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져온 괴담] 악마와 같은 여자 ~ 6 ~2010.06.26 AM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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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재판장이 몇 가지 물어 봅시다”


콧잔등에 돋보기를 걸친 재판장이 회장부인을 내려다보았다.


“판사사위에게 여자가 있다는 이상한 제보가 온 게 언제죠?”


“그러니까 결혼식날을 받아놓고 사위가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기 직전이죠.”


“그러면 결혼 전부터 다른 여자의 존재를 알았네?”


“그런 셈이죠.”


재판장은 뭔가 한참을 생각했다. 사위의 바람을 의심하는 것과 여자를 청부살해하는 과정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재판장은 이렇게 살인의 동기를 회장부인에게 추정해서 말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의심을 하고 미행정도를 하다가 오히려 고소를

당하고 접근금지가처분까지 당하고 나니까

그 여대생 가족하고 대판 원수가 된 거 아니요? 재판장인

내 생각에는 그때부터 일이 본 궤도를 벗어난 거지.

여대생부녀를 누군가 지옥으로 데려가지 않나 할 정도로 증오했겠지.

그 태도가 조카 김용국에게도 전해졌겠지.

은연중에 회장부인인 고모를 신주단지 같이 모시는 김용국이었으니까 말이야.

그렇지 않아요?”


“재판장님 그런 말씀 마세요.

고모를 신주단지 같이 모셨으면 의리를 지키지 않고

내가 살인청부를 지시했다고 이렇게 물고 들어갈 리가 있어요?”


“그거야 김용국의 인생관이 처음과는 다르게 바뀌었을 수도 있지”


재판장은 핵심을 보고 있었다. 기록에 나타난 구체적인 살인청부과정은 이랬다.

져 본적이 없는 회장부인의 자존심이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소송이 그녀에게 불리하게 진행됐기 때문이다.

무슨 일도 해내는 회장남편과 판사사위가 있는데도 말이다.

어느 날 회장부인은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차라리 그것들을 없애버릴 사람을 찾을 수 없겠니?”


라고 조카 김용국에게 넋두리했다. 그러면서

“일이 잘되면 조카인 너 하나 도움을 주지 못하겠느냐”고 암시했다.

눈물과 돈 약속으로 마음을 흔드는 회장부인의 능력은 원래 탁월했다.

조카 김용국은 사채업을 하는 친구 마기룡을 떠올렸다.

살인까지 해준다는 말을 들었었다.

마기룡으로부터 몇 방울 차나 술에 타 먹이면

일주일 후부터 점차 내장이 썩어 들어가 죽는 특수독극물 얘기를 듣고

회장부인에게 전했다. 그들은 완전범죄를 확신했다.

마기룡은 살인대금 2억을 요구했고 회장부인은 1억5천만원을 불렀다.

중간선인 1억7천5백만원에 흥정이 됐다. 2001년10월11일 오후5시.

청담고등학교 담 옆에 김용국의 그레이스가 바짝 붙어 있었다.

잠시 후 주위를 살피면서 쇼핑백을 손에 든 회장부인이 차 문을 열고 얼른 올라탔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이건 착수금이고 나머지는 일 끝나면 주겠다고 그래라.

그리고 내 얘기는 절대로 그 사람한테 하면 안 된다. 알았지?.”


회장부인은 자금추적을 피하기 위해 만든 현찰뭉치가 든 쇼핑백을 건넸다.

며칠 후 마기룡과 김용국은 정혜경이 있는 대학기숙사를 맴돌기 시작했다.

국수배달을 가장하고 정혜경의 아파트에도 갔었다. 문제가 있었다.

도대체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정혜경은 그동안의 미행에 시달려 동선을

최소한으로 줄인 상태였다. 젊은 여자를 고용해서 친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긴 있었다.

그러나 그건 비밀이 새 나갈 우려가 많았다. 도대체 공격할 틈이 없었다.

정혜경은 대학구내의 강의실과 기숙사 그리고 집 사이만 시계추 같이 반복했다.

석 달이란 시간이 소득 없이 흘렀다.

김용국은 문득 마기룡이 프로가 아니라는 의심이 들었다.


“네가 가진 특수독극물을 한번 내 앞에서 테스트 해 봐.”


회장부인인 고모는 수시로 마기룡이 사기가 아닌지 확인하라고 했다.

다음날 마기룡은 쥐 몇 마리가 든 상자를 가지고 왔다.

그는 주머니에서 노란액체가 든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준비해온

과자에 몇 방울 묻혔다. 약병에는 아무런 표지도 글씨도 없었다.

마기룡은 그 과자를 쥐들 사이에 놓았다. 이십분이 흘렀다.

쥐들의 움직임에 변화가 나타났다. 움직임이 서서히 둔해지더니

한 시간 후 잠자듯 조용히 죽은 것이다. 인간의 체력에 맞추어 독극물의

양을 늘리면 얼마 후 기력이 떨어지다가 원인불명으로 죽을 것 같았다.

마기룡의 말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을 해도 절대 잔류성분이 검출되지

않는다고 했다. 차차 고양이나 개한테도 시험을 해 보기로 했다.

문제는 독극물을 먹이는 거였다. 정혜경이 커피숍에라도 가면 화장실 간 사이

기회를 노려 독극물 몇 방울 찻잔에 떨어뜨리고 지나칠 수 있었다.

그런데 정혜경은 다른 여대생처럼 혼자 도넛집이나 커피숍에서

책을 읽거나 하는 습관이 없었다. 마침내 법원의 정식 접근금지가처분 명령이 떨어졌다.

정혜경 부녀의 승리였다. 회장부인은 더 길길이 뛰었다.


“딸보다 애비 놈이 더 악질이야.

그 애비 놈부터 먼저 처치해 봐. 술을 좋아하니까

돈 벌 사업이 있다고 접근해서 처리하면 될 거야”


증오는 회장부인의 이성을 마비시킨 것 같았다.

죽일 대상이 정의택으로 바뀌었다.

정의택은 대기업 무역파트와 광고기획파트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컨설팅업을 하고 있었다.

마기룡은 오퍼상으로 가장해서 접근하기로 했다.

참치사업을 한다고 부산으로 데려가든가 우동체인을 할 계획이라고

하면서 일본 같은 데 유인해 가서 처치하면 될 것 같았다.

특정한 품목을 정하지 않고 그때 그때 물품의 수요가 있다고 둘러대기로 했다.

마기룡은 가짜명함을 찍었다. 죽은 정의택의 품에서

나온 명함을 가지고 형사들은 한참을 헛고생 할지도 몰랐다.

강남 구청 역 근처의 마천빌딩 411호에 있는

정의택의 사무실의 주변을 골목까지 철저히 답사했다.

정의택과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에 술 먹고 골목에서 나오다

인적이 없을 때 칼을 몇 방 먹이고 강도로 위장해도 경찰은

그를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계산이었다.

바로 그 무렵 정의택은 오랜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법원의 가처분결정을 위반하면 회장부인을 구속할 수도 있었다.

이제 딸은 완전히 그들로부터 해방이었다.

사실 그동안 딸 혜경은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미행자들이 아예 드러내놓고 딸에게 따라 붙었기 때문이다.

딸은 다시 새벽에 수영장회원권도 끊고 남자친구도 만나기 시작했다.

정의택씨도 다시 일을 시작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후 그의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업계에서 정 사장님을 추천받았는데

전반적인 무역 컨설팅은 물론이고 홍보나 광고마케팅까지 자문을 받고 싶습니다.”


바닥에 깔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였다.

그는 정의택씨의 경력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일단 만나시죠.”


옛날의 동료가 보내주는 좋은 일거리 같았다.

그 남자가 말을 계속했다.


“딱딱한 사무실보다는 정사장님께 술이라도 먼저 한잔 대접하면서

귀한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장소를 정해주시면 제가 그리로 가 뵙겠습니다.”


예의바르고 겸손한 말투였다. 좋은 고객 같았다.

다음날 저녁 강남 구청역 근처 음식점에서 그는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삼십대

말의 남자와 만났다.

만만치 않은 눈빛의 그 남자는 공손히 명함을 건넸다.

위장한 킬러 마기룡이었다. 마기룡은 정의택씨에게 술을 계속 권하면서 말했다.


“농사짓던 아버지의 땅값이 크게 올라 50억 정도 유산을 받았습니다.

역삼동에서 선후배들과 사업을 했는데 2억 정도 손해보고

지금은 다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유럽에서 향수나 의류를 수입해서 판매하려고 하는데

자문을 구하고 싶어서 이렇게 뵙자고 했습니다.”


정의택씨는 그 말을 들으면서 ‘부잣집 아들이 자칫하면 사기 당하겠구나’

하고 생각 했다. 마기룡이 담담하게 얘기를 계속했다.


“저는 대학 동아리 선후배들과 제 자금을 밑천으로 공생공존하면 만족합니다.

큰 욕심 없습니다.

앞으로 형님같이 지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의택씨는 그 남자의 낭만적인 순진한 면이 마음에 들었다.


“실례지만 저를 추천한 사람이 누굽니까?”


정의택 씨는 일단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제 회사의 이사가 다른 사람한테서 정사장님 얘기를 들었습니다.

물어가지고 다음번 만나 뵐 때 알려드리겠습니다.”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며칠 후 순진한 오퍼상으로 위장한 마기룡이 다시 정의택씨를 갈비집으로 유인했다.

한결 친해진 분위기였다.


“어제 8억원어치 영국의류가 든 컨테이너가 부산에 도착했어요.

함께 가셔서 그 옷들을 직접 보시고 광고나 홍보기획까지 세워주셨으면 해서요.”


정의택씨는 그 청년이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요자의 취향도 생각하지 않고 홍보도 시기적으로 맞지 않았다.

유통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광고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수업료라고 생각하시고 지금이라도 도매상이나

전문유통업자에게 빨리 물건을 넘겨 처리하는 게 그래도

손해를 줄이는 좋은 방법입니다.

제가 부산으로 갈 필요도 없어요.”


욕심내고 따라가는 것 보다 정직하게 컨설팅을 해 주는 게 먼저

신용을 얻는 길이라고 정의택씨는 생각했다. 킬러 마기룡의 얼굴에

순간 낭패의 빛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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