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XT창고] 그때의 내가 나에게 고맙다.2014.07.08 AM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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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때였나 언니랑 막내이모 손 잡고 시장갔다가 심청전 동화책을 발견했는데
떼 한번 쓰지않아서 키우기 수월했다던 내가 아마 처음으로 사달라고 떼를 썼던 것 같다.

워낙 열악한 환경에서 커왔기때문에 교육열을 올린다는 자체가 사치였고
동화전집은 커녕 유치원조차 다녀본 적이 없을 정도니 집에 책이란 게 있을리 만무했다.
왜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 심청전이 그렇게 갖고 싶었다.
여지껏 제대로 해 준 게 없었던 우리 엄마의 죄의식이 이모한테 발로된 것인지
많지도 않은 돈이지만 손에 쥐어줬던 기억이 난다.
몇페이지 되지도 않는 책이었는데, 초등학교 1학년, 2학년이 지나 3학년이 될 때까지 몇번이고 읽었다.

그리고 내가 또 그렇게 몇년씩 즐겨읽었던 책이 있다.
권당 두께가 약 10cm에 이르는 두 권으로 구성된 대국어사전.
그 흔한 책 한 권이 없었는데 큰 국어사전이 어찌하여 책상위에 놓여져있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때 벽지 무늬가 왜 그랬을까?하고 의문이 생기지않듯 그저 자연스러운 풍경일뿐.

애초에 나는 아주 정적이고 조용한 아이였다. 그저 혼자 조용히 지내는데에 익숙했다.
낙서를 한다든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간판글씨 읽으며 한글을 뗀다든지.
그래서 국어사전을 참 좋아했다. 언제고 얘깃거리가 풍부하게 쏟아졌다.
혼자있는 시간이 외롭지 않았다.

어떤 페이지를 펼쳐들고선 마음에 드는 단어를 고르고 그 풀이에 딸려오는 다른 단어를 다시 찾는다.
혹은 유의어나 반의어를 찾아가기도 했다.
가령, 내 이름을 따라 샛별을 찾았더니
'비너스, 혹은 루시퍼라고도 한다'는 이 풀이를 따라 비너스를 찾아가니 미의 여신으로
로마신화로는 아프로디테가 나왔고 에로스의 엄마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루시퍼를 찾아가니 타락천사라는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파생된 이야깃거리를 따라가다보면 어느 샌가 나는 이미 그리스 로마신화를 읽은 것이었고
성경을 읽은 것이었으며 그렇게 매일 빼곡한 활자들이 머릿속을 채워댔다.
어느 날은 지금처럼 비를 좋아하던 어린 나였던지라
비를 찾기 시작해서는 뜬금없이 가죽이라는 단어로 사전을 덮었다.

(그 후로도 나는 내 손으로 책을 사본 적이 거의 없다.
월간지 만화책이나 사봤을까, 읽고 싶던 책은 늘 고가였던 이유로 도서관을 애용했다.
뭐..참고서도 못 살 수준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그맘때엔 어른못지않은 어휘력을 구사하곤 했다.
사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나는 글이란 것을 전혀 모르는 맹추였다.
일기는 느낌을 써야한다는 말에 '느낌이 뭐지?'라는 물음으로
매일매일을 마지막 문장이랍시고 '느낌이 이상하였다'로 귀결시키곤 했으니.
그런 꼬맹이가 1년만에 글짓기, 백일장, 우수일기, 표어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아무래도 어린애가 부리는 단어로는 믿기 어려웠을게다.

물론 그때의 그 국어사전독서가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고치지못한 습관 중 하나인데 자꾸만 고상스런 단어를 쓰려든다.
굳이 의도치않아도 글을 다 쓰고 보면 꼭 그런 어려운 단어들만 골라다
골동품가게마냥 너저분하게 전시해놓고는 정말 보여주고싶은 물건,
그러니까 하고자하는 말이 무어인지 알 수도 없게 된다.
문장력이 아주 꽝이다.
재미있게도 또 그런 지적에는 역치가 높아 스스로가 느끼지 못하면
어디가 잘못됐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단어에 의지한 글을 쓰다보니 쓸데없이 축약적이고 함축적이다.
감정이 맨들맨들해지는 기분이다.
단어를 풍부하게 쓰는 것도 좋지만 뭐랄까..표현력이 많이 결여된 것 같다.
평소 읽는 글들도 소설이나 에세이보다는 사설위주로 읽는지라..
이제와서 말이지만 되도록 좀 더 다양하게 읽어얄 것 같다.

그래도 그때 받아든 심청전을 여러번 읽으면서 든 습관도
사전을 읽으면서 채워졌던 활자들도, 나에겐 아주 고맙다.
이마저도 못됐을 나였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댓글 : 7 개
오늘 감수성 터지네염
자기 나름의 언어니 굳이 고칠 필요가 있을까싶어요.

왜 말은 마음의 거울이고 살아온 길이라고 하잖아요.
ㅇㅇ~
좋은 밤 되세요.
한때는 대백과사전이 내 보물 1호였던 시절이 있었는데...

마구잡이로 뽑아서 펼치면 그곳엔 항상 새롭고 신기한 지식들이 있었음.
소설읽은 느낌
평소에 여왕님 글 쓰시는거 보면 고급어휘를 쓰시고 함축적인 이유가 다 있었군요...
확실히 어휘구사력이 장난아니구나 했었는데 역시..
그나저나 또 늦게 주무셨나 보네요...
오늘은 부디 편하게 푹 주무시길..
참....
볼때마다 재능이 많으신 분이구나 했는데 역시나 재능이란건 그냥 떨어지는것만은 아니라는...

잘 크셨습니다 그려....(진지)
힘들게 크셨군요.
과거의 자신에게 지금 고마워하는 모습이 부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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