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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소설] 웹소설) 10,000회차 연재 후 끝장나는 세계 - 102021.09.29 AM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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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창문 넘어 아이돌이 된 70대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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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라는 마법과 거래한 거대운석의 정지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에 열을 쏟고 있었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운석 낙하 사건 때부터 사귀고 있는 미르와의 관계가 멀어진다면 본말전도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손을 잡거나 키스는 하지 않았지만, 학교 옥상에서 이마를 맞대고 같이 자는 사이이기는 했으니까.
기본적으로 소극적이고 수줍음이 강한 나라에겐 그 이상의 자극을 원할 용기는 아직 없다. 아직은 그저 저 하늘에 멈춘 거대 운석처럼 이 시간이 계속되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시간은 흐른다. 스마트폰의 진동알람이 울렸다. 아르바이트 시간이 된 것이다.
차분히 눈을 뜬 나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쉽다는 듯 곤히 잠든 미르의 얼굴을 살짝 만지고는, 곧장 학교를 나섰다.
수업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교실에는 분신을 보내뒀으니까.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수업은 장 선생의 수업이다. 세계 어딘가에서 석양이 지듯, 장 선생은 어딘가에서 죽어있을 터였다. 그러면 수업은 자습일 게 뻔하다. 늘 그랬다. 그게 ‘장 선생다움’이었으니까.
다행히 나라에겐 그랜드 위치가 알선해준 일이 많았다. 아직 학생이라서 정식으로 고용하기도 뭣했기에 일용직이고, 일이 매일 바뀌기는 했지만, 일감이 마르는 일은 결코 없었다.
한번은 나라가 그랜드 위치에게 어떻게 계속 일감을 받을 수 있는 거냐고 묻자, 그랜드 위치는 이렇게 답했다.
‘인맥은 마법이란다.’
실로 간결하고 논리적이며, 마녀다운 설명이었다.
***
나라가 이번에 맡은 아르바이트는 무대 연출 보조였다. 조명 설치부터 시작해 본공연의 조명 조절까지, 거의 전반적인 작업의 보조 말이다.
비슷한 일을 몇 번 해본 나라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이 일을 하는 동안 나라에겐 조금 다른 유형의 걱정이 생겼다.
‘진짜 괜찮은 걸까, 이 콘서트?’
“거기 알바생. 무대가 제대로 될지 걱정하는 얼굴이군.”
나라의 생각을 정확히 꿰뚫어본 무대감독은 천천히 선글라스를 내려보였다. 그 눈은 초점을 잃고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실 나도 그래.”
“감독님? 여기선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셔야…….”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인데, 알바야. 너도 방금 봤잖아.”
나라와 감독의 시선이 무대 뒤편의 스태프들로 향했고, 무리의 가운데 있는 인물에게 고정되었다.
레이스와 프릴이 잔뜩 달려, 보기만 해도 화려함과 활기가 느껴지는 화사한 드레스.
그야말로 아이돌 다운 이 복장을 소화하고 있는 인물은- 할머니였다.
“아무리 전설의 아이돌인 ‘루비아이’ 사브리나라지만, 이래서야 안무는 둘째치고 노래중에 쓰러지지나 않을지…….”
“그런데, 루비아이는 갑자기 왜 콘서트를 하기로 한 걸까요? 70대면 아이돌의 나이는 아니잖아요.”
“응? 그러고 보니 그렇네. 인맥 통해서 갑작스레 맡은 일이라 그런 부분은 생각을 못했군.”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나라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녀가 가장 곤란해 하는 버릇이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오기 전에 보이는 전조였다.
나라는 기본적으로 소극적이고, 수줍음이 많아 앞으로 나서지 않는 성격.
하지만 감정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캐릭터를 깨고 앞으로 나아가 버린다.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평소의 자신이 전혀 생각지 못하는 일에 뛰어드는 것.
좋아하는 것을, 원하는 것을 현실로 끌어내고자 하는 마음. -
그랜드 위치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그것은 ‘마법소녀의 자질’이었다.
그리고 나라는 그랜드 위치가 인정할 정도로 그 자질이 뛰어난 여고생이었다.
때로는 자기도 모르게 S시에 거대 운석을 불러낼 정도로.
그리고 대로는, 고작 아르바이트생 주제에 무대의 주역에게 서슴없이 말을 걸 정도로.
“저기, 할머니. 할머니는 왜 아이돌을 하려는 거예요?”
“이봐 학생! 사브리나씨는 지금 무대에 오르기 전에 집중하셔야…….”
매니저가 몹시 못마땅해 하며 화를 내려 하자, 루비아이가 손을 들어 이를 막았다.
“괜찮답니다. 매니저.”
“하지만 사브리나씨. 안그래도 몸도 안 좋으신데 여기서 집중력까지 흐트러지면…….”
“귀여운 아이의 질문에 답하는 것, 이 또한 아이돌의 의무니까요.”
그 순간 나라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순간이었지만, 앞에 있는 것은 나이에 맞지 않는 드레스를 입은 노파가 아니었다. 나라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은 불타는 붉은 보석 같은 눈을 가진, 작고 당돌하며 귀여운 아이돌이었다.
“아, 이거 마…….”
“답은 간단해. 이곳에 나를 기다리는 팬이 있기 때문이야.”
가볍게 윙크를 해보인 후, 말투마저 어리게 변한 루비아이는 앞으로 나아가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면 보조 잘 부탁할게, 그랜드 위치의 후계자.”
루비아이에게 할머니에서 아이돌로 변한 게 굳이 마법이라고 설명하거나, 구구절절한 뒷사연을 밝히는 촌스러움 따윈 없었다.
그녀는 싱그러운 바람을 이끌고 계단 위를 달려, 튀어오르듯 단숨에 무대 위로 올라갔다.
다음 순간, 무대에 할머니가 올라온 것만으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열광적인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나라가 있는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무대 위에 있는 것은 루비아이라 불리며 수십년동안 현장을 휩쓴 전설의 아이돌이었다.
“이게…… ‘프로’의 마법?”
나라를 포함한 모두가 얼이 빠져 있자, 이런 광경을 몇 번이고 목격한 루비아이의 매니저는 거칠게 박수를 치며 얼이 빠진 스태프들을 향해 호통쳤다.
“자, 자! 뭣들하고 있어요. 70대 할머니가 여러분이 얼타고 있는 걸 커버치고 있잖아. 빨리 해야 할 일을 하세요!”
아이돌의 마성에 홀려 시간마저 멈춘 듯했던 무대 뒤의 시간이, 그제야 현실과 맞물려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화려한 조명과 감미로운 노래, 역동적인 안무가 한데 모여 감정을 고조시키는 그 현장은, 틀림없이 마법에 가까웠다.
***
이곳은 K국의 S시.
거대 운석이 낙하하다 허공에서 멈춘 기묘한 도시.
이것은 S시에 사는 사람들의 혼돈과, 혼돈의 이야기다.
세계가 끝나기까지.
앞으로 9,99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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