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 주님의 은총을 받아 2009.01.08 AM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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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극장 이야기-김수형 감독 아름다운사람들
2006/03/28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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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극장 이야기

김수형 감독
취재 ㅣ 이병왕 기자




불나방은 자신이 타 죽을 것을 모르고 불을 향해 달려간다. 그들이 왜 불을 향해 달려드느냐는 질문에 혹자는 우스갯소리로 “지가 불에 탈 걸 알면 가겠습니까? 모르니 그러지요.”라고 대답 한다.

에로물 전문 감독에서 국내 유일의 기독교영화전용관 <뤼미에르> 운영주로 변신한 김수형 감독. 불나방 같이 세상의 정욕을 따라 살던 옛사람 김수형은 수많은 에로물을 제작하던 중 1981년, 어머니 때문에 고 최자실 목사의 삶을 다룬 영화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14년이 지난 지금, 자신의 영화관에서 다시 상영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십자가 위의 주님과 함께 죽고, 부활의 주님과 함께 살아나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에로영화의 대명사

인터넷 검색창에서 그의 이름을 치면 영화감독이란 타이틀과 함께 그가 감독한 40여 편의 영화제목들을 볼 수 있다. 그 중에 절반 이상이 에로물임을 알 수 있는 제목들이다. 6집까지 제작된 <산딸기>시리즈는 그를 1970~80년대 한국의 대표적 에로영화 감독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난 김 감독은 말한다. “당시 교회는 거의 못 다녔지요. 전도사였던 어머니는 평생 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철야기도를 하셨어요. 하지만 세상의 끈을 놓는 게 힘들더라고요.”
어머니와 형님 등이 아무리 기도하고 말려도 “에로영화도 예술이다.”라며 버텨나갔다. 자기 나름대로는 잘 나가는데 뭐가 문제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는 어머니와 가족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했다. 그래서 만든 영화가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이다.

참회록

“10여 년 전쯤 영화를 개봉하던 날 대홍수가 나면서 영화관이 물에 잠기고 쫄딱 망했어요. 그 때 성동구치소에서 4개월간 수감생활을 하면서 교회에 나가겠다고 다짐했지요.” 그러나 그가 실제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5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이다. 그가 영화감독을 하는 동안 거의 매일 교회에서 철야하시며 그를 위해 기도하시던 어머니가 안 계신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다. 그 후 새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신학공부도 시작했다.

‘나는 즐거워서 했지만 사회를 오염시키는 데 한 부분을 차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화와 선교를 연결시켜 ‘주님을 늘 만날 수 있는, TV보다 재미있는 교회’를 목표로 기독교영화전용관을 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발목을 붙잡는 것들

지금의 논현동 뤼미에르 극장에서 기독교영화전용관을 시작하기까지 모든 일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애초엔 남대문극장을 계약할 예정이었다. 이미 계약금까지 치르고 개관을 준비하고 있을 때 극장 측으로부터 해약 요청이 들어왔다. 표면상의 이유는 매일 아침마다 극장에 나와 불공을 드린다는 극장 사장 어머니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로영화 감독이었던 그가 영화관을 운영한다고 하자 성인전용극장으로 운영되는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기독교영화전용관으로 운영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준비했던 그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야 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좋은 장소를 주실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에 그가 겪는 시험과 손해는 더 좋은 곳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었다고 느꼈다. 그러던 중 소망교회 하명중 집사가 운영하는 뤼미에르 극장을 알게 됐고 이를 놓고 기도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하던 하 집사의 마음이 돌아섰고 그는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개관 준비에 너무 신경을 많이 쓰고 과로한 나머지 지난 3월, 시신경 마비가 왔다. 담당 의사는 7개월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보지 말고 쉬기만 하라고 했다. 그래야 60% 정도 회복이 가능할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나 2년여 동안 준비했던 기독교영화관이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주저앉아 걱정만 할 수는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었다. 그렇게 개관을 준비하는 두 달 여 사이에 그의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기독교영화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확신했다.

부활의 몸짓

사실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이 일을 할 수 없다. 인터넷으로 영화를 다운받아 감상하기 때문에 일반 상영관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든 요즘, 누가 일부러 기독교 영화를 보기 위해 상영관을 찾을까? 일단 개관은 했지만 입장수익은 형편없다. 토요일엔 100명 정도, 평일은 평균 50명 정도 관객이 들 뿐이다. 그래도 그는 “첫날엔 30명이었는데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고 말하며, 희망을 가졌다. 극장 운영에 부족한 금액은 신앙 간증 강사료 등으로 근근이 메우고 있다.

경제적 압박이 불 보듯 뻔한 것을 알면서도 직업이 영화감독이라 주님을 위해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작업으로 기독교영화전문 상영관을 생각했다는 김 감독. 영상선교사로 제2의 영화감독의 삶을 살겠다는 그는 조만간 한국교회 120년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 촬영에 들어가고, 12월 중에 ‘기독교 영화제’를 개최해 기독교 영화감독을 꿈꾸는 후배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려고 한다.

“당분간 고전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기독교 문화를 활성화하는 영상선교사의 임무를 받았습니다. 사탄의 문화가 복음주의 문화 속에 합류되도록 끝까지 밀고 나갈 것입니다. 그 동안은 세상에 즐거움을 줬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즐거움을 드릴 생각입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에스더가 그의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그가 어려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즐겨 본 서부영화의 주인공은 결코 죽지 않았다. 주인공이 죽으면 영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순(耳順)의 나이에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서부영화의 주인공으로 방금 전에 부름을 받았다. “The end”라는 자막이 뜨기까지는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가 펼쳐야 할 활약 또한 많이 준비되어 있다. 서부영화의 주인공이 언제 돈타령하는 것 본 적이 있는가. 그저 악당과 맞서서 물리치기만 하면 현상금은 물론이고 마을 주민들에 의해 보안관으로 추대되기도 한다. 아리따운 아가씨와의 로맨스라는 보너스와 함께….

축제의 예배를

그는 말한다. “예수님은 이벤트의 일인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이끌며 말씀을 전하셨고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고 축제로 이끄셨습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주)시네마 오병이어>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기독교영화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끄셨던 군중들이 느꼈던 것과 같은 이벤트를 이 땅에 재현하며 영상으로 선교활동을 하고자 한다. 최근 상영 중인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에서 간질에 우울증까지 겹친 무영 엄마가 안수기도를 받고 우울증이 치료되는 장면을 보고, 한 우울증 환자가 눈물을 흘리며 치유함을 받는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것이 그가 추구하는 이벤트의 본질일 것이다.

그저 기독교 영화만 보는 곳으로 머물지 않고, 음악회, 세미나, 간증집회 등을 구상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매주일 오후 4시에 열린 예배 형태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젊은이들이 부담 없이 들러서 함께 예배하고,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축제의 공간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이 공간이 주님의 역사가 임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이벤트의 장(場)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게재:2005년 11월
[출처] 뤼미에르극장 이야기-김수형 감독|작성자 지혜문학


...라지만 영상선교사의 임무는 3년도 못되어 끝났음.

주님이 시키지도 않은일 했다고 빨리 끝내게 하신거 같음.

개신교의 그 잘난 믿음도 자본 앞에선 GG

마르크스가 무덤에서 코웃음칠 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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