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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 역사] 소득불평등의 부메랑..상위 1% 과잉 저축, 저소득층 빚만 늘려2022.06.12 PM 02:52
40년 소득불평등 추세가 부른 상위1%의 '과잉 저축'
2000년대 소득상위 1%계층 저축액이
국민소득 차지하는 비중 매년 3%p 증가
'빚으로 진작된 수요'에 빠진 부채함정
통화정책 여력 제약돼 중앙은행 '곤경'
"자산·부 과세강화, 포용성장 추구하는
복합적 재분배 정책으로 전환해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최근 금리인상기에 ‘취약계층에 가해질 금리 고통’을 줄곧 강조하고 있다. 지난 10일 ‘한국은행 창립 제72주년’ 기념사에서는 “금리인상으로 취약계층이 받는 어려움이 커질 수 있다…경제 양극화 완화를 위한 중앙은행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많은 상황에서 이를 정책운영에 어떻게 반영해 나갈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난 수십년간 ‘소득불평등과 저축, 그리고 정책금리’ 사이에 전통 경제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특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 2일 ‘변화하는 중앙은행의 역할: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연 ‘2022 BOK 국제컨퍼런스’의 한 세션이 ‘소득불평등과 중앙은행’이었다. 이 세션에서 발표한 아티프 미안 프린스턴대 교수(경제학)는 코로나19 기간의 대대적인 통화 양적완화 이전, 이미 1980년대부터 40여년간 지속된 소득불평등 심화 추세가 소득 상위1% 계층의 ‘과잉 저축’을 불러왔고, 이것이 각국 경제를 ‘빚으로 진작된 수요가 이끌어가는 부채 함정‘에 빠뜨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저축과 빚 사이의 이 상호작용 경로는 소득불평등 심화→소득 최상위 1%의 (균형 실물 순투자액보다 많은)저축 과잉→이 과잉 저축을 차입하는 가계·정부의 부채 증가→가계 원리금 상환과 ‘빚으로 진작되는 총수요 경제’를 지탱하기 위한, 불가피하게 낮은 정책금리→소득상위계층 금융자산소득의 더 많은 증가(소득·자산불평등 악화)로 집약된다. 소득불평등 추세의 여러 결과 중 한 가지 현상인 ‘상위 1%의 과잉 저축’이 요즘 각국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풀어야 할 어려운 도전’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요컨대 고소득층의 과잉 저축액이 실물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가계·정부의 더 많은 빚으로 흘러들어가는 비전통적 사이클이 1980년대 초부터 반복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이런 현상의 근저에는 전세계적인 소득불평등 심화 추세가 근본 동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명목 국내총생산 대비 가계부채 규모가 2020년 4분기(102.8%·국제금융협회)부터 100%를 넘어선, 전세계에서 유일한(레바논 제외) 국가다. 한국 가계부채의 기저에도 ‘소득불평등 심화’가 동학 매커니즘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틀림 없다.
1980년대 초 이후 40여년간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경제에서 뚜렷이 관찰되는 두 추세는 가계부채 증가와 낮은 이자율이다. 책 <빚으로 지은 집>(House of Debt, 2014)으로 유명한 아티프 미안은 <이번엔 다르다>(2010)를 쓴 케네스 로고프 교수와 함께 가계·정부 부채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다. 1980년대 이래 상위소득계층의 소득(노동·자산) 증가 추세는 토마 피케티의 분석(<21세기 자본> 2013년)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으나, ‘최상위 1%의 과잉 저축’(Saving Glut of the Rich)이 전세계적으로 제로금리에 가까운 저금리를 오랫동안 유지시키고 소득불평등을 더욱 악화하며, 나아가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에 쓸 여력(탄약)을 제약하고 낮은 금리를 지속하도록 압박하고 있다는 그의 주장은 사뭇 흥미롭다.
대체로 볼때 소득상위 1~6%의 소득·자산은 매년 증가해 부의 축적이 늘어나는 반면 나머지 94%의 소득은 정체되거나 감소하고 있다. 2020년에 미국 국민총소득에서 소득상위 1%계층에 유입되는 소득몫은 1980년에 견줘 두배가량 늘었는데, 2010년대 중반에 미국 소득상위 1% 계층의 소득이 국민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7% 안팎에 이른다. 생애 전체소득 중에서 저축에 쓰는 비중은 소득상위 1%는 51%, 상위 5%는 37%, 상위 60~80%는 17% 정도다. 미국에서 소득상위 1% 계층의 저축액은 나머지 세계 총저축액의 무려 65~75%에 이른다.
2000년대 이후 상위 1% 저축액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60~70년대에 견줘 해마다 3%포인트가량씩 증가하고 있다. 반면 상위 10%를 제외한 대다수(소득 하위 90%)의 연간 저축액은 1980년대 이후 해마다 감소하는 중이다. 미국 소득상위 1% 계층의 저축액이 국민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63~1982년 5.3%에서 2008~2016년 8.5%로 크게 상승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같은 기간에 소득하위 10% 가계는 이 비율이 5%포인트가량 낮아졌다. 특히 금융위기 이전 10년(1998~2007년)에 저소득층은 낮은 금리에 힘입어 대출 차입을 늘린 반면, 고소득층의 저축률은 오히려 큰 폭으로 상승했다. 미국 가계대출의 상당 부분은 자산분포 상위 1%의 과잉 저축자금으로 운용되는 금융상품(주택저당증권 파생상품 등) 및 국공채 투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차입·조달되는 구조다. 25년간(1982~2007년)으로 확장하면 소득하위 90% 가계의 대출 부채 증가분 중에서 약 30%는, 미국 자산상위 1%가 은행에 저축한 돈을 가져다 빌려쓴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소득계층별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저축액 비중 추이(1963~2016년)
이것이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각국 중앙은행에는 어떤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소득불평등 경제에서 소득 최상위층의 과잉 저축이 높은 실물투자로 이어지지 못한 채 소득 정체·감소에 처한 대다수 가계의 차입 확대를 위한 자금공급 역할을 할 때, 중앙은행은 그 돈을 빌린 저소득층 가계의 원리금 상환을 돕기 위해 이자율을 점점 더 낮추는 쪽으로 정책금리를 결정할 수 밖에 없다. 상위 1%의 과잉 저축이 중앙은행을 제로금리 혹은 실효하한금리(더 이상 금리를 내리면 통화정책의 유효성이 급격히 떨어지거나 자본유출 등 부정적 효과가 급증하는 수준)까지 정책금리를 내리도록 밀어붙이며 압박하게 되는 셈이다.
나아가 원리금 상환을 위해 가계는 상위 1%의 과잉 저축액 중에 일부를 더 많이 빌려야 하는 연쇄 순환고리가 작동하고, 경제는 ‘빚에 의존하고 갇혀 있기 때문에 항상 위축되고 억눌릴 수밖에 없는 가계 수요’가 간신히 떠받치는 부채 함정에 영구적으로 빠져들게 된다. 소득불평등 확대가 고소득층의 저축 과잉을 낳고, 이것이 시중금리를 지속적으로 낮춰 저소득층이 갈수록 더 많이 차입하면서 부채는 더욱 증가하는 양상이다. 1983~2016년에 소득상위 1% 가계가 보유한 금융자산이 국민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매년 평균 4.4%포인트씩 증가했는데, 이 가운데 절반이 가계·정부 부채에 대한 원리금 및 채권이자 청구권이었다. 즉 노동소득뿐 아니라 금융·자산소득 불평등도 심화하며 ‘부채 경로’를 통해 점점 더 많은 경제적 자원이 부유층에게 이전된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통화정책 정상화 과정에서 각국 중앙은행 통화정책담당자들은 “가계 차입이 (총수요를 진작해) 경제를 침체에서 탈출시키지만, 우리가 이자율을 높이는 행동에 나서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곤경을 토로했다. 마크 카니 영란은행 총재는 “가계·정부가 지고 있는 부채부담의 지속가능성은 이자율을 낮게 유지하는데 달려 있다”고 했다.
미국 소득상위 1%계층의 ‘소득 대비 소비’ 비율 추이. 2010년 무렵에 7% 정도다.
해법은 뭘까? 우리가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운용했듯이 거시경제정책도 경제성장 위주의 전통 정책에서 탈피해 ‘비전통적 처방’을 써야 한다고 아티프 미안은 제안한다. “소득불평등이 각국 거시경제를 결정짓는 기초 조건이자 동학이라는 사실을 고려해, 자산·부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고 저소득층 교육투자 등 공공투자로 기회평등을 촉진하면서 ‘포용적 성장’을 추구하는 복합적 재분배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코로나 이래 미국 고소득계층은 노동소득은 별로 줄지 않은 반면 지출소비는 급감해 ‘과잉 저축’이 확실히 더 큰폭으로 증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소득구간별 저축액 통계는 공식적으로는 작성되지 않고 있다. 한국은행의 한 금통위원은 최근 “코로나에 대응한 제로금리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으로 대대적으로 풀린 돈이 주택과 주식 등 자산가격을 높여 상위소득계층의 저축은 더 높아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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