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 - ch1. 그림자 경주 (6)2014.10.10 PM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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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무사히 들어가셨어요?”



“덕분에 무탈하게 귀가했습니다.”



그때 샌슨 뒤에 있던 기사들 중 한명이 디트리히를 살짝 가리며 앞으로 나섰다. 깔끔하고 단출하지만 다른 이들보다 훨씬 세련된 기품이 흐르는 옷과 몸에서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서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제 9차 아무르타트 정벌군 총 지휘관, 로넨 휴리첼이라 합니다.”



“안녕하세요.”



리타의 짧은 인사에 휴리첼은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시선은 어떤 무례나 불만도 담고 있지 않았다. 리타도 그런 그를 마주보았다.



자세히 보니 어제 보았던 행렬에서 기사들 중 가장 앞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의 말처럼 총 지휘관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번쩍번쩍한 갑옷대신 단출한 복장을 하고 있으니 꽤 이미지가 다르다. 어제는 전쟁터에 금방이라도 뛰어들어 검을 휘두를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오히려 칼과 비슷한 느낌이 들 정도로 지적인 느낌이 강하다.



샌슨은 휴리첼이 인사하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회의가 끝났다고 해도 아직 기사들과 동행하는 중이었으니 개인행동은 삼가야 했다. 레이디를 대하는 태도가 문제였음을 깨닫지 못하는 오거형 인간은 대화에 끼어들었다.



“휴리첼 백작님. 여긴 헬턴트 영지 숲지기의 여식인 리타 스마인타그라고 합니다.”



“레이디 스마인타그시군요.”



그렇게 말하며 휴리첼은 리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샌슨은 어떤 엄숙함마저 느껴지는 동작에 당황했지만, 기사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휴리첼은 손을 내뻗어 그녀의 손을 기다렸다. 하지만 리타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리타는 담담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만 저는 레이디라고 불릴만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예법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합니다. 숲지기를 하는 시골 촌부의 딸을 레이디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겠지요. 제 손은 기사도의 명예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거칩니다. 부디 손을 거두어 주십시오, 백작님.”



정중한 거절이었지만 이미 꿇은 무릎을 되돌리기엔 기사의 체면이 문제였다. 휴리첼은 그다지 체면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뒤의 기사들은 그렇지 않다. 휴리첼은 기사들의 불만을 느낄 수 있었다. 레이디라곤 하지만 시골 촌구석 아낙네가 감히 백작을 거절하다니.



휴리첼이 다시 한 번 손을 청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뜻밖에 구원이 나타났다.



“그만 일어나세요. 휴리첼 백작님.”



디트리히는 어느새 리타의 곁에 가서 그녀의 손을 잡으며 휴리첼에게 말했다. 기다리던 손을 라자가 잡으니 휴리첼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일어났다. 기사들은 드래곤 라자의 행동에 감히 불만을 표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만 그들로서는 처음 보는 여성이 어떻게 드래곤 라자와 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타는 손을 잡은 디트리히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냈지만 디트리히는 어딘가 뿌듯한 느낌의 표정만 지었다. 리타는 휴리첼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완전히 일어선 휴리첼은 기사들과 비슷한 의문이 들었지만, 레이디에게 캐묻는 실례를 범하진 않았다. 디트리히의 출신에 관한 일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기에 휴리첼도 알고 있었다. 이런 곳에 친인척이 있을 이유도 없고 가능성도 없다.



하지만 리타는 기사들의 의문에 답해줄 만큼 성실한 부류는 아니었다. 이유를 알만한 어린 남자와 오거형 남자는 그런 의문을 느끼기엔 둔감하다. 결국 기사들은 의문을 풀 기회를 다음으로 넘기게 되었다.



샌슨은 일련의 사태에 당황했었지만 드래곤 라자 덕에 무사히 넘어가게 되자 안도했다. 그는 리타에게 네가 무슨 짓을 하려했는지 아느냐는 시선과 함께 말했다.



“리타, 난 아직 처리해야할 일들이 남아있으니 먼저 경비대실에 가 있어. 아마 지금쯤이면 많이 모여 있을 거야. 급하면 자렌이랑 이야기 해둬.”



“급하진 않아. 기다릴게.”



“그럼 그렇게 해. 휴리첼 백작님. 이쪽으로 오시죠.”



샌슨은 휴리첼과 기사들을 안내했다. 휴리첼과 기사들은 리타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며 몸을 돌렸다. 그때 디트리히가 휴리첼에게 가더니 손짓했다. 손짓의 의미를 알아들은 휴리첼은 몸을 낮추었고, 디트리히는 조그마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그것을 듣던 휴리첼은 쓴 웃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허락을 받은 디트리히는 다시 리타에게 달려와 옆에 섰고, 휴리첼은 놀라는 기사들을 집중시키고 발을 옮겼다. 샌슨과 기사들이 멀찍이 걸어가자 디트리히는 씨익 웃었다. 평소의 소심한 모습과 달리 여느 어린아이에게서 볼 수 있는 장난기와 순수함이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할슈타일공, 같이 안 가시나요?”



“네, 저는 어차피 있어봤자 알아듣지도 못하는 걸요. 작전도 저보단 카피에게 직접 말하는 게 더 효과적이에요.”



예닐곱 살의 아이가 군사회의에 가 봐야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드래곤 라자이기에 형식상 회의에 참여하는 것이겠지. 아이의 입장에선 꽤 심심한 일일 것이다. 휴리첼 백작도 그것을 알았는지 디트리히가 회의에 빠져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그것보다 누나.”



“리타라고 부르시지요.”



“리타 누나.”



“……네.”



“성을 안내해 줄 수 있어요?”



“성이요?”



“여긴 수도나 다른 성이랑 달라서 신기해요. 작아서 길 잃을 걱정도 없을 거 같고요. 마을도 궁금하지만 나가면 안 되니까……”



아마도 어제 샌슨들을 따라 나간 것으로 한 소리 들었나 보다. 하긴 드래곤 라자가 야밤에 사라졌으니 큰일이었을 거다. 홀로 있던 것으로 보아 말하고 나간 것 같지도 않았다.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어린 아이가 밤에 혼자 숲에 간다고 해서 혼자 보내진 않을 테니까.



리타는 은근히 마을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비치는 디트리히를 보았다. 그녀는 굳이 다른 사람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디트리히를 달래서 성안에 있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데리고 나간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는 건 마찬가지다. 이틀 연속으로 성 안의 사람들을 고생시킬 순 없지.



“마을은 작아서 나가시더라도 심심하실 겁니다. 성도 그다지 볼 게 없어 특별히 안내해 드릴만한 곳이 없습니다만, 혹시 괜찮으시다면 경비대원들이 훈련하는 것을 보시러 가시겠습니까?”



“경비대요? 네, 좋아요!”



그녀는 어차피 경비대에서 기다려야 하니 그렇게 말한 것이지만, 생각 외로 디트리히는 좋아했다. 아무리 감정에 둔감한 리타라 해도 손뼉을 짝 치면서 눈을 빛내는 모습을 보고 부정적인 느낌을 받진 않는다. 하지만 수도에서 멋진 기사들의 훈련을 보고 자랐을 귀족의 아이가 경비병의 훈련을 보고 싶어 할 이유가 없다.



동그랗게 뜬 리타의 눈을 보고 디트리히가 말했다.



“어제 민트를 따러 갔을 때, 이곳 경비대원분들이 싸우는 걸 봤거든요.”



“몬스터가 나타났나요?”



“네. 엄청 대단했어요. 이곳의 경비대원분들은 모두 수도의 기사들보다 강한 거 같았어요. 어제 민트를 따고 있을 때 늑대인간이 나타났거든요. 이야기 속의 늑대인간은 엄청 강하잖아요? 그런데 한 명도 상처입지 않고 순식간에 제압했어요.”



디트리히는 아직도 어제의 광경이 생각나는지 두 손을 꽉 쥐며 흥분했다. 어리다고 해도 남자아이인지 싸움을 보고 피가 뜨거워진 모양이다. 곱상한 얼굴에는 흥분으로 인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그들이라면 혼자서도 라이칸슬로프를 상대할 정도는 됩니다. 그들 자신이 인간으로 둔갑한 늑대니까요.”



“큭큭. 그 분들이랑 친하신가요?”



“마을이 작다 보니 비슷한 나이는 대부분 친구로 자랍니다. 항상 몬스터의 습격을 염려하다 보니 마을사람들끼리 단합도 잘 되는 편이죠. 제가 어릴 적부터 경비대에 와서 검을 배웠다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네요.”



“대단해요!”



“뭐가 말이죠?”



“여자들은 항상 치마를 입고 조신하게 행동하며 기품과 교양을 갖춘 존재라고 배웠어요. 그리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항상 보호해야 한다고 배웠고요. 누나처럼 검을 배우는 여자는 처음 봤어요. 어떻게 검을 배울 생각을 했어요?”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조신한 여자답지 않다고 비난처럼 들릴 수 있는 말도 순수한 감탄으로 들리게 만들었다. 리타는 종종 어머니에게 듣고 마을 어른들에게도 듣는 꾸중이 떠올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무릎을 굽혀 디트리히와 눈을 맞췄다. 디트리히는 짙은 검은 색의 눈동자를 마주보자 기분이 오묘해졌다.



“할슈타일공은 갚을 수 없을 정도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으신가요?”



“아, 아뇨.”



디트리히는 어머니가 죽고 술독에 빠진 아버지 밑에서 크다가 후작 가문에 입양되었다. 하지만 특별히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누나와 아버지랑 있을 때가 그리운 적이 많았다.



“저는 그런 은혜를 아직도 입고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계속요.”



“……”



디트리히는 리타에게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말했다.



“감히 말씀드리면 저도 할슈타일공처럼 입양된 몸입니다. 원래 부모님은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군요. 사실 입양되기 전의 기억이 아애 없습니다. 다만 친부모님의 친구였던 지금의 부모님이 거둬주셨단 사실만 알고 있습니다.”



디트리히는 입양이란 단어에 움찔했다. 화나진 않는다. 단지 리타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그러나 리타의 진지한 태도에 그는 끼어들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주변을 살펴볼 나이가 되어서 저는 혼자 살기를 희망했습니다. 지금의 부모님께 받은 은혜는 있지만 더 이상 타인에게 무엇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나이가 들자 부모님께 은혜를 갚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더 커지더군요. 제 아버지는 숲지기입니다. 다른 영지의 숲지기는 크게 어려울 게 없는 직업이지만, 저희 영지는 어제 보셨다시피 항상 몬스터의 습격을 두려워하는 곳입니다. 숲지기도 그런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요.”



“그러면 부모님을 위해서?”



리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여자란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힘을 갖춰야겠다는 결론이 나더군요. 지금이라면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만, 어렸던 그때로서는 힘이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여서 검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지요. 아버지의 숲 일을 도와드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디트리히는 리타의 조곤조곤한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린 그로서는 단순히 동의만 해야 하는 것인지, 위로를 해야 하는 것인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서투른 말 대신 질문을 하기로 했다.



“저, 진짜 부모님은 그립지 않으신가요?”



리타는 대화의 흐름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검에서 주제는 부모님께로 옮겨갔다. 성인이었다면 그 변화를 지적했겠지만, 상대는 어린 아이다. 더욱이 부모를 잃은 아이다. 아이의 관심은 검에서 부모에게로 옮겨가기 쉬웠다.



리타는 조심스럽게 팔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를 들여다보는 투명한 눈망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비치는 그녀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뻗었던 팔은 유리그릇이라도 안 듯 조심스럽게 어린 소년을 안는다. 소년과 맞닿은 가슴을 통해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맞닿은 볼은 소년이 당황하고 있음을 충분히 전달했다.



디트리히는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다행이 아무도 없었다. 그는 놀라서 굳은 상태로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전해지는 온기에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그리고 매우 천천히 여성을 마주 안았다.



그렇게 신전에 그려진 그림처럼 두 입양아는 서로의 체온을 나눴다.



“저는 사람의 감정에 둔감합니다. 지금도 할슈타일공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기분인지 알지 못합니다.”



리타는 목에 두른 소년의 팔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말을 계속 이어갔다.



“다만 제가 어릴 때 겪었던 감정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할슈타일공을 투영했습니다. 제 동생은 할슈타일공이 제 품에서 어머니를 느꼈을 거라 말하더군요. 많이 부족하겠지만 공께서 괜찮으시다면 저를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디트리히는 리타에게 안긴 채 가만히 있었다. 리타는 아무런 행동과 말없이 대답을 기다렸다. 디트리히는 천천히 리타의 품에 묻었던 얼굴을 들며 가로저었다. 리타는 그의 거절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계속 고개를 젓던 디트리히가 멈췄다. 그는 눈을 치켜떴다. 어떤 의지가 느껴지는 눈매지만 촉촉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 정도로 충분해요. 고마워요.”



“그런가요. 제가 어릴 때 보다 훨씬 강하시군요.”



“아니에요.”



디트리히는 베시시 웃었다. 퍽 진한 웃음이다. 리타는 마주 웃었다.



“그러면 경비병실로 가실까요. 정식 훈련 시간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훈련 하는 이들은 있을 겁니다. 잘하면 대무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요.”



자연스럽게 손을 잡은 어린 소년과 처녀는 복도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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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면 쓸 수록 언어 유희는 어렵다는걸 깨닫게 됩니다.
댓글 : 2 개
재밌게 읽었습니다 ㅎ 이영도팬으로서 이런거 완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달린 댓글이라 반갑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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