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 - ch4. 가장 빨리 죽는 새 (5)2015.03.03 PM 09:55
*
스스로의 인생이 결코 덧없지 않다는 자신을 가진 17세 소년, 후치 네드발은 이번만큼은 그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칼이 조목조목 이유를 알려주었다지만, 그래도! 어떻게! 세상이 보호해주어야 할 자신같이 가녀린 미소년에게 이런 일을 시킬 수 있단 말인가!
후치는 이라무스 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거무죽죽하게 그을려 있었다. 그리고 절대 꼬마라고 얕잡아 볼만큼 어려보이지도 않았다. 거들먹거리는 몸놀림이나 거친 행동거지는 그를 모험가나 용병쯤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얼굴에는 재를 펴 바른 것이고, 움직임은 레너스시에서 만났던 경비대를 참고했다. 분장은 샌슨과 리타가 해주었다. 후치는 그를 분장시키면서 웃음을 감추지 못하던 일행을 떠올리며, 인생사 아무 의미 없다고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나쁜 사람들.
속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 보기에 그는 인상 나쁜 청년이었다. 훌륭히 그 역할을 소화해내며 그는 낮에 봐두었던 여관 겸 술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트라모니카의 바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술집은 겉에서 보기에도 왁자지껄한 게 느껴졌다.
후치는 처음 보는 스윙도어에 히죽 웃고는 가슴으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안은 예상대로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잔 부딪치는 소리, 호탕한 고함소리, 그리고 노랫소리들이 요란하다. 후치는 심드렁하게 주변을 대충 훑어보다가 샌슨과 가까운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애초에 계획해둔 대로 일행은 주점 안에 미리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샌슨은 최대한 후치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후치는 그의 시선이 계속 따라오는 것을 애써 무시해야만 했다. 칼이나 다른 사람들은 능숙하게 분위기에 녹아 있었다. 이루릴은 마법을 사용해 모습을 변화시킨다고 하였기에 알아볼 수 없었다.
자리에 앉자 곧 예쁘장한 소녀가 달려와 테이블을 닦았다. 후치는 동전을 하나 튕겨주었다.
“맥주.”
실제 그의 나이와 비슷해 보이는 소녀는 고개를 꾸벅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맥주가 날라져 왔고, 후치는 한 모금 맛을 보았다. 눈살이 찌푸려진다. 대도시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레너스의 쉐린이 만든 흑맥주에 한참 못 미친다.
후치는 잔을 내려놓으며 주변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주변은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제대로 대화를 나누기도 힘들 지경이다. 후치는 혼자라 상관없다지만, 이래선 어지간한 소리가 나도 묻혀버릴 것이다. 그는 괜찮을까 걱정하면서도 최대한 덤덤한 척 앉아서 때를 기다렸다.
정적은 곧 찾아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여관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누군가 내려왔다. 그녀의 정돈된 검은 색의 긴 머리가 발걸음에 맞추어 살랑살랑 흔들린다. 훤칠한 키에 폭발적인 몸매가 달라붙는 옷으로 인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지금만큼은 어느 누구도 그녀보다 아름답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다.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그 여자는 리타였다. 그녀는 투기장에 갈 때 사두었던 원피스를 언젠가 입을 것이라며 챙겨두었다.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올진 몰랐지만 말이다.
경련이 일 정도로 열심히 연습해둔 눈웃음으로 그녀는 자신에게 향한 시선에 답례했다. 살짝 화장을 해둔 얼굴에 그런 눈웃음은 반칙에 가깝다. 홀 안의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리타는 원피스 아래로 드러나는 길쭉하고 매끈한 다리를 뻗으며 테이블 사이를 가로질렀다. 남자들의 눈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천천히 돌아간다. 그녀는 후치가 있는 테이블 근처로 걸어왔다. 하지만 후치를 바라보고 있진 않았다. 리타는 그대로 후치의 옆을 지나치려고 했고, 후치는 단단히 마음을 먹으며 옆으로 손을 뻗었다.
후치는 마치 리타의 엉덩이를 만지듯이 손을 스쳤고 리타는 비명을 질렀다.
“꺄악!”
리타의 날카로운 비명소리는 조용해진 주점에 막힘없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놀라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리타는 깜짝 놀라 엉덩이를 손으로 가리며 수치심에 붉어진 얼굴로 후치를 노려보았다. 후치는 그 시선에 능글맞게 웃었다.
“아이쿠! 여러 아가씨를 연주해 봤지만 이렇게 음이 독특한 아가씨는 처음 보겠네?”
신에게 맹세코 그런 일을 한 적은 없었다. 더욱이 리타도 직접 만지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타이밍을 맞춘 그럴듯한 연기에 불과할 뿐이다. 잘 모르는 술집 시급에게 손을 대는 일을 피하자는 칼의 의견에서 나온 연기다. 그러니 제미니가 이걸 알게 되더라도 그를 죽이진 않으리라. 후치의 마음속에선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한 많은 생각이 오갔다.
후치는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칼은 모르더라도 샌슨은 절대로 이렇게 능글맞게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에겐 더 어울리는 역할이 있다.
샌슨은 앉아 있던 의자를 거칠게 밀어내며 일어났다.
“이놈! 무슨 짓을 한 거냐!”
바로 이것. 정의감 넘치는 청년만큼 샌슨이 잘 소화해낼 수 있는 건 없다. 후치는 그 사실만큼은 인정했다.
“어어랏? 뭐야, 넌. 이 아가씨 기둥서방쯤 되시나?”
“뭐야? 이놈이 도대체 눈에 뵈는 게 없나?”
샌슨은 탁자를 쾅 내려쳤다. 후치는 비열한 웃음을 띠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거야?”
“오냐, 좋다! 너 오늘 임자 만났어!”
근처에 있던 소녀 종업원이 사색이 되어 말했다.
“싸, 싸우시면 안 돼요!”
하지만 그 말을 무시하고 샌슨은 주먹을 꽉 쥐더니 후치에게로 한 발짝 내딛었다. 그때, 샌슨의 허리를 리타가 껴안으며 말렸다.
“그러지 말아요! 참으세요.”
“그럴 순 없소! 저놈이 감히 페이를 내 눈앞에서 모욕했소. 그걸 보고 참는다면 남자가 아니오!”
샌슨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 그는 후치에게 사나운 눈빛을 보냈다. 후치는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오, 이거 진짜 기둥서방인가 본데?”
“닥쳐랏!”
후치는 인상을 쓰더니 귀를 막았다.
“아아, 그렇게 시끄럽게 말 안 해도 다 알아 듣거든? 네 돼지 멱따는 소리보단 저 아가씨의 독특한 음색이 더 듣고 싶단 말이지.”
음흉한 웃음이 그의 입가에 번지는 것을 보며 그들은 즉각 반응을 보였다.
“이노옴!”
샌슨은 후치에게 주먹을 날렸다. 평상시 그의 주먹이 아니었다. 후치는 충분히 맞춰본 합대로 몸을 피하면서 샌슨의 복부를 올려쳤다. 힘을 빼서 쳤지만 샌슨은 제대로 맞은 것처럼 허리를 덜컹했다. 그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더니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는 표정이 되었다.
샌슨은 곧바로 허리춤에 찬 롱소드로 손을 가져갔다. 그는 서슴없이 롱소드를 뽑아 들었고 주변에선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악!”
“어, 어억!”
말리려던 소녀 종업원이 달아나자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순식간에 홀 안은 후치와 샌슨을 중심으로 인파가 쫙 갈라진 상황이 되었다. 칼까지 뽑아든 마당이라면 결코 쉽게 끝나진 않을 것이다.
샌슨은 검을 뽑아 들었지만 바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의 바로 옆에 있던 리타가 샌슨의 검 든 손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간절하게 샌슨을 바라본 다음에 후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멈추세요.”
“싫은데?”
후치는 능글맞게 대답했고 리타의 표정은 차가워졌다. 하지만 평소 그녀가 하고 있던 무표정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보통 여자가 짓는 정도의 귀엽게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당신, 어째서 제…… 어, 엉덩이를 만진 거죠?”
리타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후치는 에 손을 가져다대며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응? 뭐라고? 작아서 안 들려. 내가 어딜 만졌다고?”
“그, 그러니까 엉덩이를……”
“어디?”
리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를 빽 질렀다.
“엉덩이요!”
그제서야 후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왜 그런 짓을 한 거죠?”
“아니, 그게 말이지. 너무 탐스러워 보여서 자연스럽게 손이 갔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큼지막한 게 눈앞에서 만져달라고 막 흔들어대니 어쩔 수 없더라고. 내가 잘못한 게 아냐. 아가씨 엉덩이가 매력적인 걸 내가 어쩌나?”
그러더니 그는 상체를 쭉 빼서 리타의 골반을 쳐다보았다. 리타는 몸을 뒤로 쭉 빼면서 잔뜩 붉어진 얼굴이 되었다.
“어딜 보는 거죠!”
“어디긴. 매력적인 아가씨의 엉덩이가 안 보여서 앞을 본 것뿐이지.”
“당신!”
리타는 완전히 샌슨의 뒤로 몸을 숨기면서 잔뜩 표독스런 얼굴을 했다.
“말로는 안 될 사람이군요.”
“아냐아냐. 아가씨의 말이라면 난 꿈벅 죽는다고. 물론 그게, 크흠, 가냘픈 교성이면 더 좋겠지.”
아무리 후치가 능글맞게 연기할 자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말을 대놓고 하는 것은 어려웠다. 하지만 중간에 헛기침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속아 넘겼다.
리타는 이제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의 앞에 있던 샌슨은 롱소드를 꽉 쥐며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네 이놈! 더 이상 못 들어주겠구나. 어디서 그런 버르장머리를 배워서 파렴치한 말을 일삼다니!”
“어디긴. 네 엄마한테 배웠지.”
“죽인다!”
샌슨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노성을 터트리며 후치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후치는 손을 내뻗으면서 다급하게 외쳤다.
“자, 잠깐! 난 무기도 안 든 상태라고!”
샌슨은 이를 으득 갈더니 말했다.
“어서 검을 뽑아라!”
“무식하긴. 난 쇠창살 여관에는 관심 없어. 미친 돼지새끼를 다루는 데는 좀 더 좋은 방법이 있지.”
“뭐야, 이 자식이!”
“자, 진정하고 이걸 봐.”
후치는 샌슨에게 팔을 들어 보였다. 그의 손에는 OPG가 껴진 상태였지만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장갑이었다. 그보단 어울리지 않게 알록달록한 팔찌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게 뭐야?”
“이게 보이나? 내 팔찌.”
“그게 어쨌다고?”
“이런, 돌대가리. 물건 볼 줄 모르는군.”
후치는 팔찌를 낀 팔을 앞으로 뻗더니 주문을 외웠다.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는지 들을 수 없었다. 다만 리타는 후치의 입모양을 읽고선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후치는 주문을 다 외위고선 고함을 질렀다.
“하압!”
그 순간 팔찌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꽤 강렬해서 주점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 사이에서 보고 있던 이루릴이 정확하게 마법을 써주었다. 빛의 정령을 이용한 간단한 속임수였다.
후치는 마법이 어떤 것인지 몰랐기에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덤덤한 척 애썼다. 빛이 사그라지자 그의 팔에 낀 팔찌는 불꽃으로 이글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덤으로 그의 손까지 불꽃에 휘감겨 있었다. 단순한 눈속임인지 다행히 뜨겁진 않았다.
“뭐, 뭐야, 저건!”
후치는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싸늘하게 말했다.
“해볼까? 난 주먹으로 싸우겠어. 그럼 난 잘못한 게 없지?”
샌슨은 롱소드를 든 손을 부들거렸다. 진심으로 놀랐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그건 뭐야?”
후치는 씨익 웃으며 마시던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청동으로 된 보통 술잔이다. 후치는 헬턴트에서 OPG를 받았던 첫날 만들었던 장면을 생각해내며 술잔을 양손으로 잡은 다음, 쫙 찢어버렸다.
여기저기서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청동으로 된 술잔이 마치 종이처럼 찢어졌다. 후치는 그것을 뭉쳐서 손으로 던졌다 받았다 하다가 테이블에 던졌다. 청동 덩어리에 맞은 테이블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어때, 이래도 해볼 거야?”
“비, 빌어먹을!”
샌슨은 움찔했지만 그래도 투지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뒤에서 떨고 있는 여자 때문이라도 그럴 수 없다는 듯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여기서 칼이 등장할 차례다.
“여보게, 젊은이! 관두게. 죽고 싶은 건가! 저건 파이어 자이언트의 팔찌야!”
샌슨은 당혹한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후치도 마찬가지였다. 후치는 뻔뻔스럽게 말했다.
“어랏? 당신, 이걸 아나?”
칼은 팔찌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젊은이, 어, 어떻게 그 귀한 것을 손에 넣었나?”
후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당신이 산거잖아.’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 턱이 없었다. 칼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건 돈으로 따진다면 수천 셀을 호가할 물건인데, 자, 자네 그것을 어디서 구한 건가?”
돈이 거론되자 사람들이 놀라서 팔찌를 다시 쳐다보았다. 사람들의 이목은 확실히 주목시켰다. 후치는 시선들을 느끼며 유들거렸다.
“이게 그렇게 비싼가? 고맙군. 알려줘서. 모험하다 건진 물건인데, 감정해 볼까 하다가 그냥 가지고 다녔거든.”
“그건 파이어 자이언트의 팔찌가 틀림없어! 모든 불을 막아내고, 약한 마법도 방어하며, 거인의 힘을 내는, 대마법사 핸드레이크도 가지기를 열망했던 물건! 도대체 어디서 그것을 구했나?”
핸드레이크가 뭐가 아쉬워서 거인의 힘이 나는 물건이 필요한진 모르겠으나, 칼의 말은 듣는 이로 하여금 팔찌를 가지고 싶은 물건으로 보이게 하기 충분했다. 후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 알려줄 수는 없어. 조만간 다시 가볼 계획이라서.”
그러고 후치는 샌슨을 흘겨보았다.
“이래도 덤비겠나?”
샌슨은 넋 놓고 있다가 번뜩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흔들었다.
“흥! 어디서 애송이가 좋은 아티팩트를 얻었다고 기고만장 하긴! 네 놈이 그런 걸 가지고 있다고 상대하지 못할 줄 아느냐!”
“자기 수준도 모르는 놈이군. 덤벼.”
“이얍!”
샌슨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합을 내지르면서 후치에게 달려들었다. 샌슨의 기세는 정말로 그를 죽일 것 같았다. 후치는 여유를 부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샌슨은 달려들던 경로를 바꾸었다. 그러자 후치의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어엇!”
예상외의 변칙에 당황한 후치는 마구잡이로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주먹은 엄청난 위력이 담겨 있었기에 샌슨은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 정도의 속임수도 모르다니. 생각보다 별 볼일 없는 놈이군!”
“웃기고 있네. 내 주먹이 무서워서 얄팍한 속임수나 쓰는 놈이. 너도 뒤에 있는 저 년처럼 고추 떼고 여자 옷이나 입는 게 어떠냐?”
“이익!”
후치의 도발은 훌륭했고 샌슨은 또 다시 달려들었다. 그의 검이 매섭게 움직였으나 후치는 그런대로 잘 피해냈다. 그러다 샌슨의 검이 내려진 순간에 재빨리 검을 잡았다. 날이 선 검을 손으로 잡는 모습에 사람들에게서 비명과 탄성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샌슨은 검을 빼내려는 시늉을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 듯 낑낑거렸다.
“놔랏!”
“미쳤냐? 이걸 놓게. 하압!”
후치가 검을 잡은 상태로 기합을 주자 그의 손을 감싸고 있던 불꽃이 칼까지 삼켰다.
“으악!”
샌슨은 손잡이까지 불에 휩싸이자 비명을 지르며 롱소드를 놓았다. 그는 손에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감싸 쥐며 뒤로 물러섰다. 리타가 그에게 달려와 걱정했다.
“괜찮아요? 어머, 이 손봐! 어서 치료해야 해요.”
“진정하시오. 이 정도는 괜찮소. 그보다……”
샌슨은 리타를 진정시키며 후치를 노려보았다. 후치는 불에 타오르는 검을 허공에 던졌다. 빙글빙글 검이 허공에서 불꽃을 뿌리며 회전했다. 후치는 떨어지는 검의 손잡이를 낚아채며 히죽 웃었다.
“별 볼일 없다며?”
명백한 비웃음에 대한 반응은 샌슨이 아닌 리타에게서 나왔다.
“그 입 다무세요! 더 이상 이 분을 모욕하면 용서하지 않겠어요!”
“뭐? 아가씨가 용서하지 않겠다면 어쩌겠다는 거지?”
리타는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후치는 롱소드를 바닥에 꽂으면서 여자를 가리켰다.
“아가씨가 혼내 주겠다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단, 침대 위에서 말이지. 낄낄낄.”
“당신…… 저도 더 이상 봐주지 않겠어요.”
“그래그래, 더 봐주지 말라…… 어라?”
후치는 능글거리다 말고 놀란 소리를 내뱉었다. 리타가 눈을 감은 채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캐스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윽고 리타는 눈을 뜨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뻗어진 그녀의 손앞에는 빛의 화살이 형성되어 있었다.
“매직 미사일!”
리타의 외침에 빛의 화살은 후치에게로 쏘아졌다. 사람들은 마법까지 등장하자 놀란 기색으로 허둥댔다. 하지만 후치는 전혀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여유롭게 팔을 앞으로 마주 뻗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팔을 휘감고 있던 불꽃이 펼쳐지며 불의 장막을 형성했다. 매서운 기세로 날아간 매직미사일은 불의 장막에 닿자마자 소멸해 버렸다. 후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경악해 있는 리타를 향해 말했다.
“아가씨, 마법사였군?”
“어, 어떻게 매직미사일을?”
“이런, 아까 전에 저 아저씨가 하는 말 못 들었어? 이건 마법도 어느 정도 막아 준다고 했잖아? 고등한 마법사가 아니면 이 몸에겐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어.”
“그럴 수가……”
“뭐, 그것보다.”
후치는 손을 흔들어 불의 장막을 없앴다. 그리고 굳어 있는 리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손을 붙잡고 주저앉아 있는 샌슨을 보호하기라도 할 것처럼 리타는 그의 앞을 가로 막아섰다.
후치가 비열한 미소를 떠올리며 리타의 손을 붙잡았다.
“이봐 아가씨. 저런 샌님은 내버려두고 나랑 같이 다니는 게 어때?”
“뭐예요?”
“잘 들어봐. 저런 별 볼일 없는 놈이랑 같이 다녔다간 아가씨가 언제 봉변당할지 모른다고. 저 놈이 아가씨를 지켜줄 만큼 강하다고 생각해? 그것보단 나같이 경험 많은 놈이랑 다녀야 안전하지 않겠어?”
“싫어요.”
“그렇게 앙탈 부리지 말고. 저 놈이 허우대는 멀쩡해 보여서 힘깨나 쓰는지 모르겠는데, 남잔 힘이 다가 아니라고. 내 경험은 모험에만 있는 게 아니거든.”
순식간에 리타는 벌레보다도 못한 것을 보는 것같이 경멸하는 얼굴로 바뀌었다. 하지만 후치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그대로 리타의 손을 잡아끌었다.
리타는 저항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힘에 비틀거리다 균형을 잃고 말았다. 그녀의 몸이 돌면서 후치의 손길에 이끌렸다. 후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붙잡으며 품에 안으려고 했다. 그의 손이 리타의 얇은 허리를 두르듯 감쌌다. 하지만 그의 예상보다 리타의 동작이 컸다.
“아읏!”
가냘픈 신음 소리가 리타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후치는 손끝에 닿는 느낌에 입술을 깨물었다. 잘못하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언젠가 한 번 만져본 적 있는 감촉이다. 보드랍고 폭신하고 물컹하며 따뜻하고 거대하며 탄력적인……
어설프게 쓰러지는 상태로 후치에게 안기는 바람에 리타는 정면이 아니라 등으로 그에게 안기고 말았다. 그 덕에 등을 붙잡았어야 할 후치의 손은 허리를 끼고 돌아 리타의 탐스러운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삽시간에 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리타는 입술을 부들거리면서 조심스럽게 시선을 어깨 뒤로 돌렸다. 다행히도 후치는 재로 한 분장 덕분에 벌게진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흡사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리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후, 후치.”
그러자 후치가 놓쳤던 정신 줄을 붙잡았다. 그는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잘 풀어나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지만 망설여진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입을 닫고 있으면 이제까지 한 모든 연기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어쩔 수 없다. 정말로 어쩔 수 없다. 그는 숨을 크게 삼키며 이를 악물고는(남들에겐 험악한 표정으로 보였다.) 움켜쥔 리타의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꺄악!”
“오호. 이거 엄청난 가슴이군. 생전 이런 가슴은 처음 만져 봤네.”
그건 그의 진심을 담은 감탄이었다. 후치는 이제껏 많은 가슴을 만져본 역사가 없다. 고작해야 제미니에게 키스하면서 손…… 이건 넘어가자. 어쨌든 그렇다 하더라도 리타의 가슴은 그에게 있어 가슴에 대한 이상향을 만족시키기 충분한 것이었다. 물론 처음은 아니다. 두 번째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는 재범이 되었다. 이후 어떤 욕을 들어 먹을진 모르겠지만 일단 한 번 시작한 연기니 제대로 끝내야 한다.
불안함을 속으로 삼키며 후치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리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어 냄새를 맡는 것처럼 행동했다. 혀로 핥을까 했지만 차마 그건 할 수 없었다.
“으흑!”
리타가 신음을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그 소리는 그녀의 붉은 얼굴과 흐트러진 모습에 어우러져 색기가 흘러넘쳤다. 움켜쥐어진 가슴과 치욕에 물든 표정, 참기 위해 깨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비음에 사람들은 마음이 동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놔, 주세요……”
눈물이 살짝 고인 눈으로 애처롭게 부탁하는 리타의 모습에 후치는 사기라고 속으로 외쳤다. 연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신이거니와 평소에 어쩐지도 아는데, 그조차도 가슴이 아플 정도로 리타의 모습은 효과가 어마어마했다.
그때, 후치와 리타가 벌이는 계획 외의 모습에 샌슨은 당황하면서도,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그 손 놔라! 이 무례한 놈!”
“왜? 내가 이렇게 좋은 걸 놔줘야 하지? 네가 진짜 이 아가씨 서방이라도 되는 거냐?”
“다, 닥쳐랏! 그 더러운 손을 어서 레이디에게서 떼지 못하겠느냐!”
샌슨은 비척거리며 일어나더니 후치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후치는 일어나려는 그에게 발길질했다. 샌슨은 턱이 걷어차인 것처럼 몸을 뒤로 휘며 쓰러졌다.
“크윽!”
“샌슨씨!”
“워. 가만히 있으라고. 네가 날뛰면 아플지도 몰라.”
후치는 바닥에 쓰러져 끙끙대는 샌슨을 날카롭게 쳐다봐준 다음 리타에게 말했다.
“으음. 그럼 이건 어때? 아가씨가 이대로 나랑 같이 가면 저 놈은 이대로 내가 봐주지. 하지만 아가씨가 거절한다면 저 놈은 평생 검을 못 만질지도 몰라.”
“그런 짓을, 아흑! 하고도…… 무사할 줄 아시나요?”
“먼저 검을 뽑아들고 달려든 건 저 놈이라고. 난 맨손으로 몸을 지키려고 했을 뿐이야. 그리고 윗 놈들은 돈 좀 먹이면 으레 이런 건 눈감아 준다고.”
“그, 그런……”
리타는 애처로운 시선을 샌슨에게 보냈다. 하지만 샌슨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몸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후치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럴 순…… 없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그러지 마세요! 당신은 가문을 일으켜야 해요!”
“아니오! 괜찮습니다. 이대로 레이디를 저 무뢰한에 손에 남겨둘 순 없습니다. 그건 제가 목숨을 걸고 막을 겁니다.”
“샌슨씨……”
샌슨은 비척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불타는 것처럼 강렬한 시선을 후치에게 쏘아 보냈다. 리타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샌슨을 감동스레 쳐다보았다.
후치는 신파에 흥이 깨진다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잠깐 가만히 있다가 손에 잡고 있던 리타를 샌슨에게 던지듯 놔주었다. 샌슨이 황급히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후치가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쳇. 이봐, 날 악당처럼 만들지 말라고.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나쁜 놈이 된 것 같잖아? 난 그저 건방진 놈이나 손봐주면서 모험에 같이 갈 동료나 구할 생각이었다고.”
후치는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샌슨과 리타는 서로 껴안은 상태에서 후치를 바라보았다. 후치는 뺏었던 샌슨의 롱소드를 뽑아 그들의 앞에 던지며 말했다.
“뭐, 나도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야. 흐음, 하지만 아깝긴 하군.”
후치의 눈이 리타를 훑었다. 리타는 몸을 움츠렸고 샌슨은 그녀를 감싸듯이 뒤로 숨기며 안았다. 후치는 피식 웃으며 겁에 질려 있는 주점 주인을 보았다.
“방 하나. 술맛 다 떨어졌군. 방으로 가져와. 제일 독한 걸로.”
“이, 이쪽으로……”
주인은 상황이 일단락되었다는 게 다행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서인지 재빨리 그를 안내했다. 하지만 후치는 그를 따라가는 대신에 곁에서 얼어 있는 소녀 종업원을 보았다.
“흠. 그리고 술시중은 저 아이더러 들라고 해. 이대론 못 잘 거 같군.”
“예? 아, 저, 저, 손님, 그것은……”
후치는 눈살을 찌푸리며 10셀짜리 은화 하나를 던져주었다. 순간 주인의 눈이 변했다. 그는 더 고민할 것도 없다는 것처럼 곧장 후치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후치는 속으로 주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소녀를 흘깃 바라보았다. 소녀의 안색은 창백하게 바뀌어 있었다. 무리도 아닐 것이다. 그가 벌인 짓을 보았으니, 어떤 의도인지는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알 수 있다.
후치는 날카로운 미소를 소녀에게 지어주고는 주인을 따라 올라갔다.
*
-------------------------------------------------------
참고로 원작에서 후치가 외웠던 주문은 '제미니는 귀여운 나의 천사. 키스를 하면 울어버리는 나의 악마.'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이 사람들은 여기도 그렇고 나중에 할슈타일 후작가에 쳐들어갈때도 그렇고 연기를 무척 잘하네요.
그냥 연기자로 나서도 잘 먹고 살겁니다.
뭘로 밥빌어먹고 살지 고민하는 타자와는 다르게 말이죠. 흑흑.
그럼, 좋은 밤 되시길.
댓글 : 2 개
user error : Error.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