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태지] [스타타임라인] END가 아닌 AND 서태지의 약속 18년 후2014.11.01 PM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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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는 '가왕' 조용필과 더불어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높은 존경을 받는 뮤지션이다. 아무리 21세기에 날고 기는 아이돌 스타들이 음원차트를 집어삼켜도 말이다. 그 당시 서태지는 그랬다. 비교 대상이 없었다. 앨범 한 장 발표하면 가요계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흔들렸다.




그래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고작 4장의 앨범만을 발표했다는 것이 더 믿기 힘들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넉 장의 정규앨범으로 대한민국 가요사를 다시 썼다. 아니, 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했던 유일한 아티스트다.

그 당시 서태지는 문화 대통령이었다. 대략 1년여 만에 앨범을 내놓아, '컴백'이란 단어가 나왔다. 워낙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신비주의'란 말도 나왔다. 가장 아름답던 시기에 가요계를 떠나 '은퇴'란 말도 지금까지 회자된다.











1996년. 서태지는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시기에 우리 곁을 떠났다.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멋있을 때 떠난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라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서태지는 그랬다. 은퇴 당시 불과 25살이었다. 그 젊은 나이 조차도 새삼 놀랍다.




은퇴를 번복하고 솔로 가수로 컴백해 4장의 앨범을 더 발표하고 최근 9집 '콰이어트 나이트'(Quiet Night)를 발표하기까지 우린 서태지의 인간적인 면을 보고 있다. 서태지도 사랑을 하고,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아내가 임신을 했을 때 태교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9집 컴백 후 요 며칠간의 이야기는 더욱 놀랍다. "문화 대통령 자릴 후배에게 넘겨주고 싶다"는 이야기도 꺼냈고, '소격동'의 성공을 까마득한 후배 아이유 덕으로 돌리기도 했다. 요즘의 서태지는 그렇다.




'서태지의 시대는 끝났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단독 콘서트 현장에 걸려있던 '누가 서태지가 한 물 갔다고 그래?' 라는 플래카드도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징표다. 시대의 영웅에겐 시기와 질투가 따르지만, 막상 무너지는 모습은 눈 뜨고 보기 힘들다. 그래도 그에겐 온갖 풍파 속에서도 콘서트를 보러 온 2만 5000여명의 팬들이 있다. 40대의 서태지가 호기롭게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을 대관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9집 컴백 이후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왔지만, 팬들과 만들어갈 추억들은 지금부터다.









21번째 스타 타임라인의 주인공은 바로 서태지다. 데뷔 전후 팬들과 쌓은 '우리들만의 추억들'을 본인이 직접 글로 썼다. 지난 23년간 팬들로 인해 가장 행복하고, 짠하고, 감동했던 순간을 서태지가 뽑아 감상을 글로 보내왔다. 본인은 최근 '신비주의를 벗었다'는 세간의 이야길 '아니다'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렇다'고 본다. 요즘의 서태지는 그렇다.











▶ #1 첫 콘서트, 팬들과의 만남




"1992년 8월 16일 오후 1시, 서울 잠실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첫 단독공연이 열렸어요. 고작 5개월 전에 1집을 발표한 신인 가수가 1만 명 규모의 체조경기장에서 공연을 하게 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거죠. ‘난 알아요’가 큰 사랑을 받으면서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을 때였고, 동시에 공연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제 정신이 아니었죠. 그 때 공연장을 찾은 팬 분들은 대부분 중학생, 고등학생이었어요. 낮 1시 공연을 위해 새벽 5시부터 공연장 밖에서 기다렸다는 팬들도 있었죠. 너무 떨릴 수밖에 없었어요. 무대에 오르자마자 생전 처음 경험하는 거대한 함성에 완전히 압도됐어요. 그렇게 공연이 시작되고, 어느 순간 마음이 편해지면서 객석에 눈동자들이 하나하나 들어오는 것 같았죠. 처음으로 팬이라는 존재를 공연으로 직접 경험한 순간이랄까요? 물론 첫 공연이라서 연출, 무대 모든 것이 부끄러웠지만. 팬들과의 공연장에서 첫 만남만큼은 잊을 수 없는 순간이죠."




<편집자 주>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할 당시 우리 대중음악계에 공연문화는 걸음마 수준이었다. 해외 유명 팝 가수들이 간간히 내한 공연을 펼치는 정도가 전부였고, 디너쇼나 리사이틀 형태의 공연뿐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아이돌 가수에게 공연은 생소한 이벤트였다. 방송 노출과 밤무대와 같은 행사가 잦은 가수들에게 공연 흥행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서태지는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시절부터 행사를 최대한 자제하고 방송도 부분적으로 제한했다. 대신 공연으로 팬들과 만나고 싶어 했다. 실제로 공연 준비를 이유로 방송 스케줄을 대폭 축소해, 당시 절대 갑의 위치에 있었던 방송사에 소위 ‘찍히는’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서태지는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부터 공연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앞서 서태지가 직접 언급한 1집 콘서트 뿐 아니라 2집 활동 때는 '93 마지막 축제'라는 타이틀로, 3집 활동 때는 '다른 하늘이 열리고' 라는 타이틀로 대형 공연을 열었다. 이 공연들은 모두 라이브 앨범과 영상물로 제작됐다. 이 라이브 음원과 영상은 20여년이 흐른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서태지의 공연에 대한 신념은 솔로 활동에서도 계속된다. 새 앨범 발표는 항상 컴백 공연으로 이뤄졌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도심형 록 페스티벌 'ETPFEST'를 직접 기획해 마릴린 맨슨, 더 유스드 등 세계적인 뮤지션들을 한국에 초청하기도 했다. 최근 발표한 9집 '콰이어트 나이트'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18일 서태지는 '크리스말로윈'(Christmalo.win)이라는 타이틀로 잠실 주경기장에서 약 2만 5,000여명의 관객들 앞에서 컴백을 처음 알렸다.













▶ #2 사전심의 철폐



"우리 가요계에는 음반을 내기 전에 가사를 미리 검열 받아야 하는 시절이 있었죠. 그 당시 발표된 4집 수록곡 ‘시대유감’이 가사를 검열하던 기관인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에서 ‘가사가 부정적이고 현실 전복적’이라는 이유로 수정 명령을 받았어요. 일단 가사를 아예 삭제하고 앨범에 수록했던 것이 발단이었죠. 공윤에서 우리를 고발했고, 이에 분노한 정의로운 우리 팬들의 운동이 시작했죠. 공윤에 항의편지를 보내는 것은 물론, 국회에 사전심의철폐 서명운동을 펼쳐, 국회에 정식으로 제출하는 등의 조직적인 움직임도 이때 처음 시작됐어요.




물론 그 전부터 정태춘 선배님 같은 많은 선배님들이 싸워 오신 일이지만 우리 팬들의 서명 운동이 도화선이 돼 결국 공연 윤리위원회는 1996년 6월 7일에 폐지됐고, 가사의 사전심의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당시 팬들의 움직임은 단순히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한 사랑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른들이 단순히 어리다고 치부했던 우리 세대가 현실에 대해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판단할 능력을 가졌고,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아주 성공적으로 멋지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서태지와 팬이 아닌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보여준 결과죠."




<편집자 주>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제도는 비단 서태지만 가진 문제의식은 아니었다. 앞서 서태지가 언급한 정태춘 등이 사전심의 제도에 반대해 질긴 투쟁을 펼쳐온 대표적인 경우다. 서태지의 경우 지극히 서태지스러운(?) 방식으로 공윤과 싸웠다. ‘시대유감’의 가사를 문제 삼자 아예 가사를 삭제해 버리고 연주곡으로 앨범에 수록한다거나, ‘필승’의 경우는 공윤이 수정명령을 내린 단어에 ‘삐’ 처리 하는 방식으로 ‘이 노래는 부당하게 검열 받았다’고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권력에도 주눅들지 않고 맞섰다. 서태지 팬들은 사전심의제도 철폐 서명운동, 탄원서를 국회와 정부기관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서태지 팬들의 전화와 편지 때문에 국회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우리는 사전심의 철폐를 요구한다는 이 같은 방식의 주장은 누구보다도 서태지 팬들을 동요시켰다. 직접적인 구호를 외치지 않았지만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데 완벽하게 성공한 셈이다.




90년대를 보낸 세대들에게 ‘시대유감’이라는 노래는 ‘표현의 자유’ 아젠다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라는 점은 그래서 전혀 낯설지 않다. 또 이 사건은 팬덤이 단순히 뮤지션을 좋아하고 따라다니는 철없는 소년, 소녀 무리가 아니라 대중문화의 주체로 사회와 문화의 변화를 주도하는 중심 세력으로 전면 부상하게 된 첫 사례로도 기억된다.













▶ #3 은퇴 그리고 팬들




"1996년 1월 은퇴 발표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련하고 슬픈 기억인 것 같아요. 활동 당시 여러 사건들로 너무 지쳐있던 우리는 ‘이제 멋있게 마무리하자’고 의견을 모았어요. 마지막 4집을 끝으로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를 결정했던 상황이었어요. 4집 활동을 거의 마칠 무렵, 마지막 작품인 서태지와 아이들의 활동을 총 정리한 히스토리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와중에 예상치 못하게 은퇴 기사가 뜨기 시작했어요.











기자들은 직접 답을 듣기 위해 우리를 수배 하려고 여기저기 진을 치기 시작했죠. 당황했던 우리는 마무리 작업을 위해 이곳 저곳을 배회하며 일단 작업을 급히 마무리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와중에 조폭 개입설, 정치적인 외압설 등 괴상한 소문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어요. 팬들도 너무 크게 충격을 받은 터라 전화 사서함으로 일단 팬들을 안심시키고 부랴부랴 기자회견을 잡았습니다.




연희동 집 앞에서 며칠씩 기다리는 팬들도 있었고, 입에 담아서도 안되는 행동을 하겠다는 팬들도 있었어요. 너무 무섭기도 하고 긴장과 걱정만 늘어갔습니다. 은퇴 기자회견을 하던 날 성균관 유림회관에 모여 울던 팬들, 집 앞에서 며칠을 기다린 팬들, 공항까지 달려온 팬들이 있었죠.




분명한 건 진심은 어떤 식으로든 전달된다는 거에요. 멋있고 예쁘게 ‘안녕’이라는 말로 팬들을 떠났지만, 결국 그게 끝은 아니었어요. 분명 마지막 순간까지 ‘언제든 돌아오라’ 라고 말해준 팬들의 마음이 전해진 것이었겠죠. 25살의 어린 시절에 조금은 후회되는 일이기도 하고 팬들에게 가장 미안했던 순간입니다."




<편집자 주>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300명 자살예비조 결성”, “오빠부대 '집단 히스테리' 증상”, “서태지 은퇴 파문 확산”,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소식에 10대들 심리공황 조짐. 극단행동 위협”, “서태지 찾아내라, 컴백홈 … 제발 돌아와줘요, 여학생팬들 벽보 지키며 밤샘”, “서태지 오빠 컴백홈 절규, 극성 10대팬 1주일째 집 앞 시위”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당시 국내 주요 일간지를 장식한 기사 제목들이다. 물론 실제로 극단적인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주요 소재가 되기도 하고, 이제는 30대가 된 팬들에게는 웃음이 절로 나오는 추억이 됐지만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발표가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서태지 스스로도 최근 KBS 2TV '해피투게더'에 출연해 웃으며 "후회스러운 행동이었다. (후배들도)'은퇴'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당시 팬들이 모였던 연희동 소재의 서태지 집은 여전히 팬들에게 ‘성지’처럼 여겨지는 장소다. 지금 연희동 집은 주인이 바뀌었지만 서태지와의 추억이 담긴 그 집을 쉽게 잊지 못한 팬들은 꽤 긴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연희동 집을 찾아 담벼락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은퇴 후 4년 7개월 만인 2000년 8월 29일 서태지는 정규 6집으로 다시 팬들 앞에 돌아왔다. 당시 서태지는 김포공항으로 입국했는데, 이 날 김포공항에는 약 3,000명의 팬들이 몰려 김포공항 개항 이래 최대 규모의 인파로 기록됐다.













▶ #4 팬들이 보내준 종이학




" ‘재산목록 1호’이자 팬들이 주는 선물 중 가장 소중한 건 역시 종이학일 거예요. 종이학이 주는 정성만큼은 따라올 수 없는 것 같아요. 종이학을 받는 순간은 매번 기분이 좋고 순수해지는 것 같아요.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죠. 팬들의 선물이 화려해진 지금에서 보면 종이학이 엄청 촌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이건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마음과 정성이거든요. 굉장한 노력이기도 하고요. 평소 종이학을 제일 좋아하는 선물이라고 얘기를 해서 팬들이 유독 많이 보내줘요. 몇 해 전 15주년을 기념하며 팬들이 준 종이학을 모두 모아서 공개했는데, 음. 그 양이 자랑할 만 했죠. 아직도 종이학을 보관하는 룸이 있습니다."




<편집자 주>

서태지와 조공문화. 서태지는 소위 말하는 ‘조공문화’에 대해 늘 경계하는 입장을 보였다. 명품 옷, 고가의 시계, 심지어는 중형 세단까지 등장하는 요즘 조공문화에 비하면 서태지가 데뷔해 활동한 90년대에 팬들의 선물이란 실제로 편지나 종이학처럼 소박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고가의 선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태지의 경우 인터뷰나 공식석상에서 팬들이 주는 선물에 대해 늘 ‘종이학’에 대해 언급한다. 종이학에 대한 서태지의 애정은 그 정성에 대한 감동이기도 하지만 팬들에게 불필요한 경제적 부담을 줄 이유가 없다는 판단도 작용한다. 특히 서태지에게 10대 팬들이 대다수였던 90년대에는 더더욱 중요한 문제기도 했다. 22년째 서태지 컴퍼니를 통해 들어오는 선물 역시 종이학 정도뿐이다. 종이학 선물이 들어오면 현재 서태지가 살고 있는 평창동 집으로 직행하는 건 당연하다.











▶ #5 서태지 숲이 생기다




"서태지 숲은 대한민국을 깜짝 놀라게 할만한 획기적이고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어요. 우리 팬들의 마음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또 한번 감탄하게 하는 이벤트이기도 했고요. ‘서태지 숲’은 우리 팬들이 브라질 인근 열대우림인 과피 아수(Guapi Assu)에 '서태지 숲'이라는 이름으로 나무를 심는 프로젝트 였는데요. 처음 서태지 숲 프로젝트가 공개됐을 때의 위성사진과 3년 가까이 지난 지금 위성사진을 보면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확인할 수 있어요. ‘서태지팬’이라는 이름이 ‘서태지’라는 이름보다 훨씬 더 위대해 보일 때는 이럴 때죠. 제 데뷔 20주년을 기념해 시작된 프로젝트이지만 감히 제가 받을 수 있는 선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파하는 지구를 위한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의미 있는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로 대단한 팬들이죠? ^^




사실 이 외에도 언급하기 힘들 정도로 23년간 많은 소중한 추억이 있어요. 앞으로도 23년? 정도는 함께 즐겁게 추억을 함께 만들고 서로 의지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아직 우린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모든 나의 친구들에게 젊음과 희망이 함께 하기를 빌어요."




<편집자 주>

서태지와 팬. 서태지에게는 공식 팬클럽이 없다. 서태지는 1993년 2집 활동 당시 자신의 팬클럽을 직접 해체시켜 버렸다. 팬클럽이 조직화되면 그 가운데 권력 구조가 발생하고 이 구조는 상업적으로 변질 될 수 있다는 서태지의 생각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가 직접 자신들의 공식 팬클럽을 해체 시켜버렸지만 팬들의 응집력은 더욱 강해졌다. 앞서 언급한 '공륜폐지 서명운동'이나 ‘황색저널리즘에 대한 성명서 발표 및 광고 철회 운동’, ‘가요순위 폐지 운동’, ‘저작권 투쟁’, '방송심의 연대서명', ‘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 등은 팬클럽 없는 서태지 팬들의 자발적인 활동이 이뤄낸 성과다.




서태지 팬덤의 활동은 이후 등장한 거의 모든 팬덤의 롤모델이 됐다. 자신이 사랑하는 팬을 응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종의 NGO 단체 역할을 하고 있는 것. 서태지 팬들의 경우 이제 대부분 30~40대로 접어들어 우리 사회의 중심부에 있다. 과거 이들의 목소리가 ‘세상을 뒤집어 버리겠다’는 선동적 구호였다면 이제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위해 함께 앞으로 나아가자’는 응원의 목소리가 됐다. 90년대 서태지라는 뮤지션이 등장해 만든 수많은 변화 중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건, 이런 열성적이고 사려 깊은 팬들의 등장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정리=일간스포츠 엄동진 기자 kjseven7@joongang.co.kr

사진=서태지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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