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 네이버 지식백과에 있는 고구려와 위나라의 전쟁2015.11.27 PM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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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위나라와 맞서 싸운 동천왕

시대
고구려
목차
주통촌 여인
성품이 인자한 동천왕
고구려와 오나라의 만남
공손씨의 멸망과 위나라와의 전쟁
동천왕의 교만과 득래의 충고
국제전이었던 고구려와 위나라의 싸움
동천왕의 참혹한 패배
주통촌 여인


조조, 유비, 손권이 각기 위, 촉, 오 삼국을 세워 다투던 『삼국지』는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중원을 무대로 한 『삼국지』는 잘 알고 있음에도 그들과 다른 우리 조상들이 세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서 같은 시대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에게도 『삼국지』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고구려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인 고구려 11대 동천왕을 중심으로 그 시대를 알아보자.

제갈량과 주유가 적벽에서 조조의 군대를 격파한 바로 다음해인 서기 209년 고구려 10대 산상왕은 기다리던 늦둥이 아들을 보게 되었다.

산상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자식이 없었고, 왕위에 오른 후에도 우씨왕후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우씨왕후는 고국천왕과도 아이를 낳지 못한 여자였다. 그렇지만 산상왕은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만든 우씨왕후 이외의 다른 여자를 둘째 부인으로 삼기가 어려웠다. 산상왕은 산천에 기도하면서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정성을 다해 빌었다.

그러자 3월 보름날 꿈에 천신이 나타나서 계시를 내렸다.

“내가 너의 근심을 덜어 줄 것인즉 너의 둘째 부인을 통해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근심하지 말아라.”

왕은 꿈에서 깨어나자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왕위를 계승할 아이가 없어서 매일 천신께 기도하였더니, 지난 보름날 꿈에 나타나 나의 둘째 부인에게서 아이를 낳게 해주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아직 둘째 부인이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

신하들은 왕의 뜻을 알고 있었지만 함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신하들은 산상왕의 부인인 우씨왕후를 두려워했다. 왕에게 둘째 부인을 얻어서 아이를 낳으라고 섣부르게 말했다가는 질투심이 강한 우씨왕후가 가만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연나부의 리더이며 왕을 능가하는 막강한 권력을 쥔 우씨왕후의 미움을 산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종지부를 찍는 것과 같음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그때 현명한 신하인 을파소가 나섰다.

“대왕이시여, 근심하지 마시옵소서. 하늘의 명령을 인간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참고 기다리시면 좋은 소식이 올 것입니다.”

을파소는 산상왕이 천신의 말을 빌어서 자기 속마음을 드러냈던 것을 알고서, 지금 억지로 둘째 부인을 얻으면 우씨왕후의 질투로 다툼만 일어날 테니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훌륭한 부인을 얻을 것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하지만 5년이 지나도록 산상왕은 자식을 얻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라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사용할 돼지가 우리를 탈출해 달아났다. 돼지를 관리하던 관리가 그 뒤를 쫓아서 열심히 달렸지만, 돼지를 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관리가 돼지를 쫓아서 주통촌, 즉 술을 빚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였다. 관리는 이리저리 뛰어도 달아나는 돼지를 잡지 못했는데, 20세쯤 된 곱고 어여쁜 여자가 웃으면서 나타나 돼지를 앞질러 가서 잡았다. 쫓아가던 관리는 그 여자 덕분에 비로소 돼지를 손에 넣었다.

고구려에서는 제사에 쓸 돼지가 도망간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중에서도 2대 유리명왕 때 도망간 돼지는 고구려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게 했다. 그런데 이번에 도망간 돼지도 일을 만들고 말았다. 관리가 돌아와 산상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대왕마마, 제가 놓쳤던 돼지를 잡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지만, 막상 돼지를 잡은 것은 주통촌에 사는 20세쯤 된 어여쁜 여자였습니다. 그 여인은 참으로 아름답고 신비했습니다.”

산상왕은 어떤 여자이기에 남자들도 잡지 못하고 쩔쩔매던 돼지를 잡을 수 있었을까 궁금해 했다. 며칠이 지나자 산상왕은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얼마나 예쁜 여자인지 알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산상왕은 여자를 만나려고 왕의 옷을 벗고 남모르게 밤에 시종만을 데리고 그 여자의 집을 방문했다. 우씨왕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주통촌의 여자는 이런 날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그 마을에 점을 치는 사람이 말하기를 반드시 왕후를 낳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낳자 ‘후녀’, 즉 왕후가 될 여자라고 이름지었다.

왕이 자기를 만나러 온 것을 안 후녀는 감히 거역하지 못하였고, 왕은 방에 들어가 그녀를 보았다. 왕은 후녀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자 후녀는 산상왕에게 아뢰었다.

“대왕의 명을 감히 어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관계를 맺어서 아이가 있게 되거든 부디 저와 아이를 저버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대왕이라도 쉽게 허락할 수 없다는 당찬 후녀의 말을 들은 산상왕은 흡족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왕은 밤 12시가 되어서야 그녀의 집을 나와 궁궐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후 우씨왕후는 산상왕이 후녀와 몰래 만난 것을 알게 되었다. 우씨왕후는 왕이 자신을 속이고 다른 여자와 만났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우씨왕후는 몰래 군사들을 보내어 후녀를 죽이려고 하였다.

후녀는 우씨왕후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남자옷을 입고 도망쳤다. 그러나 결국 군사들에게 들켜 버리고 말았다. 군사들이 후녀를 죽이려고 포위했다.

그러자 후녀는 당당하게 말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죽이려는 것은 대왕의 명령이더냐, 아니면 왕후의 명령이더냐. 지금 내 뱃속에는 아이가 들어 있으니 이는 대왕께서 남기신 것이다. 내 몸을 죽이는 것은 허락하지만, 왕자까지 죽일 셈이냐?”

관리들도 못 잡았던 돼지를 잡을 만큼 씩씩한 그녀의 단호한 말에 군사들은 감히 해칠 수가 없었다. 군사들은 돌아와서 우씨왕후에게 후녀가 하던 말을 그대로 고하였다. 우씨왕후는 매우 화가 났지만, 아이까지 임신한 그녀를 죽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산상왕은 우씨왕후가 후녀를 죽이려고 했으나 죽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산상왕은 후녀의 집을 찾아가서 물었다.

“네가 지금 아이를 가졌다는데 누구의 아이냐?”

“제가 평생에 남자 형제와도 같이 앉아 본 적이 없거늘 하물며 다른 남자와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 지금 배 안에 있는 아이는 대왕의 아이입니다.”

“그 말이 사실이란 말이지? 그래, 수고했다. 내 너를 궁궐로 데려가리라. 그 아이는 나의 하나뿐인 핏줄, 어찌 소중하지 않겠느냐. 걱정하지마라.”

산상왕은 후녀를 위로하고 돌아와서 우씨왕후에게 사실을 말했다. 왕위를 계승할 아이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우씨왕후도 후녀를 왕궁으로 맞아들이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후녀는 마침내 사내아이를 낳았다. 산상왕은 천신이 자신에게 약속했던 사내아이를 얻은 것이라고 크게 기뻐했다. 왕은 제사에 쓸 돼지로 인해 후녀와 만나 아이를 얻었으므로 아이의 이름을 제사에 쓸 돼지라는 뜻을 가진 교체라 하고 후녀를 소후(小后), 즉 작은 왕비라고 부르게 하였다.

산상왕은 뒤늦게 아이를 얻었으므로, 교체가 5세가 되자 태자로 삼아 왕위를 있도록 교육시켰다. 그리고 산상왕이 죽자 227년, 교체가 19세의 나이로 왕이 되니 그가 곧 동천왕이다.

성품이 인자한 동천왕

동천왕은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좀처럼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자신의 아들이 아닌 동천왕이 왕위에 오른 것을 못내 아쉬워했던 우씨태후(고구려에서는 왕의 어머니를 태후라고 불렀다)는 왕이 외출하기를 기다렸다가 사람들을 시켜 왕이 타던 말의 갈기를 잘라 버렸다. 동천왕이 돌아와 자신이 타던 말이 갈기가 잘려진 것을 보았다.

“말이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구나.”

동천왕은 이렇게 말하고 누가 말갈기를 잘랐는지 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우씨태후의 소행이 분명함에도 동천왕은 그녀가 자신에게 질투하는 마음을 이해했던 것이다. 우씨태후는 시녀를 시켜 왕의 식사를 드릴 때 일부러 국을 왕의 옷에 엎지르게 하는 등 심술을 부렸지만, 동천왕은 역시 화를 내지 않았다.

동천왕은 이처럼 자신에게 못되게 굴었던 우씨태후를 정성을 다해 섬겼다. 동천왕은 우씨태후가 이끄는 연나부 세력이 너무나 크고 강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국상 벼슬자리도 산상왕 시절부터 맡아오던 고우루가 죽자, 연나부의 명림어수에게 맡겼다. 동천왕은 당시 막강했던 연나부 세력과 화합하고 정치를 잘 이끌었다. 동천왕의 이러한 효성 때문인지 우씨태후는 동천왕 8년에 죽으면서 자신의 행실을 반성했다.

동천왕은 성품만 인자했던 것이 아니라 힘도 세고 용감했으며 안장을 놓고 말 달리는 것에도 능숙하였고, 사냥과 활쏘기 역시 잘했다. 주변의 위나라에서는 이러한 동천왕의 용맹함을 몹시 두려워했다. 특히 중국의 역사서에는 그가 태조대왕처럼 무섭고 용맹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고구려와 오나라의 만남

동천왕의 재위기간(227~248년)은 중원땅에서 위, 촉, 오의 삼국이 서로 경쟁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 시기 고구려와 중원 세력 사이에 또 하나의 세력이 있었다. 위나라의 동쪽 끝이며 고구려의 서쪽인 요동 지역에 190년경부터 238년까지 공손씨 세력이 독자적인 나라를 이루고 있었다. 본래 후한의 요동 태수였던 공손도는 원술, 원소, 손견처럼 후한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자립하여 발해만을 둘러싼 요서와 요동 지방, 그리고 산동 반도의 일부 지역을 다스렸던 것이다.

고구려, 위, 오, 공손씨 교섭

고구려, 위, 오, 공손씨 교섭
197년에 고국천왕이 죽고 우씨왕후의 도움을 받아 산상왕이 왕위에 오를 때 산상왕의 형인 발기는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공손씨 세력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일이 있다. 공손도는 3만의 군대를 내어 발기를 도와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 때문에 고구려는 영토 일부를 그들에게 빼앗겼고, 공손씨 세력과는 극도로 사이가 나빠졌다.

공손씨 세력은 위, 촉, 오 삼국간의 전쟁으로 생긴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땅으로 세력을 크게 신장시켜 나갔다. 그런데 232년 손권의 오나라가 고구려와 공손씨 관계에 변수로 등장했다.

오나라는 자신들의 적국인 위나라 후방에 위치한 공손씨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서로 협력하자고 제의하였다. 공손씨 정권은 이 제의를 수락했다. 다음해 3월 오나라는 진기한 보물을 공손씨에게 보내 협력을 굳건히 하려고 했다. 그런데 공손씨는 이웃한 위나라를 의식해서인지 갑자기 오나라 사신들을 차갑게 대하고, 마침내 그들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냈다. 이때 간신히 살아 남은 오나라 사신들은 공손씨의 눈길을 피해 산 속을 헤매며 도망쳤다.

그해 8월 오나라 사신들이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곳이 고구려였다. 동천왕은 처음 만난 그들을 크게 환영했을 뿐 아니라 후한 접대를 해주면서 국교를 맺었다. 게다가 오나라 사신들을 호위할 조의 25명과 담비가죽 1천 장, 꿩과 닭의 가죽 10장을 선물하여 장거리 항해가 가능한 고구려의 배를 태워 황해를 건너 양자강 유역에 있는 오나라로 사신들을 돌려보냈다. 동천왕이 오나라에게 우호적이었던 것은 적국인 공손씨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오나라의 손권 역시 고구려에게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공손씨와 적대관계가 된 마당에 위와 공손씨를 견제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세력은 고구려뿐이었기 때문이다. 다음해 오나라는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동천왕에게 온갖 진귀한 보물과 옷을 바치고자 했다. 그런데 오나라 사신이 배를 타고 압록강 하구에 도착했을 때, 먼저 위나라 사신이 와서 동천왕과 만나고 있었다.

오나라 사신은 위나라 사신이 왔다고 하자 동천왕을 뵈러 가지 않고, 그들이 머무는 곳으로 돌아갔다. 동천왕은 급히 신하들을 보내 오나라 사신을 맞이하러 보냈다. 그러자 오나라 사신 일행은 동천왕이 보낸 30명을 인질로 잡고 위나라와 사신왕래를 한 것에 대해 따졌다. 동천왕이 미안하다며 말 수백 필을 선물로 보내 달래자, 그들도 인질을 풀고 이어서 진기한 보물을 동천왕에게 바쳤다.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배가 적어서 말들을 다 가져가지 못하고 80필을 가지고 오나라로 돌아갔다.

동천왕은 오나라에 대해 몹시 화가 났다. 오나라와 경쟁자인 위나라와 사신왕래를 한 것이 오나라에게는 기분이 상하는 일이었겠지만, 고구려로서는 여러 나라를 사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아직 오나라와의 협력관계도 공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위나라를 섣불리 적대할 수도 없었기에 위나라 사신을 접대한 것인데, 이를 핑계로 고구려에서 보낸 신하들을 인질로 잡고 따진 오나라의 행동은 양국간의 기본적인 예의를 벗어난 것이었다.

236년 오나라 손권은 다시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와 친하게 지내고자 했다. 그러나 오나라에 대해 동천왕은 큰 배신감을 갖고 있었다.

“여봐라, 예의도 모르는 오나라 사신놈을 당장 감옥에 가두어라. 다음번 위나라에 사신을 파견할 때 저놈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선물로 보내 주리라. 무례한 오나라 놈들과는 다시는 상종하지 않을 것이다.”

동천왕은 단호하게 오나라와의 절교를 선언해 버렸고, 오나라 사신의 목을 위나라에 보냄으로써 위나라와의 협력을 약속했다. 오나라는 공손씨에 이어 고구려에게도 배척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지만 고구려와 오나라 모두 군대를 동원해 황해를 건너 싸우는 것은 서로 이익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고, 더 이상의 양국관계도 생기지 않았다.

공손씨의 멸망과 위나라와의 전쟁

동천왕이 오나라를 버리고 위나라와 친하게 지내려고 한 것은 단지 오나라 사신의 무례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천왕은 바로 이웃한 공손씨를 무너뜨리고 요동 벌판을 차지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단순히 분노에 의한 행동이 아니었다. 동천왕은 국제관계의 실익을 따져서 오나라보다 위나라와 협력하는 것이 더욱 이익을 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정을 했던 것이다.

당시 위나라는 공손씨를 멸망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237년 위나라는 관구검을 보내 공손씨를 공격했으나 실패한 바 있었다. 공손씨는 이때 위나라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연나라라고 칭했다. 위나라는 공손씨를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도움이 필요함을 알았다. 고구려가 공손씨의 배후를 치고, 위나라가 정면을 공격한다면 손쉽게 멸망시킬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고구려 역시 공손씨의 영토를 빼앗을 목적으로 위나라와 동맹군을 결성했다.

제갈공명과 오장원에서 싸운 바 있던 사마의가 238년 4만의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했다. 당시 위나라 수도에서 4천 리나 떨어진 먼 요동땅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 위나라 내부에서 반대가 많았지만, 고구려의 도움을 믿고 원정군을 보냈던 것이다.

동천왕은 위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할 때 수천의 군대를 보내 공손씨의 배후를 공격했다. 공손씨는 양국의 공격을 받아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군은 비록 위나라군에 비해 숫자는 적었지만, 연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중요한 공을 세웠다.

그런데 4년 후 동천왕은 위나라를 공격했다. 그것도 요동의 중요한 전략거점인 서안평을 공격했다. 왜 그랬을까?

위나라가 공손씨를 함께 멸망시키면 요동의 일정한 땅을 고구려에게 주기로 약속해 놓고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 같다. 화가 난 동천왕은 당시 위나라가 촉, 오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요동 방어에 전력을 쏟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공격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위나라와 전쟁을 시작하자, 요동 지방에 살던 위나라 사람들은 대거 산동 반도 등으로 이주했다. 40만에 달하던 위나라의 요동 인구는 3세기 중엽 이후에는 10만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고구려의 요동 공격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강력하게 시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천왕은 당시 위나라의 국력을 정확히 읽지 못했다. 이미 위나라는 촉, 오와의 전쟁에서 우월한 입장에 있었다. 촉나라는 234년 제갈량이 죽은 후 수비에 치중하며 삼국 중에서 최약체로 평가되었으며, 오나라도 위나라에게 밀리고 있었다. 위나라는 실전경험이 풍부한 군대를 고구려를 공격하는 데 투입할 힘을 갖고 있었다.

마침내 244년 위나라는 관구검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 고구려는 2만의 군대로 비류수 강가에서 위나라 군대와 대적했다.

두 나라 군사들의 싸움은 『삼국지』에서 보듯 먼저 장군들이 나와서 서로 고함을 지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고구려 장군 누구다, 너는 누구냐?”

“나는 위나라 장군 누구다, 내 창을 받아라!”

여기서 장군들이 전쟁의 승패를 가리지 못하면, 다시 병사들이 창과 칼, 도끼, 활을 동원해서 맞서 싸운다.

첫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적 3천여 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양맥 계곡까지 추격해 또 승리를 거두어 다시 또 적 3천여 명을 목베거나 포로로 잡았다.

동천왕의 교만과 득래의 충고

동천왕은 너무나 신이 나서 군사들에게 외쳤다.

“위나라가 큰 나라라고 자랑하더니 그 많은 군대를 이끌고도 우리의 적은 군사보다 못하구나. 관구검이 명장이라고 하더니 오늘 그의 목숨이 내 손바닥 안에 있구나.”

동천왕은 첫 승리에 너무나 자신만만해 했다. 하지만 자만심으로 적을 얕보면 위험을 부르는 법이다.

동천왕에게는 득래라는 현명한 신하가 있었다. 득래는 동천왕에게 듣기 싫지만 꼭 들어야 할 말을 자주 했다.

“처음 싸움에 이겼다고 해서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 적군이 반격을 가해 올지 모르니까 늘 경계하시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무슨 말이오, 내가 보란 듯이 적군을 두 번이나 물리쳤거늘. 적은 우리의 상대가 아니오. 궁지에 몰아넣은 적을 봐준다면 적이 다시 힘을 회복하여 우리를 공격할 것이니, 이번 기회에 완전히 무찔러야 하오. 적들은 고구려 군대라면 이제는 무서워서 대적조차 못할 것이오. 자, 보시오, 우리 철갑기병대의 위용을. 난 이들과 함께 적을 물리칠 것이오.”

동천왕은 자신이 너무나 대단해 보였기 때문에 득래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고구려 왕은 하늘의 아들이다. 누가 나를 이기겠느냐. 적들이 곧 내게 무릎을 꿇고 항복할 것이다.”

동천왕은 이렇게 자신만만해 하며 5천의 철갑기병대를 이끌고 적을 공격했다.

득래는 탄식하여 말했다.

“장차 이 땅이 쑥대밭이 될 것이 틀림없으니 이를 곧 볼 것이다.”

그리고는 굶어 죽으면서까지 왕에게 충성 어린 말을 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가 어질다고 칭찬하는데도 동천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국제전이었던 고구려와 위나라의 싸움

고구려와 위나라의 싸움은 단지 양국간의 일이 아니었다. 부여와 모용선비, 백제도 이 전쟁에 참여했다.

모용선비는 뒷날 342년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미천왕의 시신을 빼앗고 환도성을 점령해 고구려를 한동안 굴복시켰으며, 전연과 후연을 세워 황하 중하류 유역과 산동 반도 등지를 수십 년간 차지했던 무리들이다. 이들이 세운 후연이 광개토대왕과 맞서다 멸망함으로써 고구려와의 긴 인연을 마감하게 된다.

이들은 230년대 요하 유역으로 이동해 와서 고구려, 부여와 이웃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세력이 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은 위나라에게 기생하면서 성장했다. 즉 위나라가 공손씨를 멸망시킬 때는 물론 고구려를 공격할 때도 군대를 보내 위나라를 도왔다. 이들은 그 대가로 많은 식량과 무기, 각종 물품 등을 받고 위나라와 교역할 수 있도록 권리를 얻었다.

이러한 위나라의 보상은 그들이 발전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모용선비는 280년경 부여를 공격하고, 고구려와 정면으로 맞서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고구려는 위나라뿐만 아니라 모용선비와도 싸웠던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고구려의 또 하나의 적은 부여였다. 부여는 경쟁관계인 고구려를 위나라가 무찌르도록 도왔다. 고구려는 태조대왕 이후 부여를 자기 편으로 만들지 못하고 적으로 삼아 다투게 되었음을 앞에서 보았다. 부여 등이 위나라 편을 든 것은 이번 전쟁에서 고구려가 결정적으로 불리해진 원인이었다.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를 물리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수나라 군사들이 먼 거리를 오는 동안 먹을 양식이 부족해서 지쳤다는 점이다. 그런데 위나라 군사들은 식량이 모자라지도 않았고 지치지도 않았다. 위나라의 관구검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현도 태수 왕기를 부여에 파견했다. 부여의 위거왕은 대가를 보내어 교외에서 왕기를 맞이하게 했다. 부여는 위나라에 호의적이었다.

“우리 위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합니다. 부여에서 식량을 공급해 주신다면, 우리는 부여의 오랜 적인 고구려를 꺾을 수 있습니다.”

부여의 위거왕은 이러한 위나라의 제의에 흔쾌히 승낙하고 군량을 공급해 주었다. 부여에서 군량이 공급되자 위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함에 있어서 보급로에 신경쓰지 않고 오직 전투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것이 위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요인이었다. 부여가 중원세력과 연합하는 한 고구려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역으로 고구려가 서방 진출을 도모한다고 해도 부여가 후방을 공격해 올 것이 두려워 처음부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부여가 위나라와 연합한 것은 고구려에게는 커다란 불행이었다.

한편 고구려와 같은 뿌리를 가진 백제는 고구려가 위나라와 싸울 때 어떻게 했을까? 당시 백제 8대 고이왕은 고구려를 직접 돕지는 못했지만, 간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와 삭방태수 왕준과 더불어 고구려를 공격하자, 고이왕은 이 틈을 타서 좌장군 진충을 보내 낙랑군을 공격하여 그 백성들을 빼앗아 왔다. 그런데 낙랑태수가 이 일을 알고 백제와 전쟁을 치르겠다고 화를 내자, 고이왕은 전쟁을 두려워하여 빼앗았던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이런 상황을 보면 고이왕은 고구려를 도와줄 의도가 있고 없고를 떠나 결국 고구려를 뒤에서 응원한 셈이 된 것이다. 낙랑태수의 군대는 백제를 의식해 전력을 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나라는 고구려만이 아니라 백제도 견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와 위나라의 전쟁은 단순히 두 나라의 전쟁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함께 참여한 국제전이었던 것이다.

고구려와 위나라의 전쟁상황도
고구려·위와의 전쟁은 부여, 백제, 모용선비가 참여한 국제전쟁이었다.

고구려와 위나라의 전쟁상황도


동천왕의 참혹한 패배

동천왕의 교만이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말했던 득래의 말은 사실이 되었다.

동천왕은 적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지 못했다. 위나라 군대도 많았지만, 모용선비의 군대와 부여의 군량이 지원되고 있었음에도 동천왕은 적을 얕잡아보았다. 자신만만하던 동천왕은 그가 자랑하는 5천 명의 철갑기병대를 이끌고 너무나 깊이 적진으로 쳐들어갔다.

관구검은 무모하게 달려드는 동천왕의 군대를 처음에는 싸움에 지는 척하며 유인했다. 동천왕의 군대는 적진을 향해 돌진해 갔다. 적의 작전에 말려든 것이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위나라 군대가 나타났다. 고구려 군대는 앞은 물론 왼쪽과 오른쪽, 심지어는 뒤쪽까지 위나라 군대에게 사방을 포위당하자 우왕좌왕하였다. 한 쪽에서 적을 막자니, 또 다른 쪽에서 적이 나타났다. 고구려 군대는 관구검이 펼친 방진(方陣) 작전에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 군사 1만 8천여 명이 죽음을 당하고, 동천왕은 겨우 1천 명만을 데리고 압록원으로 도망쳤다. 기세 좋게 승리하던 고구려군이 단 한 번의 큰 실수로 인해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환도산성
동천왕은 환도산성에서 저항다운 저항도 못해 보고 성을 함락 당하고 말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조의 위나라와 맞서 싸운 동천왕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초판1쇄 2001., 3쇄 2007., 도서출판 창해)
댓글 : 3 개
그래서 이름도 동천왕 ..
관구검이라는 삼국지 시절 듣보잡 장수 하나한테도 쩔쩔맸죠
관구검이 듣보잡 아닌데요. 그래도 위의 촉망받는 장수였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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