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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열람] 무능하지만 착한사람2018.06.20 PM 07:10
유장 (劉璋)
생몰년도 (? ~ 219년)
한실의 종친으로 익주자사를 지낸 유언의 넷째 아들. 자는 계옥(季玉).
유장의 큰 형과 둘째 형이었던 유범과 유탄은 장안 조정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 유언이 마등과 짜고 이각을 토벌하려 했을 때 이를 눈치 챈 이각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유장도 조정에서 벼슬을 살고 있었으나, 공공연하게 한실에 반란을 품은 유언을 설득시키기 위해 익주로 내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야심만만한 유언은 설득을 듣지 않았다. 그러던 중 유언이 급사하게 된다. (오잉?)
유언의 사망으로 익주에 구심점이 사라지자 조위(趙韙)등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받아 조정으로부터 감군자사 겸 익주목으로 임명받게 된다. 이리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익주 땅을 다스리게 된다.
영웅기에 따르면 유언이 죽자, 아들 유장이 대신하여 자사가 되었는데 장안에서 영천사람 호모(扈冒)를 배수하여 자사로 삼아 한중으로 들어가게 했다. 한편 형주의 별가(別駕) 유합(劉闔)은 유장이 거느리던 심미, 누발, 감녕(오나라의 그 감녕이 맞다.) 이 반란을 일으키자, 기회를 틈 타 유장을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패주하여 형주로 달아났다. 유장이 조위를 시켜 형주로 진공하여 구에 주둔했다. 위로는 준동하고, 아래로는 반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유장의 통치는 시작부터 혼란했던 것이다.
영웅기에 이르길 방희와 유장은 예전의 우의가 있었고, 유장의 여러 아들을 방희가 난에서 구해주었기에, 유장은 방희를 후덕하게 대해주고, 방희를 파서태수로 삼게 하였는데 방희가 권세를 제멋대로 하였다고 한다. 후에 방희와 유장의 우호관계에 틈이 나자, 유장을 옹위했던 조위가 병사를 일으켜 안에서 호응하여서, 사람들은 흩어져 죽음을 당했으니, 이것은 유장이 명쾌하게 결단함이 적은데, 외부에서 촉으로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에 앞서 남양(南陽), 삼보(三輔) 사람들이 수만 가가 익주로 흘러 들어오자, 이들을 거두어 병사로 삼고, 동주병(東州兵)이라 불렀다. 유장의 성품은 너그럽고 유순하며, 위략(威略)이 없어, 동주 사람들은 예부터 있던 익주의 백성들을 침탈하고 폭행했지만, 유장은 능히 막지 못하고, 정령(政令)은 빠진 게 많아, 익주사람들은 자못 원망을 품었다.
조위는 본래 인심을 얻고 있었고 유장을 옹립했었기에, 유장이 그에게 위임했었는데 이 꼬라지를 보고 조위가 딴 마음을 품었는지 백성들의 원망을 틈타 모반하여, 이에 형주에 뇌물을 보내 강화를 청하고, 몰래 주중의 대성(大姓) 호족들과 연계하여, 이들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돌아서 유장을 공격했다. 촉군, 광한, 건위군의 모두 조위에 호응하였다. 유장은 성도로 달려 들어가 성을 지키는 꼬라지로 전락했는데, 마침 동주병들 역시 조위를 두려워 해, 모두 마음을 합치고 힘을 모아 죽을힘을 다해 유장을 도우니, 마침내 반란군을 격파하고, 강주에 있던 조위에게로 진공하으니. 조위의 장수 방락과 이이가 모반하여 조위군을 참살하고, 조위를 참수했다.
이렇게 유장 치세의 익주는 유장을 익주목으로 세운 사람이 호족들과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개판 오분전이었는데 유장은 유언처럼 익주를 휘어잡을 카리스마와 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유장의 통치기의 익주는 혼란기를 겪게되었다. 유언이 끌어들인 중원에서 전란을 피해 들어온 유민집단과 토착 호족, 북쪽의 강족, 저족과 한중의 오두미도 그리고 남쪽의 만족들이 제각기 얽히게 된다. 이들을 한데 통합하지 못했기 떄문에 익주에서는 자주 반란이 일어났으며 위에서 언급했듯이 한때는 성도가 포위되어 유장은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사실 장로와 오두미도 역시 유언이 끌어들인 세력으로 유언은 장로를 후원하여 한중에 안정적인 기반을 갖도록 했다. 그런데 문제는 장로의 어머니 노씨가 유언의 애인이었다는 점으로, 유장은 이를 못마땅해 했기 때문에 유장은 장로와의 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영웅기에 따르면 장로가 점차 교만해지고 방자해져 유장을 순종하게 받들지 않으니 유장이 장로의 모친(노씨)과 동생들을 죽여서, 마침내 서로 원수과 되었으며 유장이 여러번 방희 등을 보내 장로를 공격하게 했으나, 수차례 격파되었다고 한다. 장로의 부곡들이 파서(巴西)에 많이 있었기에, 방희를 파서태수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장로를 막게 했다. 난세에 아군을 만들어도 모자랄 판에 유장은 스스로 적을 만들었던 셈이다.
익주는 지금의 쓰촨 성 일대로, 분지다. 분지는 넓은 평야가 험준하고 높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남쪽에 자리 잡은 곳이었으므로 연중 따뜻하여 사계절 내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부유하고 축복 받은 땅이었기에 누구나(장로, 손권, 유비 등) 탐을 내는 곳이었다. 그러나 유장의 통치는 법령이 해이하고 기강이 서지 않아 혼란하여 이런 장점을 발휘하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오히려 익주의 지형의 이점이 아니었다면, 다른 군벌에게 치이고 까지며 땅을 내어주고 말았을 것이다. 아무튼 유장은 겨우겨우 익주 통치를 계속했다.
조조가 형주를 평정하자 몇 백명의 늙은 병사와 물자를 지원하여 조조에 복종하려는 의사를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세번째로 사자로 보냈던 장송이 적벽대전을 앞두고 자신감에 차있던 조조로부터 무시를 당하게 되었고, 이에 원한을 품고 돌아와 조조와 관계를 청산할 것을 진언하여 동맹은 무산되었다. 나아가 적벽대전에 패배한 조조의 세력이 밀려나자 다시 반 독립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유장의 통치에 복종하지 않는 세력이 많아 익주의 정치는 불안정 하였고,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격파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게 된다. 이에 유장은 조조가 장로의 물자를 얻어 익주마저 병합할 것이라는 걱정을 하게 된다.
한편, 유장의 나약함에 실망하고 있던 막하의 몇몇 관료들은 다른 힘있는 이에게 익주를 넘기려 한다. 장송과 법정이 이를 주도했다. 이러한 생각 아래에 그들은 음모를 꾸미고 유장을 설득하여 형주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유비를 지원군으로 불러들이도록 한다.
장송은 유장에게 유비는 유장과 같은 한실의 종친이며, 조조와는 원수 관계이고, 용병 실력이 뛰어나니, 유비를 불러들여 장로를 토벌하도록 하면, 조조가 익주를 침공하지 못할 것이라며 설득했다. 유장은 이를 그럴듯하게 여겨 유비를 불러들이기로 결정했다.
이때, 황권과 왕루는 유비를 불러들이는 것을 말렸으며, 특히 왕루는 성문에 거꾸로 매달리기까지 하며 결사반대했고 화양국지에 따르면 결국 스스로 목을 찔려 자결한다. 삼국지연의에서 각색이 좀 들어가서 황권은 유장의 옷자락을 물면서까지 붙잡았지만 화가 난 유장이 옷을 잡아당겨 앞으로 넘어져 앞니 2개가 부러졌고, 왕루는 성문 위에 몸을 묶고 사정까지 하였지만 유장이 들어주지를 않자 스스로 몸을 묶고 있던 줄을 끊어 자결까지 하는 처절한 모습을 보여준다. 유장은 그런 험한 모습을 보고도 자신의 의견을 고집해 유비를 불러들인다.
법정과 장송이 유비를 찾아가 익주로 들어오도록 권하고, 유비는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익주로 들어가서 성도에서 320리 떨어진 부성까지 와서 유장과 회담한다. 장송과 법정 그리고방통은 이때 유장을 기습하라고 권했지만 유비는 듣지 않았다.
유장과 유비의 회담은 화기애애하였는데, 유장은 유비를 대사마(大司馬) 사례교위(司隷校尉)로 천거하고, 유비는 유장을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익주목(益州牧)으로 천거했다. 함께 잔치를 벌이고 유장과 유비의 장수들은 서로 술을 마시며 우애를 다지기를 100여 일이나 했다.
유장은 유비에게 장로를 토벌하는 것을 부탁하고 대량의 군량, 마필, 물자를 공급했으며, 백수군(白水軍)을 거느리게 하고 병사를 일부 나눠주기도 했다. 때문에 유비의 군대는 매우 강성해졌다. 유비는 슬슬 북진하여 가맹(葭萌)관에 주둔한다. 하지만 장로 토벌을 서두르지 않고 우선 백성들의 민심을 얻었다.
다음해 212년, 손권이 조조에게 공격을 받자 손권은 유비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유비는 유장에게 조조가 승리한다면 형주를 통해서 익주로 공격이 들어올 것이지만, 장로는 한중에 틀어박혀 웅거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위협적이지 않으니 우선 형주로 가서 조조를 막겠다고 전달하고 병사 1만과 물자를 부탁했다. 유장은 병사 4천만 빌려주고 물자도 요청한 양의 절반 정도만 지원했다.
유비가 익주를 떠나려 하자 장송이 당황하여 유비에게 밀서를 보냈다. 헌데 장송의 형 장숙(張肅)이 두려워한 나머지 음모를 유장에게 폭로하여 장송은 참수당해버렸다. 이 때문에 유장은 유비를 의심하고, 관문을 걸어잠그도록 지시했다. 유비는 분노하여 유장의 백수군 책임자 양회를 참수해버리고 황충, 탁응에게 유장을 공격하도록 했다.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유비에게 항전하자는 의견을 낸 사람도 있었고 부하인 정탁은 심지어 청야전술을 구사할 것을 진언하였으나, 유장은 "나는 적에 맞서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백성을 움직여 적을 피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하여 그 의견을 묵살한다.
유비가 부성을 점거하자 유장은 유귀(劉貴, 혹은 유괴), 냉포, 장임, 등현을 보냈지만 모두 격파당했다. 면죽까지 밀려나자 이엄을 보내서 유비를 가로막도록 했지만 이엄은 부하들을 데리고 유비에게 항복해버린다. 유비는 제갈량, 장비, 조운을 불러들이고 백제(百帝)성, 강주(江州), 강양(江陽)이 모두 유비의 손에 떨어졌다.
유장의 아들 유순이 낙성을 지켜서 겨우 1년간 시간을 끌고 눈먼 화살로 방통을 사살하였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214년 낙성에서 싸우던 장임이 패배하고 유비군에게 붙잡힌다. 장임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 하며 참수되었다. 결국 낙성도 함락당하고 성도가 완전히 포위당한다. 성도에는 정예병 3만과 1년 간 버틸 수 있는 식량, 물자가 있었지만 유장은 이미 항전 의사를 잃고 있었다. 유비는 간옹을 보내서 유장을 설득했고 유장은 "(우리) 부자가 20여 년동안 이 주에 있으면서 은덕을 백성들에게 베푼 적이 없다. 백성들은 3년이나 전쟁하느라, 시체가 벌판에 널렸으니, 이 유장 때문인데 어찌 마음을 편히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하며 유비에게 항복한다.
항복한 유장에게 유비는 진위장군의 벼슬을 내렸지만 그저 형식일 뿐이었다. 유장은 형주의 공안으로 쫒겨나서 연금 상태에 놓인다. 유비는 새로 차지한 익주를 기반으로 날아올라 마침내 황제가 되기에 이른다.
공안에 머물던 유장은 관우가 패배하여 형주가 오나라의 손에 들어가자 손권의 포로가 되었다. 손권은 유장을 다시 익주목(명목뿐이지만)으로 임명해서 유비 세력을 흔들어 보려 했지만, 이미 유비의 지배가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던 탓인지 별 성과는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후 유장은 별 일 없이 여생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유장에게는 유순과 유천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장남 유순은 방희의 딸을 아내로 삼았으며 낙성에서 1년 간 항쟁하다가 낙성을 잃고 패퇴했다. 이 후 유장이 항복하자 봉거중랑장으로 임명되고 성도에 남았다.
차남 유천은 유장과 함께 공안으로 이주했는데 손권이 형주를 차지할 때 손권에게 넘어갔다. 따라서 유장의 자손들은 촉과 오 두 나라에서 각각 대를 잇게 되었다.
- 김재박
- 2018/06/20 PM 07:19
어어?~ 이렇게 된 거 어쩌겠누...
저짝.... 내 동생 있는 형주로 가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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