으면 별 의미가 없다. 정당의 비례대표는 과연 국민의 의견을 얼마나 수용하고
있었던 것인가? 정의당의 비례대표 1번은 정말 웃지 못할 현대판 희극이다. 민의는커녕 지지자들의 의사조차 반영된 인사가 아니라고
본다. 이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와 같다. 노동조합 자체가 힘을 쥐고 있는 게 아니라 노동조합이
정치에 영향을 끼쳐 힘을 발휘하는 구조가 아니던가? 지금 노사관계에서 자본가는 노동자의 의견보다 정치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되어있다. 중대재해법도 자본가는 노동자가 아닌 정치가를 상대하고 있었다. 노동자는 아무런 힘이 없는 무력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게 정상으로 보이는가? 엉망진창이다. 국민과 노동자가 직접 힘을 쥐는 구조가 아니라면
언제까지나 무력하게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의견을 들었다. 과학 예산이 과학에 대해 잘 모르는 관료에 의해
책정되어 예산이 효율적으로 사용되기 어렵다고 한다. 이에 나는 동의한다. 역할을 수행할 능력을 갖춘 사람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불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과학계에 대한 전반적인 홀대는 정치권력 부재가 만든다고 본다. 과학계도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과학자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과학자가 진리를 규명하는 이유는 본인의 호기심뿐만이 아니라 그 진리가 인류를 보다 나은 삶으로 인도하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단순 생계를 위해서라면 그만한 잠재능력을 지닌 사람이
과학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 좀 더 쉽게, 좀 더 편하게, 먹고 살 길을 찾았을 것이다. 지금 정치구조로는 이들이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는 어렵다. 양당체제에서 정당에 속하지 않으면 정치참여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당에서 많은 분야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며 각 분야의
인사를 초빙한다. 그런데 그런 인사는 결국 정당의 입맛에 맞는 코드인사이다. 정당과 다른 이상을 가진 사람도 정당에 속하게 되면
정당을 위해서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 성가신 걸 바라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그래서 지금까지 정계는 분야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못했다고 본다.
시대가 바뀌고 있다. 출산율 저하로 지역이 소멸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지역의 대표는 과연 국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선거를 지켜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후보의 공약이나 정책에 별 관심이
없다. 나는 그것이 피상적으로 잘못된 것이라 느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애초에 그런 공약과 정책이
국민들에게 와 닿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고시생이 많은 노량진에서 나오는 공약이 재개발이다. 그런 공약이 고시생들에게 의미가 있었다고 보는가? 부가 집중되고 있는 시점에서 지역 내 소수라고 할
수 있는 재개발 관련자에게만 의미가 있었던 공약이라 본다. 이처럼 정책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사람들이 바라는 희망 어린 행복에 대한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이제 지역 내에서 평생 머무르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 전전하는 이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지역발전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제 소멸할 지역의 발전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예산은 누구의 입으로 들어가는가? 지역대표는 이제 모든 국민을 대표할 수 없다.
온전하게 민의가 반영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분야별 대표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지금의 의석은 그대로 두고 거기에 분야별로 몇 명씩
뽑아 의원으로 만들어 분야의 대표가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분야별 의석을 정당의 소속으로 뽑게 되면 정당의 입맛에 맞는 코드인사가 뽑힐 확률이 높으므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다. 분야별 의석은 모두 무소속으로 하여 분야를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이는 모꼬지와 연결이 된다. 모꼬지를 통해 분야를 모으면 그 분야의 대표가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기술과 노동이 각자의 주도권을 잡게 되는 노동개혁이
분야를 대표하여 민의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정치개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모꼬지만 잘 정립하면 이 체계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모꼬지의 대표가 곧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되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 비용도 그리 크지 않을 거라 본다. 각 분야에 속한 인원의 수가 다르므로 형평성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미국의 상원 하원처럼 분야별 인구수에 맞춘
의석과 분야별 고정 의석 수를 나눈다면 그런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본다. 어떻게든 최대한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바로 역할주의적 사고다.
부의 대물림으로 사회는 자본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신분제가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출산율과 마찬가지로 별 다른 대책이 없을 것이다. 지금 구조로는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방치상태에서 부의 집중과 빈부격차는 커져나간다. 그런 상황에서 사회를 구성하는 힘과 부를 분리시키기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겠다. 부의 대물림으로 사회적 역할을 맡지 않거나 그 역할에 맞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면서 보다 더 역할 중심의 사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겠다. 역할주의적 관점에서 많은 재산을 소유한 역할이 없는
사람과 재산이 없어도 역할을 맡은 사람을 비교하면 후자가 더 가치가 있다. 공직자 중에서 재산이 없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별다른 역할이 없는 엄청난 부자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 자본가 중에서 건실한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별다른 역할이 없이 물려받은 부만 가진 사람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 사회적 역할의 수행여부가 그 사람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모든 역할을 맡을 수 있고, 역할에 맞는 능력이 필요하고, 역할수행여부로 존중여부가 결정되고, 역할기여도로 대우를 달리 받아야 한다. 부의 대물림으로 물려받은 부는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낮아지고 사회적 역할로 새로 창출하는 부는 가치가 높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부의 대물림이 만드는 신분사회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은 과거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부의 대물림이 미래 세대의 가능성을 지워서는 안
된다. 그 시대는!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의 것이다!! 그걸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품질의 강화가 중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하겠다.
이 주제는 다시 한번 정리할 예정이다. 분야별로 나뉜 역할중심의 사회가 역할주의 사회의
기초라고 본다.
---
이타적인 사람들은 뭔가 올바른 걸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일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타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사회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래야 중국의 더러운 야욕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본인들만 이기적인 사람들과 타인에게 이타적이길 강요하는
사람들 때문에 불행한 겁니다. 모두가 이기적일 수 있는 환경 아래에서 건전한 욕망 표출로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더러운 이들의 지배야욕에 맞서 싸우도록 합시다. 이제 지배자와의 투쟁은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최근 동북공정을 하려는 드라마가 많은 비난을 받고
조기종영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건 드라마 왜곡 때문에 비난 받은 게 아닙니다. 드라마 내에 문화와 역사를 중국화하여 흡수의 형태로 침략하겠다는 야욕이 드러나있기 때문에 반발하며 비난한 것이지요. 표현자유침해가 아닌 침략방어입니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닐 겁니다. 국제공조를 통해 저항을 해야 합니다. 최소한 국내에서 한국을 우선시하지 않는 정치가는
한국 정치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으므로 역할을 박탈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출산을 보고 한국이 오래지 않아
사라질 거란 전망을 조소하듯 말하곤 합니다. 무언가 나아지길 바랐던, 한국의 발전과 행복을 바랐던 사람들은 무엇을 바랐던 것입니까? 무엇을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겁니까? 그 어떤 사상적 신념도 없이 단순히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행동하는 이들은 왜 그렇게
욕망이 부족한 겁니까. 최근 비리들이 연달아 터지고 있지요. 가족 비리, 친인척 비리, 집단 비리 등 전부 다 멍청한 이타주의가 만든 결과물 아닙니까? 우리가 남이냐? 라며 집단의 이타심을 강요하는 그런 행태가 비리를 양산했던 것 아닙니까? 인맥에 대한 애정이 그릇된 결과를 낳은 것 아닙니까? 가족을 위해서라는 변명이 추악한 비리를 정당화하지
않았습니까! 올바른 사람들이 보다 더 이기적이어야 합니다. 사회의 행복을 위해 각자 거대한 욕망을 여지없이
표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멍청한 이타주의가 개인을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게 하고, 양극화를 부추겨 일부 집단에게 부를 집중시켜 국가를 병들게 합니다. 부의 대물림 또한 자식에 대한 이타적인 애정이 만든
거잖습니까? 사회주의적인 노동조합도 노조의 이익을 위해 집단
이기주의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까? 타인의 이익을 고려하는 이해관계에 막혀 개혁이 진행되고 있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개인이 수준 높은 학습을 통해 바라는 사회상을 실현하기 위한 욕망을 표출할 수 있어야
이런 야망이 부족한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겁니다. 어떤 거대한 꿈이나 목적도 없이 생계나 물질을 위해 안정적인 공무원에 집착하거나 빚을 지고 투자하는 한국사회상은 절망적일 정도입니다. 남을 위해 살게 만들면 개인의 바람은 이렇게 작은
바람에도 날라가 추락하는 연약한 잎사귀에 불과해집니다. 이타주의 사회의 결말은 꿈을 잃어버린 무개성의 사회입니다. 고유한 개인의 작은 꿈도 없으니까 작은 불편함에 집착하고 시시한 것에 휘둘리는 것 아닙니까? 이타적이니까 집단의 눈치를 보고 집단의 말을 맹신하며
똑같은 스타일의 옷과 꾸밈을 자랑하고 무지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거 아닙니까? 선량한 이타주의자 여러분. 여러분들이 꿈꾼 세상이 이런 것이었습니까?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꿈을 갖게 해야 활력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겁니다. 전체를 위해 희생하도록 공장에서 찍어내듯 같은 유형의
인간들을 양산하면 꿈이 없는 인간이 되어 눈앞에 이익에 집착하고 소소한 물질의 이익만 바라는 사회가 되어버립니다. 아아, 도대체 무엇을 했던 겁니까. 올바른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동정심에 눈이 멀어 배려로 끝나는 사상에 휘둘리는 바람에
근본적인 개혁을 하지 못한 채 사람들을 무력한 이타주의자로 만들었던 것을 보며 깊은 분노와 슬픔을 느낍니다. 동족에 대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애증 속에서 이들을
퇴락하게 만든 먼지를 닦아내면 개개인의 고유한 빛을 발하게 될 거란 작은 희망을 가지고 말합니다. 모두가 큰 꿈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올바른 일을 하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멍청한 양당정치가 싫어서 한쪽 당이 독식한 뒤에
어떤 혁명을 거쳐 전부 분열하길 바랐을 때가 있었습니다. 양당정치가 끝나지 않는 걸 보며 답답함을 느꼈지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애초에 국민 사상이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라 양당정치가 존재했던 거고, 그 양당정치를 끝내기 위해서는 사상정립을 통해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정치는 사실상 양당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니 민주적인 선택권이 있기나 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예전에 어떤 외국인과 대화를 했는데, 그 사람이 왕정을 옹호하며 민주주의를 비판하더군요. 반박하기 위해 민주주의는 일반 시민도 지지를 받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체제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양당정치 구조 아래 그런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민주당이 중도층을 포섭하고자 지역정당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애를 썼죠. 그렇게 해서 권력을 얻었던 정당이 민족주의적인 태도로
북한과 중국의 눈치(인민망 인사는 황당했음)를 보고 극단적인 여성주의를 옹호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고 있었다는 게 신기합니다. 중도를 버리고 다시 극단으로 돌아간 기분이 어떻습니까? 반중과 반페미 정서를 모르면 또 같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민족주의나 여성주의가 정말 옳다면 욕을 먹더라도
옹호했을 텐데 그게 아니잖아요. 민족주의는 집단의 정체성을 혈연과 과거로 규정하는 편협한 사상이죠. 특히 유교가 섞인 한국식 여성주의는 얼마나 앞뒤가 다른지. 가부장제의 배려는 받고 싶으면서 여성주의의 자유는
얻고 싶은 모순을 보면 이런 것에 휘둘리는 것 자체가 한국 인문학의 수치입니다. 국가와 여성을 위한 새로운 사상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기성화폐와 가상화폐는 이런 관계 같은 느낌이 듭니다. 기성화폐가 확립한 금융질서 내에서 자유로운 가상화폐. 국가가 확립한 사회질서 내에서 자유로운 마피아. 별다른 책임지는 것 없이 기성화폐를 몰아내겠다는
것은 너무 염치없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단순 투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가상화폐의 사회적 역할을 확실히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건 나 말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한다, 라고 생각이 들어도 무슨 의미가 있나, 라는 생각이 들어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이미 내적인 일그러짐을 바로잡기 위한 고찰의 시기는
지났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뒤가 없는 외줄타기 하는 기분. 기분이 아니라 현실이지만요. 나는 무엇으로 평가 받을 수 있을까요? 평가 받기 위해 자격증 같은 걸 취득하기 위한 지식
쌓기는 시간낭비로 느껴집니다. 나의 사상을 완성하고 싶어요. 몇 가지 사상서를 읽고 있는데 최소 그 수준 정도는 쓰고 싶네요. 공부하다 보면 느끼는 게 있어요. 사상에 관해서 한국은 세계적 영향을 끼치는 발상지가 된 적이 없던 게 아닐까 싶어요. 현대사상으로 따지면 아시아 전체가 그러하지요. 자유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아. 아. 언젠가 한국과 아시아를 현대사상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습니다.
user error : Error.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