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0일 영화] [DAY27] 마스터 (The Master, 2012)2014.06.16 AM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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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마스터 (The Master, 2012)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Paul Thomas Anderson)
제작년도: 2012년
장르: 드라마

<마스터>에서 반복되고 또한 강조되는 문장이 바로 "자신의 삶을 자신이 직접 커맨드해라"입니다. 이는 내터티브의 중심축을 담당하는 '코즈 (The Cause)'라는 사이비 종교가 새로운 신자들을 모집할 때쓰는 하나의 마케팅 문장이지요. 이 '코즈'의 수장인 '마스터'는 최면 테라피와 자기 암시등, 신비롭고 과학적인 신빙성이 있어보이면서도 없는 방식으로 '영혼의 자유'를 역설합니다. 이 '코즈'의 쿄리에 따르면 사람의 영혼이란 본래 자유로와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을 전부 넘나들 수 있고, 이런 자유를 신성히 여깁니다. 이 자유를 체험하게 할 수 있는 최면 테라피는 이 종교의 가장 중심적인 의식이고, 이 자유를 존재하게 하는 윤회의 개념이야 말로 이 종교의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죠.

자유를 원하는 사이비 종교라는 역설적인 개념으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마스터>의 내러티브를 캐리합니다. 이 패러독스야 말로 <마스터>를 꿰뚫는 주제 중 하나이자 영화에 자주 강조되는 윤회와 싸이클이라는 개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코즈'는 종교의 성격상 오로지 한명의 카리스마있는 교주의 뜻에 의해 운영되는 조직인데, 그러면서도 영혼의 자유를 원하고, 그와 함께 굉장히 자유로운 성격의 주인공인 프레디를 자유의 이름으로 억압한다는 것이죠. 이 패러독스는 이들이 행하는 최면 테라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최면이란 본래 대상자가 최면술사에게 자신의 무의식의 지배권을 넘기는 행위라고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영혼(즉 무의식의) 자유를 보여준다니 굉장히 아이러니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죠.

허나 <마스터>에선 지배하는 자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듯이 자유 또한 어두운 면을 보여줍니다. 프레디가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대로 아무거나 넣어 마시는 독주는 어찌보면 룰에 속박되지 않은 프레디의 자유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와 함께 자신과 다른이들을 내면으로부터 파괴하는 독이죠. 이런 자유의 중독에 빠진 프레디는 사회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게 되고, 결국 '마스터'에 의해 지배받으며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사회와 융화되어갑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 자유를 상징하는 독주는 '마스터'가 점점 흔들리게 되는 기폭제로 보여지기도 하는 것을 보면 영화는 이렇게 자유와 지배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돌고 도는 싸이클이라는 것을 묘사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탄생하는 것이 바로 자유를 만끽하는 자는 결국 공허함에 무력해지고 (이는 프레디가 '마스터'를 만나기 전 해변에서의 모습에서 잘 표현됩니다. 특히 전함 위에서 누워서 자고 있는 모습을 찍은 탑 샷이 그걸 시각적으로 반영하지요), 지배하는 자는 자유로움을 갈망하게 된다는 역설입니다. '마스터'는 지배하면서 자신과 다른 이들의 자유를 성취하려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다른 이들이 자신에게 기대게되는 의존과 자기 자신 조차 자신이 만들어낸 컬트에 목매달게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지배당하는 자는 지배하는 자에게 기대고, 지배하는 자도 지배당하는 자에게 의존하게 되어버리죠.

<마스터>는 '마스터'라는 카리스마있는 리더에 집중한다기 보단 이런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의 관계 그 자체를 묘사하는데 주력합니다. 그리고 이 관계가 서서히 무너져 내려가면서 뒤바껴가는 것을 보여주죠. 이는 프레디와 '마스터'인 랭카스터만의 관계 뿐만 아닙니다. 프레디와 그에게 사진을 의뢰한 사람과의 관계같이 굉장히 작은 관계부터, 랭카스터와 그가 지배하는 컬트의 관계, 그리고 랭카스터와 그의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에이미 애덤스가 연기한 페기는 그녀의 남편인 랭카스터의 '코즈'를 광적일 정도로 믿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광신도적인 성격 때문에 자신의 남편을 계속 푸쉬하게 되죠. 이렇게 페기는 랭카스터가 만들어낸 허구의 '코즈'에 지배당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광적인 집착으로 인해 '코즈'의 지배자인 랭카스터조차 지배하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그녀가 랭카스터를 손으로 자위를 시켜주는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요, 만약 페기가 '코즈'를 상징하는 인물로 받아들인다면, 그런 그녀가 '코즈'의 지배자를 자위시켜주는 장면은 랭카스터가 자신의 지배 대상에게서부터 자신의 안정과 쾌감을 얻어야 하는 기묘한 지배 구조를 보여줍니다. 페기는 랭카스터 없이 살 수 없지만, 랭카스터 또한 페기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이죠.

이런 랭카스터에게 프레디는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물론 랭카스터가 프레디에게 느낀 동경 혹은 사랑은 사실이였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프레디는 하나의 기회로 보여지지 않았을까요. 프레디같이 비사회적인 사람을 자신의 교리로 사회인으로 만든다면, 그와 함께 자신의 지위도 탄탄해지겠지요. 이런 의미에서 랭카스터는 프레디를 지배하는 사람이 되지만, 그 또한 프레디에게 의존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 곳곳에 보여지는 랭카스터가 겪고 있는 사회적 불안감(사기죄로 고소를 당한다는지)은 그로 하여금 점점 더 프레디와 그 속에 존재하는 자유를 동경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이런 지배하고 지배받는 패러독스에 중독된 '코즈'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1950년대 미국의 사회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의 초반 부분은 바로 프레디가 사진사로써 백화점에서 일하는 장면인데요, 백화점이야 말로 1950년대 급속도로 성장하는 미국의 중산층을 대변하는 심벌이자, 겉으로는 화려해보였지만 결국 안으로는 도덕성의 붕괴로 미국 사회에 큰 변화를 끼쳤던 50년대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이 패러독스가 가져온 괴리감이 결국 터져버린게 바로 프레디가 한 신사와 싸운 장면이죠.

'코즈' 또한 이런 50년대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코즈'의 교리인 자유야 말로 미국이 그토록 신성시한 이데올로기였지만, 현실의 미국은 신제국주의를 행하며 남미와 아시아에서 소련의 공산주의와 대립하고 있었지요. 게다가 '코즈'의 여인인 페기가 자신들을 비난하는 자들에 대해 공포를 느껴 극단적으로 공격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또한 매카시즘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이비 종교 자체가 사회의 불안함을 거름으로 삼아 자란다는 것을생각하면 영화와 50년대 미국 사회상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인 것 같습니다.

이런 50년대를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연출이 바로 다름아닌 65mm 필름을 사용한 촬영입니다. 디지털이 아닌 65mm 필름을 사용하여 앤더슨 감독은 영화의 내러티브가 담고 있는 노스탤지아를 있는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냈죠. 따뜻해보이면서도 강렬한 색감의 비주얼으로 <마스터>는 퍼커션을 자주 사용하여 굉장히 불안한 느낌을 전달하는 사운드트랙과 함께 당시 화려하면서도 적대적이였던 시대를 잘 묘사합니다. 만약 이런 시청각적인 연출이 없었다면 평범한 드라마 영화로 기억에 남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이질적인 느낌을 관객들이 무의식적으로 느끼게하여 지배하고 지배받는 자들이 서로 뒤엉키는 불안한 당시 사회를 날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죠.

영화의 마지막은 여러가지를 시사합니다. 랭카스터는 결국 자신이 시사하던 완전한 자유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죠. 그리고 영화는 그가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코즈'의 허상에 끌려 살게 된다는 듯한 암시까지 줍니다. 그에 비해 프레디는 과연 자신만의 자유를 찾았는지, 아니면 다른 이들을 지배하는 데에 맛들린 자가 되었는지 이중적인 암시를 주며 영화는 끝납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래도 결국 프레디는 '마스터'가 되었다는 것이죠. 누구의 마스터인지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테지만.

한줄평: "자유의 공허함. 뒤바뀌는 지배 구조. 마스터는 결국 누구의 마스터인가."



이 글은 제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30일 영화 챌린지"중 하나입니다.
"30일 영화 챌린지"는 그다지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제가 랜덤하게 고른 30개의 영화를 랜덤하게 순서를 정하여 30일 동안 하루에 영화 하나씩 보고 그 영화에 대한 감상평/분석을 쓰는 겁니다.
제가 볼 영화들의 리스트는
여기(클릭)에 있습니다.

내일의 영화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플라이>입니다.
댓글 : 2 개
정말 두 주인공, 아니 에이미 아담스까지 연기들이 대단했었죠.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연기를 다시 볼 수 없다는게 안타깝네요.
데어 윌 비 블러드의 그 분 연기를 보고 "이것보다 대단할 수 없다"라고 생각했는데

호아킨 피닉스가 보기좋게 깨버린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 분이 같은 해에 링컨을 연기하셨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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