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 - ch4. 가장 빨리 죽는 새 (22)2015.04.30 PM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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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안 좋은 것이라 하면?”



리타는 바로 답하지 않고 애꿎은 모닥불만 오매불망 바라보았다. 칼의 애타는 시선이 그녀를 향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모순은 그들이 좋아하는 것. 리타는 손을 힘없이 내리며 고개를 들어 별빛이 빛나는 밤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결코 눈부시지 않은 빛이 그녀를 맞이했다.



“잠시 옛 이야기를 하죠.”



아직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는지 숲은 조용하기만 하다. 살펴보러 갔던 샌슨이 금방 돌아왔으니 먼 거리는 아닐 것이다. 때를 보는 것일까? 그들은 아마도 무사하겠지. 막연하게 드는 생각이지만 그러함에도 확신할 수 있다.



“아버지가 어렸던 저에게 해준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께서는 키탈저 사냥꾼들의 말을 들려주셨습니다.”



“키탈저 사냥꾼?”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이야기를 안 해주셨을 수도 있지요. 기억나는 건, 그들의 옛 말이 네 마리의 형제 새에 관한 것입니다.”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이야기를 해주던 아버지는 퍽 재미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흥미로우면서도 지루해 보이는, 일견 모순적인 두 감정을 동시에 드러내었다. 따스하게 몸을 감싸 안은 체온과 흘러들어오는 따스한 목소리에는 표정으로도 나타나지 않은 감정이 스며있었다. 잔잔하게 떨리는 팔과 먼 곳을 향해 손을 뻗는 것 같았던 목소리로 속삭였다.



“물을 마시는 새, 독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 눈물을 마시는 새. 이렇게 모두 네 마리의 식성이 다른 새가 있었습니다. 이 형제 새들 중에 가장 빨리 죽는 건 어느 새일 것 같습니까?”



운차이와 칼은 뜬금없이 나온 질문에 차갑게 반응하지 않았다. 운차이는 턱을 괴며 평소와 같은 날카로운 눈으로 생각했다. 칼은 곧게 앉은 자세 그대로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독을 마시는 새가 가장 빨리 죽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신가요? 운차이는 어떻죠?”



검과 같이 싸늘한 예기가 스쳐지나간 후, 대답이 나왔다.



“옛 말들이 떠오르는군.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그건 독이나 피, 눈물도 모두 마찬가지. 역행이라는 말이 있다. 흐름에 반대되는 것을 이르는 말이지. 아래에서 위로 날아오르는 새라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역행한다. 그건 합치면 완벽해지기도 하나 파멸해 버릴 수도 있는 것.”



“끝은 같다는 건가요?”



“아니. 완벽에 대한 이야기였다. 서로 상반되는 것들이 부딪쳐 이루는 완벽은 우리나라의 옛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떠올랐을 뿐이다.”



“그걸로 끝은 아닌 것 같은데요.”



운차이는 손을 꿈틀거렸다. 그는 입가를 손으로 훑으며 담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포로인 주제에 사치스런 생각이다.



“물은 탄생이다. 독은 평온이며, 눈물은 죽음이고 피는 생명이다. 그런 말이 있지.”



“들어본 것 같습니다.”



“자이펀에서도 잘 모르는 말인데, 신차이가 이야기해 줬나보군.”



리타는 고개를 가로저었으나 운차이는 상관없다는 듯 넘어갔다. 칼은 낮은 소리를 내더니 운차이에게 물었다.



“어째서 그런 것입니까? 물과 피는 알겠지만 독과 눈물은 이해하기 힘들군요.”



“죽음을 다른 말로 뭐라고 하지요?”



“사망, 종언, 끝, …… 안식.”



운차이는 어설프게 노는 손을 양 팔 사이에 집어넣었다. 칼은 머리를 조금 흔들며 다시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눈물은 왜 죽음입니까?”



누군가 죽으면 눈물이 난다는 소리를 지껄일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그건 애초부터 인과가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눈물이 되어야 한다. 운차이는 눈에 타오르는 불꽃을 새기며 말했다.



“그것에 관해서는 자이펀에서도 여러 가지로 설이 나뉩니다. 옛 말이기에 그 뜻을 명확히 짐작하기 어려운 모양이지.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믿는 설은 눈물이 몸에서 물을 흘려보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탄생이기에?”



“그런 것 같소. 남자들은 어릴 때부터 눈물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소릴 듣고 자란다오. 남자의 눈물은 남에게 보일게 아니란 말이지.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사람은 피로 살기에 눈물의 양은 정해져 있어서 너무 많이 흘려버리면 말라 비틀어져 죽는다니. 후후후.”



“그런 말이 있었군요. 운차이씨도 그 말을 믿습니까?”



“샌슨 정도의 정신연령을 가졌을 때는 믿었던 것 같소.”



운차이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칼도 옅은 미소로 받으며 샌슨을 변호하려고 했으나 리타가 더 빠르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 운차이는 어떤 새가 가장 빨리 죽을 거라 생각한다는 거지요?”



“성질 급한 여자군.”



“난생 처음 듣는 말씀을 해주시는군요.”



“이제까지 만난 사람들이 모두 거짓말쟁이였거나 당신을 아끼기에 진실을 말해주지 않은 거겠지.”



“그렇다고 치고. 그래서?”



운차이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후치가 떠오르는 화법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말해준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먼저 죽겠지.”



“이유는?”



“사람은 강하지 못하니까.”



고개를 돌리고 있음에도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이 느껴진다. 따끔한 뒤통수를 긁으며 운차이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로 향하는 두 사람의 눈빛은 어느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만큼 확연히 드러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짊어진다는 건 범부가 할 짓이 못되지. 마시는 피는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닐 테고. 생명을 받아들인다는 건 죽음까지 책임진다는 의미다. 버티지 못해 무너져 내려 죽어버리겠지.”



“하지만 죽음을 넘어서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지. 그렇게 따지면 전쟁은 자살행위야.”



“전쟁은 어떤 시선에서 보자면 자살행위가 맞습니다.”



“칼,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오.”



칼은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그의 표정은 사뭇 열띠었다. 운차이는 물론 리타조차도 그런 칼의 모습에 고개를 슬며시 돌렸다.



“피를 마신다는 건 받아들인다는 의미지, 그냥 죽여 버린다는 의미는 아니라오. 모든 살인자가 그들의 업을 짊어진다고 생각하시오? 정말로 그렇다면 그 사람은 살인자라는 소릴 듣지도 않았겠지. 살인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훨씬 큽니다. 그 사람을 이루던 그 모든 것들, 후치의 말을 빌리자면 내 상관의 아내, 딸, 지인들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건…… 불가능합니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죽어버리겠지.”



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뭔가 그의 마음속에서 걸리는 모양이다. 운차이는 운차이대로 결론을 내려버린 모습이다. 리타는 단호한 자세를 견지한 운차이에게 밝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틀렸어요.”



“…… 정답이 궁금하군.”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않으면 갈아 마셔 버리겠다는 시선이 리타에게 향했다. 당연하게도 리타는 그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가장 빨리 죽는 새는……”



뜸을 들이듯 그녀는 말을 길게 끌었다. 운차이와 칼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녀의 입으로 향한다. 그러나 정답은 전혀 의외의 곳에서 들려왔다.



“눈물을 마시는 새다 해요.”



“카피?”



아스화리탈의 안장 위에 놓인 주머니에서는 새하얗고 길쭉한 목이 쭉 뻗어 나와 있었다. 카피는 주머니에서 기어 나오며 날개를 퍼덕여 리타의 곁으로 날아왔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카피는 느긋하게 리타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자리했다. 그녀는 조그만 입을 움직여 마치 구도자들처럼 그녀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었다.



“눈물은 가장 더럽고 해로운 것이기에 몸 안에 두지 않고 흘려보내는 것이다 해요. 그런 걸 마시면 당연히 빨리 죽을 수밖에 없다 에요.”



“눈물이 해로운 것이라고?”



운차이의 대화 기준은 웜링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모양이다. 카피의 인간 모습을 아는 운차이지만, 지금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카피는 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피는 중요한 것이다 해요. 몹시 소중하고 귀중한 것이기 때문에 흘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해요. 하지만 눈물은 어떻게든 흘려서 내보내려는 것이다 해요.”



“피는 흘리면 죽지만, 눈물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단순히 생리적인 문제에서 일어나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에요. 여기서 눈물은 타인이 내놓으려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요.”



운차이의 불만스런 얼굴을 카피가 의기양양하게 보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휙 들렸다.



“카피, 그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 있지요?”



리타가 카피를 들어 정면으로 마주했다. 리타의 눈은 번들거리고 있어 카피가 흠칫하며 놀랄 정도였다. 집착? 혹은 광기라고 해야 될 정도의 감정이 번뜩인다. 카피의 몸을 꽉 붙잡은 리타의 손이 살짝 떨려오며 그녀의 입으로 억누른 음성이 삐져나왔다.



“리, 리타?”



“말해 봐요. 어디서 그 이야기를 들은 건가요?”



평소에 보던 리타가 과연 지금 카피를 잡고 있는 인물과 동일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카피는 놀라서 얼떨떨하게 리타를 보았다. 그녀에게서는 생소하면서도 어딘가 친숙한 기운이 슬그머니 삐져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기운에 소름이 돋는 모양이다.



갑자기 돌변한 리타의 모습에 칼이 당황하며 그녀를 말렸다.



“진정하시죠, 스마인타그 양. 왜 그러십니까?”



“가만히 있어요.”



“스마인타그 양?”



리타는 칼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눈은 오직 카피에게로만 향해 있었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이 기묘하게 그녀를 압박해 들어갔다. 사람이 과연 이런 기운을 뿜을 수 있을까 의심될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 사방으로 뻗쳐 나온다.



“카피. 어서 말해요.”



웜링답게 그녀는 리타의 기세에 겁먹지는 않았다. 하지만 너무 이질적으로 변한 친구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평소에 그녀를 보던 따스함이 조금도 없는 싸늘하고 광기어린 눈이 낯설다. 이런 눈은 본 적이 없다. 아니, 한 번 보았다. 그런데 어디서 보았지?



“모, 모른다 해요.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에요.”



“……”



“정말이다 해요. 누가 말해줬는지도 모른다 에요. 기억나는 건 내용 밖에 없다 에요.”



카피는 기억의 상당부분을 잃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다. 차분한 빛을 띠고 있는 카피의 눈이 그것을 증명한다. 리타는 카피를 잡았던 손에 힘을 풀었다.



“미안해요.”



“괜찮다 해요. 그런데 왜 그랬다 에요?”



리타는 카피를 조심스럽게 내려 그녀의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사죄하듯 섬세한 손놀림으로 그녀를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였어요. 참 이상하죠? 아버지도 남에게 들은 이야기일 수 있을 텐데, 전 왜 카피랑 아버지를 연관시킨 걸까요? 요즘 너무 아버지에게 몰입해 있었나 봐요.”



“아버지라면 나이젤 씨 말씀입니까?”



“네. 맞아요.”



칼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실례지만 스마인타그양은 아버님의 기억을 잃으셨던 게……”



“칼라일에서 정신을 잃은 이후로 단편적으로 옛날 기억이 떠올라요. 처음엔 꿈이거나 환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대답하는 리타의 안색은 별로 좋지 않았다. 사실은 처음부터 꿈이 아닐 거라고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아버지가 마치 그녀를 일깨워주는 것처럼 말하는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볼 때마다 그리움보다는 다른 감정이 많이 느껴지는 게 싫었다.



리타는 다른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괜히 아버지 때문에 좋은 분위기를 망쳤네요.”



“별로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지.”



운차이에게로 카피가 째릿하며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지만 운차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리타는 그런 카피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전투를 시작한 모양입니다. 언제든지 도망칠 준비를 해둬야겠군요.”



“아까 전에 한 것들은 다 뭐지?”



“…… 준비죠.”



리타는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운차이는 차갑게 웃으면서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보며 말을 하지 않는 건 실례라지만, 여자라면 그에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다.



“그보다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군.”



“제 아버지가 궁금하신가요? 설마 형의 Atrman에게 연심을 가져 장인어른에 대한 정보를 듣고 싶으신 거라면……”



“…… 끔찍한 농담은 하나도 웃기지 않다. 그만둬.”



운차이는 일그러트린 얼굴로 피식 웃는 리타를 힐끗 보았다.



“왕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 어째서 왕은 다른 사람의 해로운 것, 눈물을 받아들여야 하지?”



“그게 왕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좋은 왕이 되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게 많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포용력이라고 생각해요.”



“눈물을 마시는 새가 포용력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럴까요? 국가라는 의미로 확대해서 보자면 그럴듯한 해석이 된다고 보는데요.”



“국가를 위해 희생한다? 백성의 눈물을 받아들여서?”



어이없어 하는 운차이를 바라보는 리타의 눈은 의미심장한 빛을 내었다.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되물었다.



“왕은 국가 위에 존재한다. 왕이 곧 국가다. 왕은 국가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다. 어느 게 옳다고 보나요?”



“우스운 소리로군. 왕은 통치자다. 왕이 있어야 국가가 성립할 수 있다.”



“자이펀은 가문 중심 체제이지 않나요?”



“그 가문을 규합하고 전체를 이끄는 사람이 왕이지. 그런 왕이 존재하기에 국가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강력한 규율과 아우르는 덕을 보임으로서 모든 것 위에 서야만 제대로 된 왕이라고 할 수 있지.”



“왕이 스스로 눈물을 마실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건가요?”



“일찍 죽는 나약한 왕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지.”



“이름은 성군보다도 폭군이 더 길게 남기는 법입니다.”



“무능한 왕은 어떤 의미로 폭군보다 더 무섭다고 하지 않나?



리타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가장 빨리 죽지만,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게 웁니다.”



“…… 해로움을 감당할 필요는 없다. 수명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로군. 위태로움인가? 감내하는 것은 그만큼 어렵고, 그만큼 위험하지. 피를 마시는 새보다 더하군.”



“받아들이는 것은 중요합니다.”



“받아들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끄는 것이지.”



단호한 태도였다. 그러자 칼이 퍽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운차이에게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운차이, 바이서스에서 당신은 자이펀과 다른 무엇을 느꼈습니까?”



운차이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왕이 멍청하더군.”



꽤 호전적인 말투였지만 칼에게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것은 바이서스 여성이라던 리타도 마찬가지였다. 칼은 여전히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우리 국왕에 대한 무례는 둘째치더라도, 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물어보고 싶군요.”



“왕이 강력하지 못해서 밑의 귀족들이 따로 놉니다. 그건 전쟁터에서도 마찬가지였소. 지휘관이 제대로 군대를 규합하지 못해. 각기 뛰어난 이들은 있어도 하나로 이끄는 놈은 없습니다. 드래곤을 가진 주제에 인간들만으로 구성된 군대와 장기전을 벌인다는 게 명확한 증거지 않습니까?”



“흐음. 그건 왕의 문제라고 하기 보다는 국가의 문제가 아닙니까?”



“방금 저 여자에게도 말하는 걸 들었지 않습니까? 국가의 문제는 왕의 문제입니다. 국가가 잘못되어 있다면 왕이 잘못 통치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꽤 위험한 생각이로군요. 국가 이상의 왕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역이지요. 국민이 존재하기에 국가가 존재하고, 그러하기에 왕이 존재합니다.”



칼의 어조는 잔잔했지만 의지는 확고했다. 운차이의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하는 칼의 눈매는 더없이 진지했다. 한 발짝의 물러섬도 없이 둘은 서로의 생각을 표현했다. 리타는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며 칼을 보았다.



“운차이의 생각은 알겠어요. 그러면 칼. 왕이 같은 인간이냐고 물었던 것은 칼이었지요. 그런 칼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들은 게 있다면 내놓은 것도 있어야하지 않겠어요?”



“하하, 그렇군요. 왕이라……”



칼은 슬며시 웃음 지으며 이야기할 자세를 취했다. 방금전까지 으르렁대던 운차이는 금세 청자의 모습으로 돌아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리타도 과연 칼이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칼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셀레나가 홀연히 떠올라 루미너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별빛이 셀레나를 따르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칼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왕은 등을 보여주는 자입니다.”



“등짝을 보자는 건가요?”



칼 대신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준 건 운차이였다. 리타는 실없는 소리를 했음에도 당당한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척 했다. 칼은 달을 닮아 멋지게 휘어지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계속 말했다.



“물론 왕은 국민을 굽어 살필 줄 알아야 하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배곯지 않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정치적인 능력도 갖추어야 하고 시끄럽지 않은 외교를 이끌어 낼 수도 있어야 하지요. 평화를 지킬 무력을 갖추고 있으면 더더욱 좋고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그 등을 보고 뒤따를 수 있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그건 내가 한 말과 비슷한 게 아닙니까?”



“다릅니다. 운차이 씨가 말한 왕은 지도력이 뛰어나고 통치를 잘하는 왕입니다. 하지만 제 왕은 그런 것들에 앞서 자연스럽게 남들을 따르도록 하는 왕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국민에게 생기는 어떠한 일에도 발 벗고 나서서 이끄는 왕입니다. 통치하는 게 아니라 따르도록 만드는 왕이지요.”



이번에는 리타가 질문했다.



“그런 식이면 제가 말한 왕과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요?”



“그것과도 다릅니다. 희생하는 왕은 분명 성군으로 추앙받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국가의 의미에서 진정한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남의 눈물을 기꺼이 먹는 자야말로 사람을 이끄는 재목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칼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에는 지나간 세월의 실망감과 청운의 꿈을 품었던 젊은 시절이 담겼다. 리타와 운차이는 자신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무게가 느껴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닫고 그가 말하기만을 잠자코 기다렸다.



“등을 보여준다는 의미는 앞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보여줄 수 없지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는 겁니다. 국민들이 왕을 볼 수 있는 건 그의 뒷모습뿐입니다. 뒷모습은 어떤 말도 하지 않습니다. 거짓말도 없고 기만도 없지요. 그저 보여줄 뿐이기 때문에 국민들은 그 뒷모습만을 따르고 왕을 판단합니다.”



“드러나지 않는 앞모습은 국민을 위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저는 국민이 근간이 되어 국가를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를 위한 일은 결국 국민을 위한 일과 일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왕은 앞으로 국가를 위합니다. 하지만 뒤로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을 해야 하지요. 모든 왕은 선왕으로 기억되길 원하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법입니다. 선하기만 해서는 국가를 제대로 이끌 수 없습니다. 더럽고 하기 싫은 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게 왕이라는 위치지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손을 더럽힌다?”



“군주론이다 해요.”



카피는 이번에도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화에 참여했다. 그녀에게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던 주제로 나누는 이야기임에도 카피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리타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군주론이 뭔가요?”



“그건 마키아…… 어? 음…… 이것도 기억이 안 난다 해요. 누가 했다고 했는데…… 어쨌건 군주의 올바른 모습을 적은 글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에요.”



“그런 것도 있었군요. 아는 게 많네요.”



“헤헤. 경제랑 정치는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해요.”



카피는 리타가 쓰다듬어 주자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한동안 그녀들에게 시선을 두고 있던 칼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결국 왕이란 선의로 남을 이끌며 보이지 않는 악의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악의라고 말하니 조금 무섭긴 하군요. 하지만 그는 잔인할 필요가 있으며, 국가를 위협하는 대상에 대해서 냉정함을 견지해야 합니다.”



“그것은 기만이 아닐까요?”



“완전히 아니라고 부정할 순 없습니다. 기만의 의미는 속이는 것이니까요. 감추는 것을 속이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뒷모습을 기만 없이 보여준다 할지라도 보이지 않는 앞을 일컬어 기만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지요.”



“칼 치고는 투정부리는 듯한 말이네요.”



“후후. 사람은 다양한 법이며, 저는 다른 사람들의 해석까지 조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제가 말하는 왕은 그런 것까지도 감수해야 하니까요. 어떤 의미로 눈물과 피를 같이 마셔야 하는 새입니다.”



“그건 좀 불쌍하네요.”



리타와 칼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카피도 덩달아 갸르릉 거리며 웃었다. 오크 무리가 지척에 다다른 마당에 이토록 화기애애하게 토론을 하는 이들이 퍽 이상했지만, 그런 이상함을 지적해줄 정도로 정상적인 정신을 가진 이는 이곳에 없었다. 운차이는 계속 차갑고 냉정했지만 자신의 생각에만 빠져있었다. 그는 모닥불을 눈으로 끄기라도 할 것처럼 노려보았다.



칼은 곧게 폈던 등에 힘을 빼며 편하게 나무에 기대었다. 그는 다시 여유가 돌아온 표정으로 느긋하게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리타는 카피를 쓰다듬으며 그와 비슷한 자세를 취했다.



등을 보이는 왕이란 어떤 왕일까?



모닥불 타는 소리만이 숲을 채우고 있을 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타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롱소드 자루를 손으로 잡았다. 칼과 운차이도 덩달아 긴장하며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수풀을 헤치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곳에 일행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이런 늑대가 발광할 야밤…… 아니, 이런 숲 속에서 불을 피워놓고 있으니 멀리서도 훤히 보이는군요. 일행이 예쁘다고…… 야! 흠흠, 아프다고 했습니까?”



“…… 예.”



퍽 소란스러운 대화에는 처음 듣는 목소리가 하나 끼어 있었다. 수폴 사이로 나타난 이는 오거형 전사 하나와 활발해 보이는 소년 하나, 빨간 머리의 긴 트라이던트를 맨 도적과 밤에 녹아든 머릿결을 가진 엘프, 그리고 전신을 실용적인 무장으로 덕지덕지 도배한 노련해 보이는 검사 한 명이었다.



검사가 검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는 걸 보며 운차이와 칼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다른 한 명은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막 자란 수염과 멋대로 내버려둔 머리, 그러함에도 몸에서 묻어나는 기품은 언제 봐도 특이하다. 때마침 검사와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이네요, 길시언.”



길시언의 눈이 커졌다. 그는 살짝 미소 짓고 있는 리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 저, 아가씨는?”



전혀 모른다는 반응에 리타는 살짝 눈썹을 꿈틀거렸다. 미세한 차이는 후치와 샌슨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얼굴로 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리타입니다. 길시언에게는 페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겠지요?”



“페이?”



그제 서야 아는 사람을 본다는 반응이 나왔다. 그런데 그 반응은 조금 이상했다. 대게 그런 반응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나타나곤 한다. 길시언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들어보였다.



“페이는 대머리…… 죄송합니다. 남자였지 않습니까? 아, 설마?”



길시언이 쉽게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리타는 과거 길시언과 만났을 때 남장을 한 상태였으니까. 놀라는 길시언에게 리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그, 그렇군요. 음, 하긴 사람이 다양한 만큼 다양한 취미도 있는 법이니까…… 그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소.”



“…… 예?”



리타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길시언은 다 이해한다는 듯이 믿음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는 남자였던 과거의 친구를 보면서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때부터 섹시하다고…… 야! 제발 좀! 크흠. 여성스럽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본격적으로 여장을 하실 줄이야. 퍽 잘 어울립니다. 누가 봐도 여자라고 믿겠군요. 키는 좀 크지만 어색하지 않습니다.”



“……”



“하하하. 괜찮습니다. 전 개인의 취미를 문제 삼진 않습니다. 제가 여장을 좋아하…… 크흠! 저에게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진짜 여자 같군요. 가슴이 큰 게 제 취향……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음? 저, 페이?”



“이 악물어요.”



리타는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가 웃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후치와 샌슨은 그 날을 두고두고 기억한다. 그들의 친구이자 누나가 지었던 섬뜩한 표정과 잠든 숲을 깨울 정도로 강렬하게 울려 퍼진 따귀 소리는 상당히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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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타자가 좀 멍청한지라 괜히 잘 알지도 못하는 어려운 말을 써서 있는척 해보일까 고민했지만,

아는 척 하다가 멍청한게 티나는 거 보다는 그냥 멍청하게 쓰는 게 낫다는 생각에 편하게 적어보았습니다.

이 대화랑 후에 있을 것들 때문에 한비자랑 마키아벨리를 공부해봤는데, 생각 이상으로 어렵더군요. 역시 멍청함 ㅠㅠ

그리고 방탕황태자 등장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등짝왕이라고 부릅니다만...

저기서 의심하며 가슴을 만지는 것까지 갈까 하다가 등장하자 마자 죽어버릴것 같아 관뒀습니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길.


댓글 : 1 개
운차이의 낚시씬이 사라졌군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인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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