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글] 백제 멸망, 예식진 관련 게시물 보고 쓴 잡상2021.09.17 PM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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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종종 백제멸망과 예식진에 관련한 게시물이 올라오곤 하는 걸 보곤 합니다.

베이스는 예전 KBS에서 제작한 역사다큐에 기반하는 듯 한데요.

좋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좀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고 저도 중국사를 공부하는 것도 있고 해서 몇자 적어봅니다.

지금 쓰는 글에 대해서 확언드리기 어렵고 그냥 이런 이야기도 있구나 정도로만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예식진 배신이 나당연합군을 구했다 라는 인식.

 

웅진방령으로 추정되는 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한 건 명확한 듯 싶습니다. 그것이 나당연합군 특히 13만 당군의 위기를 구명했다라는 시각은 다소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을 듯 싶습니다.

사비성이 함락되고 웅진성 도주 후 예식진에게 배신 당하기까지 7/13~7/18 5일 간 기록 중 나당연합군이 군량문제로 난황을 겪었다는 기록은 현재 제가 찾질 못했습니다.

-[구당서], [신당서](고종 본기, 소정방 열전, 유인궤열전) [자치통감], [삼국사기](본기-의자왕, 무열왕).

-혹 관련 기록을 보신 분은 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진현성 등 요지에서의 전투기록이 나오긴 하는데 의자왕이 포로가 된 뒤인 백제부흥전쟁에서 보인다는 점에서 7/13~7/18 군량문제는 확정짓기 어려워 보입니다. 게다가 예식진의 공적(?) 명확히 보이는 기록은 묘지명을 제외하고 [.신당서] 소정방 열전에서만 확인되는 부분입니다. 열전이 인물의 개인사적 중심으로 보다 當代의 핵심적인 사안을 다루는 [본기](고종)에 예식진의 기록이 없는 것도 주의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예식진이 굶주린 13만 당군을 구원하는 큰공을 세웠다면 본기에도 그 위업이 기록되었을 터인데 단순히 소정방 열전에만 나오고 다른 여타 열전에도 보이지 않는 점은 감안해볼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묘지명]에 황제의 깊은 총애를 보여주는 구절로 예식진이 당시 주요인물로 당나라에서 받아들였다거나 고종이 심복마냥 신뢰했다고 보기도 합니다만 [묘지명]은 당사자 개인에 대한 찬양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묘지명]은 그런 류의 과장된 찬양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어느정도 호감이 있었다라는 팩트를 엄청나게 총애하고 신뢰했다로 뻥튀기 한다 이거지요. 분명 [묘지명]當代性을 다루는 현장자료지만 그 과장이나 이런 부분에 있어 주의를 요한다고 하겠습니다.

 

2. 예식진 배신의 공적에 대한 생각

 

그럼 예식진 배신이 어떤 점에서 당나라에게 주효했을까요? 나당연합군 특히 당군의 피해를 격감시킨 것이 가장 핵심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일단 의자왕이 피신했던 웅진성은 요충지로 공략이 쉽지 않았고 주변 백제 지방 군사력과의 연계문제 등도 염두 될 수 있었기에 예식진의 배신은 당나라에게 있어 고마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당나라는 백제원정 이후 고구려 원정 또한 생각하고 있었고, 백제원정 병력 13만은 이어질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보존될 전력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당나라의 동방전쟁은 어디까지나 최종목표가 고구려였습니다. 그런 이어질 본게임(2차 여당전쟁)을 위해 핵심전력의 보존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 굶주린 당군의 구명정도의 일은 아니지만 당군에게 있어 성가신 일을 덜어준 일이라는 점에서 예식진의 공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당군 전략 문제

  

만일 당군이 사비성 함락이후 역으로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면 당시 책임자였던 소정방이 이후 이어질 고구려 원정에 중임으로 기용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또한 그 전술도 폐기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2차 여당전쟁에서 당군은 백제전쟁 때처럼 평양성으로 주력대군이 해상에서 直功하는 전략을 펼칩니다. 한중관계사에서 중국 쪽에서 이렇게 주력대군을 해상에서 공격해온 일은 이때가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전후 전쟁에서 수군 혹은 수로군은 육군. 육로군의 보조적 역할이었는데 이때만 수군 혹은 수로군이 主攻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2차 여당전쟁에선 당군이 평양 외에도 요동이나 부여, 루방(대방) 등 여타지역을 평양주력병력과 동시적으로 공격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백제 원정 때 지방병력문제에서 오는 위험을 감지한 탓은 아닌지 생각됩니다.

(웅진의 피신한 의자왕이 지방 오방과 연계해 포위망을 형성하려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만 현재 사서상으로는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는 거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2차 여당전쟁에서 당군 전략보완을 감안하면 그런 기미가 있었거나 당군이 그런 부분을 감지했던 건 아닌지 생각되네요) 

 

일단 여기까지 생각나는대로 끄적여 보았습니다. 추후 여건이 된다면 소정방에 대해서 좀더 서술해 보겠습니다. 써놓고 보니 별것도 없는 뻘글이네요. ;;

확실한 정보라기 보단 그냥 이런 이야기도 있구나 정도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댓글 : 7 개
사학과가 망하는이유
제가 글을 너무 못썼죠. ㅠㅠ 그냥 백제멸망에서 예식진 공적을 너무 과대하게 보지 말자. [묘지명] 같은 자료를 참고할 때 주의하자. 정도만 이해하시면 되요.
  • netji
  • 2021/09/17 PM 10:43
어린시절 백제 멸망은 의자왕이 정사를 멀리하고 충신들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결국 몰락했다 라고만 배웠지 백제가 어떻게 몰락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지 못했네요 ..
백제 내부적 사정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시 국제관계 흐름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특히 당시 백제, 고구려 전쟁은 당나랑와 관련된 국제적 흐름이랑 관계 큽니다. 그리고 당시 당나라가 어떤 입장에서 전쟁을 일으켰냐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죠.
역사는 승자의 기록..
의자왕의 실책이 없었다고 보긴 어렵지만, 너무 오랫동안 저평가 받았지요.
헌데 또 의자왕을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과대포장 되는것도 있어서..
사학자들은 어디까지나 기록에 의한 객관적인 평가를 하겠지만,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할까....싶습니다
학계는 항상 고민합니다. 물론 먹고살기 힘드니 성과에 급급할 때가 많지만 ;;
여러 학계, 학자분들 모두 객관성과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항상 고민하고 게시지요. 의자왕에 대한 최근 여러 학술적 성과도 바로 학계의 부단한 노력 덕이지요.
하지만 결국 백제멸망이나 의자왕에 대한 문제는 단순히 자국사 측면을 넘어 동아시아사 측면에서 봐야되는 부분도 상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사 연구도 같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사실을 남기고자한 노력이기도 합니다. 물론 승자 위주로 쓰여진 부분은 부정할 수 없지만 사가들이 기록에 있어 '직서'를 행하고자 한 노력도 부정할 수 없지요.
사실 역사는 사실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대단히 주관적인 기록물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료를 제대로 직시하고 그 속에 감춰진 시비를 따지는 것이 바로 역사학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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