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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져온 괴담
] 창귀
2010.06.25 PM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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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L : //mypi.ruliweb.com/m/mypi.htm?nid=1084161&num=983
창귀란 호랑이에게 먹힌 사람의 원귀를 일컫는 말로 중국과 한국.인도에 전해지는 귀신 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창귀에 대한 민간설화가 많은데 그만큼 호랑이에게 먹힌 사람이 많았다는 걸 얘기합니다..
'조선시대의 작자미상인 청우기담(聽雨奇談)'을 보면 창귀는 호랑이에게 먹힌 사람의 영혼으로,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오로지 호랑이의 노예가 되거나 호랑이 몸에 달라붙는다고 합니다..
창귀에는 여러 이름이 있는데, 박지원의 '호질'에는 `굴각(屈閣)' 등의 이름으로 불려지고 (박지원의 호질에서는 창귀나 호랑이가 양반을 꾸짖는 긍적적인 모습으로 나옵니다), 민간에서는 `홍살이 귀신', 특히 태백 지역에서는 좀더 토속적으로 `가문글기'라 불립니다.
창귀는 호랑이의 위세권에서 탈출하고 저승으로 가기위해 `사다리' 또는 `다리'라고 불리는 행위를 한다고 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게 하는 것으로 산사람을 해치는 악귀적 행위 입니다..
창귀는 늘 산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새 창귀감을 구하는데, 그 사람을 홀려서 불러내거나 유인하여 호랑이에게 대려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호랑이에게 먹힐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말려도 창귀가 씌여 자꾸 나가려 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또 반대로 호랑이에게 씌어서 호랑이에게 광기를 일으키게 해서 사람들을 살생 하도록 조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호랑이는 보름달이 뜨거나 14살 직후가 되면 이유없이 미쳐서 날뛴다고 하는데 이것이 창귀때문이라는 겁니다..
창귀는 무섭고 끈질기기 때문에 예전부터 창귀를 막는 법이 전해져 왔습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사람을 잡아먹은 호랑이를 잡아서 호랑이에게 죽은 사람의 장손이 호랑이 심장을 생으로 씹어먹는 방법입니다..
그럼 창귀의 원혼이 사라져서 저승으로 간다고 믿었습니다..
또다른 방법은 창귀가 다니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산간 지역에는 호식총(虎食塚)이라는 특이한 형태의 분묘가 유래하는데 호랑이가 먹다 남긴 사람의 시신을 불에 태운다음 돌상자에 재를 넣고 그주위를 돌로 높게 쌓고 위에 돌시루를 넣는 방식의 무덤입니다..
시신을 태우는 것은 창귀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이고 돌을 쌓는 것은 신성한 지역임을 뜻함과 동시에 창귀를 무거운 돌로 눌러서 꼼짝 못하게 가두어 놓는 금역임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 호식총은 조선시대 산간지역에는 흔히 볼수 있었는데 이에 대한 전설도 많이 있습니다..
태백시 창죽 조대장터 어귀에 힘이 장사인 김씨가 살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김 장군'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눈썹이 유난히 길었다. 옛말에 눈썹이 길면 호식(虎食) 당할 상이라 했다고 사람들이 말하니, 그는 크게 웃으며 그런 소리 말라 하였습니다.
까마귀가 몹시 울던 어느날, 김씨는 집앞 개울가에서 나무를 하다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앞발로 김씨의 배를 찍어 당겼습니다.
놀라 일어난 김씨는 호랑이와 혈전을 벌였습니다..
근처에 있던 아내가 달려왔으나 너무 놀라서 떨기만 하다가 마을로 가서사람들을 불러 올려고 했습니다.
김씨는 아내에게 “사람 데리러 갈 것 없이 낫이나 도끼 아무것이나 나에게 던져만 주면 된다!”고 악을 썼지만 아내는 이미 떠난 뒤였습니다..
아내가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달려왔을 때는 이미 늦은 뒤 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서 화장을 한 뒤 돌담을 치고 시루를 엎으니 사람들은 그 자리를 `장군 화장터'라고 불렀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태백시 문곡동 편뜰에 살던 대(大)씨 집안의 여자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체 몇일을 보냈습니다.
집에서는 아이가 어디 아픈가 하면서도 별일은 없겠지 하며 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저녁 아버지는 장에 다녀와서 잠시 누워있었고, 어머니는 방앗간에서 보리를 찧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방문이 버석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호랑이가 나타나 아이를 눈 깜짝할 사이에 물고 갔고. 사람들이 달려갔지만 장세마골 산등 바위 위에 호랑이가 아이의 머리를 핥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소리를 질렀으나 호랑이는 아랑곳 않고 혀로 아이의 머리를 핥아 빗어 놓고는 사라 졌습니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화장을 하고 시루를 엎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는 불과 40 ~ 50년전에 태백산 주변에서 일어난 `실화'로서 호식총(虎食塚)이라는 물증과 함께 구전돼 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리 험하지 않은 산에도 숲이 울창해서 예로부터 호랑이가 많이 서식했습니다.
그 마당에 느리고 힘약한 동물인 사람들은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례가 무수히 많았고 호랑이를 무서워해 “범에 물려갈 놈”이라는 악담이 생겼고, 악독한 전염병(콜레라) 이름을 `호열자'라고 짓기도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 2년에 경상도에서 호랑이에게 물려가 죽은 사람이 수백명이라는 기록이 있고, 중종 19년에는 황해도에서 호랑이에게 상한 사람이 40여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영조 19년에는 평안도 강계에서 20여명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으며, 영조 28년에는 호랑이가 경복궁 후원에 들어왔고, 영조 30년에는 경기도에서 한달동안 호랑이에게 물려죽은 사람이 120여명이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한양 한복판에도 호랑이가 나타날 정도니 산간지역의 호랑이 출몰은 빈번할 정도 였습니다..
태백산맥의 어미산인 태백산을 중심으로 사방 200~300리 안에는 예로부터 화전민이 많이 살았습니다.
이들 화전민이 호랑이에 대한 피해는 비일비재 였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태백시 철암동 버들골 설통바우밑 화장터 등 태백에 33곳,
삼척시 노곡면 상마읍리 범든골 호식터를 비롯해서 삼척에 53군데,
정선군 북면 유천리 송천 건너 개금벌 속골 호식터 등 정선에 33곳,
영월시 상동읍 구래리 연애골 호식터 등 영월에 5곳 등..
강원도에서 경상북도 일대 산간마을에 이르기까지 파악된 곳만 해도 무려 158곳에 이릅니다.
이런 곳에는 영락없이 호식총이 들어서 있고, 10여년전까지만 해도 호식되어간 상황 목격담을 생생하게 증언해주는 촌로들이 살고 있었다 합니다.
그러면 왜 태백산 일대 사람들은 호랑이 밥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호랑이골에 눌러 살았을까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혼란스런 사회의 분위기 때문 이였습니다..
“혹독한 정치와 관리의 횡포, 과중한 세금은 호랑이보다 무섭다(苛政 猛於虎)”는 공자의 말처럼 태백산맥 안으로 들어와 살던 화전민 가운데는 혹독한 세상, 과중한 세금과 부역 등에 쫓겨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차라리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더라도 나라 눈치는 안보겠다는 심정으로 화전을 일구며 살았으며, 호식된 상황을 신성한 경지로 격상시켜 슬픔을 미화하려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산신령이 호랑이 등을 타고 나타다니는 것도 여기서 유래 됬다고 합니다..
또 우리나라 설화를 보면 호랑이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모습으로 표현 되는데 이는 호랑이를 격하시켜 심리적 우위를 차지하고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겠다는 의지표현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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