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덕밀덕] 만약 당신이 총에 맞는다면 -1부-2012.02.27 PM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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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과 창으로 싸우던 시대의 부상은 찔리고 베이는 형태였죠.
이런 상처는 급소가 아닌 한은 또는 해당 부분이 답이 없다할 정도로 절단된게
아니라면 그나마 어떻게든 치료 할 수는 있었죠.

확실한건 이전부터 상처에 이물질 - 옷조각이나 흙먼지등등 - 이 들어가면 항
상 문제를 일으킨다는건 경험적으로 알았으니 이에 대한 조치를 하긴 합니다.

물로 씼어내거나 닦아내거나 또는 몇분 정도 그냥 방치해서 자연스럽게 이물이 피와 함
께 외부로 배출되기를 기다리거나 했으니. (상처를 그냥 방치해서 자연스럽게 출혈에
따라 이물이 배출되기를 바라는건 많은 경우 되려 상처가 더 커져서 나중에 더 조치하
기 힘들어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런 다음 베인 상처라면 양쪽에 접착제를 바른 밴드(butterfly bandage)를 대서 묶거
나 아님 실로 봉합을 해버렸죠.


이게 butterfly bandage
반창고가 없을 때 알아뒀다 써보셔도 됩니다.
제일 좋은건 이런거 필요없는 것이겠지만서도.

물론 이런 수준을 벗어난 부상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오래전부터 치명적인 상처로 취급된 복부의 손상과 내장의 손상, 그에 따른 복막염으로
가는 과정처럼.
이런 경우, 사실상 살리기 어려웠던 편이고 살릴 방법도 없던 상황이었죠.

그런데 이 검과 창, 화살에 의한 상처는 총이 등장할 때쯤에 비하면 그나마 얌전한 수
준이었을 겁니다.
그 작은 납덩어리 하나가 어떻게 수복을 하기 힘들 정도의 구멍을 내버리거나 뼈를 완
전히 박살내버렸으나.


물론 이렇게 되면 이도저도 안됩니다.
최근 발굴된 에스파냐인의 화승총에 맞은 잉카인의 두개골.

그나마 얕게 박힌 총알은 탐침이나 의사의 손가락으로 위치를 알아내면 오리 주둥이처
럼 생긴 겸자로 총알을 물고 빼낸 다음 각종 이물을 빼내기 위해 물로 씼어낼 수라도
있었죠.

그러나 깊게 들어가서 탐침이나 손가락으로 총알 위치를 알아내기 힘든 경우는 단순명
료하게 포기됩니다.
X선도 뭐도 없던 시절에 총알이 몸속 어딘가에 있는지 알아낼 방법 자체가 없었으니.

덕분에 총을 맞고도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 특히 고참병사들은 죽는 그날까지 몸속에
총알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죠.

한편 총알에 의해 생긴 구멍은 화살보다 더 조치하기 곤란했습니다.
확실한건 이걸 단순히 봉합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지혈과 함께 아물 때까지 봉
해두는 조치가 필요했죠.

화승총이 전장에서 활약하던 시절만해도 화약에는 독이 포함됐더라고 믿었으며 총알을
맞았으면 뽑아낼 수 있는한은 뽑아냈고 지혈을 위해 소작을 한 뒤, 거기다 나름 지혈
겸 상처 보호 조치를 취하긴 합니다.
문제는 그 보호조치라는게 차라리 안받고 만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던게 탈이었죠.

바로 딱총나무(elderberry) 기름을 끓이면서 약간의 당밀을 넣고 더 끓이다 붕대를 뜨
거운 기름에 담궈 베어들게 한 뒤, 바로 상처에다 대버리는 겁니다.
뜨거운 기름을 먹인 붕대를 가져다 댔으니 화상을 입는건 당연할 겁니다.

뭐 이 방법 자체는 화승총이 나오기 천여년도 더이전 로마에서 이미 써먹던 방법입니다
만 크게 개선된거 없이 사용된거죠.

아, 총상만 아니라 화약으로 인한 화상을 입는다거나 할 때도 이런 조치를 하기도 했다
죠.
가령 유지와 화약류를 넣은 단지가 터지면서 그걸 뒤집어 썼다든지 하면 걍 뜨거운 기
름 붕대를 덮었더라는.

이렇게 부상을 악화시키는 외과적 처방은 16세기 들어서 개선됩니다.
프랑스의 외과의, 아니 '이발사' 외과의인 앙브로아즈 파레(Ambroise Pare, 1510. ? ~
1590.10.20)에 의해서.

이 때만해도 외과의는 긴 옷을 입고 학구적인 내과의에 비해 기술자적인 면이 강했었고
이발사 조합과 같은 영역을 공유하던 시기였죠.
즉, 외과의는 의사로 대접받던 시대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파레 역시도 이발사 겸 외과의로 도제 생활을 시작했고 가난해서 자격 시험조차 제대로
치르기 힘들 정도였다 하죠.
어쩌다 한 장군의 개인 의사가 되서 1537년의 토리노 포위 공격에 참전했을 당시, 파레
역시도 유서 깊은 뜨거운 기름에 적신 붕대로 환부를 감싸는 방법에 정통했었죠.

그런데 이 전투에서 파레가 준비해간 물품보다 더많은 부상병이 발생하자 파레는 부상
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다떨어진 뜨거운 기름 대신 자신이 만든 연고를 사용하게 됩니
다.

'뜨거운 기름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계란, 테레빈 유, 장미유로 만든 연고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날 밤, 나는 기름을 사용하지 않은 부상자들이 독이 퍼쳐 죽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연고를 바른 부상자들은 뜨거운 기름을 사용한 부상자들이 부어오
 른 상처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에 비해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



17세기를 넘어서면서 총상과 같은 부상은 얌전하게 치료되기 시작했으며 지혈도 소작법
외에 혈관을 묶어서 처치하는 방법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발전들은 얌전한 부위에 얌전하게 총알을 맞았을 때의 이야기지 뼈가 부숴
지고 박살났다든지 하는 부상은 자르는 방법밖에 없었답니다.

19세기까지의 어떤 풍경.

1. 육군 병사로 전투에 참전했고 대열속에 서있다 부상을 당했습니다.
   총에 맞아 팔이나 다리 뼈가 부숴질 수도 있었고 포탄이 팔다리를 통채로 뜯어날
   려 버릴 수도 있었으며 포도탄이 손만 잘라서 날려버릴 수도 있었죠.
   작게는 총알이나 파편에 의해 손가락 하나가 날아갈 수도 있었고.
   오히려 총검이나 기병창에 찔리고 기병도에 베인 상처는 가벼운 정도였죠.

2. 수병으로 작업을 하다 돛대에서 떨어져 골절 입었거나 혹은 뭔가에 깔려 팔다리가
   부숴졌습니다.

3. 민간인으로 마차에 치어 다리가 뭉게졌거나 팔이 부러져 개방 골절이 생겼습니다.

저런 경우 저 당시 의사들이 내릴 최후의 방법은 절단(amputation)이었죠.


1760년대, 절단 수술 방식.
다리의 경우 지혈대로 누르고 살을 베어낸 다음 톱을 넣고 썰어내며,
그런 다음 남은 살로 절단면을 감싸서 처리하죠.

지금이야 뼈를 맞추니 복원을 하니 여러가지 합니다만 저 때는 그럴 수도 그럴 생각도
없었답니다.
그렇다고 저런 상처를 그냥 내버려둬서 살 수 있냐면 그것도 아니었죠.
그러니 최후의 희망을 걸고 다친 부위를 포함해서 잘라내 버리는 수술이 선택됐고 저
때 외과의라면 이에 대해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아야 했답니다.
아니 오히려 최선을 다해 잘라내 주는게 옳은 행동이라 여겨지기도 했죠.

아닌게 아니라 저 때는 사지를 다친건 운이 좋은 축에 속했거든요.

만약 배에 구멍이 났거나 갈비뼈가 부숴지고 그게 폐를 찔렀거나 혹은 머리에 구멍이
났다거나 하면 전장에서는 보통 흔히 한구석에 조용히 치워졌죠.
살릴 방법이 없었고 당장 살릴 수 있는 다른 부상병을 포기해가면서까지 살릴 가치도
없었으니.

그런데 이 절단 수술, 생각보다 위험했습니다.
그나마 19세기 중반 이후로는 마취제가 등장했지만 - 전쟁중 마취제의 헤택을 잘본 전
쟁이 바로 남북전쟁 - 그 이전에는 아편같은 것에서 뽑아낸 뭔가 의심스러운 약제부터
술, 그마저도 없다면 납총알 따위를 입에 무는 정도 밖에 없었죠.

덕분에 외과의는 조수가 찍어누른 환자에게 최대한 빨리 수슬을 끝내야 했죠.
제대로된 마취제가 없으니 환자를 괴롭혀 죽일게 아니라면 최대한 빨리 칼로 살을 자르
고 톱으로 뼈를 썰어내고 지혈과 봉합을 해야했고 덕분에 절단 수술을 살자르고 톱질하
는데 5분내에 끝내면 그건 능력있는 외과의였죠. (톱질 자체는 1분내에 끝내야 한다고
강조됐다죠.)

아울러 이렇게 급히 해치우는 수술은 그만큼 환자가 출혈 과다로 죽을 확률을 낮추기도
했답니다.
18세기초만해도 절단 수술, 특히 다리 부분의 절단은 곧잘 과다 실혈로 인한 사망으로
끝났거든요.
왜 외과의가 5분내에 살을 자르고 뼈를 톱질하는데 5분내에 끝내고 어지간한 봉합도 끝
내야 하는지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환자외에 실혈이란 문제가 겹쳤기 때문입니다. (뭐
지금이라고 여유만만하게 수술을 하는건 절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다 1718년, 프랑스의 외과의(Jean Louis Petit)가 특히 출혈로 인한 사망 확률이
높았던 다리 부분의 절단시 허벅지 부분을 조여서 지혈할 장비 - screw tourniquet -
를 개발하며 이건 18세기 중반쯤 되면 외과의의 장비와 수련과정에 포함되게 되죠.


뭐 대충 요런 물건입니다.

다만 이 물건을 쓰면 꽉 졸리는 것에서부터 아주 고통스러웠고 서투르게 봉합하고 풀다
가 갑자기 솟아나오는 핏줄기에서 환자의 쇼크까지 겹친다는게 좀 탈이었지만 실혈을
막을 수 있다는 것에서 이정도는 그까이꺼 하고 넘어갔죠.

한편 절단 방식 자체도 18세기 들어서며 고급스러워(?) 집니다.

17세기까지만해도 절단은 말그대로 절단이었죠.
만약 종아리 부분을 다쳐 잘라내야 한다면 무릎뼈를 경계로 살을 자르고 뼈가 드러나면
바로 톱질을 시작해버렸으며 절단은 수직방향으로 이뤄집니다.

절단 자체는 빠르지만 수직으로 잘린 절단면을 봉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고
뼈의 절단면이 드러난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아, 드러난 절단면에서 혈관은 이전에는 인두로 지진다거나 해서 출혈을 막았지만 나중
에는 비단실이나 무명실 또는 동물의 건이나 말총 따위로 만든 봉합사(? 라 칩시다.)로
묶어서 출혈을 막게 되며 작은 혈관은 인두를 사용하거나 해서 조치했다 하죠.
그런 다음 절단면을 린넨 붕대로 막고 다시 울로 만든 덮개를 씌워서 조치합니다.

그러다 17세기말, 18세기 들어서면서 칼을 대각선으로 집어넣고 빙돌려 원뿔형으로 잘
라내고 톱을 넣어 뼈를 자른 뼈의 절단면을 살로 덮은 다음 누관(drain)을 끝단에 대고
살을 묶어버리는 방식이 나오게 되죠.


flap 방식
살을 비스듬하게 자른 다음 뼈를 드러내어 자르고 살로 덮는 방법.
간단하다는 점때문에 꽤 사용되었는데다 전장에서 흔히 사용됐으리라 추측되는 방식.
다만 환자를 이동시킨다든지 해서 절단 부분의 근육이 움직인다든지 하면 절단부의 괴
사가 더 빨리 벌어졌다나요.


circular 방식
원추형으로 도려내고 뼈를 자른 다음 살로 감싸버리는 방식.
flap보다 복잡하고 시간이 더 걸리지만 절단부의 괴사는 덜한 방식이라죠.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19세기까지 줄기차게 사용된 외과의의 도구 세트.
공구 셋트가 아닙니다.
의료 기구입니다.

어쩌건 고통스러운 절단 과정이 끝났고 상처도 잘 봉합됐습니다.
문제는 이걸로 모든게 끝난건 아니었더란거죠.

그 당시, 위생이란 면은 전혀 아예 고려되지 않았던 문제입니다.

'그자체가 부패(감염)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감염을 촉진하기 때문에 감염을 일으킬 수
 있는 옷, 린넨 등등을 Fomites 부른다.'
---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수학과 천문, 지리학자였던 Girolamo Fracastoro
    (1478 ~ 1553.08.08)
    Fomites : 라틴어로 부싯깃.
    3세기 넘게 세균이 등장하기 전 감염에 대한 이해의 초석을 쌓은 한마디.
    그러나 이런 이해가 3세기 동안 항상 통했냐면은...

의사의 손이나 탐침은 제대로 씼겨지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었는데다 수술칼이나 톱
이건 간에 마찬가지였죠.
상처를 씼는 물도 대충 어딘가 우물에서 길어왔을 수도 있으며 그조차도 흔히 여러번
사용됩니다.

그렇다고 수술후 누워있을 병상이나 상처의 조치가 깨끗하냐면 것도 아니었죠.
심지어 붕대조차도 제대로 교환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이러니 수술후 감염이 안일어나면 그게 이상한 일일 겁니다.
수술후 한달을 잘 버티면 그나마 살아남을 확률이 증가하는거지만 이 기간을 넘기지 못
하고 묘지로 직행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으니.


1775년, 성 토마스 병원(St.Thomas Hosp.)의 절단 수술


남북전쟁 당시의 절단 수술.
이 시기는 마취제(클로로포름)가 사용됩니다.
수술대(?) 아래에 놓여진 나무통은 절단된 다리를 담는 통.
큰 전투가 있으면 노란색 바탕에 초록색으로 H가 쓰여진 깃발이 날리던 야전 병원에는
저런 나무통에 잘려진 팔다리가 수북하게 쌓여졌었다죠.
그나마 이렇게라도 조치된건 다행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중 군의관 라리에 의해 확립된 응급환자 분류(triage)에서 살릴 수 없는
부상을 당했다면 그저 한켠에 조용히 치워졌으니.

수술후 감염은 19세기 들어 교육받은 외과의와 마취제의 발전, 외과적인 조치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듬에 따라 수술이 증가하면서 자연스럽게 덩달아 증가하게 됩니다.
아니 수술후 감염같은 단어는 아예 없었으니 수술후 환자들이 무엇 때문인진 몰라도
하여튼 죽어 나가는데 환장하게 된거죠.

덕분에 이 때 의사들, 고름을 수술한 환자의 상태를 보여주는 척도로 보게 됩니다.
아니 갈렌(Claudius Galen, A.D 130 ~ 200 --- 아마도)시절부터 고름은 필요악 내지는
당연한 정도로 받아들여졌고 이게 2천년 정도 유지된 판이니 이 시기 의사들도 고름을
당연하게 받아들인건 놀라운 일도 아닐 겁니다.

드물게 고름도 없이 나아버리는 경우는 굉장히 운이 좋은 일이었고 상처 가장자리를 따
라 밝은 색의 고름이 나오다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는걸 반깁니다.
오죽했으면 이런 고름에다 건전한(laudable)이란 수식을 붙일 정도였죠.

Pus was the most common subject of converse, because it was the most prominent
feature in the surgeon's work.
It was classified according to degrees ol: vileness.
"Laudable" pus was considered rather a fine thing, something to be proud of.
"Sanious" pus was not only nasty in appearance but regrettable,
while "ichorous" pus represented the most malignant depths to which matter
could attain.

고름은 외과의의 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일이었기에 흔한 대화 주제였다.
이것은 해로움의 정도에 따라 구분됐다.
"건전한" 고름은 뭔가 좋은 일이자 자랑스러워 해야했다.
"묽은" 고름은 보기 나쁘고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장액성" 피고름은 가장 악성에 이른 불길하고 나쁜 것이었다.
--- Old Receiving Room, Sir Frederick Treves, 1st Baronet, GCVO, CH, CB
    트레브스 박사라면 엘리펀트 맨과 안소니 홉킨스로 더 유명하려나요?

아마도 요즘으로 치면 저 건전한 고름 - 진하고 누런 색 - 은 포도상구균에 감염된 것
이라 할겁니다.
화농이 국부적으로 벌어지려는 경향이 있고 몸속 깊은 곳까지 내려가려는 경향이 덜했
으니 말입니다.
대채적으로 빠르게 곪다가 농이 국소적으로 모이던게 터지고 그 후로 상태가 좋아져 아
무는게 빨랐으니 감염에 대해 감도 못잡던 19세기 의사들로서는 매우 반가웠을 겁니다.

이에 대해 묽고 녹색을 띄는 고름이 나오는데다 그와 함께 수술자국 주위로 붉은 발적
이 생기더니 곧 오한과 고열을 동반하면 이제 상황은 절대 좋은이란 소리가 안나오게
됩니다.

저 때만해도 단독(Erysipelas, 그리스어로 붉은 피부에서)과 같은 증상은 악몽에 가까
운 일이었죠.
오죽했으면 저 단독이란 말외에 Ignis sacer(라틴어: 신성한 불꽃, holy fire)니 성 안
토니의 불(St. Anthony's fire)과 같은 별칭이 붙었냐를 본다면 말입니다.

오늘날에야 저 단독이란게 연쇄상구균(streptococcus)에 감염되어져 림프절을 통해 하
는 식의 설명과 예방책, 페니실린부터 에리스로마이신(erythromycin)같은 항생제가 줄
줄이 나올 겁니다만 저 때는 수술 자국을 중심으로 발적이 엄청난 속도로 퍼지기 시작
하더니 곧 주변 피부가 급속히 붉어지고 이빨이 부딫힐 정도로 오한과 열이 나면 거진
죽는다 라고 봤죠.

조치법? 그런건 없었습니다.
적어도 1940년대까지만해도 단독이 나왔다면 사람 목숨이 진짜로 끝장난거죠. (이게 수
술해서 난 것이면 억울하지나 않지 면도하다가 칼에 베었다가 걸렸다 이러면 진짜 황당
하죠.)

그나마 여기까지는 살 수 있는 확률이라도 있었죠.
병원괴저(hospital gangrene)니 뭐니 하면서 회색 또는 검은색의 부패한 조직이 농처럼
나오기 시작하면 살릴 수 있는 확률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답니다.
오늘날이라면 혐기성 균이 포함된 다발적인 감염을 과격하기까지한 예방적 조치와 각종
항생제를 넣어서 해결할 일이었지만 저 때는 그저 신을 찾아야만 했죠.

더하여 이 악몽과 같은 감염은 그저 수술부위에서만 벌어진 일은 아니었죠.
패혈증 / 농혈증으로 커진다거나 별 연관이 없어보이던 파상풍이나 산욕열로 나타나서
병원에 살기위해 왔던 환자와 산모, 겨우 삶의 줄을 잡은 부상병들을 죽였으니.

이런 문제에 대해 당시 의사들은 정확한 원인을 찾아내지도 그에 걸맞는 예방법을 찾아
내지 못합니다.
항생제가 없었다라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당장 의사 그 자신이 죽음의 손을 휘두르고 있
다는 것조차 몰랐었죠.

'치료는 매우 거칠었다.
 외과의사도 거칠었다.
 그는 마취제 없이 수술을 하던 시절, 고통에 냉담할 뿐만 아니라 거칠고, 강하고, 재
 짤라야 했던 시절의 태도를 답습했다.
 고통은 어쩔 수 없이 동반되는 것으로 질병의 유감스러운 측면이었다.

 수술실에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또 밤이나 낮이나 항상 불이 켜있는 난로가 있다.
 그 물건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부터 했던 대로 지혈을 할 때 사용하는 인두를 달구
 기 위해 항상 불을 준비해 놓는 것이었다.

 마취제는 아직 사용되지 않았다.
 패혈증은 병실에서 일반적인 병이었다.

 사실 심각한 상처는 모두 곪는다고 볼 수 있었다.
 고름은 가장 흔한 대화의 주제였다.
 외과의사의 일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로운 정도에 따라 분류되었다.
 건전한 고름은 뭔가 좋은 것, 기뻐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녹색빛이 나는 묽은 고름은 보기에도 좋지않을 뿐더라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장액성 고름은 가장 심각한 상태의 고름이었다.

 청결함은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다시 말하면 청결함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몹시 까다롭고 잘난 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차라리 사형집행인이 머리를 베기 전에 손톱을 다듬는 편이 나았다.
 외과의사는 도살장을 연상시키는 검정색 프록코트를 입고 수술을 했다.
 그것은 몇년간 말라붙은 피와 오물로 인해 뻣뻣했다.
 코트가 더 많이 축축할수록 그 외과의사가 유능하다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물론 나도 그런 코트를 입고 외과의사로서 첫발을 내딛었고, 그것을 상당히 자랑스러
 워 했다.

 상처는 기름에 적신 붕대로 감았다.
 기름과 붕대는 솔직히 말해 오염된 것이었다.
 붕대는 버려진 리넨에서 얻은 폐기된 면사의 일종이었다.
 아마 지금은 자동차 정비소조차도 차에 사용하기에는 너무 더럽다며 집어던질 것이다

 곪고 있는 상처 때문에 병실에서 나는 악취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달갑지 않게 오늘날까지도 그 냄새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병실에는 스펀지가 하나 있었다.
 그 악취나는 물건과 한 때는 깨끗했던 대야의 물로 하루에 두번씩 병실에 있는 모든
 환자들의 상처를 닦았다.
 이 때문에 환자가 회복될 가능성은 사라졌다.
 병원괴저로 모든 병실에서 많은 환자들이 사망했던 일이 기억난다.
 오늘날 학생들은 이런 병에 대한 지식이 없다. 본적도 없고 다행스럽게 앞으로도 보
 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말하곤 한다.
 외과 환자들이 그 시대에 살아서 얼마나 다행이냐고.
 사실 그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아니, 그들중 몇 명만이 살아남았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시기의 병원과 병원 일에 대한 일반 대중의 사고방식은 다음 사건
 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느 여인에게서 딸의 수술에 대한 허락을 받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수술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응접실에 있는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와 수술 과정에 대해, 내 생각에는 동정적이고 희망적인 어조로 매우 자세하게
 논의했다.
 대화를 끝내고 그 녀에게 수술에 동의하냐고 묻자 그 녀가 대답했다.

 수술에 동의하는건 좋지만 장례 비용은 누가 대죠?'

--- Old Receiving Room, Sir Frederick Treves, 1st Baronet, GCVO, CH, CB
    닥터스 / 의학의 일대기, 살림. 안혜원 옮김.

더 아이러니한 일은 병원에서 이뤄진 수술의 사망율이 더 높았다는 겁니다.
평균적으로 병원에서 이뤄진 수술에서 흔히 40% 이상의 환자들이 폐혈증과 같은 수술후
감염등으로 죽어갔으니 말입니다.

이런터라 마취제가 나왔음에도 수술은 절단 수술과 외부에 난 종양의 절제 정도로만 끝
납니다.
문제는 이런 수술마저도 그 결과가 심히 좋지 않았던게 탈이었죠.

'나는 내 운명이 그 수술에 달려있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다.
 그 수술을 하기 싫었다.'
--- 1820년, 죠지 4세의 두피에 난 피지낭(sebaceous cyst)을 수술했던 Astley Cooper.
    만약 저 간단한 수술에서 단독이 번졌다면 죠지 4세와 애틀리 쿠퍼 모두 19세기 의
    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겠죠.
    어쩌건 저 수술 자체는 무사히 끝났고 6개월후, 쿠퍼는 준남작(baronetcy)을 수여
    받았죠.

1860년 3월, 글래스고 병원에 외과의로 부임한 리스터(Joseph Lister)는 염증과 혈액의
응고를 연구하면서 종래의 의사들이 보였던 부패는 산소에 의해 일어나므로 수술중 조
직에 스며든 산소에 의해 조직이 파괴되고 염증이 나며 고름이 나오는건 자연스러며 그
래서 어쩔 수 없다는 태도에 의문을 가지게 되죠.


죠셉 리스터 경, 1st baron Lister.

만약 산소가 부패의 원인이라면 정상적인 육체 역시도 부패를 해야했지만 수술한 상처
에서만 그런 부패가 벌어진다는건 믿기 어려웠으니 말입니다.
이에 리스터는 상처의 부패에 산소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끼어들었으리라 추측하고
그 무엇인가를 찾게 되죠.

한편 1856년,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는 릴에서 주류 제조업자의 불평 - 주정 발
효중이던 원액이 시큼해지며 끈끈해져 쓸모없이 상하는지 - 을 해결하기 위해 연구에
착수하죠.
곧 파스퇴르는 효모균외에 다른 종류의 미생물이 발효에 끼어들면 술이 아닌 부패물을
얻어진다는걸 알게 되죠.

1859년, 파스퇴르가 발효에 대해 발표한 논문들을 살펴본 화학 교수 토마스 앤더슨(Th-
omas Anderson, 1819.07.02 ~ 1874.11.02)은 수술후 패혈증에 대해 고민하던 리스터에
게 파스퇴르의 논문을 읽어보길 권하게 되며 리스터는 미생물에 의한 감염을 실험을 통
해 확인하며 어떻게 하면 수술중 상처에 떨어질 미생물을 막을 것인지 생각하게 되죠.

그리고 곧 두피를 손상시키지 않고 머릿이를 죽이는 약처럼 상처를 손상시키지 않으며
미생물을 사멸할 뭔가를 찾게 됩니다.

마침 글래스고 인근의 칼라일에서 석탄산(carbolic acid, 페놀이라 하면 더 쉬울듯)을
사용해 하수구의 악취를 제거하는 것과 부가적으로 가축의 기생충이 박멸됐다는 것을
듣고 석탄산을 소독제로 사용해 보기로 작정하죠.

1865년 8월, 마차에 치어 뼈가 부러지며 다리를 뚫고나온 11살짜리 어린얘가 병원에 후
송되자 리스터는 석탄산에 적신 붕대를 바꿔주며 경과를 보게되죠.

6주후, 골절은 치료됐으며 감염도 고름도 없었는데다 환자도 죽지 않았죠.

이전같았으면 이런 류의 개방 골절은 곧잘 감염과 함께 뼈와 상처 주변에 다량의 고름
이 발생하다 자칫하면 죽음으로 끝났으니.

그 후로 환자들은 석탄산을 소독제로 한 붕대로 처치됐으며 곧 붕대만 아니라 수술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것에 석탄산이 뿌려집니다.
상처 주변, 수술대, 수술에 참여한 의사의 손, 수술 기구까지.
그리고 수술을 잠시 중단하고 석탄산으로 손을 씼고 상처는 석탄산을 적신 수건으로 닦
아 냈으며 수술후, 붕대도 석탄산에 적셔져야 했고 붕대를 교환할 때도 붕대는 물론이
고 상처까지 모두 석탄산으로 소독되죠.

'소독전 : 35명중 16명 사망
 소독후 : 40명중 6명 사망'
--- 1870년 1월자 란셋지에 기고된 리스터의 소독된 절단 수술 결과


1870년대의 석탄산 증기 분무기
석탄산(페놀)은 소독제로 효과적이었으나 당시 의사들이 싫어할만한 조건을 갖춘 물질
이었기도 하죠.
빳빳하게 풀먹인 컬러깃과 프록코트의 소맷자락을 흐늘거리게 만들었으며 손은 곧잘
붉게 변하며 물집이 잡히기도 했으며 자극적인 분무는 호홉기에도 좋지 못했죠.
무엇보다 리스터의 석탄산 소독법은 준비와 수술중, 수술후 과정 모두가 복잡했고 빠른
시간내에 수술을 끝내는걸 숙련의라고 여겼던 그 당시 의사들
에게는 복잡함을 떠나 터
무니 없는데다 효과조차 의심스러운 방법이었죠.

그런데 리스터의 소독된 수술법은 영국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의대보다 신학
대에 더많은 지원금이 보내지던 변두리 미국은 별도로 치더라도.)

리스터의 방식은 더없이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다 비용이 더들어갔는데다 무엇보다
의사들 자신의 손과 자신이 걸친 모든 것이 환자를 죽였다는 것과 보잘것
없는 세균이 원
인이 됐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도 않으려 했죠.


반면 유럽, 특히 독일 의사들에게 리스터의 방식은 빠르게 받아들여 집니다.
1870년의 보불전쟁을 겪으면서 실험적으로 리스터의 방법을 채택해본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확실히 감염이 줄어들었으니 말입니다.

단적으로 야전병원에서 1만건의 절단 수술을 했더니 그중 대부분이 감염으로 죽었다는
결과를 얻은 의사라면 전혀 감염 없이 거의 대부분이 살아남은 결과를 얻은 의사를 눈
여겨 볼 수 밖에 없을 겁니다.

1875년쯤 되면 독일에서는 리스터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수술후 감염을 줄이며
1880년대쯤 되면 그 완고한 영국과 미국의 외과의들도 리스터의 방식을 적용하게 됩니
다.
완력으로 환자를 찍어눌러 급하게 수술을 해치우던 피와 고름에 전 프록코트를 입은 의
사 대신 16세기 파레가 말한 치유는 신의 소관이자 상처를 만드는 치료가 아닌 섬세하
게 짜여진 계획에 따라 절차를 밟으며 환자에게 부담을 덜줄려는 현대적인 의사가 등장
하는 계기가 도니거죠.

더불어 이 때쯤되면 치료법으로서의 소독법 대신 예방법인 무균법이 등장하게 됩니다.
애초에 원인이 될 균이 상처에 접근할 길을 막아버린 환경에서 소독을 통해 깨끗해진
환부를 수술하자는 것으로 발전하게 된거죠.

1884년에 무균실에 가깝게 환기 잘되며 소독된 수술실이 등장하며 의사들의 복장도 프
록코트가 아닌 소독된 가운과 모자를 쓰개 됐고 1886년이 되면 증기 멸균에 미국에서는
고무 장갑이 등장하게 되죠. (고무 장갑은 소독제로 쓰이던 승홍 용액에 의해 피부가
상하는걸 막기위해 등장하지만 이후 멸균처리된 상태로 의사의 손에 씌워지게 되죠.)
댓글 : 3 개
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약간 으스스하기도 하고.
다음편 기대되네요.
으으으.. 마취약이 개발되서 다행이다..
마취약보단 살균의 개념이 발견돼서 다행. (2)

의외로 소독,살균에 대한 개념은 굉장히 최근에 이루어졌네요.
(저는 파스퇴르 때부터 일시에 적용된 건 줄 알았는데, 의사들의 자존심 때문에 이 또한 한참 뒤에 이루어지다니..... 그리고 저는 파스퇴르 살균이 17~18세기인줄 알았는데.... 19세기였네요 -_-;;;)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현대에서 이루어지는 외과 수술들 자체가 최근에서야 가능하게 된거라니..... 놀랍고도, 한편으로는 무섭기 그지 없습니다.(만약 몇십년, 100년~200년만 빨리 태어났으면.... 상상도 하기 싫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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