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 - ch1. 그림자 경주 (14)2014.10.19 PM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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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턴트 성은 언덕위에 꽤 멋스럽게 지어져있다. 크기나 외양만 보자면 다른 영주들의 성에 비해 초라하지만, 군사적 방위 측면에서만 보자면 실용적이기 그지없다. 기사도를 숭상하는 나라의 성이니 그런 것이겠지만, 단순하고 직선적이며 미를 찬양하지 않는 남성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성은 나름의 멋이 있다.



하지만 그 성은 지금 어딘가 황량한 느낌이 되었다. 주인인 영주가 없어서인지, 성을 지키던 경비대가 많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일주일 정도 북적대던 많은 손님이 빠져나가서인지, 혹은 그 모두 탓인지 모른다.



헬턴트 영주인 헬턴트 자작은 제 9차 아무르타트 정벌군에 참여했다. 그의 아들은 과거 아무르타트 정벌군에 참여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에 대한 복수심과 영지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절망의 연쇄를 끊기 위한 책임감이 그를 부추겼으리라. 아무튼 주인이 없는 성은 집사이던 하멜이 대신 전권을 위임받고 있었다.



숲지기의 임무는 기본적으로 숲을 관리하는 것이다. 순찰을 도는 것 이외에도 사냥이나 벌채 등의 여러 가지 일에 관여한다. 그리고 그 일들에 관한 사항을 성에 보고하는 것이 임무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리타는 하멜 집사를 만나 숲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상세히 보고했다.



“이 건은 이 정도면 되었네. 더 보고할 건 없는가?”



“네, 이걸로 끝입니다.”



“사람이 많이 빠져나가서 그런지 평소보다 적구나.”



“집사님께서 하시는 일은 더 많아졌는데 말이죠.”



“허허, 그러게 말이다.”



웃는 하멜의 눈가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정벌군이 출병하고 난 후 하멜은 급격히 노화하는 것 같았다. 업무의 양도 문제지만 마음에 안고 있는 불안이 더 큰 문제였다.



“잠은 제대로 주무십니까? 안색이 많이 안 좋습니다.”



하멜의 얼굴에는 피로가 진하게 깔려 있었다. 리타는 하멜이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하멜은 그의 얼굴을 손으로 한번 쓸어내렸다. 손가락 사이로 지친 두 눈이 탁한 빛을 띤다.



“잠이 제대로 올 턱이 있는가. 피곤함에 눈을 감아도 불안해서 금방 깨어버린다네.”



“보통 이런 상황이면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 않나요?”



하멜은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를 해야 하지 않는가?”



리타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저는 솔직한 게 매력이라고 하더군요.”



“나도 그런 매력을 추구하는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해두지. 괜히 괜찮은 척 해봐야 뭐하겠는가. 어차피 이 늙은이이가 안 괜찮다는건 얼굴에 다 써 붙이고 다니는데. 사람들이 하도 괜찮냐고 물어봐서 괜찮다고 대답하는데 지치기도 한다네.”



“그럼 제가 괜찮은 선물을 가져왔군요.”



리타는 그녀가 가져온 짐을 하멜의 책상에다 올려놓았다. 안에는 허브가 들어있는 화분과 어떤 식물을 말린 잎이 들어 있었다.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허브입니다. 그리고 이건 그 잎을 말린 건데 차를 끓여 드시면 걱정을 더는데 도움이 될 거에요.”



“오, 이런. 고맙구나.”



하멜은 얼굴에 주름을 한가득 만들었다. 리타는 노년의 미소는 세월의 풍파를 간직했기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책의 한 구절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멜은 리타의 손을 잡으며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도 줄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자네 캇셀프라임님과 아는 사이인가?”



갑자기 나온 드래곤의 이름은 리타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단 한번 이야기를 나눈 사이기에 아는 사이라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그런 것을 설명하고 싶진 않았다.



하멜은 리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실은 나에게 어떤 물건을 맡기고 가셨네. 자기가 돌아오면 직접 전해주겠지만, 혹시 그러지 못할 경우 너에게 전해달라고 하셨지.”



“그렇습니까?”



“평범한 다기 세트 같았는데, 감히 드래곤의 물건에 손댈 수가 없어서 자세히 보진 않았다네.”



“그렇군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건강관리 잘 하세요.”



리타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멜은 그녀가 갑자기 일어나자 당황하며 말했다.



“드래곤이 남긴 물건인데 궁금한 게 없는가?”



“궁금해야 하나요?”



리타의 반문은 비꼬는 의미 없이 정확히 궁금하다는 의미만 담고 있었다. 그렇기에 하멜은 ‘내가 궁금해서 그러네,’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막아야 했다. 그는 머리를 굴려 최대한 완만하게 의미를 전했다.



“보통 사람들은 다른 종족의 선물에 대해 누구라도 궁금해 할 걸세. 더욱이 그 종족이 드래곤이라면 이루 말할 것도 없겠지. 사실은 자네가 캇셀프라임님과 차를 마실 때부터 지금까지 그 관계나 내용에 대해 수도 없이 묻고 싶었네. 이젠 어떻게 드래곤의 선물을 받게 된 건지도 궁금하구만.”



“음…… 저도 궁금하군요.”



“됐네. 억지로 궁금한 척 하지 말게.”



“예.”



“그보다 왜 자네는 드래곤의 선물이 궁금하지 않은 건가?”



리타는 볼을 긁적였다. 그녀가 생각할 때 주로 나타나는 버릇이다.



“어차피 저에게 전해질 운명이니까요. 내용물은 그때 가서 알게 되겠지요. 그녀가 저에게 선물을 남긴 이유는 저도 궁금하군요.”



죽을 거란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라는 뒷말은 삼켰다. 하멜은 이미 드래곤을 ‘그녀’라고 부른 시점에서부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표정이었기에 더 이상 충격을 주었다간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다. 그의 건강을 위해서도 충격적인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리타는 방을 빠져나왔다.



연병장으로 내려가니 타이번은 남아있는 경비대원들과 이야기하고 있었고 후치는 연병장에서 열심히 춤을 추고 있었다. 검을 들고 추는 춤이라니 꽤 재미있어 보인다.



“다녀왔어요. 타이번.”



“어어, 조금만 기다려주게. 금방 끝날테니.”



타이번은 아직 이야기가 다 안 끝난 모양이다. 그는 지도를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장소를 짚어가며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타이번과 순찰 일을 시작하고 같이 봐두었던 장소들이다. 마을 인근 숲만 관리하던 그녀와 달리, 타이번은 마을로 들어오는 모든 예상 침투로를 파악했다.



타이번은 후치와 리타를 데리고 순찰을 돌면서 몬스터들의 침입 경로를 예상하고 마법으로 트랩을 설치했다. 마나는 자연에너지이므로 한곳에 집중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 트랩을 매일 살펴야 한다는 귀찮음이 있지만, 효과는 절대적이다. 숲은 리타와 아버지가 설치해둔 장치들이 꽤 잘 되어있다는 평가를 받고, 약간의 보강만 해두었다. 전의 트랩은 약한 몬스터는 잡을 수 있으나 강한 몬스터에겐 그저 알람용에 불과한 수준이었는데, 이제 마법이 더해지면서 강한 몬스터에게도 훌륭한 공격수단이 되었다.



타이번과 후치는 매일 아침 펍에 모여서 식사를 한 후, 성에 들러 경과보고를 한다. 그러는 동안 후치는 연병장에서 신나게 춤을 춘다. 본인은 검술 연습이라고 하지만 리타가 보기에는 훌륭한 춤이다. 성에서 일이 끝나면 순찰을 돌면서 트랩을 점검하고 새로 설치한다. 이때 리타가 합류해서 같이 순찰을 돈다. 리타는 경비대원과 순찰을 자주 돌았으며 트랩도 혼자 설치하곤 하였기에, 눈이 안 보이는 타이번과 경험 없는 후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오후가 되면 그들은 ‘산트렐라의 노래’로 귀환하고 거기서 해산하였다. 타이번은 많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퍽 훌륭한 솜씨로 말하였기 때문에 주당들과 마을 아이들의 인기인이 되어있었다. 후치는 집에 돌아가 양초를 고거나 검술 연습(어디까지나 본인생각)을 하였고, 리타는 숲 일을 마저 하는 패턴이다.



오늘은 리타도 성에 보고 할 게 있었기에 아침부터 같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동생인 제미니는 후치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함정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 몸소 체험하였고, 그때부터 순찰대에 합류해서 같이 다니게 되었다. 지금도 연병장에서 열심히 후치가 춤추는 것을 구경하고 있다.



“후치! 힘내!”



제미니는 양손을 모아 후치에게 외치고는 손을 들어 응원했다. 그 응원에 더욱 탄력을 받았는지 후치의 춤사위에 힘이 넘쳤다.



“오늘도 현란한 솜씨네.”



“후치 저 녀석. 발전할 기미가 안보여.”



리타는 나지막이 감탄을 내뱉었고 터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경비대원인 그는 지난 트롤의 침입 때 다리부상을 입었고, 그 덕에 이번 정벌군에서 빠지게 되었다. 타이번이 마법으로 치료해 주었다는데 움직임에 불편함이 남아있단다. 리타도 늑골을 치료했지만 아직도 가끔 통증이 있거나 움직일 때 어색함이 남아있었다.



터너는 후치의 동작을 지도하며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그리고 후치는 분명히 같은 자세인데도 춤으로 보이게 하는 엄청난 재주를 가졌음을 증명해 보였다. 터너를 비롯한 경비대원들의 지도(를 가장한 놀림)과 시범(을 가장한 괴롭히기)를 매일 당하면서도 후치는 나름대로 열심히 연습했다. 해너의 펍에서 얻은 바스타드 소드를 든 모습은 이제 그런대로 사람들의 눈에 익었다. 본인의 손에만 안 익었을 뿐이라는 게 문제다.



“후치, 검을 확실히 의식해. 너무 검에 휘둘린다.”



“검은 내 팔의 일부야!”



“그건 실력이 뛰어난 검사한테나 해당하는 소리고. 걸음마도 하기 전에 달리려고 하는 녀석이네.”



“임마, 검을 확실히 의식해야 공격이 제대로 이루어져. 검이 네 몸에 완전히 익고 나서야 그런 걸 느끼는 거지. 지금은 착실하게 검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해.”



“동작은 딱딱 끊어가면서. 전사들이 물 흐르듯이 한다는 게 얼마나 절제된 동작 안에서 이루어지는지 알기나 아냐?”



후치의 한마디는 경비대의 수 마디를 낳았고, 후치는 입을 다물며 마음속으로만 궁시렁거렸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우습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팔 힘을 기르기 위해서 집에 가서도 팔굽혀펴기를 하고 며칠간 빵도 제대로 못 먹을 만큼 노력했다. 노력하는 미소년을 매도하다니 나쁜 사람들.



타이번은 일을 끝냈고 일행을 성을 나섰다. 그리고 변함없이 순찰을 돌았고 오후가 되어 펍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정벌군이 떠나고 나서 계속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그 기간동안 별다른 문제는 없었고 오늘도 그렇게 하루가 흘러갈 것만 같았다.



쿠콰콰쾅



우레와도 같은 소리에 일행은 놀라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을 동편의 야산 쪽이었다. 그곳은 타이번이 마법 트랩을 설치해둔 장소였다. 타이번이 날카롭게 말했다.



“제미니는 여기 있나?”



“……예”



“그럼 제미니는 아니군. 드디어 뭐가 걸린 모양인데?”



“정말 대단하군요. 그쪽으로 들어올 거라는 걸 어떻게?”



“리타가 워낙 지형을 잘 보는 것도 있고, 몬스터라면 여기로 들어와야겠다고 생각할 만한 곳은 흔하지 않거든. 자, 가보자. 제미니? 우리 둘이 먼저 가볼 테니까 자경단에 가서 양동작전일지도 모르니 대기하라고 전해. 그리고 리타는 성에 가서 경비대를 파견시켜줘.”



“내가 경비대에 가는 게 안 나을까요?”



“임마, 넌 조수잖아. 그리고 남자가 앞장서야지.”



여자를 위험에 보내려고 해버린 남자가 된 후치는 말없이 타이번을 따랐다. 제미니는 자경단을 향해서 치마가 뒤집어져라 뛰었고, 리타는 마치 말이 뛰는 것처럼 엄청난 속도로 성을 향해 달렸다.



후치는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달려가려다 타이번의 만류에 멈추었다. 타이번은 경비대가 오길 기다리면서 느긋하게 가자고 했고, 후치는 몬스터들이 마을을 습격할까봐 걱정했다. 타이번은 느긋하게 말했다.



“뭔 놈들이지 모르지만 뒤로 돌아 줄행랑을 치고 싶을 걸? 내 특기는 마법의 연결이야.”



후치는 반문하려다 하늘에 모이는 구름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야산 쪽으로 모여든 구름은 이윽고 벼락을 쏟아냈다. 우레 같은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우레가 친다.



타이번은 쑥대밭이 되리라 예견했지만, 거친 포효소리에 표정이 굳었다. 후치는 바스타드를 내밀어 타이번이 잡도록 하고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님인 타이번이 있었기에 높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구보 정도의 속도로 달렸다.



마을을 벗어나자 포효소리는 더 가까워졌다. 땅의 진동도 느껴진다. 몬스터들은 타이번의 마법에 걸려 기습도 실패하고 화도 올랐는지 전 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후치는 멀리서 몬스터들이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다리가 그대로 굳었다.



타이번은 멈춰서며 다급하게 물었다.



“종류가 뭐야?”



“황소 대가리에 몸은 사람 몸인데 7큐빗도 넘겠는데요?”



“아이구 맙소사, 미노타우르스잖아? 얼마야?”



“열……둘! 열둘이요!”



타이번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그는 진심으로 짜증이 묻어나는 말투로 외쳤다.



“우라질! 이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마을이야! 미노타우르사가 한놈도 아니고 열둘이나 나타나다니!”



사실 정벌군의 출병으로 인해 미노타우르스는 근거지를 잃었다. 화이트 드래곤은 앞길을 막는 것에 대해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미노타우르스는 근거지를 잃고 가까스로 도망친 것이다. 그렇게 도망쳐서 헤매다가 마을을 발견하고 지금 같은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 과정을 모르는 타이번으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로도 병사 수십 명을 상대하는 미노타우르스가 분대로 나타나는 마을은 금시초문이다. 그는 모르지만 사실 헬턴트는 과거에 미노타우르스의 습격을 여러 번 겪었다. 지금 정벌군에 소속된 경비대들은 이런 몬스터들의 습격으로부터 마을을 지켜내 온 것이다.



미노타우르스들은 후치와 타이번을 발견하자 거대한 배틀 액스를 들고 포효하면서 달려왔다. 미노타우르스가 든 도끼는 사람이 들면 그레이트 액스라고 부르기 충분한 것이었지만, 그것들은 한 손으로 휘두른다. 미노타우르스는 타이번의 마법에 걸린 탓인지 군데군데 상처를 입고 그을린 놈들도 보였다. 후치는 그대로 오줌을 지릴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거리와 방향!”



후치는 재빨리 타이번의 오른손을 잡아 방향을 가르쳐주었고, 입으로 줄어드는 거리를 재빨리 내뱉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으니 거리가 계속 바뀐다. 타이번은 씩씩거렸다.



“제기, 눈이 안보이니 매직 미사일 같은 초급 주문도 못쓰잖아.”



타이번의 몸에 있는 문신들이 번쩍거리며 빛을 내기 시작했다. 미노타우르스들은 갑자기 빛이 번쩍이자 발광하며 기세를 높였다. 본능이 빛을 보고 위험하다고 외친 건지 금방이라도 후려칠 기세였다. 후치는 타이번을 내버려두고 도망치자는 자신의 마음을 따르지 않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인가 생각하며 타이번의 앞을 지켰다. 타이번은 스펠을 읊조리다가 두 팔을 미노타우르스를 향해 쫙 뻗었다.



“에라, 내 눈이 안보이면 다른 눈으로 하지 뭐!”



타이번이 외쳤을 때, 정면에서 달려오던 미노타우르스 한 마리가 그대로 배틀 액스를 집어던졌다. 그것은 너무나도 무지막지한 기세로 타이번을 향해 날아왔다. 길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후치는 검을 뽑아 들었다.



“죽어보자!”



그는 기합을 내지르며 바스타드 소드로 배틀액스를 쳐냈다. 배틀 액스는 그 무게와 미노타우르스가 던진 힘 때문에 엄청난 기세였지만 후치의 일격이 운 좋게도 방향을 바꿔냈다. 일반 전사라 하더라도 미노타우르스가 던진 도끼를 쳐낸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후치는 충격으로 인해 감각이 없는 손을 늘어트렸다. 그리고 마침내 타이번의 캐스팅이 끝났다.



“적을 분쇄해! 발러!(발록Barlog)”








*








경비대로 쏜살같이 달려온 리타는 다급히 경비대를 모았다. 헬턴트의 경비대원답게 그들은 순식간에 무장을 제대로 갖췄고 바로 리타를 따라나섰다. 경비대의 수가 적은 것이 불안했지만 트롤을 마법 한방에 잡은 타이번이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성에서 나온 순간 그들은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꽤 떨어진 거리임에도 한눈에 들어올 만큼 엄청난 기세로 무엇인가 몰아치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재빨리 달렸다. 그들은 꽤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음에도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기세로 보아서는 보통 몬스터가 아닌 것 같다. 그런 곳에 장님 마법사랑 초장이 소년만 있다고 생각하자 자연스레 발이 빨라진다. 그리고 이내 장소에 도달한 이들은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광경에 얼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뭐야……?”



“저 시커먼 놈은 타이번이 불러낸 놈이에요! 우리 편이죠!”



멍하니 내뱉는 경비대원의 말에 후치가 대답했다. 타이번이 소환한 발러는 압도적인 모습으로 미노타우르스를 도륙하는 중이었다. 10큐빗은 넘어 보이는 엄청난 덩치에 머리에는 1큐빗짜리 뿔이 달린 검은색 괴물은, 몬스터중에서도 상급으로 분류되는 미노타우르스가 불쌍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것은 너무나도 새까만 칠흑과 같았다. 칠흑의 갑옷을 입고 칠흑의 뿔이 달린 투구를 쓴 그것의 얼굴은 아무것도 없는 암흑이다. 온통 칠흑으로 이루어진 그것은 오른손에 스커지를 들고 왼손에 클레이모어를 든 채 사정없이 미노타우르스를 멸절한다.



클레이모어를 휘두르자 미노타우르스의 신체들은 서로를 떠났고, 스커지를 휘두르자 매달려있던 미노타우르스들이 사방으로 터져나간다. 도무지 싸움이라 부를 수 없는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 우리 편이란 말이지? 정말 우리 편으로 삼고 싶지 않은 놈인데. 저건 발러잖아?”



“어? 터너, 저걸 알아요?”



터너의 말에 주위 사람들은 그를 쳐다보았다. 터너는 타이번을 보면서 말했다.



“마법사님. 제가 보기엔 발러인데요? 채찍만 봐도 알겠는데, 맞습니까?”



“맞아.”



“그런데 어떻게 어비스의 발러가 우리를 돕고 있습니까?”



“내가 불러냈다고 후치가 그랬잖아?”



터너는 입을 쫙 벌렸다. 그의 곁에 있던 리타는 칠흑의 괴물을 무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저건 소환할만한 성질의 것이 아닌데요?”



“잘 아는군, 리타. 잠깐 어비스의 미궁에서 내가 여기로 옮겨온 거야. 소환이 아니지. 공간 이동이야.”



“묻고 싶은 게 리스트로 1부터 10까지 순식간에 채워졌는데, 1번부터 질문해보죠. 발러가 불려왔다고 싸워주나요?”



리타는 타이번을 보지 않고 계속 발러에게 시선을 준 채 물었다. 후치와 경비병들은 모두 타이번의 대답에 주목했다.



“약속 때문이니까.”



“무슨 약속인가요?”



“간단한 거야. 내가 원하는 놈을 박살낸다는 약속. 바꿔 말하면 난 놈에게 피를 제공하는 거지. 지금 신나게 미노타우르스들의 피를 받아내고 있을 텐데.”



발러는 어느새 달아나는 미노타우르스들까지 깨끗하게 멸절시켜버렸다. 그는 마지막 미노타우르스를 처리하자 그대로 돌아서서 날개를 펼치더니 사람들 쪽으로 날아왔다.



경비병들은 기겁하며 무기를 뽑아들었다. 후치도 몸의 중심이 뒤로 쏠려 있는 게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자세를 만들고 있었다. 리타만이 타이번 옆에 가만히 서서 발러를 보고 있었다. 발러는 타이번 앞에 내려서더니 뒤쪽의 병사들을 보고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암흑안에서 무섭도록 웅장한 목소리가 들린다.



“저 놈들도?”



후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으나 병사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타이번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이놈아. 아냐!”



타이번이 대꾸하는 것을 보며 병사들은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아무리 불러냈다지만 저런 괴물을 앞에 두고 제대로 말할 수 있다니. 장님이라 보이지 않는 다는 사실은 완전히 잊어먹고 있다.



“그럼 돌려보내다오.”



“뭐야? 급한 일이라도?”



“내 미궁에 들어온 모험자들이 있다. 그놈들을 부수고 있었는데 네놈이 날 부른 것이다.”



“그래? 흠…… 갑자기 텔레포트 워프 스펠이 생각나지 않는데.”



갑자기 발러는 미노타우르스의 피로 물든 스커지를 확 위로 쳐들었다. 사람들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으나 무기를 제대로 치켜들었다. 여차하면 달려들 기세였지만 타이번을 향해 마음속으로 외치는 일을 잊지 않았다. 도대체 타이번은 어떤 심장을 가지고 있기에 이 상황에서 발러에게 도발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행이 발러는 스커지를 내렸고 병사들은 유언을 외는 것을 중단할 수 있었다.



“생각해내라.”



“네 목소릴 듣자니 돌아가면 그 모험자들을 아주 가루로 만들어버릴 생각인가 보군?”



발러의 검은 투구가 아래로 숙여졌다.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침울한 기색을 머금고 있었다.



“잘 들어라, 타이번. 넌 옛날의 타이번이 아니다. 마법사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어떻게 아직껏 살아남았는지 의아할 정도다.”



발러의 목소리는 마치 형체를 지닌 것처럼 듣는 이를 아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타이번은 뻔뻔할 정도로 평온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발러는 잠깐 멈칫했다. 그의 어두운 얼굴은 타이번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그의 옆에 서있는 존재도 같이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그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내가 옛날의 너에게 약속했을 때는 어쩔 수 없어서였다. 피 대 폭력. 그렇게 나쁜 계약도 아니었지. 하지만 지금의 넌 내 손가락 하나로도 간단히 죽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여전히 이상한 동료를 데리고 있는군.”



발러의 마지막 말은 타이번을 향한 게 아니었다. 타이번이 무슨 소리냐고 대꾸하려던 찰나에 여성의 가늘고 높은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평범한데?”



“전에는 괴상한 프리티스트를 데려오더니, 이번엔 타이번인가.”



“괴상하기로는 여전히 어두운 네 얼굴이 더 하지.”



“그 겁 없는 말투도 여전하군, 리타.”



“오랜만이야.”



리타는 오랜 친구를 만난 듯이 손을 가볍게 흔들며 웃었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타이번에게서 리타로 옮겼다. 심지어 타이번조차도 보이지 않는 눈을 리타에게 향했다. 그들의 눈은 도대체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발러가 나타난 시점부터 차라리 환상으로 치부해 버리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잔혹한 법이고, 리타는 여상스럽게 발러와 이야기를 나눴다.



“인간의 시간으로는 오래 흐른 건가. 찰나와 같은 너희 인간의 시간을 이해하기 힘들군.”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돼. 반가움은 피차 느낄만한 감정도 아니니까. 아직도 그때의 일이 생각나면 소름이 돋는걸.”



“그렇군. 네 살은 제법 맛있었다.”



병사들은 발러에게 혀가 있었다면 지금 입술을 핥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그의 목소리는 무엇에 대한 갈망이 느껴졌다.



“너는 그렇겠지만, 나에겐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으니까. 피도 엄청 흘렀고, 너무 아파서 오히려 내 몸이 아닌 것 같이 느꼈지. 그렇게 큰 게 내 몸에 들어오다니.”



듣기에 따라서 퍽 이상한 소리에 남자들은 리타와 발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리타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발러는 당연히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이다. 그들은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 프리티스트가 아니라면 넌 절명했겠지. 솔직히 타이번보다도 네가 아직 살아있는 게 더 놀랍군.”



“그땐 어렸으니까. 무모하고 겁이 없었지.”



“겁이 없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지금이라면 대화를 나누는 대가로 날 마음대로 하란 소리는 못해.”



리타는 어깨를 으슥했고 사람들의 얼굴은 새하얗다 못해 사색이 되었다. 리타는 평온한 어조로 계속 말했다.



“지금도 비어있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정말 비어있는 것을 채워 넣고 싶어서 아등바등 했을 때니까, 오히려 목숨에 여한이 없었지. 그렇다 하더라도 산채로 씹어 먹히는 고통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네 살은 이제껏 먹어본 적이 없을 만큼 달콤했고 네 피는 그 어떤 것보다도 향긋했다. 너의 죽음을 내가 받을 수 있다면 좋겠군.”



“사양하겠어. 어머니는 언제나 나보고 자식새끼들 다 키워서 남편 손잡고 눈감는 걸 꿈꾸라고 하시거든. 어머니의 말씀은 새겨들어야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군.”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야. 인간을 이해하려고 하지마. 이해한다면 너도 인간이 되어버릴 테니까.”



사람들은 암흑 속에서 나타나는 반응에 움찔했다. 그들은 이런 반응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발러는 콧방귀를 뀌고 있었다.



“흥. 건방진 소릴. 너는 변함이 없군.”



“내 나이대의 여성에게 변함이 없단 말은 칭찬이야. 고마워.”



“…… 이만 돌아가겠다. 타이번, 네가 원하는 만큼의 시간은 충분히 지난 것 같군. 내가 너에게 약속을 지키고 있으니, 너도 나를 명예롭게 대해다오.”



타이번은 잠자코 있다가 스펠을 외더니 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돌아가, 재수 없는 녀석.”



발러의 몸이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칠흑 빛 투구 속에 자리한 암흑은 사라지기전까지 리타를 보고 있었다. 리타는 손을 흔들었다.



“한번 찾아갈게.”



“기대하지.”



지독한 유황 냄새가 사람들을 덮치며 발러를 휩싼 검은 연기는 사라졌다. 사람들은 발러가 사라지고 나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발러가 있는 동안은 마치 태양조차 사라진 기분이었다. 긴장이 풀어지자 후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팔은 여전히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러는 동안 발러에게 겁먹지 않았던 두 명은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 중 남성이 여성에게 말을 던졌다.



“나말고도 발러랑 농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네, 리타.”



“예전에 여행할 때 어비스의 미궁을 들린 적이 있거든요.”



“어비스를 간 거야, 리타?”



터너가 놀라며 물었다. 리타가 2년 정도 여행을 다닌 것은 알았지만, 어비스의 미궁에 갔다는 것은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리타가 본디 자신의 일을 타인에게 잘 말하지 않는다지만, 이건 너무 놀라운 이야기라서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것이다.



“응, 재밌는 곳이었어.”



“재미?”



타이번과 터너는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렇기에 반문도 같이 내뱉었다. 리타는 두 사람의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지금 농담을 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말한 것이었기에 이들이 놀라는 게 이상했다.



“발러에게 먹힐 뻔 했던 건 최악에 들어가는 일이었지만 그 외에는 괜찮았는걸. 신기한 것도 많았고, 발러랑 대화는 얻어갈게 많아서 재밌었지.”



괴물과 대화하는 걸 재밌다고 말하는 사람은 리타 말곤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타이번조차 그를 굴복시킬 때 재미라는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리타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자 화제를 돌리기 위해 손뼉을 짝 쳤다.



“자, 우선 미노타우르스의 시체부터 정리하죠.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요.”



“그렇군. 가자, 후치. 놈들이 터트린 마법을 다시 걸어둬야겠군.”



타이번은 후치를 불렀으나 후치는 그의 말에 응하지 못했다. 풀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타이번…… 나 지금 다리가 후들거려 움직이지도 못하겠어요.”



“이런 불성실한 조수를 봤나. 확 갈아치워 버릴까?”



“뭐예요? 누구 때문에 당신이 살았는데!”



“응? 무슨 이야기야?”



“아까 당신이 캐스팅할 때 미노타우르스가 도끼를 던졌다고요! 그걸 내가 막아내지 않았으면 당신은 벌써 골로 갔어!”



타이번은 놀라 표정이 되었다. 리타는 근처에 있던 배틀 액스를 들어올렸다. 병사들은 엄청난 도끼의 크기에 놀랐다.



“아무래도 이걸 막은 거 같은데요. 이 거리라면 날린 게 아니고서야 떨어져 있을 리가 없을 것 같네요.”



타이번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거, 후치가 내 생명의 은인이군? 좋아! 원하는 걸 말해봐. 그럼 들어주지.”



“정말요?”



“하지만 황당한 소원을 말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 우선 일을 하자고. 시체 더미에 모여드는 건 파리만이 아니지.”



타이번의 말을 끝으로 병사들은 미노타우르스의 시체들을 모았다. 엄청난 덩치에다가 사방으로 터져나간 것들을 모은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헬턴트 경비대원들은 익숙하게 처리했다. 미노타우르스들의 시체가 타는 것은 엄청난 것이었고, 마을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기 충분했다. 시체의 불꽃은 훌륭한 구경거리에 흥이 식을 때쯤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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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집에 들어왔습니다.

4박5일 제주도 나홀로 여행기는 역시나 아무런 썸없이 깔끔하게 끝났네요.

몸은 혹사시켜도 정신은 힐링했으니 내일부터 다시 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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