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과 중국인] 베이징의 권력투쟁 방식 2015.06.13 AM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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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천시통, 천량위, 보시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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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2013년 9월 4일에 쓰여진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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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이목이 베이징으로 향하고 있다. 혁명 원로이자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했으며, 4인방 분쇄 후 중공 8대 원로 중의 한명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보이보(薄一波, 1908~2007)의 아들로 최고 권력기구인 중국공산당 정치국원이었던 전 총칭(重?)시 위원회 서기 보시라이(薄熙?)의 부패혐의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뇌물수수,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기소된 보시라이에 대한 사법부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중국 최고 지도부의 판단은 이후의 재판 과정 중 주요 정치 세력들 간의 투쟁과 타협을 통해 최종적으로 결정될 것이며 그 결과는 판결 이후의 중국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중국정치에서 고위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전혀 낯설지 않지만 특히 정치국원 이상의 고위 관리들에게 있어서 부정부패 사건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정치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중국공산당 내부에는 몇몇 암묵적인 규정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정치국원 이상의 고위 지도자들은 경제문제로 책임추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쟝쩌민(江?民) 집권 시기의 쟈칭린(??林)이나 황쥐(?菊), 쩡칭홍(曾??) 등 몇몇 정치국 상무위원은 재임기와 퇴임 이후에도 많은 소문과 정황들이 제시되었지만 아무런 법적 처분도 받지 않았다. 결국 정치국원 이상의 고위 인사가 법적인 처벌을 받는 경우는 정치적인 문제, 즉 반당(反黨)행위나 당의 통일적 결정에 대한 반대 또는 최고 지도부에 반기를 들었을 경우이다.

개혁개방 이후 보시라이 이전까지 처벌 받은 정치국원 이상의 인사는 단 두 명, 쟝쩌민 집권 초기 베이징 시위원회 서기였던 천시통(?希同)과 후진타오(胡??) 집권 시기 샹하이 시위원회 서기였던 천량위(?良宇) 뿐이다. 두 사람 모두 공식 죄명은 경제문제, 즉 부정부패였지만 실제로는 당시의 최고 지도부와의 마찰 때문이었다.

천시통은 대학 졸업 후 베이징의 하급관리에서 시작해 베이징의 시장과 서기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6.4 천안문 학생운동을 진압할 때 떵샤오핑 등 보수파 원로의 입장을 지지해 공을 세웠지만 중앙정부 경력이 거의 없던 쟝쩌민이 최고 권력을 거머쥔 것에 불만을 품고 계속 도전하다 결국 자신의 심복인 베이징 부시장 왕바오선(王?森)의 비리와 연루되어 결국 제거되고 말았다.

역시 샹하이에서 공직을 시작한 천량위는 주군인 쟝쩌민의 본거지인 샹하이 시위원회 서기로 재직하면서 쟝쩌민의 뜻을 따라 후진타오를 비롯한 신임 지도부의 정책에 반기를 듣다가 결국 뇌물수뢰와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18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있다.

보시라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뇌물수수, 직권남용 등의 죄명으로 재판을 받고 있지만 더 문제가 된 것은 당시 최고 책임자였던 당 총서기 후진타오의 전화를 도청하고 쟝쩌민의 심복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정법위(政法委) 서기 조우용캉(周永康)과 모의하여 당 최고 지도부의 결정을 거쳐 이미 후진타오의 후계자로 지명된 현 총서기 시진핑(?近平)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최고 권좌에 오르려했다는 사실이다.


혁명 원로의 아들로 승승장구하던 보시라이는 랴오닝성(??省)의 성장과 국무원 상무(商?)부장을 거쳐 직할시인 총칭 시위원회 서기에 임명되었다. 국무원 상무부장에서 총칭시 서기로의 이동은 형식적으로는 승진의 모양새를 갖췄지만, 내심 국무원 부총리가 되어 중앙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했던 보시라이는 이를 후진타오를 비롯한 최고 지도부가 자신을 좌천시킨 것으로 판단하고 좀 더 적극적인 행보를 취하게 되었다.

보시라이의 정치적인 행보가 급격하게 전환한 것이 바로 이 시점이다. 그 이전까지 좌파적이거나 개혁적인 정책을 전혀 보이지 않았던 보시라이는 총칭에 취임한 이후 개혁개방으로 심화된 빈부격차와 당-정 관료들의 부정부패에 불만을 가진 군중들을 달래고 이를 자신의 정치적 상표로 내세우기 위해 마오쩌뚱 시절의 방식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보시라이가 좌파들의 상징적 인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의 이런 통치방식이 일부 군중들과 좌파 지식인들의 지지를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이런 시도가 진정으로 민중들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여전히 많은 의문부호가 남아있다.

그러나 군중심리와 마오쩌뚱식의 통치방식으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당의 최고 지도부를 압박하려던 보시라이의 정책은 오히려 베이징 지도부와의 불화를 증폭시켰으며 보시라이의 차기 최고 지도부 진입 가능성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후진타오의 전화를 도청하고 당 지도부가 공식적으로 결정한 시진핑의 후진타오 승계를 부정하는 태도를 드러냄으로서 당적을 박탈당하고 사법처리를 받게 되었다.

보시라이 재판은 아직 진행 중이다. 이제 막 임기를 시작한 시진핑과 리커챵의 쌍두마차 체제가 정국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며 정치국 상무위원회에도 쟝쩌민의 영향 하에 있는 인사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때문에 보시라이의 운명은 이들 세력들의 투쟁과 타협의 결과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완전히 면죄부를 받을 가능성이 극히 적기는 하지만.

보시라이와 깊은 관계였던 조우용캉의 부패문제에 대한 조사가 시작될 것이라는 홍콩언론의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과거 세력과 새로운 세력의 또 다른 전투가 시작되고 있다.

중국정치는 변화하고 있다. 그렇지만 당의 통일성을 해치는 행위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방식은 여전히 과거의 방식대로 작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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