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 - ch1. 그림자 경주 (16)2014.10.21 PM 09:13

게시물 주소 FONT글자 작게하기 글자 키우기

*








열린 창문으로 기분 좋은 미풍이 불어온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이고 옷깃도 가볍게 나부낀다. 시원함을 즐기며 흩날리는 머리를 손으로 가볍게 쓸어 올린다. 잡고 있던 책장이 바람에 펄럭인다. 놀라서 책장을 다시 손으로 잡았으나 읽던 페이지는 사라져 버렸다. 아쉬운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는다.



창가의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던 리타는 포개진 책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페이지는 기억하고 있지만 한참 집중하던 게 흐트러지자 다시 읽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눈을 감고 창틀에 기대 턱을 괴며 바람을 음미한다. 오랜만에 가지는 여유로운 시간을 그녀는 마음껏 만끽하는 중이었다.



최근 그녀는 타이번과 순찰을 돈 이후에 바로 귀가하곤 하였다. 후치에게 시범을 보인다고 오거와 붙은 이후로 경비대원들이 계속 그녀를 귀찮게 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에게 시달리는 게 익숙하지 않았던 그녀는 자리 자체를 피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후치가 일루젼 몬스터를 상대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마을 사람들이 구경하러 연병장에 모인다는 점도 리타가 꺼리게 된 이유이다.



듣기로 후치는 제미니의 이름을 외쳤다는 이유로 온 마을의 놀림감이 되었다고 한다. 리타의 검술에 마음을 빼앗겼지만 그렇다고 후치를 놀리는 것을 잊어먹지 않은 경비대원들이다. ‘제미니의 나이트’, ‘나이트 후치’, ‘후치 경’ 등 많은 별명을 가진 후치는 덕분에 하루하루가 괴로운 생활을 보냈다. 일루젼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한데 마을 사람들의 놀림까지 계속되다니. 거기다가 후치보고 자기 이름을 불러달라는 마을 소녀들이 생겨서 제미니까지 후치 입단속 하느라 고생이다.



리타는 그런 북적한 상황을 지켜보는 건 좋아하지만 참여하면 피곤함을 느끼는 타입이었기에, 집에서 제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만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제미니는 후치와 관련된 일이라면 눈앞에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상세히 이야기해주었다. 덕분에 여러 몬스터와 어떻게 후치가 싸웠는지 리타는 자세히 알고 있었다.



살랑



바람이 소란스럽다. 마을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마을은 오늘도 억지로 활기차고 북적거린다. 후치가 만들어 내는 재미난 상황이 그들의 활력제가 되겠지. 리타는 살짝 내려 깐 눈으로 마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때 리타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바람은 여전히 부산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묘한 기운이 섞여 있다. 마을 전체가 평소처럼 들뜬 분위기가 아니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이런 분위기는 좋지 않은 일을 가져온다.



“언니.”



“벌써부터 안 좋은 일이 벌어진 건가.”



들려오는 제미니의 목소리에 리타는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제미니는 헉헉대는 숨을 몰아쉬면서 서 있었다.



“무슨 소리야?”



“헛소리로 치부해도 될만한 영역의 소리.”



“그럼 헛소리로 치부할 게. 그보다 중요한 소식이 있어.”



“혹시 안 좋은 소식이야?”



“어? 어.”



리타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바람에 섞여 있던 불쾌한 느낌은 정확했다. 그래도 일단 제미니를 진정시키기 위해 농담을 한마디 건넨다.



“후치가 허리를 못 쓰게 되었다거나 다른 여자의 이름을 외친 게 아니라면 말해봐.”



“그 소식은 내가 폭행죄로 잡혀가는 소식과 함께 들을 수 있을 거야. 아니아니, 아이 참! 그거보다 진짜 중요한 일이야.”



“뭔데?”



제미니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호흡을 다듬은 다음 대답했다.



“정벌군이 돌아왔어.”



“그렇군.”



제미니는 리타가 놀라는 것을 기대했으나 그녀는 놀라서 일어난다거나 소리친다거나 하는 통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다시 턱을 괴었을 뿐이다. 제미니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안 놀라?”



리타는 약간 나긋해 보이는 상태로 책을 침대위로 던졌다. ‘멋진 이성을 유혹하는 100가지 방법’이라는 책 제목이 제미니의 눈길을 끌었다. 리타가 다 읽으면 바로 빌려서 읽어야겠다고 다짐할만한 제목이다. 리타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제미니를 보았다.



“예상보다 조금 빠르긴 하지만 슬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했어. 전투의 규모가 커지면 시일이 오래 걸리지만, 부딪치는 힘만 크다면 빨리 끝나는 법이지. 드래곤의 대결은 오래 끌만한 성질이 아니야. 그리고……”



리타는 말을 끌었다. 그녀의 시선을 창문 너머로 마을을 향하고 있었다. 제미니는 슬금슬금 침대로 가서 책을 살피려다 리타의 말이 끊겼음을 깨닫고 리타를 쳐다보았다.



“정벌군이 승리해서 돌아왔다면 절대로 지금 같지 않겠지. 온 마을이 축제 분위기일거야. 먼저 승전보를 전하러 온 파발이 온 것이든 정벌군이 다 온 것이든.”



“파발 혼자 온 거 같던데? 그러면 정벌군이 패배한거야?”



제미니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아무리 철없는 그녀라도 드래곤과 싸우러 간 군대가 패배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안다. 제미니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예상일뿐이야. 하지만 네 말대로 정벌군이 온 게 사실이라면, 마을 사람들이 다같이 승리를 조용히 즐기자 라고 약속이라도 하지 않은 이상 이럴 리가 없겠지.”



리타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집이라 원피스 하나만 입은 채 편안하게 있었는데 옷을 갈아입어야 하겠다. 그녀의 예상이 맞다면 아마도 타이번과 그녀는 한창 바빠질 것이다.



“패잔병들이 올 때 트랩에 걸리지 않도록 해체해야겠네.”








*








무장을 완전히 갖춘 리타는 성으로 갔다. 성으로 가는 동안 마을의 분위기는 몹시 쳐져 있었다. 그리고 파발로 온 사람이 기사로 보였으며 꽤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라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성에서는 마을의 중요인사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영주 대리인 하멜과 경비대장 대리인 터너를 비롯해서 여러 대리인들과 마을의 장로들 정도가 참여하였다. 어딘지 모르게 옹색하면서도 침울한 참여명단이다. 리타는 타이번도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기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기로 했다.



회의실 밖에서 대기하는 동안 리타는 상념에 빠졌다. 그녀는 애초부터 캇셀프라임의 패배를 예측했다. 캇셀프라임의 패배는 곧 정벌군의 패배를 뜻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정벌군이 패배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런 말없이 그들을 떠나보낸 셈이다.



그녀는 죽음과 패배가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죽음이란 필멸자에게 내려진 축복이며, 치열한 삶의 끝에서 주어지는 휴식이다. 죽음은 아무에게나 아무렇지 않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정해진 운명이며, 흔히 말하는 수명이 다했을 때 찾아온다. 아무리 죽을 것 같은 위기가 닥쳐도 수명이 남았다면 그건 극복할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필멸자는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한다. 눈앞에 펼쳐진 시련이 감내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모든 힘을 다해서 시련을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운명은 끝이 아니라 믿으면서.



리타는 칼로부터 염세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칼은 사람이 언젠가 죽을 걸 알기에 타오른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였지만, 리타의 생각은 이미 결정된 운명을 연기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운명이란 각본이 준비되어 있다면 사람은 그 각본에 맞춰 충실히 연기하는 연기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이다. 그것이 사실이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람은 자신을 불태울 수 없다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



칼의 의견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동의하지는 못하는 사항이다. 유피넬과 헬카네스가 지켜보는 이 세상은 그들의 딸인 시간이 함께한다. 시간은 어느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작용하지만, 어느 누구도 시간 앞에서는 평등할 수 없다. 그것은 뒤로도, 앞으로도 흐른다. 그것이 앞질러 가거나 뒤처진다면 그때 보게 되는 것은 자신으로서는 미래의 일이다. 그리고 미래의 일이라는 것은 그렇게 되도록 짜여져 있는 운명이란 것이겠지.



그렇기에 운명의 연기자는 죽음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지 못했다. 죽음에 대해 고요하게 가라앉은 호수마냥 평온했다. 하지만 디트리히라는 돌이 그녀에게 던져졌다. 그리고 캇셀프라임이라는 바위가 던져졌다.



생에 처음 겪는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는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남겼다. 아직 그녀는 그 감정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오롯하기를 원했고, 그러고자 행동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캇셀프라임과 디트리히를 잡았어야 했을까? 잡았더라면 정벌군이 패퇴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마을을 절망에 빠트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불쌍한 아이와 불쌍한 드래곤을 구할 수 있었을까?



후회한다.



과거의 일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캇셀프라임은 리타가 잡아주길 바라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리타가 잡았다면 지금과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도 캇셀프라임의 운명이 허용 된다면의 이야기다. 운명의 연기자는 후회라는 것을 하는 순간 스스로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불신은 사실 이전부터 존재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로니가 생각난다. 그 남자를 살리고자 리타는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희망을 주고 싶어 했고 슬픔에 찬 농담까지 내뱉었다. 그의 운명을 안다면 그 앞에서 필사적이었던 자신은 어떤 심정이었나. 죽어버린 사람들을 보는 심정은 어떠했는가. 슬픔에 찬 가족들을 보면서 정말로 그녀는 멀리서만 바라본 것일까.



디트리히를 안고 싶다. 그 조그만 아이를 품안에 안고 온기를 느끼고 싶다. 캇셀프라임도 보고 싶다. 그녀에게 멍청하다고 지적해줄 수 있는 존재가 그립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해서 멀어질 이유 같은 건 없었다. 텅 비어버린 그녀 자신이 느끼는 갈망이 합리화 시킨 것뿐이다. 아니, 합리화도 아니다. 그녀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사람의 사랑을, 인간의 나눔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지금은 변화했다. 죽음을 한 발자국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운명이란 틀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이 빈 그릇을 채울 수 있을까?



“리타?”



후치는 회의실을 나오며 리타를 발견했다. 그는 리타가 무섭도록 허망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무심결에 불렀다. 어쩐지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탓이다.



후치의 목소리에 리타는 눈이 내린 듯한 차가움이 느껴지는 얼굴로 변했다. 평소의 표정이 된 것이다. 웃지 않을 때의 그녀는 한결같이 무표정하다.



“너도 회의에 참여했었니?”



“타이번의 조수라는 신분이 꽤 높더라고요.”



“그래, 아버지에 대한 건…… 아니, 미안하다.”



후치의 안색이 어두운 것을 보고 리타는 질문을 그만두었다. 그녀는 그러는 와중에도 타인에 대한 걱정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너무 상념을 깊게 했나 보다.



“리타가 와있나 보군.”



“예, 타이번. 정벌군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저희가 해야 할 일이 생긴 것 같네요.”



“다른 패잔병들도 서서히 도착할 테니까, 얼른 트랩을 치워버려야겠지. 스로이는 운이 좋아서 트랩에 걸리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운이 좋을거라 장담할 수는 없어.”



“도착한 기사의 이름이 스로이인가 보군요.”



타이번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후치와 리타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리타는 계속 어두운 표정의 후치를 보고 있었다.



이 소년의 아버지는 어떤 운명인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는 알 수 있다. 소년은 아버지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다면 운명이든 뭐든 발등에 키스하고 세상이 떠나가라 즐거워할 것임을.



“걱정되니?”



리타는 후치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물었다. 후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타이번도 비슷하게 묻더군요. 여기서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면 리타는 걱정하지 않을까요?”



“응.”



후치는 세상에 더없이 진지하다는 표정의 리타를 보며 다시 씁쓸한 미소를 올렸다.



“내가 잠시 누구랑 대화하는지 잊고 있었네요. 하지만 지금은 받아줄 기분이 아니라고 하고 싶어요.”



“미안.”



“나는 걱정하지 말란다고 걱정을 안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를 걱정한다고 아무것도 나아지는 게 없다는 걸 알고 있고요.”



“걱정하지 말란 말은 위로가 안 되겠네.”



“아마도 그렇겠죠? 그러니 저는 제 마음대로 마음껏 아버지를 걱정하겠어요.”



열일곱 살의 소년이 꽤 대견하다. 리타는 어깨동무를 한 손을 들어 그의 삐죽삐죽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문득 집에서 읽던 책의 내용이 생각난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남성이 풀 죽어있을 때 위로하는 방법이었다.



“후치.”



“왜요?”



“가슴 만질래?”



“……예?”



후치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리타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지금 그가 들은 말의 진위여부를 확실히 하기 위해 리타의 얼굴과 가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반응을 보며 리타는 고개를 갸웃했다.



“십대 소년이 우울해하면 이 방법이 제일 좋다고 책에 적혀 있던데?”



후치는 인상을 썼다. 저 여자는 진심으로 믿고 말한거야.



“그 책 당장 갖다 버려요.”



후치의 말에 리타는 ‘왜?’라는 의문문을 표현했고 후치는 성실이 답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쩐지 아쉬워하는 자신을 모른척하며 리타의 도담한 가슴에 시선이 향하는 것을 최대한 참아야 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이대로 돌아오지 않아서 제미니에게 끌려가 사랑받는 남편이 되는 미래를 상상했으나, 이제 그 미래에 리타까지 끼어들어 고통 받는 나날이 추가되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걱정되지만, 그래도 리타의 농담은 잠시나마 어두운 기분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



------------------------------------------------



이거 다음 내용이 거의 비슷한 분량이라서 중간에 끊었습니다.

항상 7~8장씩 개재하다가 5장 하려니 짧게 느껴지네요.

가끔 달아주시는 댓글들에 많은 힘을 얻고 있습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점이나 어색한 게 보이면 언제든지 지적해 주세요.

좋은 밤 되시길.
댓글 : 2 개
가슴 만질래 ㅋㅋ
원작에서 후치가 좀더 음흉했으면 하면서 원망해 봅시다.
친구글 비밀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