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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 - ch1. 그림자 경주 (9)2014.10.13 PM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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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이 떠올라 어둠이 자욱하게 깔린 시간임에도 마을대로는 어수선했다. 평소 헬턴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축제를 제외하고 이런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드래곤이 성 너머에 있고 곧 있으면 또 다른 골칫덩이 드래곤을 잡으러 간다. 정벌군을 준비하는 동안 마을에 움직임이 많아지고 그것은 사람들의 기분마저 활발하게 만든다.
리타는 분주하게 움직이거나 들뜬 표정으로 서성이는 사람들을 지나쳤다. 주변의 분위기에 쉽게 동화되는 성격은 아니라지만 발걸음이 가벼워 지는 정도의 변화는 있었다. 그녀는 대로에서 과일주를 한 병 사들고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집은 숲 속에 있지만 그곳 말고도 숲 속에는 한 사람이 더 살고 있다. 리타의 목적지는 그곳이다.
아담한 오두막에 도착한 리타는 창문으로 불빛이 비치는 걸 보고 안에 사람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후치가 만들어주는 양초의 열렬한 소비자인 그는 늦은 밤까지 책을 읽는 취미를 가졌다. 또한 리타가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명이기도 하다.
“칼, 계신가요?”
리타는 문을 노크하며 칼을 불렀다. 곧이어 안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문이 열리며 칼의 의아한 얼굴이 나타났다.
“스마인타그양 아니십니까. 이런 야심한 시간에 어쩐 일이신지요?”
리타는 과일주를 들어 보였다.
“한 잔 하실래요?”
리타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매력적이라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칼은 당혹해하는 표정으로 화답했다.
“으음, 스마인타그양. 저는 보기보다 주변을 살피는 사람입니다.”
“마치 전 그렇지 않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야심한 시간에 남자 혼자 사는 오두막에 여성이 술을 들고 왔다는 건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이 되겠지요.”
리타는 주위를 둘러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볼 사람도 없는 숲 속에 사는 분께서 걱정할 일은 아니군요. 그리고 혹시라도 여차하면 칼한테 시집가는 수가 있지요.”
“쿨럭, 컥.”
“농담입니다. 멀쩡한 남자의 인생을 망치고 싶진 않아요.”
칼의 격렬한 기침을 부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리타는 과일주를 얼굴에 대며 싱긋 웃었다. 칼은 그답지 않게 당황한 기색을 보일 때 안에서 통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꽤 유쾌한 처자일세. 칼, 언제까지 레이디를 밖에 세워둘 건가? 들어오라고 하시게.”
목소리를 듣는 순간 리타의 표정을 살짝 굳었다. 혼자 산다고 생각했던 칼의 집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 아니다. 한번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는 어딘지 껄끄러운 기억이 있었다.
“그러지요. 누옥에 왕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마인타그양.”
칼은 문을 활짝 열며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예상대로 위압적인 모습의 장님 마법사였다. 술과 책이 올려진 테이블 옆에 그는 편안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아마도 칼과 한창 이야기 중이었던 모양이다.
“실례하겠습니다.”
리타는 고개를 숙이며 의자에 앉았고 칼은 잔을 하나 더 챙겨왔다. 리타는 그에게 과일주를 내밀며 말했다.
“선물은 정말 선물이 되어버렸군요.”
선물은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것이다. 술을 마시는데 술을 사온 상황을 빗댄 말이다. 주량이 약한 칼로서는 영락없이 다음 기회를 위해 남겨놓아야겠지.
칼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마시지 전까지 선물해준 사람을 기억할 수 있으니 훌륭한 선물입니다. 미인을 계속 기억할 수 있다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시고 나면 잊겠다는 말 같은데요?”
“망각은 헬카네스와 유피넬의 선물이고, 술은 그 훌륭한 촉매제니까요.”
리타는 생각에 빠진 포즈를 취했다.
“역시 음험한 사람이군요. 칼. 시집가는 건 재고해 봐야겠어요.”
“……”
“푸하하하. 칼, 자네가 이리도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나.”
타이번의 폭소에 칼은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그러며 그는 타이번과 마시던 와인을 리타에게 따라주었다. 리타는 농담을 할 때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진지하기 때문에 단순히 말로 듣는 것 이상의 효과가 있다. 그의 당황은 타이번에 비해 정당성을 가진다고 위안했다.
붉은 와인이 따른 잔에 비치는 미녀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리타는 우아한 자세로 잔을 들어 돌리며 향을 음미했다. 타이번은 폭소를 멈추고 리타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장님이건만 그는 리타가 앉은 곳을 정확히 보고 있었다.
“그래, 이 늦은 밤에 사내 둘이 외로이 있는데 어인 일로 온 건가?”
“성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이야기지요?”
칼은 관심을 보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대게 이 남자는 남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가지지만 맹렬히 자기 것으로 하고 싶다는 욕구의 일변일 뿐이다. 지식욕이 넘쳐나는 것은 마법사의 그것과 비슷할 것 같다.
타이번도 귀를 기울였기에 주목을 받게 된 리타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떫고 신맛 사이로 은은한 단맛이 퍼지는 게 꽤 좋은 와인인 것 같다. 하지만 맛에 감탄하기엔 두 남자의 기다림이 있어서 그녀는 바로 말했다.
“캇셀프라임을 만났습니다.”
칼은 잔을 놓칠 뻔 하다가 간신히 다시 움켜쥘 수 있었다. 하지만 안에 들어있던 와인의 상당량은 그의 옷에 떨어져 촉촉하게 적셨다. 그러나 그런 소소한 것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그 화이트 드래곤을 말입니까?”
리타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칼에게 주며 대답했다.
“네. 허슨이 말한 대로 상당히 예쁘더군요.”
“호오, 드래곤을 보고 예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구만.”
타이번은 칼과 달리 침착했다. 그는 드래곤을 보았다는 사실보다 드래곤을 예쁘다고 말한 사실에 더 주목했다. 리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파충류보고 예쁘다고 할 만큼 미적 감각이 폭넓은 편은 아닙니다. 드래곤을 보고 감탄한다면 다른 표현들이 더 어울리겠죠. 멋있다거나 장엄하다거나 그런 것들이요. 제가 본 것은 폴리모프한 모습입니다.”
“세상에…… 폴리모프까지 했습니까?”
칼은 그녀의 말에 거듭 놀랐다. 그가 견문이 넓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안에서 드래곤과 대화를 해본 역사는 없었다. 더욱이 폴리모프한 드래곤을 마주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놀란 칼은 리타의 손수건으로 옷을 닦는 것을 잊었지만 옆에 있던 타이번은 느긋한 모습이었다.
“하긴 헬턴트성은 드래곤이 지내기엔 비좁지. 캇셀프라임은 라자를 아낀다는 소문도 있으니 폴리모프한 모습을 봤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야.”
“후치도 비슷한 질문을 드렸던 거 같은데 드래곤을 잘 아시나 보군요.”
타이번을 손을 휘휘 내저었다. 치렁치렁한 로브가 날리는 바람에 테이블 위의 집기들이 쓰러질 뻔 하였지만 장님답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도 말했지만 드래곤은 잘 몰라. 그저 나이를 먹어서 어지간한 일에도 잘 안 놀랄 뿐이지. 자네들 보다야 여러 드래곤에 대해서 들은 것도 많이 있고.”
칼과 리타는 타이번의 말을 그대로 믿진 않았지만 더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대신 리타는 원래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캇셀프라임은 드래곤 라자와 꽤 친해 보이더군요.”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서로 맹약으로 맺어져 있는 이들이니.”
리타는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녀는 맹약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강제로 맺어주는 맹약이죠. 정략결혼과 다를 게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거 같구만.”
타이번은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리타를 보았다. 리타는 한 모금 마셨다고 생각한 와인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자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지금 헬턴트의 주민으로서 드래곤 라자를 싫어할 수는 없습니다. 드래곤 라자가 없었다면 이곳은 지금 같은 희망도 가지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거 같네만.”
두 남자는 리타의 말에 동시에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칼은 타이번을 보았으나 타이번은 계속 리타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타이번은 리타가 어떤 말을 할지 기대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칼은 평소에도 아무르타트가 있었기에 헬턴트는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하셨죠. 동의합니다. 드래곤 라자가 오지 않더라도 헬턴트는 더욱 결속하여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힘든 일이 있더라도 마을은 힘을 합쳐 여러 번 극복해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반복되겠지요. 절망의 수렁을 빠져나오고 다시 빠지고 나오고 빠지고 나오고 빠지고……”
“음, 그 정도까지의 말은 아니었습니다. 낮에 네드발군에게도 말한 것이지만, 우리말은 번영하기 좋은 위치에 있지요. 비옥한 토지와 서쪽 개척지의 첨병이 되는 위치입니다. 지금은 아무르타트 때문에 이 땅을 노리는 사람이 없을 뿐이라서 이렇게 조용하고 평온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이지요. 스마인타그양도 번화한 도시의 모습을 알지 않습니까? 아무르타트가 지금의 마을을 만든 가장 큰 원인일 뿐이라는 것이지, 미래에 대한 원인까지 말하는 것은 너무 이릅니다.”
리타는 칼을 바라보았다. 그는 평소의 평온을 되찾은 모습으로 리타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칼, 당신은 마을이 적응한다고 말했어요. 그래요. 마을이 변화할 수는 있겠죠. 사람들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도 그 가능성을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다가올 종말을 알기에 더 불태울 수 있듯이 우리 마을은 즐거울 수 있어요. 하지만 드래곤이 왔으니까. 아무르타트가 가져오는 연쇄를 끊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캇셀프라임이 왔으니까. 나중에 더 절망한다 하더라도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저로서는 이 잠시간의 고양감 때문이라도 드래곤 라자가 왔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하지만……”
“드래곤 라자라는 맹약은 불쾌하다, 이건가?”
타이번이 리타의 말을 받았다. 양초 불빛이 그의 하얀 눈에 드리워져 마치 눈동자가 불타는 것만 같다. 리타는 술을 삼키며 대답했다.
“제가 생각해도 어린아이 같은 이유입니다. 맹약 자체는 불쾌하지만 드래곤 라자의 존재를 기뻐하니까요.”
“그렇군. 그럼 이제 왜 불쾌한지에 대해서 들을 수 있겠나? 단순히 정략결혼 같이 강제성을 가진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닌 거 같네만.”
또 한 모금. 오늘은 자주 목을 축이게 된다. 어느 사이 잔은 비었고 리타는 다시 채웠다.
“칼과 전에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을 불에 비유해서요. 인간을 모든 것을 태웁니다. 다 인간의 길로 만들어 버려요. 그리고 그건 라자를 통해 드래곤도 그렇게 만들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으음……”
“할슈타일가의 꼬마는 캇셀프라임을 누나 같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고 투덜댔어요. 캇셀프라임이 폴리모프 했을 땐 마치 가족처럼 스스럼없는 태도였습니다. 캇셀프라임은 하얀 눈의 공주 같은 모습으로 라자를 품에 안고 재우더군요. 그리고 저와 오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화를 낼만한 말에도 평정을 유지하면서 논리적으로 말씀하시더군요. 여전히 라자를 재우면서요.”
리타는 무표정으로 일관한 채 말을 끝냈다.
칼과 타이번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리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덕분에 오두막은 적막에 휩싸였다. 양초만이 홀로 불을 피우며 방을 채웠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적막은 리타가 와인을 삼키는 소리만이 범할 뿐이다. 그 오랜 침묵을 깨트린 건 가장 나이가 많은 이였다.
“그 드래곤 라자는 어떻든가?”
리타는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질문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정확히 모르겠단 의사표시에 타이번은 다시 질문했다.
“드래곤 라자는 보통 사람과 다를 게 없던가?”
“나이에 비해서 조숙하지만 그 나이또래 같은 모습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사람들과 다른 점은 없는 것 같더군요. 드래곤을 사람 대하듯이 대한다는 것 빼고는요.”
“그런가.”
한 모금. 잔이 비었다. 손을 뻗어 보니 병도 비었다. 그것을 본 칼은 리타가 들고 왔던 과실주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술은 선물의 의미는 퇴색되겠지만 본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칼은 술이 약하지만 이런 대화가 안주라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두 사람의 대화가 자기 안에서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드래곤 라자는 두 존재의 변화를 가져오는군요. 아마도 드래곤 로드가 할슈타일가문에 내린 것은 단순한 보답이 아니었나 봅니다.”
“드래곤이 인간을 변화시키길 바랐다고 봐야겠지요.”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겠지.”
“네, 맹약의 의도가 어떻든 결과적으로 캇셀프라임은 드래곤 라자에 의해 변화된 드래곤이 되었군요.”
“그렇게 되는군.”
칼은 빈 잔에 과실주를 따르며 다른 사람들의 잔도 채워주었다. 타이번은 소리를 듣고 감사를 표했으며 리타도 고개를 숙였다. 숙여지는 그녀의 얼굴은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칼은 그녀가 생각보다 취기가 많이 오른 것인가 걱정되어 말을 걸려고 하였으나, 타이번이 갑자기 손뼉을 치기 시작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짝짝짝!
“대단해. 이 마을은 정말 흥미롭구만. 자네들에겐 실례지만 이런 촌구석에서 지금 같은 대화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네. 진심으로 이렇게 대화하는 게 오랜만이야.”
그는 정말로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하였기에 리타는 의아하게 쳐다보았고 칼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칼, 자네는 아무르타트가 가진 힘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풀어냈지. 낮에 자네와 같이했던 후치라는 소년이 말했던 게 일반적인 사람의 생각이야.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아가씨는 드래곤의 변화를 눈치 채고 불쾌해 하네. 인간에 의한 인간화라는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생각하겠나? 다들 인간 안에 갇혀서 생각할 뿐인데, 자네들은 제각기 그 틀을 벗어났어. 재밌구만. 재밌어.”
“미력한 안목으로 본 세상을 궤변으로 풀어냈을 뿐입니다. 천수를 헬카네스와 유피넬의 딸에게 받친 분께 괜히 실례가 되지 않았나 걱정됩니다.”
“겸손할 것 없네. 자네는 이런 촌구석에 있을 사람이 아니로군.”
칼은 머쓱한 표정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는 과거 청운의 꿈을 가지고 세상을 주유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과거일 뿐이고 지금은 그저 헬턴트의 독서가이면 충분하다.
리타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와인과는 다르게 맑은 빛을 내는 과실주를 기울였다. 제법 도수가 높은 것인지 단번에 목구멍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풍부한 과일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그녀가 자신의 안목이 정확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녀는 왠지 좋아지는 기분에 타이번에게 말을 걸었다.
“타이번, 방금 제 이야기가 재미있었나요?”
장님은 타이번은 리타가 어떤 표정으로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순순히 대답했다.
“물론일세. 아가씨는 잘 모르겠지만 아가씨가 해준 이야기는 나도 꽤 품고 있던 부분이거든.”
“그래요? 신기하네요. 전 아직 재미있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즐거워 하시다니요.”
“뭐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가?”
리타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칼은 어떤 불안함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결코 이렇게 웃는 리타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
“캇셀프라임…… 아니, 카피…… 어, 음 나보다 나이가 많을 테니 언니이려나? 카피 언니랑 했던 말이 있거든요. 그게 원래 하려던 거였어요.”
카피 언니라는 말은 아마도 캇셀프라임을 일컫는 것이라 짐작하며 칼은 사색이 되었다. 이번에는 타이번 조차도 드래곤을 애칭으로 부르는 아가씨를 보고 가만히 있진 못했다. 디트리히를 알지 못했던 그들은 세상에서 어느 누가 카피언니라는 친숙한 호칭으로 드래곤을 부를 수 있을지 떠올리려고 애썼다.
리타는 싱글거리며 과실주를 입에 가져갔다. 칼이 재빨리 컵을 낚아채려고 했지만 리타는 신기한 움직임으로 칼의 손을 피했다. 그리고 입에 과실주를 들이부었다. 목구멍은 불타올랐고 자연스레 인상은 찌푸려지지만 기분은 좋다.
“그 언니는 세상에 자기가…… 아, 이건 사생활인가. 말하면 안 되겠네요. 바보 같아서 꽤 웃긴 건데.”
“저기, 스마인타그양?”
“네에!”
“……”
칼은 헬카네스와 유피넬게 맹세코 이런 하이텐션의 리타를 본 적이 없다. 칼은 그랑엘베르를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홍조가 진하게 오른 얼굴로 싱글거리는 리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타이번은 재밌는 이야기를 못들은 게 더 아쉬운 모양이다.
“아가씨. 지인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자세는 정말 훌륭하구만. 그 언니도 아가씨에게 감동할걸세. 하지만 그 언니는 지금 이 자리에 없고 여긴 그 언니를 만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늙은이 둘 뿐이지 않은가. 언니가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면 이야기 하지 않아도 괜찮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킬 수야 없지 않은가.”
“말하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리타는 잔을 쥔 상태로 검지를 척 들어서 타이번을 가리켰다. 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다행이도 타이번은 장님이어서 리타의 제스처를 볼 수 없었다. 볼 수 있었다 하더라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아가씨의 고결한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를 어찌 강요할 수 있겠는가. 이 마나의 종은 그저 아가씨가 판단하기를 기다릴 뿐이네. 하지만 그 언니가 아가씨의 말에 어떤 수치심을 느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뭐니뭐니해도 위대한 드래곤이니 말일세. 그녀는 아가씨의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해. 아가씨가 말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을 거야.”
“그럴까요?”
“타이번……”
칼은 리타를 꼬드기는 타이번을 말렸다. 어째서인지 점잖고 경험 많은 이 노인이 드래곤의 이야기에 이토록 집착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 술에 취한 리타를 잡고 숨기려는 이야기를 들으려는 게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비록 그의 호기심은 듣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칼은 난처한 표정이 되어서 리타에게서 술병을 멀리 떨어트렸다. 술잔을 뺏을 수 없으니 술병이라도 피신시켜야지.
“스마인타그양, 술이 과했습니다. 그만 마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괜찮아요오, 카알. 아직 멀쩡한걸요오. 더주세요오.”
리타는 손을 뻗어 술병을 낚아채려 하였고 칼은 필사적으로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칼보다도 긴 그녀의 팔은 꽤나 위협적이다. 흐느적대는 움직임으로 팔을 움직이던 리타는 몽롱한 눈빛으로 팔을 내렸다. 대신 분한 표정으로 칼이 든 술병을 노려보았다.
타이번은 껄걸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내가 주책을 부렸구만. 미안하이.”
리타의 시선이 타이번을 향했다. 하지만 시선이 담고 있는 것은 퍽 이상했다. 그녀의 눈은 어디를 향하는지 모를 불쌍함을 담고 있었다. 촛불이 흔들린다.
“카피 언니는 행복해 보였어요. 그게 바보 같은 게 아니면 뭐겠어요. 바보도 그런 바보가 없어요. 나보고 멍청하다는 주제에 자기가 더 멍청해요.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는 거죠?”
그녀의 마지막 말은 대답을 바란 질문이 아니다. 칼과 타이번을 그것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 말을 꺼낼 정도로 눈치 없는 남자들은 아니다. 리타는 타이번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양초가 일렁이는 게 눈길을 잡아끈다.
성에서 캇셀프라임과 이야기 할 때도 활활 타는 양초가 있었다. 캇셀프라임은 그 양초를 눈에 담으며 자조적으로 이야기했었다. 그녀는 라자를 받아들이고 변화를 받아들이더니 죽음까지 받아들였다.
리타는 양초를 보며 웃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캇셀프라임의 웃음을 흉내 내어보려고 시도했다. 입가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며 일그러진다. 결코 웃을 수가 없다. 그녀의 웃음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담고 있는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양초가 기묘하게 흔들린다. 아니, 흔들리는 건 양초가 아니라 자신인가? 시야가 아득해진다.
“드래곤이 행복해 보인다니, 정말로 웃긴 이야기였어.”
“타이번, 말이 과하십니다.”
“아닐세. 전혀 과하지 않아. 자네 생각에도 웃기지 않다면 왜 그렇게 즐거워하는 건가? 아, 내 눈은 보이지 않으니 걱정 말게. 다만 자네가 지금 흠칫하는 기색만으로 내 짐작을 확인시켜 주었을 뿐일세.”
“대단하시군요. 타이번. 제 자신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감출 게 뭐가 있겠는가. 누가 들어도 웃긴 이야기에 웃는 게 당연한 것을.”
“그렇군요. 하하하.”
“이 아가씨는 내가 보기에 그 라자보다도 더 드래곤을 걱정하는 거 같아. 드래곤이라고는 증오해야 할 대상일 뿐인 이 마을에서 말이야.”
“그게 이곳 헬턴트라는 마을의 매력이 아니겠습니까. 이 아가씨의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이 매력적인 아가씨의 말을 안주 삼아 한 잔 더 기울이겠나? 아가씨가 혼자서 다 마셔버리는 바람에 정작 우리는 제대로 마시지도 못했지 않는가.”
“그러시겠습니까?”
“이토록 좋은 안주가 있는데 마다하는 건 술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하하. 알겠습니다. 그러면 우선 그 안주제공자를 어떻게든 해야겠군요.”
칼은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은 채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는 리타를 보고 말했다. 아무리 본인들의 의도는 없다지만 과년한 처녀를 남자들만 있는 곳에서 재울 순 없는 법이다. 칼은 잠든 리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우려고 했다.
“카피!”
칼의 손이 리타의 어깨에 닿는 순간 리타를 고개를 번쩍 들며 외쳤다. 볼만 아니라 테이블과 닿아있던 이마도 발갛게 도장이 찍혀있는 게 꽤 재미난 모습이다. 하지만 칼은 그 재미를 즐길 수 없었다.
리타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칼을 직시했다. 칼은 그녀가 술이 과하다고 느낀 순간부터 줄 곳 받았던 불안함이 어떤 것인지 점점 실체가 밝혀지는 느낌이 들었다.
“미인계를 쓰는 거예요!”
“뭐?”
타이번이 황당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리타는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팔로 테이블에 고정시키며 외치다시피 말했다.
“카피 언니는 예쁘니까요! 안 돌아볼 남자가 없어요! 그러니까 미인계를 써서 아무르타트를 꼬시면 돼요!”
“진정하게나, 스마인타그양.”
“아니지. 아니지. 히히. 아무르타트는 여성형이랬지. 그러면 미인계가 안 되잖아. 어떡하죠, 언니?”
칼은 허우적거리는 리타를 붙잡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타이번은 장님의 권리를 적절히 행사하며 리타의 말에 웃고 있었다. 리타는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눈으로 계속 허공을 향해 말했다.
“에이, 괜찮을 거야. 요즘 세상에 여자도 미인계로 꼬실 수 있어요! 카피 언니라면 가능해. 아무르타트 같은 건 레즈로 만들어 버려요! 요망한 에로 꼬맹이를 꼬신 솜씨로 아무르타트도 꼬시는 거야! 안되면 덮쳐버려!”
그랑엘베르! 좀 도와주시죠!
칼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고 타이번은 너무나도 즐겁단 표정이 되었다. 타이번은 과실주가 담긴 잔을 들어 허공을 향해 건배하며 리타의 주정을 감상했다. 칼은 최대한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지 않으려 애쓰면서 리타를 붙잡으려 했다. 그 모순적 행동 때문에 리타는 조금 더 주정을 부리며 칼을 곤란하게 만들었고, 이내 다시 테이블위에 쓰러졌다.
칼은 지친 몸과 마음으로 원래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은 세월을 뛰어 넘은 것처럼 초췌해져 있었다.
“하…… 시집온다고 해도 거절해야겠습니다.”
“뭐? 으하하핫.”
타이번은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 독서가도 유머 감각이 없는 게 아니었어.
“이제 진정 된 듯하니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타이번?”
“이보게 칼. 자네는 방금 전부터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계속 의심 하는 중인가 보군.”
“……타이번.”
장님은 웃었고 칼도 웃었다. 칼의 웃음은 울음을 동반한 쓴 웃음이라는 게 차이점이다. 장님의 권리를 주장하는 타이번을 보며 칼은 이 키 큰 아가씨를 어떻게 집까지 모셔다 드리나 생각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엎드려있던 리타는 그들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잠결에 웃음소리가 그녀에게로 번져서 입 꼬리가 올라간다.
히히히. 반가웠어요. 캇셀프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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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4용지로 8장 분량입니다. 보통 5장씩 개재하는데, 이건 대화가 중간에 끊기 애매해서 한번에 올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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