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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 - ch4. 가장 빨리 죽는 새 (21)2015.04.29 AM 12:16
[이번 편에서 운차이와 후치의 대화는 원작부분을 3인칭으로 바꾸기만 해서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혹시라도 원작은 안 보셨거나 보신지 오래되어 기억나지 않으시는 분들을 위한 것이니, 내용을 아는 분들은 뛰어넘으셔도 됩니다.]
*
이라무스 시에 들어설 때 일었던 말싸움에 비해 이번 말싸움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그땐 일대일이었지만 지금은 이대일이다. 애초에 서로가 서로를 설득시키기 위한 논쟁이 아니라 자신의 말만을 후치에게 외칠 뿐이라서 결론이 날 여지도 별로 없었다. 다만 여자 둘에게 집중포화를 받게 된 운차이를 남성 일동이 측은하게 여길 정도가 되자 자연스럽게 멈추었다.
숲의 밤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오며 금세 암흑을 몰고 온다. 일행은 내일 일찍 출발하기로 하며 잠자리를 빨리 청했다. 그리고 샌슨이 말했던 것처럼 경계할 인원은 남아서 불침번을 서기로 했고, 후치가 가장 먼저 그 역할을 맡았다.
후치는 아직도 멍멍한 귀를 손으로 비비며 나무에 기대었다. 그리고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 넣으며 일행을 둘러보았다. 일행은 저마다의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샌슨은 그 성질을 그대로 드러내듯이 모포를 걷어치우고 몸을 쫙 펼친 채로 누워있었다. 춥지도 않은 걸까? 후치는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의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다른 이들을 보았다. 칼은 완전히 죽은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골아 떨어져 있었고 여성 세 명은 같이 누워서 서로를 껴안고 자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장 키가 큰 리타가 가운데 누워있고 양쪽에서 이루릴과 네리아가 껴안은 모습이다. 거기다 가슴 위에는 카피까지 똬리를 틀고 있는 걸 보니 답답해서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니 나무에 다리가 묶인 채 누워있는 운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잠들어있지 않았다.
“안 자요?”
“잠이 오지 않는다. 너무 이르군.”
“자둬요.”
“걱정 마라. 난 불침번도 세우지 않을 것 아니냐. 포로가 편한 점도 있지.”
후치는 머리를 나무에 기대며 그의 말에 수긍했다. 리타는 환자이니 후치, 샌슨, 칼, 이루릴이 불침번을 서야 한다. 이루릴은 아침에 기주를 해야 하기에 불침번에서 제하였지만 본인이 하겠다는 의사를 강력히 주장해서 받아들여졌다. 네리아는 일단 아직까지는 불침번을 세우기 적당치 않았다.
“후치.”
운차이가 말을 걸었다. 후치는 장작개비를 다시 던져 넣으며 바라보았다.
“날 놔줘.”
“…… 그건 곤란해요.”
“사례하마. 기필코 하겠다. 날 놔줘.”
“안돼요.”
“기어코 바이서스 임펠에 데려가서 교수대에 걸겠다는 거냐?”
“당신은 간첩이 되었을 때,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을 거 아니에요?”
“끝까지 살아남겠다는 각오도 있었지.”
“…… 살아남겠다고요? 당신은 전쟁포로로 취급되긴 어렵겠죠. 간첩활동을 했으니까. 그리고 당신들이 칼라일 영지에 일으킨 해악을 생각해봐요. 그러고도 살아남겠다고요?”
“그건 그 여자의 짓이다. 우린 그 여자의 호위였을 뿐이지. 우리는 그저 그 땅에 아지트를 만들어두고 그 여자를 기다렸을 뿐이다.”
“재판에서는 막지 않았다면 공범이나 다름없다고 할걸요. 그걸 방조죄라고 하던가?”
“그건 옳은 말이지만, 옳은 말이 아니기도 하다. 자신의 손에 닿지 않는 것도 많다.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책임질 수는 없다.”
“……”
“내 듣기에, 넌 전장과 멀리 떨어진 웨스트 그레이드의 주민으로 바이서스와 자이펀의 전쟁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이 살았구나. 하지만 만일 자이펀이 바이서스를 침공해서 너희 고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너희 국왕이 우리 나라에 전쟁을 건 것을 막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널 죽이려 든다면, 넌 뭐라고 하겠냐?”
“장기판의 말 신세인 아랫사람만 죽어난다는 식의 이야기로군요.”
“억울하지 않으냐?”
“전혀.”
“…… 이류를 말해 봐라.”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내가 독수리처럼 날 수 없어서 억울할 수도 있어요. 내가 물고기처럼 물 속에서 숨쉴 수 없어서 억울할 수도 있지요.”
“넌 독수리나 물고기가 아니라 인간이다. 그리고 너의 국왕, 귀족, 장군들도 너와 같은 인간이다. 같은 인간이면서 왜 아래에 있는 사람들만이 대가를 뒤집어써야 되느냐? 나도 인간이고, 날 바이서스로 파견한 내 상관도 같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난 명령 때문에 여기로 왔고 결국 죽게 되었지만, 내 상관은 또 다른 간첩을 육성시키며 지금도 배불리 잘살고 있을 것이다. 나보다 그 놈이 더 나쁜 놈 아니냐?”
“같은 인간? 허, 웃기는군요.”
“뭐?”
“바보나 그런 말을 해요. 같은 인간이면서 어쩌니저쩌니. 헤, 같은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어. 다른 사람들을 모조리 자신과 비슷한 범주에 넣고 이해하는 것은 다시없는 바보죠. 당신처럼 생각하면 귀족이나 왕족을 욕하기에는 쉽겠죠. '제기럴, 같은 인간인데 왜 난 보리빵에 물 한 그릇으로 아침 때우는데 녀석들은 미녀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산해진미를 먹느냐.' 그게 억울하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어버려요. 그게 귀찮아서 하지 않겠다면 입 다물고 앉아 있어요.”
“귀찮아서…… 라고?”
“귀찮은 것 아니에요? 당신 말마따나 같은 인간이면, 당신도 자이펀의 왕처럼 왕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귀찮아서 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그게 귀찮아서 하지 않는 거냐? 불가능하지……”
“얼씨구. 이젠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무시하시는군요. 당신 같은 화법은 추해요. 불평할 때는 같은 인간이고, 당신을 그런 사람들에게 비교해서 꾸짖을 때는 다른 인간인가요? 누구나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비판하면 기분 나쁜 법이죠. 동일성을 가져요. 그렇게 같은 인간이라면, 이 넓은 대지 어느 한 편에 나라를 세워요. 이제 너는 왜 그러지 않겠냐고 묻겠지요?"
“묻고 싶군.”
“난 귀찮아요. 난 헬턴트 영지의 초장이 후보로 남는 게 훨씬 속편해요. 내가 야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간혹 나도 귀족들이 되고 싶기는 해요. 하지만, 난 그렇게 되지 않겠어요. 하지만 누군가가 야심 없고 능력 없는 자의 자기 위안이라고 날 욕하게 하진 않겠어요. '쳇, 넌 야심이 있으면서도 능력이 안 되니까 비굴하게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것 아니냐?' 바보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은 야심이 사람의 본능인 것처럼 생각하죠. 자기가 그 야심 때문에 목숨까지 걸며 허겁지겁 돌아다니니까 다른 사람도 그런 줄 알아요. 그런 작자들은 남을 이해할 줄 몰라요. 뭐, 보통은 그런 자들이 왕이 되고, 영웅이 되고 하겠지만,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지요? 만일 그런 영웅이 무능력하고 비굴하다고 날 비판하겠다면, 난 그 작자에게 초를 만들어보라고 하겠어요. 그리고는 '초 한 자루도 못 만드는 주제에. 시장 한편에 집어던지면 굶어죽기 십상이겠군.' 이라고 말해주지요. 그러면 그 작자는 화내겠지요? 하지만 그런 영웅들은 자기 손으로 먹고 살 재주는 없을 걸요? 다만 무한한 야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부려서 왕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 뿐이죠. 그리고 난 그런 야심이 없는 대신, 내 손재주로 내 호구지책을 마련할 수 있고.”
“……”
“그게 진정한 '같은 인간'이지요. 내가 남이 될 수 없고, 남이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어요. 당신은 당신을 이곳으로 파견한 상관이 될 수 없어요. 당신의 가족, 당신의 추억, 당신의 사랑, 당신의 과거의 소중한 것을 모두 팽개치고 그 상관의 자리에 대신 들어가라면, 그렇게 할 거예요? 그럴 수 있어요? 당신 상관의 아내를 부인이라 부르고, 당신 상관의 자식들을 내 아들아, 혹은 딸아, 이렇게 부를 수 있어요?”
“…… 내 상관은 독신이다.”
후치는 웃어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운차이도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웃음을 지은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풉.”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운차이의 고개가 잽싸게 돌아갔다. 자는 줄 알았던 리타가 몸을 들썩거리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누르는 중이었다.
“다 듣고 있었어요, 리타?”
“푸훗. 아, 응.”
리타는 조심스럽게 카피를 무릎으로 옮기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에게 달라붙어 있는 두 여성이 깨지 않게 조심스러운 몸놀림이었다. 리타는 놀란 시선을 보내는 운차이를 향해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주며 후치에게 말했다.
“수군거리는 소리에 깼는데 제법 재미난 이야기가 나와서 다시 잠들 수가 없었어.”
“인기척이라도 내지 그랬어요.”
후치는 스스로가 한 이야기가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다소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은 깔끔하게 정리된 것이 아니라 거칠어서 남에게 들려줄만하지 않았다.
“애매한 타이밍에 끼어든 것 같네. 이럴 거 같아서 그냥 잠자코 듣기만 하려고 했는데. 이게 다 운차이가 웃겨서 그런 거야.”
“역시 잘못은 운차이에게 있었군요.”
당황에서 회복한 운차이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들에게 어디서 헛소리를 지껄이냐는 의미를 전달했다. 후치는 킥킥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뭐, 어쨌든 내가 해줄 말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난 잘 모르겠지만, 펠레일의 말에 의하면 당신은 중요 인물이래요.”
“중요 인물?”
“뭐라더라……”
후치가 턱을 긁적이자 리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주전파와 주화파.”
“아, 맞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우리나라의 주화파들을 주전파로 바꿀 수 있는 산 증거라더군요. 그러니 당신의 증언은 중요해요. 당신의 한 마디에 전쟁의 판도가 바뀔 수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수도에 도착하면, 당신이 한 짓을 뉘우친다는 식으로 말해 봐요. 그리고 당신 상관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라고 말해 보세요.”
운차이의 차가운 눈이 후치를 향했다. 이 소년은 처음에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가져왔다. 표정과 다르게 약간은 우울한 목소리가 그에게서 나왔다.
“그런다고 내가 살겠나?”
“그럼 끝까지 조국에 대한 충성을 지켜 교수대의 이슬이 되든가.”
“쉽게 말하는군.”
“운차이가 결정하기 쉬우라고 쉽게 말하는 거죠. 결정을 내려요. 살고 싶다면, 전향을 해서 당신의 조국을 마구 꾸짖고 선전책동의 앞잡이가 되어요. 그럴 수 없다면, 표표히 죽어가요. 양자가 다 싫다면, 재주껏 달아나요. 하지만 나에게 도와달라고 하지는 말아요. 알아서 도망쳐요.”
“후훗. 후치에게 한 방 먹었군요. 그래도 이 녀석이 당신을 생각해서 한 말이니까 너무 고깝게 생각하진 마세요.”
리타의 웃음소리에 운차이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다 다시 자리에 드러누웠다. 리타가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책임지지도 못할 꼬맹이에게 할 말은 아니었어. 알아서 도망치지.”
“그게 좋은 태도지요. 잘 해봐요. 난 잘 지킬 테니까.”
그리고 후치는 시선을 리타에게로 돌렸다.
“그런데 리타. 평소에는 운차이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면서, 왜 아까 전에는 굳이 나를 통해서 말한 거예요?”
“아, 그거? 재밌어 보여서.”
“……”
상큼하게 미소 짓는 리타를 후치가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 여자는 왜 이렇게 자신을 놀리기 좋아하는 걸까? 후치는 그가 노려봐도 리타가 미동도 하지 않자 고개를 흔들어 버리고서는 운차이에게 말했다.
“하아…… 여하튼 운차이. 혹시 도망갈 생각이 있다면 샌슨을 꼬드겨 봐요. 샌슨은 의외로 마음씨가 착하거든요. 고향에 있는 처녀가 애타게 기다린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꽤 흔들릴걸요?”
“샌슨이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
후치와 리타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운차이는 얼이 빠졌으면서도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때마침 샌슨이 몸을 일으켰다.
“너무들 하시는군.”
“어, 안 자고 있었어?”
리타가 잘 잤냐며 손을 흔드는 것을 무시하고 샌슨은 후치에게 섬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요놈아, 흉측한 계획을 말하더라? 정말 무서운 계획이라서 모포 속에서 소름이 다 돋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너에 대한 처리는 좀 있다가 하자.”
후치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소변 마려워?”
“땅에 귀를 대고 있자니 뭔가의 발소리가 들리더라.”
샌슨의 말에 후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엉거주춤한 자세인 그를 내버려두고 샌슨은 하드레더를 눈 깜짝할 새에 입더니 롱소드를 들었다.
“그냥 앉아 있어. 다른 사람들 깨우고. 내가 살펴보고 올 테니.”
“응.”
리타가 카피를 옆에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같이 갈까?”
“됐어.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 가봐야 방해다. 너도 후치나 도와서 다른 사람들 깨우고 대기해.”
“알았어.”
“최대한 조용히 해.”
샌슨은 말을 마치고 숲의 나무들 사이로 금방 사라졌다. 후치와 리타는 조심스럽게 자고 있는 일행을 깨웠다. 칼과 네리아는 깊이 잠들었던 것인지 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발소리?”
이루릴은 누은 채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대로 당에 귀를 대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맞군요. 꽤 많은데요?”
청력이 좋은 이루릴이 확인해 주었으니 확실하다. 일행은 긴장하며 각자의 무기를 잡았다. 리타는 나무에 묶인 운차이의 포승줄을 풀어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대비했다.
잠시 후 돌아온 샌슨은 이를 마구 갈아댔다.
“빌어먹을! 그 오크들이다.”
*
‘그 오크들’ 이 가리키는 바를 일행은 바로 알아차렸다. 네리아와 운차이도 조금 전의 대화에서 들었기에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후치는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아이구, 오크와 복수의 옹호자 화렌차여! 정말 엄청난 복수심을 녀석들에게 주셨군요!”
칼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얼굴을 손으로 비비며 샌슨에게 물었다.
“어떤가, 덮쳐올 모양인가?”
“가까이 와 있습니다. 약 오륙백 큐빗쯤 떨어져 있는데, 지금 포위망을 만들어보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여러 무리로 나뉘어 움직이던데요. 어두워서 수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사오십 마리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또 달아나야 하는가?”
“밤중에 산 속을 달리는 것은 위험할 텐데요.”
“허어, 낭패로군.”
샌슨은 잠깐 생각하더니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말했다.
“결판을 지어야겠습니다. 다 죽여 버리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뒷말은 이루릴을 향한 것이었다. 그녀가 큰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계획이 있나요?”
“글쎄요…… 제 판단이지만 그들로서도 이젠 한계 상황일 겁니다. 식료품 등의 보급이 얼마나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갈색 산맥에서 우릴 놓치면 더 이상 따라오지는 못하겠지요. 그리고 갈색 산맥을 넘으면 곧 바이서스 임펠이 나타나니까요. 따라서 이번이 그들로서는 마지막 기회일 겁니다. 그러니 이번만 막으면 됩니다.”
“어떻게요?”
“그들은 지금 불빛을 보고 오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오히려 지금은 방심하고 있겠죠. 거꾸로 덮치는 겁니다. 인원은 많이 필요 없습니다. 의외의 방향에서 기습함으로써 놀라게 하는 것이 목적이니까요. 저와 후치가 가겠습니다.”
“둘은 위험해.”
리타가 끼어들었다.
“아무리 야밤의 기습이라지만 사오십 마리 정도 되는 오크를 단 두 명이서 상대하긴 위험부담이 커. 난 아직 몸이 완전하지 않아서 도움보다는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으니 여기서 대기하는 게 효율적이겠지. 운차이를 감시할 사람도 필요 하고. 하지만 혼자서는 무리가 있을 테니 칼이나 이루릴 중에 한 명 만 남겨두고, 다른 인원은 같이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이루릴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차가운 표정으로 시선을 외면했다.
“…… 믿으면 되는데.”
“우리는 운차이가 도망가리라는 것을 믿는 거죠. 운차이는 한 번도 도망가지 않겠다고 말한 적 없으니까요.”
그러는 사이 네리아는 발딱 일어서며 트라이던트를 등에 매었다.
“가자고. 시간 없어.”
“야, 네리아.”
그러나 네리아는 곧장 숲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샌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젠장. 멋대로군. 별 수 없지. 칼, 운차이를 부탁합니다. 리타는 혹시라도 계획이 틀어지면 바로 도망갈 수 있게 준비하고 있어. 후치랑 이루릴은 같이 움직이지요.”
“알았네. 조심하게.”
“네. 가자, 후치.”
샌슨은 후치와 이루릴을 데리고 숲 속으로 사라졌다.
모닥불 가에 남게 된 리타는 카피를 아스화리탈 위의 주머니에 옮기며 말을 모았다. 칼도 운차이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집을 챙겼다. 운차이는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주시했지만 틈을 노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나무에 기대 서 있을 뿐이었다.
칼과 리타는 다른 일행이 돌아오면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다. 애초부터 짐이 많지 않았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모닥불 가에 모여 앉았다. 운차이의 발에 연결된 포승줄은 현재 칼과 이어져 있었다. 리타가 아무 생각 없이 자기 발에 묶으려고 하자 운차이가 기겁을 하며 반대한 탓이다. 그런 관계로 칼이 모닥불에 앉자 운차이는 그를 따라 앉을 수밖에 없었다.
리타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닥불에 붉게 비치는 차가운 얼굴은 묘하게 어울렸다.
“무슨 생각하나요, 운차이?”
“……”
운차이는 못 들은 것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리타는 실수를 깨닫고 말을 덧붙였다.
“라고 전해주세요, 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스마인타그 양께서 묻는군요.”
후치와 달리 성실한 전달이었다. 운차이는 그제 서야 고개를 돌리며 칼과 리타를 바라보았다.
“당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전해 주십시오.”
“왕이 되고 싶은 건가요?”
갑자기 찔러 들어오는 날카로운 질문에 운차이는 입을 다물었다. 리타는 칼을 거치지 않아 그가 대답하지 않는가 싶어서 또 덧붙여서 말했다.
“부탁드려요, 칼.”
여전히 답답한 사람이다. 후치를 놀리는 재미에 그를 통해서 말을 했었지만, 칼에게는 그런 수고를 끼치기에 조금 미안하다. 이웃집 아저씨보단 동생이 편한 법이니까. 칼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말을 전달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눈 한켠에는 흥미로운 화제에 대한 호기심이 숨겨져 있었다.
“왕이 되고 싶은지 물었소이다.”
“들었습니다. 후…… 무슨 의도로 묻는 것인지 여쭤 주겠소? 아니, 직접 묻지. 무슨 의도로 묻는 거지?”
신차이와 Atrman이니 애초부터 다른 사람을 거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도의적으로 처음 보는 여자와 직접 말을 섞는다는 게 어색해서 피했을 뿐이다. 운차이의 날카로운 눈빛에도 리타는 편안하게 대답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속인다거나 기만하려고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당신과 후치가 나누던 이야기를 듣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 왕이 될 생각은 없다.”
“그렇습니까? 대화의 흐림이 왠지 왕으로 귀결되는 것 같았습니다만 아니었나보군요.”
“어림없는 소리였지.”
“네. 그렇지요.”
후치의 말을 떠올리며 운차이와 리타는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후치의 말을 비웃는 의미는 둘 모두에게 담겨 있지 않았다.
“같은 인간…… 애초에 나는 단수가 아닌 인간이라는 걸 무시하더군요.”
“나는 네 나라의 마법사가 한 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 꼬맹이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알 수 있겠더군. 꽤 생각이 깊은 아이였어. 당신 작품이오?”
운차이의 시선을 받은 칼은 리타가 항상 말하던 속에 뱀을 품은 표정을 보였다.
“저는 잔다고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그 소년이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이 가장 큰 요인이지 않겠소? 나는 그저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계기 정도만을 제공해 주는 마을 아저씨에 지나지 않았소이다.”
“겸손이로군. 당신이 그 정도가 아니라는 건 내가 잘 압니다. 그때 발차기는 제법 아팠지.”
“그랬소?”
칼은 사과를 덧붙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음험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운차이도 사과를 받을 생각은 없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후치는 간과하기 쉬운 것을 일러주었지. 보통 사람들은 전혀 생각하기 힘든 문제야.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이기에 그런 것이었는데.”
“같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게 같은 점이겠죠. 하지만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너는 내가 될 수 없다. 우스갯소리지만 그만큼 명확하죠.”
“흐음, 두 분이 나누시는 이야길 들어보니 네드발 군과 운차이 씨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궁금해지는군요.”
칼이 손을 모으며 관심을 나타냈다. 운차이는 리타와 칼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칼에게 조금 전에 있었던 대화를 말해주었다. 그의 사견을 첨가하지 않은 후치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칼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자신의 지식욕을 채웠다는 만족감이 드러난 미소를 머금었다.
“네드발 군이 그런 말을 했었군요. 같은 인간이라…… 퍽 재미난 주제입니다.”
“오크들이 쫓아오는 마당에 나누기 좋은 주제도 아니오.”
“후후. 그렇다고는 해도 딱히 나누지 못할 주제도 아니지요. 운차이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처벌 받을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단 낫지 않나요?”
“내가 도망가는 것을 어떤 식으로 눈감아 줄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더 흥미로울 것 같군.”
“반대 의견이 다수일 테니 기각하죠.”
운차이는 아쉽다는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리타는 눈을 빛내고 있는 칼에게 물었다.
“칼은 후치의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죠?”
“네드발 군이 새집만 뒤지고 다닌 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하. 제미니 꽁무니 쫓아다니기 바빠서 새집을 뒤질 시간조차 없었죠.”
후치가 만약 이 자리에 있었다면 두 사람을 향해 원망이 듬뿍 담긴 시선을 보내며 억울하다고 소리쳤겠지만, 그에게 죄가 있다면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이었다.
칼은 바닥에 놓여진 장작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모닥불에 탁 던져 넣으며 그곳을 주시했다. 정면으로 붉은 불빛을 맞이하는 중년의 얼굴에 깊은 세월의 그림자를 두 신의 딸이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얼굴이 되어 낮은 목소리를 냈다.
“스마인타그 양이나 운차이 씨도 생각하셨을 겁니다. 사람은 모두 다르고 어느 상황에서나 동일할 수는 없어요. 인간이라는 조건은 분명히 같지만 타고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타고나는 조건까지 같아지길 바랍니다. 차이가 있다면 차별이 생기고 차별이 있다면 불만이 생겨나는 법입니다.”
“통속적인 이야기는 됐습니다. 당신의 말처럼 나는 그것을 생각하고 있소.”
“실례했습니다. 말하면서 정리하는 버릇이 들었나봅니다. 네드발 군의 이야기는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핀트가 어긋나 있지요.”
“무엇이 어긋났을까요?”
“운차이 씨가 말했던 같은 사람과 네드발 군이 말하는 같은 사람은 다릅니다. 먼저 말하셨던 인간이라는 의미와 타인과 구별하는 자신이라는 차이지요. 차이와 차별을 네드발 군은 당연한 것으로 인지하고자 합니다. 쉽지 않은 사고방식이지요. 과연 부당한 처지에 놓였는데 억울하지 않을까요? 혹여 그는 그럴 수 있을지언정,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절벽에서 추락하는 상황이라면 독수리처럼 날지 못해 억울할 테고, 물에 빠졌다면 물고기처럼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어 억울해 집니다. 그건 사람이 가지는 당연한 감정입니다.”
“칼, 운차이가 통속적인 이야기는 됐다고 했잖아요.”
“으음, 말이 길어졌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통속적인 것들에서 귀결되기에 그랬습니다.”
“이해해드리죠.”
“감사합니다. 이야기의 결론을 짓자면, 그런 당연한 것을 단순하게 같은 인간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버리면 꽤 재밌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왕이 될 수도 있고, 누구나 시골의 초장이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같다면, 그렇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네드발 군은 흡사 ‘네가 왕이라면, 내가 왕이 못 될 거는 뭐냐?’ 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짝짝
리타가 박수를 쳤다.
“괜찮은 해석이군요. 저도 후치의 말은 운차이더러 왕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 말이었습니다. 어차피 다른 사람인데, 그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같음을 증명해 보이라는 말로도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자, 그러면 왜 제가 당신에게 왕이 될 건지 물어보았는지를 아시겠습니까, 운차이?”
운차이는 묵묵히 모닥불만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여자와 대화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리타는 가만히 그가 반응을 보이기를 기다렸다. 운차이는 모닥불에서 무엇을 투영해 보는 걸까? 그의 깊은 눈은 불꽃을 머금을 것처럼 타올랐다. 몰락한 명가의 정자는 과연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까?
운차이는 시간이 영원하기라도 할 것처럼 같은 자세로 계속 있었다. 수많은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버리는 것, 버려야 할 것, 바뀌는 것, 바뀌어야 할 것, 지키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맹세했던 것.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요?”
칼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리타와 운차이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특별한 건 아닙니다. 마침 운차이씨가 그런 이야기를 나눈 김에 여쭈어 보려는 것이죠. 운차이씨는 왕이 과연 같은 인간이라 생각하십니까?”
“왕의 자질이 따로 있는지 묻는 것이오?”
“어떻게 받아들이시든 생각하시는 그대로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운차이는 턱을 쓰다듬었다.
“…… 자이펀에는 노예가 있소. 그리고 가문도 있지. 타고나는 것이오.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지. 왕족도 마찬가지, 자이펀에서는 서로 간에 차이가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소.”
“운차이 씨는 어떻습니까?”
“…… 꽤 음험한 사람이로군.”
“가끔 듣는 소리입니다.”
덤덤하게 웃는 칼을 보며 운차이는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때 잠자코 있던 리타가 입을 열었다.
“왕은 받아들일 수 있어야합니다.”
“스마인타그 양?”
리타의 검은 눈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깊숙이 가라앉았다. 모닥불을 바라보던 타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눈은 불을 향해 있음에도 불을 보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천천히 말했다.
“왕이 될 자질은 핏줄이 아닙니다. 그것은 왕을 이루는 명분에 불과할 뿐입니다. 왕이 왕다운 왕이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자질은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무엇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지?”
얼굴이 타올랐다. 검은 눈동자만큼이나 온통 검은색 일색의 남자는 어렸던 그녀를 안고 속삭였었다. 왕이란.
“다른 사람의 가장 안 좋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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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타올랐지만 댓글이 없어서 삐친 관계로 글에 손을 안대고 놀다가 왔습니다.
라고는 해도 화요일은 또 15분 가량 지나가버렸군요. 좀 빨리 쓸걸.
한 10장 정도로 한번에 담아내려고 했는데 귀찮아서 끊었습니다.
후치가 귀찮다고 말하니까 저도 귀찮아지네요. 후치탓입니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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