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 - ch1. 그림자 경주 (13)2014.10.18 AM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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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의 물결이 찬란하게 펼쳐진다. 넓고 평평한 것에서부터 날카롭고 긴 것까지 모두 은색이다. 태양이 비추는 대지에 오롯이 은색만이 가득하다. 은색의 대지 뒤로 날카로운 은의 파편이 산란해있다. 은빛의 줄기들은 저마다 태양을 가득 머금고 세상을 비춘다.



“장관이네요.”



“다른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멋지군요.”



아름드리나무 아래서 남성과 여성은 서로의 감탄사를 나누었다. 태양이 만들어 내는 장엄하고도 놀라운 광경은 그들에게 더 이상의 말을 허락지 않았다. 태양을 막아주는 나뭇잎 아래에 있는 그들이라도 눈에 보이는 것만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한 사람, 남성과 여성 옆에 서 있는 초로의 노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이보게. 자네들이 그렇게 말하면 내 호기심만 늘어나지 않는가.”



노인의 눈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눈동자와 눈자위의 구분이 없었기에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함을 느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옆에 서있던 남성과 여성이 각기 돌아본다.



“죄송합니다. 타이번.”



“아닐세. 아냐. 그냥 해본 소리네. 사실 귀로 들으면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꽤 멋진 풍경이 그려지거든.”



“소리만으로 가능하신가요?”



“세상을 보지 못하며 살다보면, 어느새 눈으로 보지 않아도 어지간한 건 알 수 있게 되더군.”



“그렇군요.”



칼과 리타, 타이번은 그 대화를 끝으로 다시 눈앞의 광경에 몰입했다. 드넓은 대지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용을 잡으러 가는 사람들이다.



“제 9차 아무르타트 정벌군 출발합니다.”



로넨 휴리첼 백작의 짧은 말을 끝으로 군사들은 행군을 시작했다. 수도에서 온 헤비 트루퍼(중장보병)을 필두로 은빛의 물결이 펼쳐졌다. 그들이 든 롱소드와 타워실드, 그리고 입고 있는 체인메일은 눈부신 태양 아래 더 눈부신 대지를 창조했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헬턴트 경비대로 이루어진 라이트 풋맨(경보병)들이다. 그들의 무기는 마찬가지로 은빛의 파편을 산란했다. 이어서 파이커즈(창병)와 아처리(궁병), 마지막으로 보조부대가 따랐다.



그리고 그 부대들 옆으로 제 9차 아무르타트 정벌군의 가장 핵심 전력이 있었다. 다른 부대와 달리 단 한명과 두 마리로 구성된 부대는 그 어떤 부대보다도 강력한 전력을 보유했다. 대지를 채운 은빛에 못지않게 한 겨울에 눈 내린 설원마냥 깨끗하고 고고한 하얀색이 장엄하게 존재한다. 화이트 드래곤 캇셀프라임과 그녀의 드래곤 라자인 디트리히 할슈타일, 그리고 그의 말이다.



리타는 캇셀프라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캇셀프라임은 그녀의 시선을 모르는지 두 눈을 회색산맥으로만 향했다. 그리고 디트리히는 불안한지 말 위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아무리 드래곤 라자라고 하더라도 평범한 어린아이라는 사실은 리타가 잘 아는 사실이다.



캇셀프라임이 아무르타트와의 전투에서 죽는다면 디트리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바이서스 삼백년 역사상 드래곤 라자가 많았던 적은 없었다. 드래곤의 수가 루트에리노 대왕의 영광의7주 이후로 줄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정도로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드래곤 라자를 가졌던 드래곤은 드래곤 라자가 죽자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런 드래곤들은 대게 다시는 라자의 계약을 맺지 않았다. 또한 거의 없던 일이지만 드래곤이 죽은 경우, 드래곤 라자는 드래곤을 따라 운명을 같이 하게 된다. 그들은 한 생명이나 다름없기에 서로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아파하는 것이다.



디트리히는 캇셀프라임의 죽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지. 그리고 디트리히를 몹시 사랑하는 캇셀프라임도 그 사실을 알고 있겠지. 그리고……



리타는 가슴에 돌이 얹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신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속은 쓰리고 가슴 한가운데가 뭉친 듯 아프고 기분이 좋지 않고 불쾌하다. 어째서일까, 걸어가는 아이와 드래곤을 바라볼수록 증상이 더 심해져 간다. 캇셀프라임은 끝내 그녀의 시선에 답하지 않았다.



“스마인타그양?”



칼이 걱정스럽게 리타를 들여다보았다. 리타는 가슴을 움켜쥔 채 숨을 간헐적으로 내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다. 리타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을 폈다.



“괜찮습니다. 잠시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몸이 안 좋으면 이만 들어가시는 게 어떠신가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칼.”



리타는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제스처를 취했기에 칼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타이번이 리타를 보며 말했다.



“리타. 내 제안은 생각해 보았나?”



“칼에게 시집가는 것 말씀인가요?”



“몹시 영광된 주제인 것 같지만,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진행된 혼약은 아름답게 끝낼 권리가 결국 당사자에게 돌아가지요.”



파탄내고 말거라는 말을 퍽 우아하게 말한다. 리타는 피식 웃었다.



“칼의 반응을 보니 그건 아닌 거 같군요. 제자가 되라는 말씀이라면 그때 거절했으니, 그것도 아닐테지요.”



“자네, 칼과 붙어 있다 보니까 의뭉스러운 구석까지 닮아가는 것 아닌가?”



“부부는 닮는다는 말은 진리였군요.”



“서로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서로를 투영하게 되는 존재들이니까요. 우리 인간은 말입니다. 물론 그게 꼭 부부라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더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까지 부정하면 여성으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군요. 칼.”



칼은 난감한 표정이 올라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평정을 유지했다. 리타도 더 이상 그를 놀리지 않고 타이번의 말에 순순히 대답하기로 했다. 마법사는 지팡이를 들어 언제든지 스펠을 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제 말씀하신 제안은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로서도 아직 몸을 움직이는 데 약간의 불편함이 남아 있으니, 같이 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지요.”



“알았네. 조수 한명만 더 구하면 되겠는걸.”



타이번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이지 않는 눈으로 시선을 멀리했다. 그의 시선은 회색산맥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 칼이 리타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스마인타그양.”



“네, 칼.”



“어째서 타이번의 제자가 되는 것을 거절하신 겁니까? 마법사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입니다.”



그 자리에 없었던 칼은 타이번에게 리타와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거절의 이유를 리타와 함께했던 경험에 비추어 추측했지만 굳이 질문했다.



리타의 큰 눈이 날카로워 졌다. 한동안 잘 짓지 않았던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물어보았다면 냉소로 답했겠지만, 질문자가 칼이니까 진심을 드러내기로 했다. 그녀는 칼 대신 타이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남에게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스승에게서 받기만 하는 일방적인 관계의 형성이 아닙니다.”



“주고받는 관계겠지요. 하지만 전 주거나 받는다는 것 자체가 어색합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부터 문제가 시작되죠. 저 자신이 귀찮다거나, 숲지기를 해야 한다는 것도 이유의 한 축이네요. 솔직히 말해 마법사의 제자는 마법사의 수족과 다름없으니까요. 타이번이 저를 그 정도로 부려먹을 것이라곤 생각지 않습니다만, 지금의 생활이 파괴될 확률이 높습니다.”



“변화가 두려우신 겁니까?”



칼은 리타의 변화를 살폈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 저녁 메뉴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정도로 반응했다. 즉, 평소와 아무 다름이 없었다.



“제가 구축해 놓은 지금의 상황이 저에겐 가장 소중합니다. 제 주변을 위시한 상황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한다거나, 그 상황 이상으로 저에게 소중한 것이 나타난다면 그때는 변화를 받아들이겠지요.”



“정체(停滯)라는 말을 아십니까? 물이 고이면 썩는 법입니다. 사람이 머물러 있다간 침체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은 변화를 필요로 할 땐 이미 다른 식의 변화가 일어난 상태를 초래합니다.”



“너무 나가셨어요, 칼.”



“죄송합니다.”



리타는 칼의 너머로 시선을 두었다. 멀리서 갈색 머리의 소년이 사라져 가는 부대의 뒷모습을 가만히 서서 쫒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소년의 옆엔 붉은 머리의 소녀가 촐랑거리며 서있다. 후치의 아버지는 이번 정벌군에 지원해서 참전했다. 아마도 후치는 정벌군이 아닌 아버지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는 것이겠지.



“가장 큰 이유는 제가 관심이 없어서라고 정리하는 것이 빠르겠죠. 몬스터들로부터 이 마을을 지키는 데 필요한 정도의 마법만 익히는 정도라면 모를까, 제자로 들어가 마법이라는 학문을 파고드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자로 들어가는 입장에서 그런 어중간한 마음을 가질 순 없지요.”



“그랬는가?”



타이번은 큰 숨을 내쉬었다. 리타가 그의 권유를 거절했을 때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았다. 리타가 제자가 되길 거절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거절당했다는 상황을 바로 납득했기 때문이다. 그는 제의했고 거절당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리타의 거절이 어떤 연유로 이루어지게 된 것인지도 이제 알게 되었다.



타이번은 리타를 만났던 순간부터 계속 어떤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리타만 타이번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리타가 타이번이 가지는 이질감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던 것에 비해서 타이번은 약간씩이나마 이질감의 정체를 깨닫고 있었다.



“퍽이나 재미있어. 이야기하다 보면 내가 사람과 말하는 건가 고민하게끔 만들어주는군.”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서라는 이유로 납득해도 될까요?”



“이 마을엔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잊어버리는 사람이 너무 많구만.”



“전혀 장님답지 않은 행동을 많이 하시니까요.”



“감각이 예민해서 그런 걸 어쩌겠는가. 그보다 리타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신기해서 그러네.”



“바로 앞에 있는 대상을 제 3자 취급 하지 마시죠.”



“눈이 안보이니 습관이 그렇게 들었네. 노인을 공경해 준다 생각하고 넘어가 주는 아량을 보여주겠나?”



“말씀 따르지요.”



리타는 입지도 않은 치마를 들어올리며 귀부인이 인사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타이번은 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어떤 행동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미소 지었다. 리타라는 여성이 이런 상황에서 할만한 행동이 무엇이든 미소 지을만한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은 듯 칼도 같이 미소를 지었다.



셋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아래에 있던 제미니와 후치가 어느새 다가왔다. 제미니는 리타에게 손을 붕붕 흔들어준 다음 활기차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칼? 일전의 융숭한 대접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천만에요. 스마인타그양. 누옥에 왕림해주셔서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후치는 눈뜨고 못 봐주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타이번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래도 못 봐주겠다는 표정이었다. 리타만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제미니를 바라보았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내 동생은 결코 그런 말을 할 줄 모른다.”



후치는 제미니가 화낼 것이라 생각했으나 예상은 빗나갔다.



“후후, 언니. 동생들은 원래 눈 깜짝할 사이에 성장한다구. 나도 이제 기품과 교양이 흘러넘치는 인사쯤은 할 줄 안단 말이야.”



제미니는 자랑스럽게 가슴에 손을 올리며 콧대를 세웠다. 이번에는 칼마저도 그 표정이 되었다. 후치와 타이번이 짓는 표정 말이다.



하지만 리타는 담담했다.



“키는 전혀 성장하지 않았고, 가슴도 그대로고. 허리둘레가 성장한거니?”



“언니!”



역시 이쯤 되면 화낼 거라고 생각했어. 후치는 그래도 한 번이나 받아치게 된 제미니가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이 반응을 보니까 제미니가 맞구나. 도플갱어는 아닐까 걱정했단다.”



리타는 따스하게 말하며 제미니를 안아버렸고, 제미니는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울상만 지었다. 두 여성이 달라붙어있을 때 후치는 남성들의 모임을 주도했다.



“안녕하세요. 칼.”



“오, 네드발군. 이젠 내 실수를 용서해주는 건가?”



“용서는 무슨. 소리쳐서 내가 미안해요. 구경 나왔나요?”



후치는 타이번이 마을에 온 이튿날 칼과 주점에서 언쟁을 벌였다. 칼과 타이번은 예의 아무르타트에 의한 마을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였고, 후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며칠이 지나는 동안 감정은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후치의 대답에 칼은 표정을 밝히며 말했다.



“사실은 타이번을 안내해 온 거라네. 리타양은 오는 길에 만났고. 사실 난 별로 구경할 의향이 없었거든.”



후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타이번, 당신이 무슨 <구경>을 한다는 말이죠?



타이번은 히죽 웃었다.



“나름대로의 요령이 있지. 소리를 들으며 상상을 펼치는 것도 재미있어.”



“재미?”



“응, 분위기가 꽤 좋더라구. 드래곤과 싸우러 가는 병사들 같진 않던데.”



“사실 병사들은 드래곤의 싸움을 구경하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리타가 제미니를 안은 채로 말했다. 정면으로 안겨있던 제미니는 몸을 돌려서 리타가 백허그를 한 모양세가 되었다. 두 여성은 대화에 흥미를 보이는 듯 남자들에게 가까이 왔다.



“음,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군.”



“그보다 타이번. 휴리첼 백작이 도와달라는 말 하지 않던가요? 당신 근사한 마법사잖아요?”



후치가 타이번이 트롤을 쓰러트리던 것을 떠올리며 질문했다.



“상식이 있군. 뭐, 거절했다.



“이유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어. 스승에게 덤비는 꼴이 되니까. 감정적으로 귀찮아.”



“스승?”



“말했잖아. 마법은 원래 드래곤의 것. 따라서 드래곤에게 마법을 사용한다는 건 사조에게 덤벼드는 꼴이지. 우스운 모양이 된다고.”



“아니, 고작 그런 이유로.”



후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리타는 타이번의 힘줄이 돋는 것을 알아챘다.



“자네가 고작이라고 해도 화는 내지 않겠어. 하지만 자네가 마법에 대해 좀 알거나 하다못해 기사도에 대해서라도 좀 안다면 대가리를 박살내 놨을 거야.”



타이번의 어조는 평온했다. 그랬기에 후치는 처음엔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화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 리타가 제미니에게서 떨어져 후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후치는 갑자기 리타가 끌어안자 올라오던 분노가 당황함으로 바뀌는 신기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말이 심했어요, 타이번. 우리는 루트에리노와 핸드레이크라는 영웅을 가진 나라에 살고 있어요. 드래곤 로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 대마법사 핸드레이크가 있는데 그런 말은 모순이지 않나요? 우리는 사조에게 덤벼든 마법사가 세운 나라에 살고 있는 국민으로서 당연한 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



타이번은 입을 다물었다. 타이번을 오래 본 것이 아니지만, 그가 이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굽힐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후치는 의아했다. 타이번은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손을 허공에 휘휘 내저었다.



“그놈의 루트에리노와 핸드레이크가 문제로군.”



“당신, 마법사니까 루트에리노 대왕은 그렇다 치더라도 핸드레이크를 그렇게 막 불러도 되요?”



“상관없네. 어쨌든 사조에게 덤벼든다는 건 둘째 치고, 이날 이 때까지 마법을 익혀왔으면서 할 줄 아는 게 박살내고 뒤틀고 죽여 버리는 거라는 거, 그것도 찝찝한 일이고. 나 자신이 보잘것없게 느껴지는 일이지. 자네가 이해할 간단한 이유를 말하자면, 죽기 싫으니까. 장님 마법사가 수백년 동안 마법을 갈고닦은 드래곤과 싸워주기를 바라면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야.”



후치는 뚱한 표정이 되었다.



“당신은 장님이면서도 트롤들을 간단히 처리했잖아요?”



“트롤이 마법을 쓰진 않으니까. 드래곤을 트롤과 비교하는 건 아무리 아무르타트라도 상당히 실례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말하며 리타는 후치의 볼에 얼굴을 댔다. 후치는 삽시간에 얼굴을 붉혔고, 제미니는 기겁하며 그들에게 달려들어 서로를 떼어내었다. 리타는 순순히 물러나며 대신 칼에게 다가갔으나 칼은 점잖은 표정으로 타이번 뒤로 피했다.



상황을 볼 수 없는 타이번은 그저 부산스럽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내가 없더라도 캇셀프라임이 잘 상대할거야. 휴리첼 백작도 그런 생각이니 날 끌어들이는 일에 열성적이지 않았고. 내가 보기엔 이건 제 9차 아무르타트 정발이 아니라 제 1차 아무르타트-캇셀프라임 대결이야. 나 같은 인간 마법사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하긴 그렇겠군요. 리타 말처럼 다른 병사들은 어차피 구경꾼이고.”



후치는 정벌군에 참여한 아버지를 떠올리며 제발 자신의 말대로 되길 희망했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포차드를 들며 돌격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타이번은 씨익 웃었다.



“음, 그 대신 나는 다른 일을 맡았지.”



“다른 일?”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조수를 선별할 권리도 받았고.”



“잠깐, 잠깐, 다른 일이라니요?”



“아, 그렇지! 자네, 내 조수가 되지 않겠는가? 리타도 도와주기로 했어.”



후치는 복장이 뒤집어질 것 같았지만 리타가 도와준다는 말에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는 어떤 일이기에 리타가 도울까에서부터 시작해서 리타가 하는 일을 떠올려 보았다.



“리타가 도와주는데 저까지 필요한 걸 보면 마법적인 건 아니군요. 리타한테 제자권유 차였다고 저까지 제자로 들이려는 건 아닐테고요.”



“정확하네. 내가 장님이라도 사람은 가리거든.”



“뭐 그렇다 치고요. 그럼 우리 마을의 경비를 맡았겠군요. 지금이 딱 몬스터가 많이 쳐들어 올 시기니까요.”



며칠 전 나타난 트롤들도 겨울 식량을 준비하기 위해 식량창고를 급습했다. 몬스터들은 헬턴트 주민들이 저희들을 위해 봄여름 뼈빠지게 농사를 짓는다고 착각하나 보다. 경비대도 거의 다 떠났으니 얼씨구 좋아라 달려들겠지. 마을에서 자경대를 조직하긴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후치는 몬스터들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조수는 다소 건방지긴 하지만 머리는 잘 돌아가는 놈이다. 타이번은 후치의 추측을 긍정했다.



“맞아. 정답이네. 제자는 몰라도 조수로 뽑긴 충분한 머리군. 그래서 할 텐가?”



“거, 괜찮게 들리네. 조수 봉급이 어떻게 되요?”



후치는 타이번과 협상에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제미니는 리타를 잡아 당겼다. 그녀는 리타의 귀에 대고 후치한테 너무 붙지 말라는 귀여운 협박을 하였다. 리타는 웃어 넘겼지만 제미니는 퍽 심각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그녀의 언니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넘쳐흐른다. 풍만하고 농익은 여성이 십대 소년에게 스킨십을 한다면 어느 누가 넘어가지 않고 버틸 수 있겠나. 후치가 언제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리타는 전혀 후치를 남성으로 보지 않았으며 후치도 비슷했다. 둘은 오히려 남매에 가깝게 서로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타는 제미니를 놀리는 것이 삶의 낙 중 하나라고 여겼기에 제미니를 애태우며 실랑이를 벌였다.



그때 후치의 놀란 목소리가 그들의 주목을 끌었다.



“다, 당신 100셀짜리 말고는 가진 게 없어요?”



제미니는 금빛의 동전이 타이번의 손에서 떠난 그 순간부터 리타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녀는 후치가 금화를 받자마자 후치에게 달려들어 금화를 뺏었다. 타이번은 그런 후치를 나무랐다.



“야이, 닭대가리야! 그건 준비금도 포함하는 거야! 적당히 무장을 챙겨. 뭐, 한달 정도의 단기고용으로는 보수가 비싸지만. 좋은가?”



“찬성! 두 말 없기!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이름으로!”



“좋군. 내 사무실은 산트렐라의 노래니까 아침마다 찾아오도록.”



후치는 제미니가 먹기라도 할 듯 침을 흘리며 구경하는 금화를 다시 빼앗으며 타이번의 당부를 받아냈다. 제미니는 눈을 빛내며 타이번에 꼬리라도 흔들 듯이 조수가 더 필요 없냐고 물었고, 타이번은 씨익 웃었다. ‘없어.’



그것을 잠잠히 보고 있던 리타는 자기가 무보수임을 떠올렸다.



“타이번, 내 봉급은 어떻게 되죠?”



“산트렐라의 노래에서 매일 술 한 잔 사지. 어떤가? 칼이 좋아할 것 같은데.”



“타이번!”



칼은 머리를 감싸며 외쳤다. 그리고 리타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트롤의 습격 다음날 칼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하지만 사과했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짓궂은 놈담보다도 칼에게 했던 일들이 떠올라서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사양할게요. 어차피 저는 원래하던 일을 같이하는 거니 굳이 봉급이 필요 없어요. 더 이상 해봐야 타이번에게 놀림만 당할 것 같고.”



“잘 생각했네.”



후치와 제미니는 100셀로 뭘 할까 고민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칼과 리타는 애처로운 표정인 가운데, 타이번만이 흐뭇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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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제주도 여행은 어제 밤으로 끝나고 밤비행기로 날아온 친구와 합류했습니다.

사내 둘이서 모텔에 투숙하는 ang틱한 상황을 연출하면서 알몸인채로 이 글을 올리고 있네요...

많은 분들이 기대하시는 '자꾸 손으로 찌르지마.' '이거 손 아니야. 존슨' 같은 일은 아쉽게도 없습니다.

내일 복귀하면 한동안 또 소설로 달려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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