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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 - ch1. 그림자 경주 (11)2014.10.15 PM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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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후퇴!”
샌슨의 명령에 병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병사들 사이에 후치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아홉 마리의 트롤은 여덟 명의 도망치는 인간을 본능적으로 쫓아갔다.
먼 거리에서 지켜보던 리타는 몸을 돌려서 식량창고 쪽으로 향했다. 샌슨은 다른 병사들과 합류하여 트롤을 저지할 생각인가 보다. 방금 있던 병사만으로 제압은 할 수 있겠지만 사상자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난전에 후치가 말려들지도 모르니 그들은 후퇴했으리라. 일단 샌슨들이 대로에 쳐들어 온 트롤을 막는다면 그쪽은 맡겨도 된다.
트롤들은 몬스터 주제에 양동작전을 썼다. 대로를 공격해서 혼란시키고 그사이 소수의 트롤이 식량창고를 턴다. 힘 있는 놈들치고 생각이상으로 머리를 굴렸다.
식량창고로 향하던 그녀는 또 다른 비명소리를 들었다. 이번엔 전과 달리 묵직한 저음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저음들. 남자들이 전투를 하고 있다.
멀리 트롤 한 마리와 대치하고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한 명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있었고 두 명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피를 흘리고 간신히 서 있었다. 트롤도 정상은 아니었다. 재생력이 엄청난 트롤이라지만 완전히 떨어져 나간 팔과 몸을 꿰뚫은 상처들이 상태를 말해준다.
리타는 달리는 그대로 오른손으로 검을 뽑으며 왼손에 마나를 집중했다. 왼손에 모여든 마나는 칠흑 같은 어두운 빛을 뿜으며 공처럼 형상화했다. 그리고 리타는 달리던 기세 그대로 왼손에 떠오른 마나 볼을 트롤을 향해 던졌다.
“쿠워어어!”
마나 볼은 트롤에게 직격하며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트롤은 갑작스런 공격에 남자들 보다 훨씬 묵직한 비명을 지르며 발광했다. 시뻘게진 트롤의 눈이 리타를 발견했다.
리타는 마나 볼을 던진 직후 다시 마나 볼을 생성하며 트롤에게 달려들었다. 트롤은 남은 한쪽 팔로 돌도끼를 리타에게 휘둘렀다. 리타는 횡으로 휘둘러지는 공격을 피해내며 휘둘러진 트롤의 팔을 위로 베어 올렸다. 그리고 운동력을 그대로 보존하듯 몸을 회전시키며 칼이 베고 지나간 자리에 마나볼을 날렸다.
퍼엉!
롱소드는 트롤의 팔을 절반쯤 잘라냈으나 상처는 얇았다. 하지만 그 틈을 파고든 마나볼은 폭발하며 트롤의 팔을 완전히 날려 버린다.
졸지에 두 팔을 다 잃은 트롤은 당황보다 분노를 더 느끼며 리타에게 몸으로 달려들었다. 성인 남성 보다 훨씬 크고 우람한 몸이 돌진하니 엄청난 위압감이다.
리타는 뒷발에 힘을 주며 몸을 최대한 낮춰 트롤의 다리를 돌아 지나갔다. 롱소드로 허벅지 근육을 베었지만 완전히 절단하지는 못했고 트롤은 뒤돌며 발을 날렸다. 베어진 근육에 힘이 들어가며 트롤의 피가 거세게 뿜어져 나온다.
리타는 흩뿌리는 피를 왼팔로 가리며 뒤로 피했다. 찰나의 차로 트롤의 발이 그 자리를 가르며 무서운 파공성을 남겼다. 두 팔을 잃은 트롤은 몹시 분노한 눈으로 리타를 노려보았다. 눈빛이 살기로 나타난다면 리타를 갈기갈기 찢을 것만 같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것은 트롤 평생의 실수다.
리타는 트롤을 노려보며 사납게 외쳤다.
“Peka!"
트롤은 지금 앞에 서있는 조그만 먹잇감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온 몸이 사시나무 떨 듯이 떨려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조그만 먹잇감의 매서운 눈과 목소리는 마치 흉흉한 포식자의 그것 같다. 턱이 덜덜 부딪친다.
푸욱
리타는 그대로 롱소드를 트롤의 심장에 찔러 넣었다.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난 트롤이라도 확실하게 죽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목을 완전히 절단하거나 심장을 망가트리는 것. 리타는 찔러 넣은 검을 좌우로 비틀며 빼냈다. 수축된 근육이 단단히 검을 움켜쥐었기에 한쪽 발로 트롤의 거체를 밀어냈다.
트롤은 상처에서 피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리타는 피를 피해 물러나며 주위를 살폈다. 트롤이 더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트롤과 대치하던 남자들에게로 달려갔다.
“괜찮아요?”
서로를 부축하고 있던 남자들은 고개를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하지만 한 명만 제대로 고개를 들었고 나머지 한 명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개를 들 수 있었던 한 명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 리타구나.”
목소리는 매우 가늘게 떨며 나오고 있었다. 그와 서로를 지탱하던 남자는 어느새 일방적으로 기대고 있었다. 살아남은 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참지 못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그는 손을 들어서 그의 어깨에 기대었던 사람의 눈을 감겨주었다. 마지막까지도 트롤을 노려보던 눈은 겨우 편안히 감길 수 있었다.
“당신도 위험합니다. 출혈량이 많아요.”
“나, 는 괜찮아. 그래, 어떻게든…… 큽, 살았잖아.”
“……”
리타는 울음을 베어 문 남자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회복 마법 같은 건 쓸 줄도 모르고 이 마을엔 신관도 없다. 그를 치료해 주고 싶어도 응급처치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출혈은 치사량이라고 봐도 될 정도다. 입술이 새파랗다.
리타는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검게 타오르는 눈동자를 들어 남자를 직시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한 발짝 물러서 있는 남자는 몹시 위태로워 보인다.
“네, 살아남았어요. 그러니까 조금 더 노력하세요.”
리타는 남자의 짓이겨진 복부를 발견했다. 엄청난 피는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이리라. 남자의 눈은 삶에 대한 의지보다는 남겨진 것에 대한 회한을 비추고 있었다. 그런 눈이 된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익숙한 리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살라고 말하는 남자지만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하고, 살아난다 해도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포기 할 수는 없다.
리타는 그녀의 라이트 레더를 벗었다. 그리고 셔츠의 단추를 거칠게 풀어내고 이빨로 셔츠자락을 물었다. 남자의 눈이 커졌다. 태양아래 완연히 드러난 처녀의 하얀 속살 때문이 아니다.
리타는 셔츠를 잡고 턱과 손에 동시에 힘을 주었다. 셔츠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찢어졌고 리타는 그것을 조심스레 남자의 복부에 감았다. 남자는 리타의 행동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매듭을 지으려 할 때 손을 붙잡았다.
“됐어. 무, 묶는 건 내가…… 할 수 있어.”
“말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이 곧 올 겁니다. 그때까지만 버티세요. 의사만 있으면 희망이 있어요.”
“희망? 자, 잔인한…… 후우, 말이구나.”
리타는 매듭을 마저 묶었다. 힘을 줘서 꽉 묶었으니 상처의 고통이 상당할 텐데도 남자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이미 통각을 못 느낄 지경이 된 건지도 모른다. 리타는 출혈을 막는 것 외에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배가 짓이긴 거 외엔 다른 큰 상처는 없었고, 짓이긴 배에는 그녀가 더 이상 행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리타는 어떤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희망을 비웃는 남자에게 어떻게 희망을 줄 수 있을까. 후치라면, 샌슨이라면, 제미니라면, 칼이라면, 어머니라면, 아버지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지금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할 텐데, 그녀는 말할 수 없다.
가슴이 답답하다. 속옷만 남은 가슴이지만 한 없이 답답한데 어찌할 길이 없다. 리타는 이를 악물고 남자를 땅에 편하게 눕혔다. 그리고 적당할지도 모르지만, 이것 말고는 해줄 게 없는 말을 했다.
“죽어도 헬턴트답게…… 죽으세요.”
죽으라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스스로가 불쾌하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뜨겁다. 숙취 탓인가? 그럴 리는 없겠지. 이를 악물 수밖에 없다.
남자는 손을 들었다. 천천히 힘겹게 올라간 손은 리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맙다.”
리타는 머리에 손을 올려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사람의 손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차갑다. 이 이상은 무리다. 지금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리타는 그 손을 잡고 천천히 내려놓은 다음 일어섰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라이트 레더를 속옷 위에 바로 뒤집어썼다. 피를 머금은 가죽의 서늘하면서도 기분 나쁜 감촉이 전해진다.
“트롤은 더 있습니까?”
“식량 차, 창고에……”
“알겠습니다.”
리타는 남자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남자를 다시 뒤돌아보았다. 이런 때라도 도움이 될지 모르는 유머 감각이 빛을 발하기를.
“혹시 살아난다면, 결혼해 주실래요? 요즘 어머니가 사윗감 데려오라고 성화거든요.”
남자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내 눈은 가라앉으며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이미 결혼, 쿨럭, 큽, 겨, 결혼한 사람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거든. 미, 미안하네.”
“첫 번째 프로포즈는 실패군요.”
리타는 황급히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이번에야 말로 뒤도 안 돌아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숲을 달릴 때와 마찬가지로 주변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남자의 마지막 말에 지어지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 한껏 속도를 높인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돌아갈 의지가 있다는 거겠지. 정말로 그 별 것 아닌 한마디가 이렇게 뜨거울 수가 있구나.
달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식량 창고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앞을 서성이는 무엇인가가 보인다.
“키륵?”
“키르르.”
보이는 건 두 마리. 창고 문이 열린 것으로 보아서 창고 안에 더 있을 수도 있다. 트롤들은 멍청해 보이는 얼굴을 들고 리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에서 볼 때 그건 벌레가 죽여 달라고 달려드는 모습이었다.
검은 레깅스팬츠 위에 라이트레더만 걸친 리타는 왼손에 마나볼과 오른손에 롱소드를 들고 쇄도했다. 양동작전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쪽으로 온 건 많아도 서너 마리. 해볼만 하다. 그리고 지금 기분으로는 그 이상 있다고 해도 감행 할 것만 같다.
“방금 실연당한 여자의 히스테리를 받아라.”
마나볼을 던진다. 리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마법이자 마법이 아닌 기술. 단순하게 마나를 움직여 응집시킨 것이라 파괴력은 거의 없다. 단지 응축된 마나가 대상물에 닿는 순간 팽창하는 에너지를 폭발력으로 전환시킬 뿐인 기술이다. 하지만 사용방법에 따라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다.
제일 가까운 트롤은 과실 정도의 크기로 날아오는 공을 돌도끼로 쳐냈다. 빛나는 공은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몸을 보호하는 본능이 그것을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것이 리타의 노림수였다.
펑
돌도끼에 맞은 마나 볼은 폭발하면서 엄청난 빛을 뿜었다. 트롤들의 눈은 무방비 상태로 그 빛에 노출 되고 말았다.
“키워어어!”
눈이 보이지 않게 된 트롤은 괴성을 지르며 눈을 손으로 부여잡았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리타가 달려들었다.
롱소드는 가장 앞에서 혼란에 빠진 트롤의 가슴을 꿰뚫었다.
“쳇!”
롱소드가 약간 빗겨 갔다. 트롤의 발작이 심해서 정확하게 노리기 힘들었다. 심장 조금 옆을 찔렀지만, 이정도로 트롤을 죽일 순 없다.
리타는 혀를 차며 바로 물러났다. 그녀가 물러난 자리로 돌도끼가 떨어져 내린다.
뒤에 있던 트롤은 빛에 의한 데미지가 약했는지 흐리지만 시력을 가지고 있었다. 트롤은 동료가 공격당하자 바로 그녀를 내려찍으려고 한 것이다.
리타는 피해내며 롱소드로 무방비가 된 목을 노렸다. 그녀의 힘으로 일격에 목을 끊는 건 무리지만 충분히 틈은 벌 수 있다.
“키엑!”
목이 베인 트롤이 목을 부여잡고 고통에 겨운 외침을 내뱉었다. 하지만 리타는 전혀 개의치 않고 확실히 목숨을 끊기 위해 마나 볼을 날렸다.
마나 볼은 목에 난 상처에 닿아 폭발을 일으키며 트롤의 목을 완전히 날려버렸다. 트롤의 거체는 어깨 위로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은 머리를 회복시키기라도 할 듯이 상처부위에서 끊임없이 근육이 솟아올랐지만 아무런 소용없었다. 비틀거리던 상체는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리타는 그 거체를 밟고 뛰어올랐다.
“흡!”
짧게 기합을 내 뱉으며 오른팔을 최대한 뒤로 뺐다. 근육의 모든 움직임을 집중하고 몸에 붙은 속력을 이용해 아직 시력을 회복하지 못한 트롤의 목을 완전히 쳐내기 위함이다.
트롤은 동료의 비명소리에 사방으로 돌도끼를 휘둘러 대고 있었다. 하지만 공중은 무방비 상태였기에 리타는 그곳을 노렸다.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리타의 롱소드가 공기를 가른다. 쉐에엑.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서늘해지는 파공음과 함께 쇄도한다. 이 정도 힘이라면 충분히 목을 끊을 수 있다.
하지만 리타의 검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꺄악!”
리타는 사정없이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한참을 구른 그녀는 겨우 멈추었다. 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고통이 그녀를 엄습한다. 겨우 눈을 떠서 바라보니 목표이던 트롤 외에 다른 트롤이 보였다. 식량창고에서 금방 나온 모양이다.
“큭!”
리타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키려고 힘썼다. 전신에서 비명을 질러댔으나 지금 이대로 쓰러져 있다간 다가오는 트롤에게 죽는다. 공중에서 공격당하는 와중에도 놓치지 않은 롱소드를 지팡이 삼아 간신히 일어섰다.
늑골 쪽에 고통이 상당하다. 아마도 그곳을 맞았나 보다. 그녀가 있던 자리 조금 옆에 돌도끼가 땅에 떨어진 게 보인다. 식량창고를 나온 트롤이 공중에 떠있는 그녀를 향해 던진 것이리라.
“후우……”
크게 숨을 들이쉰다. 늑골에서 계속 찌릿찌릿 신호를 보낸다. 호흡하기 힘들다. 속을 다쳤는지 입안에 비릿한 쇠 맛이 느껴진다.
일어선 그녀는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라이트 레더의 아랫부분이 거의 찢겨져 나갔다. 절대 사람의 힘으로 잡아 뜯을 수 없는 모양으로 찢겨 있다. 왼쪽 아래가슴께로 서늘한 바람이 느껴진다.
그녀가 입고 있던 라이트 레더는 사실 두꺼운 가죽옷 수준의 보호구다. 여러 공정을 거쳐서 단련된 하드레더와 달리 라이트 레더는 방어력이 상당히 낮다. 당연히 트롤 같은 몬스터의 공격에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리타의 경우는 돌도끼가 직격한 것이 아니라서 가죽이 찢어지는 정도로 끝난 것이다. 몸을 트는 와중이었고 공중이라 충격이 분산되었기에 몸이 터지는 사태는 겨우 면했다. 늑골은 나간 것 같지만.
리타는 인상을 찌푸리며 제대로 섰다. 고통에 정신 팔릴 틈이 있다면 한 놈이라도 더 죽이는 게 헬턴트 식이다.
“내 속옷 값은 비싸다. 스트립쇼는 더 비싸지! 아직 미개봉이거든.”
찢어진 라이트 레더가 바람에 나풀거리며 아래가슴이 보일 듯 드러났다. 리타는 식량창고에 더 트롤이 없는 것을 확인하며 남은 두 마리에게 달려들었다. 뜨거워졌던 피가 서늘한 바람 덕분인지 차가워진다.
트롤들은 달려드는 귀찮은 벌레를 쳐 죽이기 위해 팔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쓰러진 사이에 트롤은 시야를 회복했다. 트롤은 돌도끼를 휘둘렀고 돌도끼가 없는 트롤은 그 자체만으로 흉기가 되는 팔을 휘둘렀다.
“흥.”
리타는 달려드는 척 그들의 공격을 유도해내며 식량창고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렇게 사방이 트인 곳에서 불리한 인원수의 전투를 벌이는 건 자살행위다. 평소라면 두 마리 정도를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늑골이 나간 지금은 힘들다. 아까 전엔 피가 거꾸로 솟아올라서 막 달려들었을 뿐, 이제 확실한 길을 택한다.
“키아?”
트롤들은 그녀가 다른 쪽으로 달려가자 의아해했다. 그것은 잠시뿐. 곧 트롤들은 살기를 뿜어대며 리타를 뒤쫓아 식량창고로 향했다. 흉흉한 기세가 리타의 등을 엄습했다.
리타는 식량창고 입구 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벽 앞에서 몸을 빙글 돌렸다. 식량창고 안은 트롤뿐만 아니라 그녀로서도 싸우기 위험하다. 혹여 마나 볼을 잘못해서 분진 폭발이라도 난다면 다 같이 죽을 수도 있다. 지금은 차라리 퇴로를 막더라도 등을 보호하는 게 안전하다. 두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더라도 시야에만 들어온다면 피할 수 있다.
트롤들은 막다른 길에 몰린 사냥감을 압박했다. 그들은 더 이상 여성이 도망칠 곳이 없자 틈을 벌리며 다가갔다. 그리고 일정 거리가 된 순간 어떤 신호 없이도 동시에 공격을 시작했다.
“키이!”
“키워워!”
“알아, 나도 만나서 반가워.”
다리로 뒷벽을 걷어차며 추진력을 얻는다. 트롤들은 양쪽에서 공격을 들어왔지만 공교롭게도 노리는 곳은 같다. 리타는 앞으로 쓰러질 것만 같은 자세로 트롤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갔다.
오른손에 든 검은 돌도끼를 든 트롤의 옆구리를 베었고 왼손에 생성한 마나 볼은 맨손인 트롤의 얼굴을 노렸다. 옆구리의 상처는 얕았고 얼굴을 노린 마나볼은 허공을 갈랐다. 트롤들은 전혀 거리낌 없는 움직임으로 리타를 향해 몸을 돌리며 팔을 뻗는다.
리타의 검은 머리가 거칠게 휘날린다. 급격하게 몸을 움직이는 주인의 몸놀림을 따라간다. 트롤의 주먹은 그녀의 뒤틀린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갔고 그 팔에는 자상이 생겼다. 내려찍은 돌도끼는 몇 올의 검은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리고 얻은 것은 옆구리에 생긴 틈으로 들어오는 빛의 공.
“키아아아!”
옆구리가 터져나가며 트롤의 녹색 피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울부짖는 트롤은 검은 벌레를 죽이기 위해 전력으로 돌도끼를 휘두른다. 하지만 검은 벌레는 돌도끼의 간격 밖으로 이미 벗어났다. 뒤이어 휘두르는 동료의 팔은 목표에 닿지 못하고 허공으로 날랐다.
휘두르는 트롤의 팔을 잘라버린 리타는 다시 벽을 등지고 섰다. 엄청난 힘이 담긴 일격에 전력을 다한 힘으로 받아친 대가는 꽤 컸다. 녀석의 팔은 잘랐지만 그녀의 오른손목은 인대가 끊어진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부어올랐다. 싸움을 길 게 끌 수 없다.
내장이 흘러내리는 트롤과 외팔이 트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죽이고 말겠다는 살기등등한 시선을 보냈다. 지금이다. 리타의 눈이 돌도끼를 든 트롤을 향해 흉폭한 빛을 머금었다.
“Peka!"
돌도끼를 든 트롤은 순간 드래곤을 앞에 둔 느낌을 받았다. 본능은 도망치라고 외치지만 몸은 전혀 말을 들을 의지가 없었다. 공포에 물든 눈에는 검은 눈동자만이 자리한다.
외팔이 트롤은 동료의 이상을 눈치 챈 이성보다 본능에 더 충실했다. 하나 남은 팔을 휘둘러 벽을 등진 리타를 벽 채 뭉개버릴 듯 달려들었다.
리타는 시선을 거두고 재빨리 벽을 옆으로 박찼다. 그리고 벽을 걷는 것처럼 한발자국 더 내딛어 몸을 회전시켰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새처럼 우아한 동작으로 리타의 몸이 허공을 날랐다.
활처럼 꺾인 허리를 비틀며 실재로 벽을 반쯤 허물어버린 트롤의 위로 지나간다. 그녀의 왼손엔 마나 볼 대신 돌덩이가 하나 들려 있었다.
리타는 허공에 뜬 상태로 양 팔을 뻗었다. 오른손에 든 검을 왼손의 돌을 든 손으로 받친다. 마치 만세라도 부르는 듯한 포즈로 리타의 손이 트롤의 목에 걸렸다.
“이야압!”
리타는 어깨에 최대한 힘을 주었다. 그녀의 팔과 검과 몸이 마치 사각형을 그리듯 둘러싼 안에는 트롤의 머리가 있었다. 굵은 그 목은 단번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이 중간쯤에 걸렸다. 가벼운 리타의 몸으로 허공에서 한번에 목을 떨구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리타는 땅에 착지하며 딸려온 힘을 그대로 쏟아 부었다. 트롤은 리타의 움직임에 따라 뒤로 쓰러질 듯이 몸이 젖혀졌다. 그리고 리타는 힘이 다하기 전에 전신의 힘을 주며 팔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푸확
트롤의 목이 떨어져 나가며 몸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온다. 전과 달리 피할 도리가 없던 리타는 피를 그대로 뒤집어썼다.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른다. 끈적한 피가 전신에 달라붙어 불쾌하다. 그러나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두려움에 몸을 움직이지 못했던 트롤은 리타의 시선이 사라지자 육체의 통제권을 되찾았다. 완전히 살기의 지배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도망가고자 하는 본능보다는 사냥감에 대한 살의가 더 커졌다. 트롤의 붉은 눈이 동료를 둘이나 처치한 사냥감을 향했다.
“포기할 줄 모르는 남자는 인기 없어.”
리타는 살의가 흘러넘치는 시선에도 농담을 내뱉었다.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농담 아닌 이 상황이 그녀를 압박한다. 살기를 연속으로 내뿜을 정신력도 없고, 무리한 근육과 관절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계속 살기에 겁먹고 있다면 편하게 심장에 검을 박을 수 있을 텐데. 트롤의 터프한 정신력이 원망스럽다. 도망이라도 쳐주지 않으려나.
“키아! 키아아!”
불행하게도 이런 연약한 사냥감을 두고 도망을 친다는 선택지는 트롤에게 없었다. 트롤은 흉폭하게 울며 돌도끼를 내리 찍었다. 리타는 흐느적거리며 옆으로 몸을 피했다. 트롤은 아직 완전히 몸을 지배하지 못하는지 연속으로 공격을 날리지 않았다.
“후우……”
리타는 시큰거리는 오른 손목을 왼손으로 부여잡으며 자세를 똑바로 하였다. 본디 그녀는 힘이나 살기가 아닌, 기술로 싸우는 타입이다. 힘의 차이가 극명한 몬스터를 상대로 기술은 그다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지만, 이제 기댈 곳은 별로 없다. 터트린 옆구리의 상처가 트롤의 체력을 많이 앗아갔기만을 기대해야 한다. 상처 자체는 재생되는 중이지만 기력은 소모하였기를 빈다.
트롤이 마주 섰다. 옆구리의 상처는 피범벅이지만 상처자국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돌도끼를 든 팔은 힘줄이 엄청나게 돋아 있다. 두 눈은 살의로 가득하다.
“사이록 호라이즌 4식.”
마음을 가라앉힌다. 피를 식히고 머리를 비운다. 호흡은 크고 느리게. 눈은 상대의 전신을 응시한다. 작은 동작 하나, 근육의 움직임조차 놓치지 않는다.
오른쪽 어깨의 힘줄이 약동한다. 팔을 들려는 움직임이다. 왼쪽 다리의 고관절이 뒤틀린다. 왼발이 앞으로 나온다. 발을 들며 팔을 들고, 발을 내려놓으며 팔을 내려찍는다.
리타는 발을 뒤로 빼며 검을 비스듬하게 휘둘렀다. 트롤은 왼발을 내딛으며 돌도끼를 내려찍었다. 트롤의 돌도끼는 리타를 지나쳐 허공을 갈랐고, 리타의 검은 트롤의 오른 팔을 베었다.
“키아악!”
비명을 지르며 트롤은 오른 팔을 다시 옆으로 휘두른다. 리타의 검은 오른팔을 베었던 자세 그대로 아래로 향한다. 리타의 몸은 트롤에게 바짝 달라붙어 팔의 공격범위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딸려오는 검이 오른 손목을 베어 버린다.
“켁!”
트롤이 돌도끼를 손 채 놓쳐버렸다. 트롤의 손목은 손 대신 녹색의 피만 뿜어져 나온다. 당황한 트롤이 몸을 뒤로 빼내며 왼팔을 휘두르지만 이미 그곳에는 롱소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손목을 절단한 검은 리타가 몸을 낮추며 들어올렸고, 그것은 완벽하게 휘둘러지는 왼팔을 꿰뚫어 버렸다.
“하앗!”
얼마 남지 않은 힘을 다해 꿰뚫은 검을 끌어 내린다. 심장이 아닌 트롤의 몸을 꿰뚫어보아야 금방 회복해 버린다. 확실하게 잘라 내거나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큰 상처를 내야한다.
트롤의 왼팔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가 생겼다. 힘줄 부위를 완전히 잘라냈기에 팔뚝 아래로 손이 힘없이 쳐져버렸다. 순식간에 양 손을 다 잃게 된 트롤은 아직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리타는 팔과 손을 잃음으로서 패닉에 빠져버린 트롤의 무방비하게 열린 가슴을 노렸다. 정확하게는 두터운 가슴과 갈비뼈 사이로 숨겨진 심장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내려찍은 검으로 찔러 봐야 심장을 박살낼 수 없다. 움직임이 없다면 만들어야 한다.
리타의 검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종으로, 횡으로, 사선으로. 트롤은 발로 쫓아 버리려고 하였지만, 그때마다 리타는 교묘하게 피하며 검격을 날렸다. 트롤의 몸은 크고 작은 상처가 점점 늘어갔다.
쿵
트롤은 의아했다. 무엇인가 그의 등을 거세게 때렸기 때문이다. 놀란 트롤은 그것이 무엇인지 금방 깨달았다.
벽이다. 리타의 검을 피하고 공격하며 이리저리 다니는 동안 창고 벽까지 몰리고 말았다. 완전히 상황이 역전되었다.
검은 눈동자가 불안하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가 세차게 휘날린다. 본래 새하얗던 피부는 녹색으로 물들어 끔찍하다. 붉은 피는 왼쪽 가슴 아래에서만 흘러나온다. 입가에도 약간의 핏자국이 보인다. 그리고 그 붉은 피에 물들어 새빨간 입술이 호를 그린다.
“죽어라.”
말을 외치는 취미는 없다. 더욱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몬스터에게 말하는 취미는 없다. 그러나 리타는 차갑게 내뱉으며 안광을 뿜었다. 살기는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살기와도 같은 흉흉한 기세와 말은 트롤을 겁박했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어떤 의미인지 트롤은 온 몸으로 느꼈다.
달아날 수도 없다. 반항할 수도 없다.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자유를 잃은 두 손과 고통스러운 옆구리가 시리다. 눈앞에 겨눠진 검이 빛을 뿜는다. 사냥감이던 여성이 든 검은 녹색 이물질이 묻었음에도 시퍼렇다.
검이 다가온다. 키에에엑. 소리가 목에서 멈춘다. 입 밖으로 도무지 꺼낼 수가 없다. 가슴에 검이 닿는다. 금속의 서늘한 감촉이 트롤의 뇌까지 얼어붙게 만든다.
리타는 손에 힘을 주어 그대로 트롤의 심장을 찔렀다. 하지만 처음 만났던 트롤처럼 손목을 비틀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검을 뽑아 올렸다. 벽에 기대어 주저앉은 트롤이 멍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본다.
리타는 가슴의 상처 부위에 왼손을 가져다 대었다. 내뿜는 피와 트롤의 엄청난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큰 몸을 움직이고 끊임없이 생명력을 환원하기 위해 심장은 한없이 뛴다. 소용없다. 이제 그 운동을 멈춰주겠다.
그녀가 다시 한 번 말한다.
“죽어라.”
왼손에 마나가 응집한다. 그리고 맞댄 가슴의 상처 사이로 마나가 사정없이 파고들어가 압축된다. 그것은 정확히 심장에서 모였다. 그리고 리타는 마나의 구속을 해방했다. 심장은 엄청난 위력의 압력에 짓이겨지며 혈관이 터져나간다.
트롤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앞이 아련하다. 시야가 점점 어두워진다. 하지만 가장 어두운 것은 트롤을 바로 앞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검은 눈동자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불꽃이 꺼지는 그 순간, 트롤은 눈동자에서 익숙함을 발견했다. 그들의 군주, 위대한 회색산맥의 지배자, 잔혹하도록 평온한 존재. 그것의 광기와 공포. 그 압도적인 위압까지 내포한 깊은 눈.
눈은 말하고 있었다.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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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도 좀 길죠?
글 자체를 몇년만에 적는것이지만 전투씬은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적는게 힘드네요.
그, 그리고 댓글좀. 굽신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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