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 - ch2. 딸의 아버지 (17)2014.12.13 PM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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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은 입만 벙긋벙긋 하며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파견된 동생이 너무 걱정되어서 임무가 있는 리타를 설득해서 따라나선 것이에요. 아버지께서는 드래곤 라자를 제외한 자식에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으시니 그냥 허락하시더군요.”



에포닌으로 변장한 카피는 낮은 목소리로 비꼬듯이 말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나 처지에 대한 한탄이 잘 드러나는 표정과 어조였다. 리타는 뜻밖에도 훌륭하게 연기를 해내는 카피에게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시장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카피의 말과 인지하기 힘든 범주의 내용 때문에 패닉에 빠진 상태였다. 어제 할슈타일 가문에서 방문한단 이야기를 듣고 할슈타일 가문의 자료를 살펴보았다. 당연히 드래곤 라자인 디트리히와 돌멘에 대한 자료가 있었고 그들의 형제에 관한 것도 읽었다. 거기서 디트리히 할슈타일에게 누나가 한 명 있다는 것을 보았던 게 기억난다. 다만 방문한다고 했던 사람이 평민이라는 소리에 그 이름까지 상세히 보지 않았었다.



그때 사무장이 그의 귀에 대고 에포닌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고, 그는 간신히 정신을 되찾았다.



“그…… 마음이 몹시 심란 하시겠습니다.”



“아니에요.”



하지만 카피는 대답과 달리 눈시울을 붉히며 눈을 촉촉하게 물들였다. 그녀는 실례했다며 손으로 조심스레 눈가를 훔쳤다. 누가 보더라도 영락없이 동생에 대한 걱정 때문에 슬퍼하는 누나의 모습이었다.



“허허, 제가 뭐라고 위로를 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괜한 질문을 드린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시장은 눈물을 훔치는 소녀의 앞에서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허둥댔다. 본디 그는 그녀의 정체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반지를 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완벽히 믿을 수는 없었다. 거기다 영애라고 나타난 아가씨도 어딘가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는 여러 가지 질문으로 은근슬쩍 분위기를 압박해 정체를 밝혀내고, 어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잘 처리하는 동시에, 혹여 정말 할슈타일 가문이라면 앞으로의 관계를 고려해 잘 보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그가 감당하기 힘든 문제를 안고 있는 인물일 줄은 몰랐다. 거짓말이라면 탄로날까봐 이렇게 크게 하지 못한다. 어제 레넌의 보고에서 리타가 기밀임무를 수행중이라는 것을 보았지만, 이런 일이었다니. 그가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때 리타가 훌쩍이는 에포닌에게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아가씨, 진정하시지요. 다른 분들께서 흉보십니다.”



“네…… 추태를 부렸습니다. 부디 넓으신 아량으로 소녀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무슨 말씀을. 오히려 제 잘못입니다.”



카피는 감정을 서서히 진정시키며 다시 표정을 바로했다. 시장은 마음속으로 큰 한숨을 내쉬면서 그녀의 기분이 다시 나빠지는 것을 막고자 다른 질문들을 던졌다.



주로 수도에 관한 질문이었는데, 카피는 모른다는 대답을 많이 했다. 만약 드래곤 라자에 대한 말을 듣기 전이었다면 의심이 들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저택 내에 있어서 소식을 잘 모른다는 대답에 신뢰가 갈 뿐이었다.



시장이 탐색할 기색이 없어 보이자 카피는 넌지시 본래의 목적을 꺼냈다.



“시장님. 이 도시에는 투기장이라는 명소가 있다고 들었어요.”



“오, 수도에서도 투기장에 대한 소문을 들으셨나 보군요. 맞습니다. 이 시의 투기장은 웨스트 그레이드에서 가장 크고 화려합니다. 당연히 전투도 다른 투기장과 비교가 되지 않지요.”



“그런가요? 소녀는 아직 한 번도 투기장을 구경해 보지 못했어요.”



“투기장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그게 사실 기사들의 결투는 몇 번 보았지만, 투기장에서는 정말로 목숨을 걸고 전투가 난다고 들었어요.”



“하하, 맞습니다. 기사분들의 결투는 어디까지나 실력을 겨루는 것이지요. 하지만 투기장은 목숨을 담보로 싸우는 것이니 박진감의 수준이 다를 겁니다. 아, 절대로 기사의 결투를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닙니다.”



시장은 투기장 이야기가 나오자 신나서 떠들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부랴부랴 변명했다. 카피는 살짝 웃으면서 그를 안심시켰다.



“네, 알고 있어요.”



“다행입니다. 그러면 이 기회에 투기장에서 한 번 관람해 보시겠습니까?”



“괜찮아요. 사실 피를 보고 야만적인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아, 실례했습니다. 고귀하고 청초하신 레이디에게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실리 없지요. 미련한 제가 거기까지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니에요. 먼저 말을 꺼낸 건 저인데요. 그런데 그 투기장은 시에서 운영하는 것인가요?”



시장은 표정을 살짝 굳혔으나 금방 웃으면서 대답했다. 리타의 눈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그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투기장은 실리키안이라는 자의 개인 소유물입니다. 하지만 시의 명소로서 많은 사람들이 찾기 때문에 시에서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이 도시에 와서 실리키안 남작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남작이란 말에 시장은 다시 표정이 굳었다. 그는 살며시 카피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그녀에게서 남작의 직위에 대한 의문은 떠올라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안심하며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대단한 수완가니까요. 투기장을 지금처럼 발전시키고 시의 재정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게 당연한 일이지요.”



“그 분이 예전엔 시청에서 근무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맞습니다. 꽤 오래 전 일인데 아시는군요.”



“우연히 들었어요. 그런데 그런 분이 어쩌다가 투기장으로 가게 된 건가요?”



시장은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불미스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일인가요?”



“시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라서 말씀드리자니 마음이 편친 않군요.”



“실례했어요. 저는 다만 들었던 게 있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했어요.”



“들었던 것이라니요?”



“아닙니다. 시의 치부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그저 소문에 지레짐작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카피는 그렇게 말하며 입을 닫았고 시장은 애매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가만히 서있던 리타의 목소리가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아가씨께서는 실리키안이 시와 투기장의 거래를 맡아 그 사이에서 공금을 횡령했다는 소문을 들으시고는 그 진위여부를 궁금해 하시는 겁니다.”



“리타! 조용히 하세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시장님, 못 들은 것으로 해 주시겠어요? 제 수행원이 예의 없는 말을 하는 바람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절 봐서 용서해 주세요.”



시장은 리타의 말에 움찔했다. 그는 우선 카피의 사과에 정중하게 대답하고서는 턱에 난 수염을 쓰다듬었다. 수염을 쓰다듬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계시다니, 제대로 말씀드리는 게 낫겠군요.”



“그러지 않으셔도 되세요.”



“괜찮습니다. 오히려 오해를 품고 계시는 것보다 확실히 말씀드리는 게 더 좋습니다. 들으신 소문은 사실입니다.”



“그랬군요.”



“다만, 그때 실리키안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공금 횡령이 말인가요?”



“네, 당시 그의 아내는 몸이 많이 약하고 선천적으로 지병을 앓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아내를 치료하는 데 많은 돈이 드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아내의 병세가 악화되었는데 마침 치료법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실리키안은 횡령한 돈으로 그 치료법을 개발한 의사를 데려와서 아내의 병세를 치료한 것이지요. 물론 그 대가로 시에서는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범법행위를 잘했다고 할 순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다니, 듣던 거랑 다른 분이네요.”



“네, 그 친구가 지금은 냉혈한 소리를 듣고 있지만, 그때는 정말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시장은 그리움과 아쉬움이 묻어나는 얼굴이 되었다. 카피와 리타는 조용히 그의 표정을 감상하였다. 언뜻 보니 실리키안 남작과 비슷해 보이는 연배다. 아마도 시청에서 같이 근무했을 지도 모른다.



리타는 그의 얼굴에서 실리키안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짐작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어지럽게 흩어진 퍼즐의 가운데 부분을 채워서 틀이 맞춰지는 느낌을 주었다. 버터핑거와 톨러스에게 부탁했던 정보를 얻는다면 퍼즐은 완성될 것이다.



리타가 생각에 몰두하고 있을 때 카피는 시장의 회상을 방해했다.



“그런데 시장님.”



“말씀하시지요.”



“혹시 며칠 사이에 헬턴트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들으셨나요?”



시장은 반복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제까지처럼 지금도 움찔하고 말았다. 카피는 걱정스런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장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험. 글쎄요. 공무가 바쁘다 보니 오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전부 파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신가요……”



대답하는 카피는 눈에 띄게 축 처진 분위기를 내었고, 시장은 당황을 숨기며 질문했다.



“혹 아시는 사람들입니까?”



“아는 분들은 아니지만…… 그 분들이 이번에 제 수행원이 하는 임무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거든요. 본래 이 곳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 조우하질 못해서요.”



“그런! 아, 아닙니다. 실례지만 그 분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여쭤 봐도……”



리타가 딱 잘라 대답했다.



“기밀입니다.”



“아, 예. 기밀이었지요. 제가 당연한 것을 물었습니다.”



허둥지둥하는 시장을 카피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시장님?”



“허, 험.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한 번 그런 모험가들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모험가라고 밝힌 적도 없는데 그는 모험가라는 말을 꺼냈다. 후치 일행의 행색을 보면 누구도 사절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 이미지는 당연히 모험가일 테고 시장은 무의식중에 그들을 안다는 증언을 한 셈이다.



하지만 시장은 자신의 실수도 깨닫지 못한 채 사무장을 잡고 이것저것 말하는 모습이었다. 카피는 조금 더 몰아붙이기로 했다.



“외람된 말이지만, 가능하다면 그 분들을 찾는데 시에서 힘을 빌려주실 수 있나요?”



“예, 예. 물론이지요. 시의 모든 인원을 동원해서라도 찾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조우하지 못하셨다면 이 도시에 도착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리타가 다시 한번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곧 이 도시를 떠나야 합니다. 그러니 혹시 그들을 발견하신다면 그들에게 ‘물레방앗간은 빨래터’라고 한 마디만 전해주시겠습니까?”



시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리타의 말을 되새겼다.



“‘물레방앗간은 빨래터’라고요? 그게 무슨…… 아, 암호군요. 알겠습니다. 이것만 전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네.”



리타는 샌슨이 들었다간 그대로 목을 꺾어버릴 소리를 태연하게 하였다. 정말 이 말이 전해질지 알 수는 없지만 제법 재밌는 꼴이 예상된다.



이후로 몇 마디 더 나눈 그녀들은 시장에게 이만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시장은 한 마디라도 더 나누기 위해 그녀들을 잡아두려고 하였지만 단호하게 거부했다. 시장은 그러면 묵고 있는 곳까지 마차를 태워 보내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는 상당히 집요했으나 카피가 정중히 거절했다. 지금은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리타의 지인에게 신세를 지고 있으니 양해해 달란 말에 시장은 울며 겨자라도 먹는 심정으로 물러섰다.



시청 정문까지 나와서 열렬히 배웅하는 시장을 뒤로하고 그들은 말을 몰았다. 시청까지 거리가 꽤 멀어져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되자 카피는 웃음을 터트렸다.



“파하하하하. 리타, 어땠어요. 내 연기?”



“훌륭했어요.”



“그렇다 에요? 이거 재밌다 에요!”



“저도 흥미진진했어요.”



“전혀 흥미진진하단 표정이 아니다 해요.”



“후후, 그런가요?”



리타는 가벼운 웃음을 지으면서 카피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다. 하지만 말의 거리 때문에 힘든 것을 깨닫고 손을 내렸다. 그러자 카피는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리타의 살짝 놀란 눈이 카피를 향한다.



“고맙다 해요, 리타. 리타 덕분에 이런 경험도 할 수 있었다 해요.”



“저도 고마워요.”



“헤헤, 그럼 이제 할 일은 끝난 거다 에요?”



리타는 맞잡지 않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말의 움직임에 맞춰 흘러내리는 머리와 펄럭이는 망토가 새삼 거슬린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으면서도 어딘지 들떠 보이는 얼굴이 되었다. 카피는 그녀가 놀이를 앞두고 두근거리는 아이 같다고 느꼈다.



“이제 버터핑거와 톨러스에게 부탁한 것들만 듣는다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남겠네요.”



“아아, 그 옛날 일하고 딸 말이다 에요?”



“맞아요. 이제 재료가 모였으니 완성하는 일만 남았죠. 후후.”



“리타, 즐거워하는 거 같다 에요.”



“그런가요?”



대답하는 리타는 눈이 크게 떠져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만져보며 어떤 표정이 떠올라 있는지 느꼈다. 확실히 살짝 달아오른 얼굴에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그녀는 기묘한 감정이 자리 잡는 것을 느끼며, 그 느낌을 가슴에 새겼다. 그리고 숨을 크게 한 번 들이 마신 다음 멀리 있는 실리키안 남작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자, 어찌되었건 오늘 이 도시의 밤은 꽤 소란스러워 지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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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적어 졌네요. 나가야 하는데 삘 받는 바람에 금방 적고 말았습니다.

어흑. 또 늦었다고 욕좀 먹겠네요.

그럼 좋은 밤 되시길.
댓글 : 1 개
물래방안갓은 빨래터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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