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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 - ch4. 가장 빨리 죽는 새 (28)2015.05.09 PM 01:11
저도 모르게 고향에 있을 레이디의 이름이 나왔다. 어차피 죽을 마당인데 뭐 어떤가. 실컷 불러야지.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인정하던 후치는 사람의 체온 외에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자 이상함을 느꼈다. 그는 슬며시 눈을 떴다.
“어라?”
살아 있었다. 아무런 문제없이 눈이 떠지고 곧 세상의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있던 나무들은 거의 나무가 되다시피 했고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나무들은 쓰러져 불타오르고 있었다. 땅은 시커멓게 변했고, 남자가 있던 땅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한 눈에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큰 구덩이는 쓰러진 그의 위치에서 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곳으로 호수의 물이 밀려드는 것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를 어떤 것이 가렸다.
“괜찮아? 괜찮아, 후치? 다친데 없니? 어디 아픈 곳은?”
호들갑을 떨며 그의 얼굴을 마구 만져댄다. 잔뜩 걱정이 담겨 있는 눈동자가 그를 향하고 있다. 거기다 남자들이라면 누구도 반하지 않고는 못 베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 바로 지척에 있다. 숨을 조금이라도 크게 내쉬면 닿을 것 같았다. 그제 서야 그가 처한 상황이 제대로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리, 리타. 일단 좀 비켜요.”
“어? 어, 응. 알았어. 그런데 진짜 괜찮니? 엄청 폭발이 크게 일어났는데.”
“가짜로 괜찮진 않아요.”
리타는 계속 그를 걱정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을 압박하고 있던 풍만한 여체의 감촉이 떨어져 나가자 살짝 아쉬움이 들었다. 아니다. 아쉬움은 안 들었다. 안 들어야 했다. 후치는 그의 정신이 있다면 멱살을 붙잡고 탈탈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리타가 비키고 후치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당황했었지만 그가 보았던 것을 금방 기억해냈다.
쏴아아아
“이, 이런. 빠져죽겠다! 어서 나가요, 리타!”
이미 구덩이로는 물이 급격히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후치는 리타의 손을 붙잡고 일어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리타는 손을 잡힌 채로 후치를 뒤따라 달렸다.
그들은 간신히 물이 차는 것을 피해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뒤를 돌아보자 구덩이를 메운 물이 작은 호수를 만들고 있었다. 그 광경에 후치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저런 폭발이 일어났는데 그는 무사할 수 있었을까?
“서, 설마……”
“왜 그래?”
후치는 불안한 눈으로 리타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죽은 거 아닐까요? 저렇게 큰 폭발이 일어났는데 우리가 살아있을 리가 없잖아요.”
“뭐?”
리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갑자기 평소와는 다른 미소를 얼굴에 머금었다. 후치는 그 표정이 예전에 보았던 것임을 기억해냈다. 언제였더라…… 아마 제미니가 잔뜩 술에 취했던 날이었던 것 같은데……
“죽었는지 실험해볼까?”
“네?”
리타의 손이 후치의 얼굴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녀의 검은 눈이 후치의 흔들리는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눈빛이 그윽하다.
“가만히 있어.”
후치보다 키가 큰 리타는 조금 상체를 숙이며 그에게 얼굴을 가져갔다.
“리, 리타?”
후치는 자신이 세상물정 모를 정도로 어린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령 예를 들어서, 지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여성의 촉촉한 눈빛과 다소 상기된 볼, 그리고 물기를 머금어 반짝이는 입술이 천천히 다가온다는 게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다.
후치는 얼굴을 빼내려고 힘을 주었지만 단단히 양손에 잡힌 그의 얼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회피해보려고 용을 썼지만 어떤 수도 통하지 않았다. 점점 얼굴은 가까이 다가오고 금방이라도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후치는 마음속으로 이건 어차피 사후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죄책감이 들었다. ‘이건 노카운트야! 그러니까 죽이지 마, 제미니!
꽝!
“악!”
후치는 이마에 격렬한 통증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그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리타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눈물이 그렁거릴 정도로 아프다.
“아야……”
박치기를 한 리타도 아픈지 그녀의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 한가운데가 발갛게 물든 것을 보니 제법 강하게 박은 모양이다. 리타의 눈가도 물기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무슨 짓이에요?”
“살아 있는지 확인해 보려면 고통을 느껴보는 게 제일이잖아.”
“그럴 거면 혼자 해요! 왜 나한테 박치기를 한 거예요!”
“놀리려고.”
당당하게 대답하는 리타를 보고 후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안심이 되면서도 서운한 기분이 든다.
그는 섬뜩한 생각에 놀라며 고개를 마구 휘저어 생각을 날려버렸다. 자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뭐해?”
“아, 네리아.”
고개를 돌려보니 네리아가 서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행도 멀쩡한 상태로 있었다. 확실히 죽은 건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후치는 리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는 살짝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며 말했다.
“모, 모두 무사하네? 그런데 어떻게 그 폭발에서 살았지?”
반응을 보니 다들 모르는 것 같다. 샌슨은 머리를 긁적이며 자기도 신기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칼이나 네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루릴은 살짝 감정이 격해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한 손으로 가슴 가운데를 누르며 말했다.
“그녀가 막아주었군요.”
“예?”
“다레니안…… 인가요?”
리타가 말에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다레니안의 영토. 그녀가 우릴 보호한 모양입니다.”
후치는 놀라며 호수로 시선을 돌렸다. 호수의 표면은 잔잔하고 변함없었다. 칼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페어리퀸 다레니안.”
그러자 마치 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호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행은 가만히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 표면에 일렁이는 움직임은 곧 거대한 물보라로 바뀌었다. 기둥? 아니, 그것은 장막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물은 커튼을 펼치는 것처럼 쫘악 늘어서서 파도를 만들었다.
일행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파도는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일행을 덮칠 것처럼 일행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하지만 물방울은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다. 파도는 마치 단단한 물질처럼 허공을 천천히 지나쳐갔다. 그리고 그것은 일행의 머리를 넘어 불타고 있는 숲으로 향했다. 불이 붙은 나무들에 물이 끼얹어지자 삽시간에 불길은 잦아들었다.
그 과정에서 일행은 조금도 물에 젖지 않았다. 정말로 신기하였지만 바로 그들이 겪고 있는 일이었다.
불이 꺼지자 호수는 다시 잔잔해졌다. 조금 전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하지만 불타오르던 숲에서는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이 잠들어있던 현실감을 일깨워주었다.
“놀라워……”
샌슨은 떨리는 다리를 힘겹게 움직여 호숫가로 걸어갔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레니안.”
그의 행동을 시작으로 다른 일행도 호수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살아남게 된 운차이도 마찬가지였다. 칼, 샌슨, 후치, 운차이, 네리아, 리타 모두 진심을 담아 감사했다. 그리고 이루릴은 다정하고 애틋한 어조로 나지막하게 호수를 향해 말했다.
“고마워요…… 내 친구 다레니안.”
*
일행은 폭발 현장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나무들이 매캐한 연기를 피워 올리는 바람에 있기가 힘들었다. 일행을 습격한 자들의 시체는 모두 폭발에 휘말리거나 웅덩이에 있어서 조사할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이 타던 말은 모두 무사했다. 다레니안은 그 말들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말들도 같이 보호한 것이다. 이루릴은 다친 말들을 치료했다.
샌슨은 전투가 있었던 웅덩이를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뭘까?”
“적어도 산적은 아니야.”
후치는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몸서리 쳤다. 리타는 남자들의 행색을 기억하며 말했다.
“그렇겠지. 여덟 명이 모두 흑마를 타고 있는 데다 검은 로브를 두르고 통일된 무장을 하고 있었어. 거기다 활과 검에도 능숙했지. 절대로 마구잡이로 배운 기술이 아니었어.”
“용병일까?”
“그것도 아닐 거야. 용병은 대게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니까. 저런 식으로 복장이나 무장의 통일은 하지 않을 걸?”
“하긴.”
샌슨은 칼라일 영지에서 만났던 터커 일행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은 자유를 추구하고 통제를 싫어한다. 그런 이들이 할만한 행색은 아니다.
“그럼 뭐지?”
샌슨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의 정체를 조사할 만한 것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진실을 아는 이들은 모두 시체가 되어버린 데다 살아남은 말에서는 그들의 정보를 유추해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안장은 평범한 것이었고 별다른 짐은 실려 있지 않았다.
“군인이네.”
“응? 무슨 말이야, 리타?”
리타는 느긋하게 팔을 뻗어 말을 가리켰다.
“같은 품종의 말을 함께 쓸 수 있는 조직은 많이 없어. 흑마는 우리가 있는 웨스트 그레이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품종이야. 거기다 안장도 각각 다르지 않고 간단하게 되어 있지. 활이나 무기를 수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식만 있어. 상인이나 여행자라면 말에 이것저것을 싣기 때문에 저런 것을 쓰지 않아. 저렇게 간단한 안장은 어디서 쓰는지 알겠지?”
“으흠, 아무래도 군대지. 전투할 때 방해가 되면 안 되니까 최대한 걸리는 것 없이 간단하게 만들어.”
“무기를 다루는 솜씨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거야. 그리고 너처럼 시간차 공격을 사용하는 걸 보면 마상 전투에 익숙하단 거겠지. 길시언이랑 검을 견줄 수 있다는 것만 봐도 이들의 실력을 알 수 있잖아.”
“맞아. 보통 실력이 아니었어.”
“그자들이 길시언 씨 외에 다른 사람을 무시해서 우리가 쉽게 상대한 거지.”
“음, 무장이 좋아도 꼭 득이 되는 건 없지. 공격은 혼자서 다 당하니까.”
후치와 샌슨은 아찔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샌슨은 경비대에서 그런 전술을 배웠다. 군인 신분인 그는 확실히 적들에게서 군대에서나 느낄 만한 점들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리타는 이어 말했다.
“그들은 웨스트 그레이드에서 미드 그레이드로 이어지는 이곳에 나타났어. 그것도 우리가 온 방향이 아니라 반대 방향이지. 즉, 우리가 향하는 곳.”
“바이서스 임펠?”
“맞아. 거기엔 수많은 군대가 있잖아? 우리나라는 귀족의 사병을 허용하니까 말이야.”
“귀족의 사병이 우릴 왜 노려?”
샌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와 달리 후치는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어, 이상한데요? 난 분명히 들었어요.”
“듣다니?”
“그 남자 말이야. 자폭하기 전에 ‘국왕 전하 만세.’라고 외쳤잖아.”
자폭한 남자는 스크롤을 찢기 직전에 크게 소리 질렀었다. 최초에 자폭하려던 남자도 실패했지만 분명 그와 같은 말을 하려고 했었다. 멀리 있던 칼과 운차이를 제외하고서는 모두 똑똑히 들었던 것이다.
샌슨도 그 말을 들었었기에 표정을 굳혔다.
“그놈들, 설마 자이펀 국왕이 보낸 암살자들인가? 운차이 때문에 우릴 노리고……”
샌슨은 운차이를 바라봤지만 운차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치는 샌슨을 향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샌슨. 자이펀에서 보냈으면 왜 바이서스 말로 외쳤겠어? 우리가 듣고 이해하기 쉬우라고 죽는 순간에 그렇게 외쳤을까?”
맞는 말이라 샌슨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 그는 뇌리를 번뜩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안색을 창백하게 물들였다.
“그, 그럼 설마 국왕 전하가 우리를?”
“국왕 전하가 우릴 왜 노려?”
“그러게. 우릴 노릴 이유가 없는데. 솔직히 말해봐, 후치. 우리 몰래 반란 계획이라도 짰어?”
“샌슨, 순순히 자수하지?”
샌슨과 후치가 실없는 소리를 하는 가운데 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혹시 그런 이유가, 그런 말 같지 않은 이유가 있다 해도, 우리가 수도에 도착한 다음에 처리하는 게 더 편한 길일세. 왜 굳이 암살자를 보내어 우리를 처리한단 말인가? 앞뒤가 맞지 않네.”
그러나 리타는 동의하지 않는 듯 했다. 그녀는 칼의 말에 반박했다.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들통 나면 안 될 일이라거나 정치적인 희생양으로서 우리가 전할 소식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끼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왕 전하 만세를 굳이 외치며 자폭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들은 확실히 우리를 노리고 있었습니다만, 고도로 훈련된 암살자들이 죽기 전에 그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게 했을까요?”
“칼, 방금 전에 말했잖아요. 이들이 우리를 노리는 암살자들은 맞지만 신분을 따지자면 군인이에요. 목적보다는 충성심을 우위에 둘 수도 있지요. 특히, 실패할 걸 알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덤벼든 점이나 마지막에 안 되면 같이 죽을 생각으로 자폭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아선, 매우 강한 충성심을 심어둔 군인 같습니다. 충성심이 있다면 그렇게 외치는 게 무리도 아니지요.”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더욱 이상해집니다. 먼저의 논점으로 돌아가 국왕 전하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부터 봅시다. 만약 스마인타그 양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종의 오해라거나 음모가 있다고 치더라도, 전문 암살자가 아닌 군인을 보내 일을 처리한다는 건 이상합니다. 죽이는 것에 있다면 전문 암살자가 훨씬 더 적합할 텐데요.”
“그건…… 그렇군요. 확실히 이상합니다. 어째서 군인을 보낸 걸까요? 군인 밖에 움직일 수 있는 세력이 없었다거나……”
리타는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겨들었다. 후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그런 걸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로는 딱히 결론이 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길시언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고개를 숙인채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프림 블레이드를 손으로 잡고 있는 것을 보니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다. 그의 표정은 험악해졌다가 허무해지는 등 변화무쌍하게 바뀌었다. 때론 잿빛 머리를 마구 헤집기도 했다. 그 나름의 고충이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니 네리아가 보였다.
“네리아?”
하지만 네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끝이 보이지도 않는 호수처럼 잔뜩 가라앉은 눈으로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정상적이지 않은 것을 알아차릴 정도로 이상했다. 활기찬 그녀가 저렇게 풀이 죽어 있다니. 후치는 그녀를 다시 불렀다.
“네리아.”
“응? 아, 후치구나. 왜 그래?”
“네리아야 말로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은 거예요?”
“으응. 아냐. 괜찮아. 완전 멀쩡한 걸.”
네리아는 밝게 웃으면서 팔을 막 들어보였다. 후치는 리타가 연기할 때처럼 어색함이 흘러넘치는 그녀를 보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네리아는 그에게 다가와 헤헤 웃었다.
“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니? 우리 후치 씨는 아무 여자나 그렇게 걱정해주다간 진짜로 반해버리는 수가 있다는 걸 아시나 모르겠어.”
“네리아 같은 미녀가 반해주면 고맙죠.”
“어머, 지금 유혹하는 거니?”
후치는 실없이 웃으며 넘겼다. 네리아가 애써 밝은척을 한다는 건 알겠지만, 저렇게 이야기해 줄 마음이 없는 걸 봐서는 파고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샌슨은 칼과 리타 사이에 껴서 거의 단정 지어 말하고 있었다.
“산적은 절대 아니고. 칼과 리타의 말대로라면 우리를 죽이려는 암살자인데, 정체를 감춘 군인일 거라는 거군요. 으음, 그렇게 따지자면 역시 제일 가능성이 높은 건, 운차이 때문이 아닐까요? 펠레일도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칼라일에서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을 마법사는 일행과 헤어질 때 분명히 말했었다. 일행이 가지고 있는 서류와 운차이는 앞으로의 전쟁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고, 그러하기에 노리는 이들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그때 말들의 치료를 다 끝낸 이루릴이 일행에게 걸어왔다. 그녀는 일행의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여러분, 좀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 어떻게 말입니까?”
“우리는 그 보고서와 운차이를 호송하고 있어요. 하지만 여기에는 여러 분들이 계십니다만 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진 않죠. 칼과 샌슨, 후치는 고향의 일을 보고하기 위해 수도로 가시죠? 그것은 어떨까요?”
샌슨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암살자가 쫒아올 만한 일은 아닙니다.”
“가능성은 열어둬야지. 운차이와 보고서의 문제만큼 우리가 전하려는 소식은 꽤 큰 무게를 가져. 내가 만약 정권을 잡으려는 귀족이었다면 이걸 어떻게든 이용했을 거야.”
리타의 말에 샌슨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의 머리로는 귀족들이 고작 그런 소식 하나 막자고 죽이려고 들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칼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이루릴은 그들의 반응을 보며 말했다.
“여러분의 일은 가능으로 따지자면 어느 정도인가요?”
“낮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저는 어떨까요? 제 생각에 제 일 때문에 인간 암살자들이 쫒아올 것 같지는 않군요. 전 델하파의 항구로 가서 누굴 만날 계획입니다만 그건 인간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에요.”
왜 인간과 상관이 없을까? 그녀가 찾는 인물은 인간일 텐데.
“윽!”
리타는 갑자기 머리를 감싸며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일행의 걱정스런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괜찮냐고 묻는 그들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리타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의 지끈거림은 남아 있었다.
이루릴은 리타에게서 네리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후치와 칼, 샌슨의 시선도 그녀를 따라 네리아에게로 향했다. 네리아는 후치가 걱정스레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네리아?”
“…… 나 때문일지 몰라.”
네리아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길드에서는 분명히 날 쫒고 있을 거야. 내가 그들을 배신했잖아? 더군다나 당신들도 길드를 부수는 데 일조했으니, 이 기회에 다 같이 처리해버리자면서 암살자를 보낸 게 틀림없어.”
일행의 표정이 그녀를 따라 굳었다. 어째서 잊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이라무스 시에서 도둑 길드를 박살냈다. 당연히 길드원에게 쫒기는 처지를 먼저 떠올렸어야했다.
“내가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어. 괜히 나 때문에 당신들까지 목숨이 위험했잖아? 페어리퀸이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모두 다 죽고 말았을 거야.”
네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불안함에 잔뜩 겁먹은 얼굴이다. 눈가에는 물기가 촉촉하게 맺혀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입술로 토해내듯 말했다.
“지금이라도 따로 떨어져야 해. 당신들까지 끌어들일 순 없어. 이건 내 문제야.”
“그런 틀려요.”
리타는 눈물 젖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계속 말하는 내용이지만, 도둑 길드에서는 암살자들에게 군대식 교육을 먼저 시키나보죠? 이들의 정체를 생각해볼 때 도둑 길드에서 보낸 암살자는 아니에요.”
“아냐! 너흰 도둑 길드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모르고 있어! 그냥 도둑들만 모인 곳이라고 생각해? 그들은 자기들이 직접 손을 쓰는 것 외에도 얼마든지 다른 방식을 취할 수 있다고!”
“자기들이 더 잘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남에게 부탁하진 않겠지요. 복수는 가능하면 자신의 손으로 하고 싶은 법이고요. 그리고……”
리타는 손을 뻗어 네리아의 흔들리는 어깨를 감싸주었다. 따스한 체온이 그녀의 몸을 파고든다.
“이건 네리아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 모두의 문제지요. 처음부터 네리아에게 맡길 거였으면 같이 가자고 하지도 않았어요. 그러니 괜히 자기 탓이라고 자책할 필요 없어요.”
“으흑.”
네리아는 눈물을 훌쩍이며 리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리타는 말없이 그녀의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일행은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러나 단 한 명, 분위기에 구애받지 않는 엘프는 바로 운차이에게 말을 걸었다.
“운차이 씨는 암살자가 노릴 만하죠?”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반응이었기에 이루릴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했다.
“운차이 씨가 칼리일 영지에서 한 일이 들통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자들이 죽기 직전 바이서스어로 국왕 전하 만세라고 외쳤다는 것이에요. 저도 똑똑히 들었습니다.”
“으음……”
그 문제에 관해서는 열심히 토론을 나눴기 때문에 알고 있다. 칼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결론에 신음하며 마지막 남은 이를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그때까지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루릴이 그를 불렀다.
“길시언 씨.”
“……”
“길시언 씨?”
“예? 아, 왜 그러십니까?”
“혹시 암살자들이 따라다닐 만한 일을 저질렀나요?”
“아까 그 암살자놈들이 날 노렸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모험을 하다보니 원한 살 일도 가끔은 했습니다. 복수를 원하는 사람은 많을 겁니다. 하지만 저렇게 엄청난 암살자를 보내었을 거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없는데요?”
“그런가요?”
“도무지…… 그럴 만한 작자는 생각나지 않는데요?”
리타가 손숙건을 꺼내 네리아의 눈가를 닦아주다 고개를 들어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동생이 보냈을 가능성은 어떤가요?”
순간 길시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는 이가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거세게 악물며 간신히 알아들을만한 말을 내뱉었다.
“어떤 의미입니까?”
“길시언을 노릴 만한 사람들은 많죠.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정황 상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역시 동생 같은데요. 물론 형제를 의심하는 것은 좋지 못한 행위이긴 하지만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잖아요?”
“…… 내 동생은 그럴 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단호한 부정에 리타는 입을 닫았다. 일행은 길시언의 가정사를 아는 것 같은 리타의 발언에 호기심을 보였지만, 그녀가 더 말을 하지 않자 관심을 접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조용히 있던 운차이가 입을 열었다.
“길시언.”
갑자기 나온 그의 말에 일행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운차이는 서늘한 눈빛을 길시언에게 향했다.
“어제도 말했지만, 당신 정말 피 냄새가 많이 나.”
“그래서? 그 이야기는 왜 자꾸 하는 겁니까?”
“아무래도 이상해. 당신 정도의 남자라면 그렇게 몸에 피 묻힐 일이 많지 않아. 오히려 적수가 적기 때문에 그렇지. 당신은……”
운차이는 싱긋 웃으며 갑자기 말투를 바꾸었다.
“Yamus dsidafra un ert m'kima?"
“여보시오. 자이펀어로 말하는 이유가 뭐요?”
“Ert m'kima unte raleil Djipenian. Releil?"
갑작스런 자이펀 어에 길시언은 이를 갈았다. 그러다 그는 리타를 보더니 침착하게 대답했다.
“허튼 생각 하지 마시오. 리타 양이 자이펀 어를 할 줄 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소.”
“도움이 안 되는군.”
운차이는 리타를 힐끗 쳐다보며 혀를 찼다. 그런 반면 칼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이펀 어를 할 줄 아는 건 리타뿐만이 아니다. 길시언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운차이의 질문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있었다.
리타는 운차이와 눈이 마주치자 볼을 긁적였다. 그녀는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 아무래도 운차이는 당신 정체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요?”
“제 정체…… 말입니까?”
“생각해보면 길시언이 여기서 가장 노림을 당한 이유에서 목표가 당신이었다는 걸 짐작했어야 했어요. 이 중에서 가장 많은 노림을 받을 만한 태생을 타고난 건 길시언이죠.”
“…… 리타 양. 전부터 느꼈지만, 혹시 알고 있습니까?”
리타의 변화가 드문 얼굴에는 당연하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솔로처가 왕에게 선물한 마법검을 들고 있고, 6년 전부터 모험가를 하며, 귀족의 습성이 남아 있는 사람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 그리고 아애 숨길 거라면 이름부터 바꿨어야지요. 그 이름을 사용하면서 눈치 채질 못하길 바라는 건 안일한 생각이에요.”
길시언은 몹시 놀란 듯 눈을 부릅뜨며 손에 쥐고 있던 프림 블레이드를 떨어트렸다. 프림 블레이드는 그 즉시 몸을 울렸고 당황한 길시언이 잽싸게 들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넋이 나간 듯 굳어 있다가 갑자기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후치는 그들의 대화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칼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도 후치와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행의 궁금증을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리타에게 질문했다.
“무슨 말이에요, 리타? 길시언의 정체가 뭐기에 그러는 거죠?”
리타는 대답하는 대신 길시언을 쳐다보았다. 길시언은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초탈하게 앉아 있었다. 리타는 그에게 눈을 깜박이더니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길시언 바이서스. 6년 전에 태자에서 폐위된 폐태자이자 국왕의 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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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간만에 백수끼리 한잔 하기로 한 날이라 아침 일찍부터 열심히 손을 놀렸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안올리고 말텐데, 저도 너무 성실해졌군요.
이걸로 4장도 한편만 남겨두었습니다.
몇달간 드래곤라자 3권만 죽어라 붙잡고 있었는데, 이제 겨우 4권으로 넘어가겠네요.
하아... 메인스토리는 짜놨지만 이제 자세한거 설정하려면 또 죽어나겠군요.
그럼, 좋은 낮 되시길.
댓글 : 3 개
- 매드★몬스터
- 2015/05/10 PM 03:29
눈물을 마시는 새 등장
- 파츄리
- 2015/05/11 AM 10:12
월요일 아침부터 3편 연속 상큼하게 보고 시작합니다^^
길시언 정체 발각... 이라기보다는 저런 특이한 사람을 보고 의심을 하지 않다니 역시 후치 일행은 어딘가 비범하면서도 평범하군요.
좋은 월요일 되십시오~
길시언 정체 발각... 이라기보다는 저런 특이한 사람을 보고 의심을 하지 않다니 역시 후치 일행은 어딘가 비범하면서도 평범하군요.
좋은 월요일 되십시오~
- Defiance
- 2015/05/12 AM 02:51
이미 월요일은 지났지만, 좋은 한주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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