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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드라마] 한국 영화는 참패했는데 일본 애니는 왜 흥행했나2023.10.21 PM 10:14
2023년 상반기 한국 영화 점유율은 34.9%로 전년 동기 대비 14.9% 감소했다. 이는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을 제외하고 2004년 이후 역대 최저 기록이다. 2023년 7월9일 서울의 한 영화관에서 상영 중인 <범죄도시3>. 연합뉴스
개인적으로 제일 존경하는 영화사의 인물을 꼽자면 <달세계 여행>을 만든 조르주 멜리에스가 있다. 그는 영화라는 갓 태어난 신기한 ‘기술’을 대중이 즐기는 ‘콘텐츠’로 만들었다. 현대 문화콘텐츠 산업의 아버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창기 영화 제작자들이 만든 영화는 대부분 단순 구도나 짧은 시간에 담을 수 있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처음 이 ‘움직이는 그림’의 신기함에 지갑을 열던 사람들은 서서히 같은 형태에 지겨움을 느꼈다. 영화를 제일 먼저 상영한 뤼미에르 형제조차 영화 붐이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봤다. 반면 마술사 출신의 멜리에스는 영화라는 기술에 무한한 가능성을 느꼈다. 그는 화려한 무대를 만들고 마술 같아 보이는 영상의 묘기(트릭)로 사람을 놀라게 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스토리를 넣었다.
멜리에스의 끊임없는 노력에 따른 변화는 짧은 시간 유행처럼 번지다 사라질 수도 있었던 영화산업에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을 불어넣었다. 이후로도 영화산업은 많은 후발 문화산업의 도전에 직면했다. 그때마다 영화는 생존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다. 무성영화에 소리를 넣었고, 흑백 화면에 색을 넣어 컬러 필름을 만들었다. 이런 노력으로 영화산업은 텔레비전(TV)이나 게임 같은 경쟁 산업에 밀리지 않고 사회적 영향력이 큰 문화콘텐츠 분야의 하나로 살아남았다. 정체되지 않고 끊임없는 변혁을 이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체되는 한국 영화의 현주소
2023년 한국 영화 박스오피스의 반기 결과를 두고 한국 영화의 위기설이 재점화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영화의 위상은 월드클래스를 논하던 단계였다.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이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전세계적 히트 등 영화계에는 웃을 일이 그치지 않았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한국 영화가 2023년 들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23년 상반기 한국 영화 점유율은 34.9%로 전년 동기 대비 14.9% 감소했다. 이는 5월 말 개봉한 영화 <범죄도시3>이 2023년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그나마 만회한 수치다. 5월까지 30%를 밑도는 점유율을 보였는데 이는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을 제외하고 2004년 이후 역대 최저 기록이다.
한국 영화 위기론의 가장 큰 원인으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부상에 따른 영화 관람 문화의 변화나 관람료 상승이 거론된다. 사실 한국 영화의 위기론은 일부 대작 영화의 흥행 참패가 나올 때마다 거론되는 영화계 단골 메뉴다. 이번에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지만 업계 사람들이 느끼는 이번의 위기는 심상치 않아 보인다.
가장 큰 요인은 극장을 찾는 관객에게서 나타난다. 극장 경험이 전혀 다른 세대가 주요 소비 세대로 떠오른 것이다. 이로 인해 극장 영화에 대한 우선 소비 가치가 콘텐츠 내용보다 영화관에서 얻을 수 있는 공간적 경험 가치에 좌우되는 경향을 보인다. 상반기 한국 박스오피스를 강타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흥행도 이런 새로운 관객 심리가 촉발돼 나온 것이 계기였다.
2023년 3월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은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역대 한국 개봉 일본 영화 중 최고 흥행작에 올랐다. 신카이 감독의 전 작품인 <너의 이름은.>이 큰 흥행을 기록했기에 후속작에 대한 기대로 어느 정도의 흥행은 예상했지만 500만 관객 돌파라는 신기록을 세우리라 예상한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사실상 한국 영화들이 최악의 성적표를 받는 동안 2023년 초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합하면 일본 애니메이션 두 편만으로 천만 관객을 넘긴 셈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흥행은 한국 영화가 현재 가진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왜 한국 관객은 한국 영화 대신 일본 애니메이션을 선택했을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두 영화 모두 ‘영화관에서 보고 싶은 영화’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박진감 넘치는 농구경기 장면과 <스즈메의 문단속>의 신카이 감독 특유의 영상미는 휴대전화나 TV 화면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2023년 8월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가 상대적으로 비싼 아이맥스상영관에서 먼저 매진되는 현상만 봐도 알 수 있다. 관객은 이제 영화관에서 볼 영화와 보지 않을 영화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영화관에서 볼 영화의 가장 큰 선택 기준은 바로 TV나 모바일 화면 이상의 시각과 청각적 쾌감이다.
이렇게 관객은 변화하는데 2023년 개봉한 한국 영화들은 여전히 과거의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 한 해 동안 ‘텐트폴 무비’(스튜디오를 지탱해줄 대작 영화)가 가장 많은 올여름 시즌만 봐도 그렇다. 믿고 보는 배우들이 즐비한 멀티캐스팅 영화나 신파 요소 가득한 감동 대작 영화, 재난 영화. 이렇게만 보면 매년 반복돼온 여름 영화시장의 재탕이라 봐도 무방하다. 최종 결과를 논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몇몇 작품은 손익분기점을 못 넘을 것으로 보이고, 나름 흥행했다는 작품도 예전에 비하면 ‘중박’ 정도의 수준이다.
한국 영화 위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바로 매너리즘에 빠진 프로덕션 운용 방식이다. 여전히 하나가 뜨면 아류작이 우수수 쏟아지는 자기복제식 시장에 관객이 매력을 느낄 이유가 없다. 방송사의 영화 소개 프로그램이나 유튜브의 리뷰만 봐도 영화 한 편을 다 본 것 같은 느낌인데 굳이 영화관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2023년 3월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은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역대 한국 개봉 일본 영화 중 최고 흥행작에 올랐다.
특히 새로움을 두려워하고 안정만을 추구하려는 투자배급사의 안일한 자세가 제작사의 도전 의욕에 찬물을 끼얹는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무난한 내용, 적당한 컴퓨터그래픽(CG)에 인기 배우들을 기용한 멀티캐스팅 등 몇 가지 성공 공식이 없으면 투자받기 힘들다는 것이 영화업계에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 ‘공식’ 아래 제작사가 투자자로부터 투자받고 영화를 만든 결과가 바로 지금 같은 현실로 이어졌다.
한국에서 천만 관객을 모으려면 다양한 계층의 관객을 만족시켜야 한다. 신파나 멀티캐스팅 등은 그런 측면에서 효율적인 무기였다. 하지만 그것이 10년 전에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이제는 투자사와 제작사 모두 바뀌어야 한다.
시대 흐름에 맞게 변화 꾀해야
여전히 과거의 흥행 공식에 얽매인 배급사나 제작사의 구태의연함에 더해 영화 관람료의 인상도 한국 영화 위기론에 한몫한다.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를 고민해야 할 정도라면 분명 영화는 더 이상 마음 편히 보는 엔터테인먼트라 할 수 없다. 한 편이라도 천만 관객을 넘으면 모든 게 오케이라는 ‘텐트폴 대박’의 환상에서 벗어나 한 세대라도 제대로 잡는 방식의 사고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맛있는 것도 너무 먹으면 질리는 법이다. 이제는 한국 영화도 시대 흐름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신인 등용에도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투자사나 배급사도 겁내지 말고 독립영화 등에 눈을 돌려 새로운 배우나 감독 등 인재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 어느 정도 모험을 감수한 투자가 이뤄지다보면 새로운 장르가 계속 발굴되고 그 과정에서 대박이 터져 그동안 본 손해를 일거에 만회할 수도 있다. 지금의 웹툰이나 웹소설 시장처럼 끊임없는 자기복제만 이뤄진다면 결국 사람들로부터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요즘같이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넘치는 세상에서 영화시장이 쪼그라드는 건 순식간의 일이다.
한국 영화가 변화 없이 이대로 간다면 그 미래는 뻔히 보인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바로 일본 영화계다. 한때 아시아 영화의 맹주를 자처하며 세계적 영향력을 자랑하던 일본 영화계는 이제 스스로 몰락했다고 평할 정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배경을 들여다보면 대형 기획사 위주의 캐스팅과 뻔한 내용, 모험을 두려워하고 인기 있는 원작과 캐스팅에만 의존하는 구태의연함이 관객을 일본 영화에서 멀어지게 했다.
그동안 한국 영화계는 수많은 위기를 겪었다. 그때마다 새로운 도전이 성공을 거두고 그 성공이 한국 영화계를 위기에서 구해내며 성장했다. 우리는 그 성장이 공짜로 얻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골든타임은 항상 금방 다가온다. 끊임없이 관객을 위해 새로움을 추구하던 조르주 멜리에스와 같이 변화하고 또 변화하지 않으면 몇 년 뒤 한국 영화계는 쓸쓸히 과거의 영광만을 그리워하는 일본 영화계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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