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져온 괴담] 껌 ~ 17 ~2010.06.22 PM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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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면서 401호를 힐끗 쳐다보았다.

사람이 있었다면, 소리를 질렀을 때 나와 보는 것이 정상이다.

생각해보니 401호는 입사 동기인 천대리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문 앞을 천천히 지나며 내부를 살폈다.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딱히 기척이 느껴지진 않았다.

아마도 비어있는 모양이었다.

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대부분이 퇴근하고, 남은 직원이라 봐야 한 사무실에 두 명에서 세 명 정도뿐일 것이었다.

적게는 한 명인 곳도 있을 것이고.

전체를 둘러보라는 임무를 맏고 오긴 했지만,

어차피 나는 일게 대리에 불과했고, 그럴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우선 핸드폰을 저 어둠너머로 분실했다.

게다가 3층에서는 습격을 당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지금 내 입에 있는 껌이 마지막 껌이라는 점이다.

그런 연유로 401호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내 발은 급격히 빨라졌다.

사무실간의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순식간에 402호 문 앞으로 다다랐다.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잠시 계단 쪽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지옥의 경계선이라도 되는 양 계단이 있는 복도 끝은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다.

금방이라도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다.

나는 점점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어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손에 힘을 주었다.


-끼이이익


거슬리는 낡은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휘이이이잉


제일먼저 나를 맞은 것은 맞바람이었다.

춘천의 싸늘한 밤공기가 몸을 훑자 나도 모르게 몸을 감싸며 추위에 반응을 한다.

정면으로 보이는 창문이 반 쯤 열려져 있던 게 원인인 것 같다.

난로를 켜 놔도 모자랄 날씨에 창문을 열어 놓다니 정말 생각이 있는 건가?


“오주임! 오주임!”


그 자리에 서서 오주임을 불렀다.

하지만 대답은 없다.

아무래도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쓰윽 주위를 둘러보았다.

싸늘한 공기 외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우선 창문을 닫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문을 닫은 후에는 히터도 틀 생각이었다.

걸으면서 슬쩍 책상들을 살펴보았다.


“이건 뭐 개판이구만...”


절로 이런 말이 나왔다.

책상들은 하나같이 아수라장이었다.

중요한 서류들은 죄다 땅에 내팽개쳐져 있었고, 필기구들과 이면지 따위가 지저분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당장 부도가 나도 이것보단 나을 지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차며 앞으로 걷다가 오주임 책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질러진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면지에 크게 적어놓은 글귀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큼직하게 써 놓긴 했지만 휘갈겨 쓴 글씨라 멀리서는 식별이 힘들었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허리를 굽혔다.


[김대리 개새끼. 저주할거다.]


내 욕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자리에 서서 오주임 책상 위를 뒤적거려보니 글귀가 적힌 종이 세 장을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손에 쥐고 한 장씩 읽어 내려간다.



[껌을 씹고 싶다. 정말 이대로 있다간 죽을 것 같다.]



[깨달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것 같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나가는 일만 남았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알 수 없는 말들이었다.

대체 뭘 깨닫고, 어떤 준비가 끝났다는 것일까?


“이 새끼, 혹시 여기 없는건가...”


마지막 글귀가 마음에 걸렸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나가는 일만 남았다.]



-끼이이익, 탁


창문을 닫으니 웅웅거리던 바람소리가 가셨다.

손목에 걸고 있던 봉지를 아무 책상에나 던져 놓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천히 둘러보니 훨씬 더 난장판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씩 납득이 안 가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출장을 마치고 올라와야 할 사람들이 사무실을 이렇게 개판으로 만들고 어딘가로 사라졌다니.

왠지 이 건물에 나 밖에 없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자,

참을 수 없는 공포감이 또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마침 신경이 곤두선 내 귓가에 희미한 소리가 잡혔다.


-쿵.


온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불현듯 이 건물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쿠웅.


좀 더 명확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3층에서 들었던 그 소리가 분명하다.

나는 미친듯이 책상들의 서랍을 열어 보기 시작했다.

오주임의 책상, 이주임의 책상, 그리고 양주임의 책상.


“차, 찾았다!”


양주임 책상 두 번째 서랍에서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그것은 손전등이었다.

오른 손으로 손전등을 잡고, 왼 손으로 이주임의 서랍에 있던 대형 콤파스를 들었다.


-쿠웅.


소리로 미루어보아 아직 사무실 앞까지 오진 못한 것 같았다.

당장 문을 열고 왼쪽 계단 쪽으로 뛰어간다면 탈출할 수 있을 것 같다.


-벌컥!


문을 열었다.

그리고 미친듯이 뛰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씨... 씨팔...”


왼쪽 계단을 통해서도 뭔가의 그림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림자로 봐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존재였다.

어쩔 수 없이 황급히 뒤로 몸을 돌렸다.


-스르륵, 쿵


하지만 나는 더욱더 멈춰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미 401호 앞 까지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쉬우후우취우


‘그것’이 또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나 또한 ‘그것’에게 소리를 냈다.


“야... 양주임!?”


‘그것’은 바로 양주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양주임의 얼굴이 ‘그것’에 붙어 있었다.

몸 전체가 헐렁한 옷처럼 바닥으로 축 쳐져 있었고, 팔이나 다리가 제멋대로 뒤틀려서 붙어있었다.

그리고 몹시 덩치가 크다.

양주임의 덩치가 원래 컸다고 해도 이건 그보다 두 배 이상은 커 보였다.

거기에 손과 발의 갯수도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눈에 보이는 손만 네 개였는데 붙어 있는 위치도 제 각각이었다.


-우쉬우우후위우


또 한 번 괴상한 소리를 낸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슴팍에 붙어있는 양주임의 얼굴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왼쪽 옆구리쯤에 붙어있는 이주임의 얼굴에서 나온 소리였다.


“으, 으, 으아아아악!”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양주임과 이주임의 얼굴을 가진 ‘그것’은 아랑곳 않고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리가 풀려서 이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스르륵 쿵


‘그것’이 발을 움직일 때마다 축 쳐진 몸이 바닥을 ‘스르륵’하고 쓸었다.

나는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면서 뒤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어둠의 경계를 넘어 살짝 보이는 ‘또 다른 그것’의 일부분이 보인다.

이대로 주저앉고 싶다.

이 괴생물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스르륵 쿵


뒷걸음으로 어느덧 403호 앞까지 왔다.

하지만 무의미한 걸음이었다.

나는 그저 협살 당하는 주자에 불과했다.

저것들에게 붙잡히면 대체 무슨 일을 당하게 될까?

극에 달한 공포가 점점 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아빠. 치킨 사 올거지~?’


그러던 중,

문득 은비의 목소리가 생각난다.

그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동시에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불 타 오르기 시작했다.


“누, 누구 없어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손전등을 입에 물고 403호 문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덜컥, 덜컥


잠겨있었다.

나는 앞을 향해 콤파스를 휘두르며 계속해서 문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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