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경제의 역할2021.09.06 AM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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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역할

 

 

 

시대의 문제는 그 시대의 세대가 해결해야 한다. 어떤 시대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 시대의 세대가 해결하고 매듭 져서 후대에 넘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시대의 세대가 과중한 문제로부터 벗어나 다소 여유롭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한국은 전대가 물려준 산더미 같은 문제를 짊어져 불행하다. 몇 가지 알아보자. 노동자 착취 문제는 산업혁명 시대에 해결했어야 했다. 그걸 해결 못했기에 지금 노동자는 농노의 위치에서 배려만 받고 있다. 농노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배려만 받는 것은 상처를 치료 받지 못한 채 진통제만 먹는 것과 같다. 유교사상으로 인한 폐해는 광복 이후 해결했어야 했다. 그걸 해결 못했기에 지금 한국은 유교사상에서 현대이념으로 넘어가질 못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 외교, 역사, 교육, 여성, 아동, 세대, 갑을 등 다방면에서 수많은 문제는 아직 사상이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강요에서 자유로 사회가 바뀔 때 발생하는 문제는 문민정부 이후 해결했어야 했다. 그걸 해결 못했기에 지금 한국은 출산율과 취업률이 박살이 나고 사회가 혼란스럽다. 강요하는 수직사회에서 자유로운 수평사회로의 전환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나 자유가 이념인 이상 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이런걸 그 시대에 해결했더라면 현 세대는 확실히 말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행복했을 것이다. 정말 아쉽다.

한국은 유교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유교사상의 틀 안에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드리게 되었다. 유교 필터를 거치고 난 뒤에 과거의 문제를 해결 못한 사상을 참고하니 더욱더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유교 필터는 새로운 사상의 장벽이 되어 한국 사회의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한국은 본래 사회주의가 적합한 나라다. 왜냐하면 유교사상이 사회주의와 본질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자유가 만드는 노동자 착취를 보고 질서를 강요하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사상이다. 어떤 질서를 만들고 거기에 모든 인간을 맞춘다. 그 질서를 근거로 만들어진 관계와 집단과 연대를 중시한다. 여기서 그 질서를 만드는 자만 달라졌다. 과거엔 왕과 귀족이었다면 현대엔 사회주의 정치가나 공산당원이다. 아직 한국이 왕과 양반이 있던 시대에 쓰이던 유교사상에 머물러 있으므로 다수의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빠지고 자유를 외치는 이조차 사회주의식 억압과 강요를 자행하는 것이다. 이 기초적인 이해가 없으면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경제적으로 보수라 주장하는 정당이 권력을 쥐었었는가? 그 정당 구성원도 유교사상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보수라 하더라도 다른 면면에서는 사회주의적 형태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군사독재의 계획경제도 사회주의와 비슷하지 않나. 이후에는 그 시대의 향수와 선동으로 권력을 쥐었다. 경제적으로 진보라 주장하는 정당도 열심히 선동해서 권력을 쥐었으니 한국정치는 선동정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국정의 능력과 무관하게 선동으로 권력을 쥐었다는 것이다. 정책이나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던 국민이 얼마나 있었나. 애초에 정책만 공약으로 내세우는 것도 이상하다. 사상과 이념을 알면 정책의 방향성을 알게 된다. 그걸 먼저 알리는 게 우선 아니던가? 이런 선동정치의 근원은 역사적으로 실제 직간접적으로 겪은 피해의식에 있고 정치적으로는 선동에 취약한 지역대표에 있다.

 

뭔가 문제가 생기면 유교의 틀 내에서 과거의 사상을 참고하여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경제에 문제가 생기면 자본주의와 그 파생사상을 참고한다. 노동에 문제가 생기면 사회주의와 그 파생사상을 참고한다. 도덕에 문제가 생기면 유교사상이나 다른 종교사상을 참고한다. 그리고 그걸 기준으로 옳고 그름이나 방향성을 결정하고 따른다. 그런데 이런 사상들은 결국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 못한 불완전한 사상이다. 과거의 문제를 해결 못한 사상을 참고하여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안다. 과거의 사상으로 현대 사회가 형성되었다는 걸 안다. 과거 사상을 참고한 나로서도 그 사상의 위대함을 폄하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냥 단순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문제를 미래로 떠넘긴 사상이라는 점은 달라질 수가 없다. 진실을 외면해서야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사상들도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해체주의는 과거에 만들어진 기준에서 벗어나자는 것 외의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PC주의는 과거 사상을 부정하며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불쌍하니까 배려하자를 강요하며 권력을 얻고자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떤 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 만들어졌다고 하여 그걸 배제하면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없다. 그러면 제대로 된 답을 도출해낼 수 있겠는가? 이제는 과거가 떠넘긴 문제와 현재 발생한 문제와 미래 발생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대로 된 답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실책은 경제 진보의 열쇠를 노동자와 정치가에게 빼앗긴 것에 있다. 경제란 인간의 공동생활을 유지 및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의 활동 또는 그것을 통하여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자본가가 그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노동자 착취 문제를 외면한 결과, 경제 진보의 열쇠를 노동자와 정치가가 주장하는 사회주의에 강탈당했다. 노동자 착취 문제는 부의 분배 문제다. 제대로 된 부의 분배가 되지 못한 결과가 노동자 착취다. 그렇다면 부의 분배는 누가 전문인가? 누구의 역할인가? 노동자인가? 정치가인가? 아니다. 자본가다. 경제 전문가인 자본가야말로 부의 분배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러나 자본가가 문제를 방치하며 보수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그걸 방치했으니까 노동자와 정치가에게 그 역할을 빼앗겼다. 빼앗아간 이들은 고작 노동자를 배려 해주는 것에 머물렀다. 중국과 북한을 보면 사회주의의 일그러진 결말인 공산주의를 알고 있음에도 그거 말고는 방법을 모르니까 계속 배려만 해주고 있다.

 

더 이상 전문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걸 놔둬서는 안 된다. 경제의 전문가인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와 정치가가 부의 분배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의료의 전문가인 의사가 아닌 간호조무사나 영업사원이 수술을 하려는 것과 같다. 자본가가 노동자 착취를 방치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의사가 대리수술을 방치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과 같다. 문제해결을 하지 않으려는 보수적인 태도 때문에 자본가는 노동자와 정치가에게 진보의 열쇠를 빼앗겼고 의사는 환자와 정치가에게 진보의 열쇠를 빼앗겼다.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 직접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자본가는 경제 원칙에 따라 효율적으로 이윤을 얻는 방법을 알 것이다. 그렇다면 효율적으로 부를 분배하는 방법도 알 것이다. 경제계에서 알뜰살뜰하게 절약한 돈으로 낸 세금을 정부에서 낭비하는 걸 보면 분통이 터질 수 있을 거라 본다. 그런 걸 지켜보고만 있지 말고 이제 경제도 진보해야 한다. 사회주의가 아닌 진보를 해야 한다. 단순히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인간에게 필요로 하는 역할을 맡는 이에게 정당한 부의 분배를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나가는 자본주의의 진보를 해야 한다. 지금 보면 부의 분배 단계에서 별 필요가 없는 이들이 과도한 부를 얻고 있다. 그런 점을 개혁하고 개선하는 진보를 하게 된다면 경제의 진보 열쇠를 노동자와 정치가에 빼앗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에서 자본주의가 승리했다. 사상적으로 보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결정적인 차이는 누구를 생각하느냐였다. 자본주의는 소비자라는 이름의 대중에게 필요한 것을 상품화하여 판매하는 것에 몰두했고 공산주의는 생산자라는 이름의 노동자를 집단의 연대를 통해 배려하는 것에 몰두했다. 소비자를 생각하고 만든 상품과 생산자를 배려하며 만든 상품 중에서 일반적으로 가치가 높은 것이 전자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결과적으로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상품화 능력에서 승패가 갈렸다. 상품 가치 낮은 걸 무료로 나눠줘 봐야 국민이 행복할 수 있을 리 없다. 상품 가치 낮은 걸 해외에 팔아봐야 팔릴 리가 없다. 상품화 능력만 보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애초에 승부가 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노동자 착취를 방치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승리했기 때문에 그걸 방치하는 것이 옳다며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게 잘못되었다. 이제 자본주의도 진보해야 한다. 승패는 상품화 능력에 있었다. 그렇다면 상품화 능력은 키우면서 올바른 부의 분배를 통해 착취는 하지 않는 진보를 하게 된다면 자본주의의 결함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본다. 그 역할을 경제의 전문가가 맡아야 한다. 경제는 경제에 속한 이들에게 올바른 부를 분배하는 역할을 맡고 정부는 경제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게 안전망을 통해 생존을 보장한다. 이런 것이 바로 역할주의다.

 

모든 인간은 보다 큰 욕망을 가져야 한다. 욕망이란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하는 것이라 한다. 선과 악이나 물질과 정신과 관계없이 순수하게 무엇에 대한 강한 바람이 욕망이다. 이런 욕망이 나쁜 행동을 낳는다고 하여 욕망 자체를 나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기득권이 잘못을 저지르면 욕망이 크기 때문이었다며 비판한다. 그러나 그것은 욕망이 크기 때문이 아니다. 욕망이 작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생각해보자. 인간은 큰 욕망을 위해 작은 욕망이나 욕구를 참는다. 몸을 위해 식욕을 참거나 성적을 위해 수면욕을 참는 것과 같다. 이런 관점에서 기득권의 잘못은 국가의 발전이나 국민의 행복이라는 큰 욕망보다 사리사욕이라는 작은 욕망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럼에도 욕망이 나쁘다는 인식이 퍼져나갔던 것은 인간의 마음에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욕망이나 이기심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악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에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수 없다 생각한 이들의 사상 때문이다. 그럴 거면 뭐 하러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규정하나. 사회를 구성하는 건 사회에 속한 인원이 다른 인원을 사랑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것이다.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밖에 없으면 애초에 사회구성 자체가 안 된다. 도덕이나 질서로 강요하지 않아도 타인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마음껏 자신의 욕망을 이기적으로 추구해야 사리사욕이란 작은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큰 꿈을 추구하여 사회를 이롭게 하여 행복하게 되자는 사상이다. 인간의 한계를 멋대로 규정하고 욕망이나 꿈을 절제하게 만드는 건 유교 같은 종교나 사회주의다. 욕망을 줄인 결과가 조선 말기고, 종교의 부패다. 경제에 속한 인간도 더 큰 욕망을 추구해야 한다. 어째서 경제는 물질적인 욕망만 추구해야 하는가? 인간은 어떤 감각이든 한계점이 있다. 지나치게 높은 쾌락을 받아드릴 수 없어 망가진다. 지나치게 높은 슬픔을 받아드릴 수 없어 망가진다. 따라서 하나의 감각을 최고로 즐기기보다 다양한 감각을 복잡하게 즐기는 것이 오랫동안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다. 보수에 머무르며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새로운 진보로 나아가는 자본주의를 추구하여 국가의 기초체력인 국민의 상품화 능력을 키우고 국민의 행복을 부를 올바른 부의 분배를 하는 것이 더 큰 욕망이며 즐거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한국의 성장은 경제가 주역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발전 방식이나 이윤 추구는 분명 우수할 것이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영역은 그런 방식 자체가 아니다. 인간의 사상이다. 시장원리란 수요와 공급에 의해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이 결정되는 걸 말한다. 여기서 수요란 무엇인가? 어떤 재화나 서비스를 일정한 가격으로 사려고 하는 욕구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욕구는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인간의 본성과 사상이다. 선천적인 욕구와 후천적으로 욕구의 방향을 정한 사상이다. 예컨대 선천적인 식욕과 그 식욕을 어떻게 충족할 것인지 알려준 사상이 수요에 있는 욕구의 근거다. 그런데 지능이 높은 인간은 사상으로 본성을 제어하거나 바꾸는 일이 가능하다. 본래 벌레를 역겹게 느끼지 않는 이도 교육을 통해 역겹게 느끼는 것처럼 사상에 의해 감각이 바뀌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실상 욕구의 근거는 사상일 확률이 높다. 본능이 이성을 잡아먹을 정도로 극한에 처하지 않는 이상 보통 사상에 의해 수요가 결정된다. 내가 다루는 영역은 경제의 원리보다는 수요에 영향을 끼치는 사상이다. 가치나 옳고 그름을 말하는 사상이다. 무엇이 가치 있고 올바른가? 자본주의의 진보는 그런 걸 바꾸는 걸 의미한다. 시장원리는 그대로 둬도 충분히 진보할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상파악을 해야 한다. 현상파악을 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우선 한국 경제의 상황을 몇 가지 살펴보자. 첫째, 상품화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경제참여인구 감소. 둘째, 정보확산을 통한 경제성장 공식의 노후화. 셋째, 경제 양극화로 인한 기초체력 부실.

 

첫째, 상품화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경제참여인구 감소. 경제참여인구의 감소는 국민의 상품화 능력 부족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핵심을 보면 그렇다. 상품화 능력이 높았다면 경제참여인구 수가 줄어들 수가 없다. 상품이란 사람에게 필요한 걸 의미하고 상품화는 사람에게 필요로 하게끔 하는 걸 의미한다. 능력의 상품화가 가능하면 기업에 필요한 능력이 되어 취업이 가능할 터이고 사물의 상품화가 가능하면 사회에 필요한 걸 만들 수 있어 창업이 가능할 터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상품화 능력이 부족했던 걸까? 그건 과거에 그 능력의 필요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기술이 발전하기 전에는 단순 노동의 수요가 높아 굳이 상품화 능력을 갖추지 않아도 취업할 수 있었다. 경제가 발전하기 전에는 창업이 수월하고 적은 임금으로도 어느 정도 만족하며 살 수 있었다. 교육이 발전하기 전에는 교육이 체계적이지 못해 문제풀이능력의 필요성이 적었었다. 그래서 사회에 필요한 걸 찾아 파는 문제해결능력을 갖춘 이들이 창업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시대가 달라졌다. 기술이 발전하자 단순 노동의 수요가 줄어들어 취업 풀이 좁아졌다. 능력을 상품화하여 기업에 필요로 되어야 취업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가 발전하자 창업이 어려워지고 적은 임금으로는 만족하며 살기 어려워졌다. 중소기업을 가느니 취업을 포기한다. 이직의 어려움을 아는 부모도 중소기업에 가는 걸 만류하는 실정이다. 능력이든 사물이든 수준 높은 상품화가 가능해야 창업이든 취업이든 할 수 있게 되었다. 교육이 발전하자 교육이 체계적이게 되었다. 시험을 풀 수 있는 문제풀이능력에 구애 받고 문제풀이능력을 키워 진학을 하고 취업으로 수익을 얻었다. 창업을 하는 것보다 대기업에 취업하는 게 더 중요시되었다. 문제해결능력이 아닌 문제풀이능력이 뛰어난 취업자만 늘어난 것이다. 이는 집단에 종속되는 걸 올바르다 주장한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기술과 경제의 발전으로 이전보다 상품화 능력이 더 필요하게 되었음에도 상품화 능력에 필요한 문제해결능력이 아닌 문제풀이능력을 키우는 바람에 국민의 상품화 능력 부족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줄어든 취업 풀에서 상품화 능력 부족으로 기업에 필요한 능력자의 수가 줄어들고 사회에 필요한 상품을 팔 수 있는 사업자 수가 줄어들면서 결정적으로 경제참여인구가 감소한 것이다. 상품화 능력이 뛰어났다면 착취가 아니면 기업을 유지할 수도 없는 무능한 기업은 진작에 사라져 중소기업 기피도 없었을 것이다. 체계적인 교육이 되려 경제 참여와 경제 선순환을 막았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근간이 되는 사상이 낡으면 이런 현상도 일어나는 법이다.

 

둘째, 정보확산을 통한 경제성장 공식의 노후화.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정보의 확산이다. 이것이 정말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경제적으로 보면 경제성장공식이 노출되었다는 점이 크다. 경제성장은 일종의 공식이 있다. 경제 수준에 따라, 국가 환경에 따라, 국민 수준에 따라, 선진국들이 경제를 성장했던 공식이 있다. 한국 또한 그 공식을 차용하여 성장했다. 많은 한국인이 실제 직간접적으로 겪은 피해로 인해 제국주의와 그를 야기한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사실 한국이 그런 흐름의 막차를 탄 자유진영의 막내다. 지금 한국은 제국주의의 폐해를 줄인 자본주의 공식을 본받아 성장했다. 노동자 착취(군사독재 아래 가발 생산 따위)와 기술의 발전(중공업의 발전 등)과 다양한 상품화(다양한 산업 진출)와 개발도상국의 경제성장(중국이나 동남아 등)을 돕는 것으로 한국이 성장했다. 이런 것이 전부 공개되었다. 어느 나라나 이걸 본받아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한국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면서 선진국 이후의 성장공식은 미지인 상태다. 개발도상국은 성장공식을 아는데 선진국은 성장공식을 모른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의 전철을 밟게 될 확률이 높다. 그토록 성장했던 일본이 오랫동안 정체된 까닭은 새로운 성장공식을 만들어낼 사상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제 제재가 있더라도 그에 대응하는 사상이 있었다면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베노믹스가 양적완화를 한다고 다방면에 비판을 받았음에도 마땅한 대안이 없었기에 그대로 갔다고 한다. 지금 금융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음을 안다. 그런데 그건 올바른 길이 아니다. 금융으로 돈이 오가는 것은 기초적인 국가생산력과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금융 자본주의를 통해 다양한 자산을 늘려나가더라도 자본을 통해 가치 있는 새로운 상품을 생산할 능력이 없으면 오래지 않아 도태되어버린다. 이건 양적완화와 비슷할 정도의 임시방편이다. 개발도상국과 격차를 벌리기 위해 기술 초격차를 추구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제 부족하다. 정보가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미국이 그렇다. 정보공개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중국에 노출하여 중국의 성장을 견인했다. 수많은 중국의 산업스파이가 미국에서 활동하여 가치 있는 정보를 빼가고 있는 상황이다. 정보가 공개된 이상 기술 격차만이 아닌 모든 국민의 수준을 높이는 것으로 격차를 유지해야 한다. 지금 중국은 한국 인구수만큼의 부자가 있다고 한다. 거기에 대응하려면 한국도 그 인구수만큼의 부자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가능한 많은 국민이 자본가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과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공장 같은 거대 자본재를 소유한 이들만 자본가가 되어 노동자를 착취하며 성장했다. 하나 현재는 다르다. 현재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들의 시작은 컴퓨터다. 소프트웨어로 부를 창출하여 하드웨어로 나아갔다. 이런 방식으로 누구나 다 능력만 있으면 자본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사회에 필요한 것을 찾은 다음 그에 필요한 기술을 연구소에서 찾은 후 협력하여 생산하면 새로운 상품화를 만들어 자산을 불릴 수 있다. 여기서 상품가치가 높으면 착취를 하지 않아도 자본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은 그걸 전제하지 않았다. 상품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운 것이 아니라 상품화가 되는 능력을 키웠다. 그런 까닭에 많은 학생들이 문제풀이능력을 키우며 집단에 종속되기만을 희망하게 되었다. 한국만큼 교육열이 높은 곳이 많지 않다. 만약 한국에서 문제풀이능력이 아닌 문제해결능력을 통해 상품화 능력을 키웠다면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의 순위에 많은 한국인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은 우수한 실무자가 많다. 그 실무자가 교육만 조금 다르게 받았어도 우수한 경영자가 되어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 경영자 아래에서 취업자리도 많았을 것이다. 많은 취업자리로 인력난에 시달려도 외국인이나 자동화 시설이 있으니 걱정이 덜하다. 능력만 있으면 마음껏 자본가가 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도 된다. 선진국에 도달한 한국의 앞길은 이제 본받을 대상이 없다. 이제 한국이 직접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한다.

 

셋째, 경제 양극화로 인한 기초체력 부실. 국가의 기초체력은 생산능력에 달려있다. 사람에게 필요한 걸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국가의 기초체력이다. 공산주의는 이런 기초체력 부실로 무너졌다. 그런데 경제 양극화가 발생하면 저소득층의 생활수준 및 교육수준 저하로 전체적인 생산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단순 노동이 필요하던 시대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아니다. 수준 높은 지성으로 가치 있는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사람 수가 늘어야 선진국은 기초체력이 유지될 수 있다. 기초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부의 분배를 통해 가능한 양극화를 해소해야 할 것이다. 올바른 부의 분배란 상품 가치가 있는 이들에게 부가 흘러가는 걸 말한다. 자본주의의 가치판단기준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정도이고 미덕은 그런 필요에 부가 흘러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 되는 능력을 가진 능력의 상품화가 뛰어난 이에게 부가 흘러가고,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 되는 상품을 만드는 사물의 상품화가 뛰어난 이에게 부가 흘러가야 한다. 상품화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부가 흘러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그러지 않고 있다. 몇 가지 알아보자. 하나, 부동산. 사람의 능력과 관계없이 자전거래나 정치적 수단 따위를 통한 부동산 가격 뻥튀기를 하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고 있다. 실상 이런 부동산 부자는 사람이 바뀌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의 능력에 관련된 자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기업은 사람이 바뀌면 큰 문제가 생긴다. 그의 능력으로 기업을 키운 것이기 때문이다. 부동산보다 기업에 부가 흘러가는 것이 올바르다. , 인력파견. 위험의 외주화를 명분으로 실제 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하지 않은 이에게 부가 흘러가고 있다. 원래 이런 회사가 없더라도 생산에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위험의 외주화로 좀 더 이익을 얻어보겠다고 하다가 잘못된 부의 분배를 해버렸다. 불필요한 인원에게 부가 흘러가는 것을 신체로 비유하면 피가 흘러가다 중간에서 줄줄 세어 나오는 것과 같다. 실제 생산에 필요한 능력을 제공하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는 것이 올바르다. , 무능한 기업. 착취가 아니면 기업을 유지할 수도 없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고 있다. 본래 이런 기업은 상품화 능력이 뛰어난 새로운 자본가에 의해 대체되어 사라졌어야 했다. 그리고 경제도 그에 맞춰 사물의 상품화 능력이 뛰어난 이에게 투자를 하여 대체될 수 있도록 유도했어야 했다. 착취를 하지 않아 올바른 부의 분배가 가능하고 중소기업 기피도 없었을 것이다. 착취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유능한 기업에 부가 흘러가는 것이 올바르다.

 

 

 

몇 가지 한국 경제의 상황과 해결방법을 살펴보았다. 상품화 능력을 키워 자본가를 늘리고 올바른 부의 분배를 하면 당면의 경제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이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상품이란 장사로 파는 물건이나 매매를 목적으로 한 재화라고 한다. 이걸 다른 시각으로 보면 사람이 구매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물건이나 재화라는 것이 된다. 필요하지 않으면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상품화란 즉 사람에게 필요로 되게끔 만드는 걸 의미한다. 능력의 상품화는 그 능력을 사람에게 필요로 하게끔 만드는 걸 의미한다. 사물의 상품화는 그 사물을 사람에게 필요로 하게끔 만드는 걸 의미한다. 상품을 만드는 사람은 정말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 지금 당장 주위의 상품을 보자. 이 상품들이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나온 것일 것 같은가? 어떻게 하면 소비자가 필요를 느끼고 구매할까? 그야말로 엄청나게 생각해서 나온 것들이다. 상품화하는 사람이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그들이야말로 정말 많이 사람을 생각하고 사랑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할 정도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걸 제공하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는 것은 매우 정당하다. 이렇게 사람을 생각하고 사랑 받기를 원하는 이들이 어째서 노동자는 착취했을까? 그건 관습적으로 노동자가 농노의 위치에 있어 같은 인간이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 주로 생산은 노동자가 하고 소비는 기득권이 했다. 그러다 시대가 흘러가 평등해지면서 노동자의 소비가 늘어났다. 그럼에도 관습은 유지되어 노동자일 때에는 천대하고 소비자일 때에는 우대하게 되었다. 참 씁쓸한 상황이다. 상품화를 하는 이들처럼 사람을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이제는 소비자에게 사랑 받기를 바라는 만큼 노동자에게도 사랑 받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인식만 살짝 바꿔도 자본가는 인본주의자가 된다.

 

노동자도 능력을 상품화하여 자본가에게 사랑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실 이 시점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구분이 필요한지 의문이 든다. 능력을 상품화하는 능력자와 사물을 상품화는 능력자로 구분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래도 일단 알기 쉽게 과거의 구분을 사용하겠다.) 상품화 능력의 개발은 어린 시기의 교육부터 시작해야 한다. 연애 능력을 어린 시절 키워야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하는 것처럼 상품화 능력을 어린 시절 키워야 자유롭게 취업하고 창업하며 생산할 수 있다. 지금 한국은 연애 능력을 갖춘 일부를 제외하고는 결혼을 포기하거나 조건으로 만나 결혼하고 있다. 조건 결혼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사랑하는 것이다. 조건을 사랑하는 것은 과거 중매와 비슷하다. 중매로 결혼한 다수가 황혼이혼을 바랄 정도로 행복한 결혼생활이 아니었음을 안다면 조건 결혼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걸 알 것이다.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은 상품화 능력을 갖춘 일부를 제외하고는 취업이나 창업을 포기하거나 만족스러운 일자리를 가지지 못한 상황이다. 사람의 삶 중에 노동시간이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다. 만족스러운 일자리가 아니어서 행복한 노동이 불가능하면 삶 자체도 불행할 확률이 너무나도 높다. 사회 행복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노동 또한 행복하게 해야 한다. 한국이 불행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많은 국민이 이 두 가지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상품화 능력을 갖추면 모두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된다.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는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상품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상품화 능력은 어린 시기의 교육단계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교육을 다룬 글에서 따로 체계적으로 작성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간단히 써보도록 하겠다. 우선 평가부터 달라져야 한다. 학생 능력의 평가를 단순히 점수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만든 상품을 점수로 구매한다는 것으로 접근해야 한다. 교사가 소비자가 되고 학생이 생산자가 된다. 이런 개념을 초기부터 인식하게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소비자인 교사에게 필요 되는 상품을 만들 수 있는가? 지식은 이런 연구에 필요할 때 각자 알아서 수집해야 한다. 이것으로 상품화 능력과 가치 있는 정보 수집 능력이 키워진다. 이런 것이 매우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 생각해보자. 과거 교육 체계가 정돈되지 못했을 때에는 수많은 창업자가 나타났다. 수준 높은 학력이 없더라도 상품은 생산할 수 있었다. 되려 고정된 지식이 자유로운 사고를 막아 다양한 상품을 생산하는데 방해가 된다. 간단한 지식의 상품화를 시작으로 복잡한 지식의 상품화로 나아가야 한다. 상품화 능력도 차근차근 키워 나가야 빛을 발할 수 있다. 보통 기업에서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그걸 대신한다. 이제 그걸 교육 단계에서 해야 한다. 이후에는 조별과제를 통해 교사는 소비자 역할을 맡고 조장은 자본가 역할을 맡고 조원은 노동자 역할을 맡아 각자 사물의 상품화와 능력의 상품화 능력을 키운다. 교사는 소비자가 되어 점수를 지불하고 과제를 구매하고 조장은 판매한 과제로 받은 점수를 계약에 따라 조원에게 분배한다. 과제에 따라 역할을 바꾸며 모두가 능력과 사물의 상품화 능력을 익힌다. 이것으로 체계화된 상품화 능력과 계약을 통한 거래와 올바른 부의 분배 능력이 키워진다. 이런 걸 키워나가면 어떤 것도 상품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그러면 복잡한 연구 결과를 봐도 그것과 다른 것을 조합해 새로운 상품화를 순식간에 떠올리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후에는 선동정치를 바꾸기 위해 분야의 대표에 입법권을 주는 것에 필요한 분야의 모임인 모꼬지에 속하여 분야의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으며 실제 사회에서 상품을 팔아봐야 한다. 능력을 상품화하는 이는 관련 분야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보거나 사물을 상품화하는 이는 관련 분야의 상품을 팔아봐야 한다. 이렇게 모두가 상품화 능력을 갖춰 한국이 전세계에 필요로 되는 국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올바른 부의 분배를 하기 위해서는 사람에게 필요로 되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야 한다. 그러지 못하고 불필요한 이에게 부가 흘러가는 것은 과거 특권계층인 성직자와 귀족과 비슷한 계층을 형성할 우려가 있다. 시에예스는 제3신분은 무엇인가에서 3신분이 모든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외의 특권계층은 국가에 전혀 필요가 없음을 역설했다. 그와 마찬가지다. 사람에게 필요로 되지 않는 이가 과도한 힘을 가지는 것은 국가에 전혀 필요가 없다. 필요가 없음에도 그들의 재산을 보장하는 것은 사회의 질서를 위해 범죄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과 같다. 경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가 없음에도 보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불필요하던 걸로 이익을 얻는 이들은 이제 점차 자취를 감춰야 한다. 부동산 자전거래나 주식 장난질 따위를 하는 이는 자본주의적으로 보면 부도덕하다. 사람에게 필요 없는 걸로 부를 얻기 때문이다. 그런 부도덕한 이들에게 투자나 지원은 잘못된 일이다. 시장원리는 수요와 공급으로 상품의 가격이 결정되는 걸 말한다. 그런 이들에 대한 수요가 줄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들의 생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을 위해 정부가 살아갈 수 있도록 안전망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그런 안전망에서 정말 사람에게 필요한 걸 만들 수 있는 상품화 능력을 키운 다음 다시 경제에 속하여 이익을 얻으면 된다. 그래야 올바른 부의 분배를 통해 사람에게 필요한 일을 하는 이가 행복해질 수 있다. 경제는 그런 이들에 쓰이는 복지 비용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필연적으로 불필요한 직종이 늘어나게 되는데 그들을 위해 기술의 발전을 늦추는 것이 오히려 경제에 해가 된다. 팍팍 발전하면서 뒤쳐지는 이들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 경제성장에 이롭다.

 

경제는 노동의 유연화를 주장할 것이다. 나도 그것에 동의한다. 노동의 유연화를 통해 유능한 능력을 제공하는 이가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자리에 맞지 않는 능력자는 다른 자리를 알아봐야 한다. 그것이 모든 노동자에게 이로운 일이다. 노동자를 위해서라며 무능한 노동자가 고위직에 있게 하는 것은 유능한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다. 그리고 이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기업의 유연화를 주장하겠다. 무능한 기업은 도태되고 유능한 기업이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의 유연화를 주장하면서 기업의 유연화에는 반대한다면 내로남불로 볼 수밖에 없다. 노동계가 유능한 노동자와 무능한 노동자를 구분 짓지 않는 것과 경제계가 유능한 자본가와 무능한 자본가를 구분 짓지 않는 것은 같다. 어째서 착취로 유지하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이 같은 그룹에 묶이는가? 천 원짜리를 이천 원에 팔 경우 착취할 수 밖에 없다면 천 원짜리를 오천 원에 팔 수 있도록 상품 가치를 올리면 된다. 그런 기업만 살아남도록 유도하는 것이 기업의 유연화다. 이런 식으로 기업의 유연화를 하면 착취하지 않고도 부를 분배할 수 있어 올바른 부의 분배가 가능해진다. 쉽지 않다는 건 안다. 하나 유능한 한국인이 문제풀이능력이 아닌 문제해결능력인 상품화 능력을 갖춰 상품 가치를 올리는데 전력으로 도전한다면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업의 유연화에 속할 기업은 인력파견도 포함된다. 굳이 그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 설령 프리랜서의 형태를 띠더라도 능력에 대한 대가가 온전히 능력을 제공하는 이에게 지불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불필요한 걸 정리하면 기존의 수익을 유지한 상태에서도 올바른 부의 분배가 가능해질 수 있을 거라 본다.

 

올바른 부의 분배가 미시적으로 보면 손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이익이다. 부의 분배에 대한 불만은 정치로 이어져 기업에 대한 규제와 억압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거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브랜드 가치를 올리기 위한 투자를 하고 있음을 안다. 사회에 투자하고 환경에 투자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라보면 된다. 당장 손해를 볼 수도 있고 이후에도 경제계에 속한 무능한 기업은 손해를 볼 수가 있다. 그래도 미래를 보면 이익임을 강조하겠다. 상품화 능력과 올바른 부의 분배로 경쟁자를 늘리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 하나 생각해보자. 한국인의 경쟁상대는 한국인이 아니다. 전세계인이다. 전세계에 사랑 받는 한국이 되길 바라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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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가 진실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그가 너무 멀리 나아가는 것을 비난하지 말라. 그의 직무는 목적지를 알려주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목적지에 이미 도착해 있어야 한다. 아직까지 노상에 있으면서 감히 자신의 깃발을 들어 올린다면, 그 깃발은 기만적인 것이리라. 그와 반대로, 행정가의 의무는 문제점들의 성격에 따라 그 추진 방법을 연구하고 단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철학자가 목적지에 있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행정가가 목적지를 보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 시에예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이 문장이 마음에 들더군요.

 

이제 웬만한 현상은 보면 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걸 평가할 수 있는 곳이 있긴 한가요. 평가 받기 위한 자격증을 위한 공부는 정말 불필요합니다. 하고 싶지도 않고요. 데이터수집을 위해 몇 가지 방법도 찾았지만 힘들더군요. 사상의 상품화는 선동과 세뇌입니다. 필요하게끔 만들어 파는 게 사상의 방식이죠. 종교나 공산주의가 대체로 그렇죠. 그런 걸 할 수는 없습니다.

 

역할주의 사상부터 글을 다듬고 사상가라고 말하고 다닐 생각이었습니다만…. 지금 상대하는 게 수백 년에서 수천 년 체계화된 사상들이라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서 생각에 초점을 맞춰 양식이 될 글까지 다듬지는 않았는데 이제 시간이 없네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꽤 가치 있는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괴롭다.

 

다음 글은 아직 모르겠네요. 쓸 주제야 차고 넘치니까. 그냥 아무거나 쓰면 됩니다. 자유적응이 필요한 분야가 많으니까요. 시기가 시기인 만큼 정치가 평가를 해볼까도 했는데 아직은 계획에 없네요. 하나만 말하자면 다른 분야에 있던 이들이 정치를 하게 되면 정치 전문가에게 지나치게 휘둘린다는 점입니다. 국민들이 굳이 다른 분야에 있던 이들을 지지한 까닭은 그런 구태정치를 보기 싫어서 그랬던 것일 텐데 말이죠. 할말은 더 많은데 여기까지만 하죠.

 

내가 독재자와 사회주의자를 지지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한국에서 사회적으로는 유교와 비슷한 사회주의가 보수고 자유주의가 진보임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는 민족주의가 보수고 자유주의가 진보입니다. 자유주의는 유교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상대하는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할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말하겠습니다. 선동해서 권력을 얻고 사리사욕을 추구하겠다는 생각하기보다는 자유로운 세상으로 바꾸겠다는 야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나 또한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자 하는 야망을 갖도록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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