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요즘 교과서에서는 알려주지 않는 유신체제가 일어나게 된 배경2014.05.03 PM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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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유신체제 성립에 대해 집중적으로 들여다 봤다.

궁금했던 것은 왜 그렇게 정치적 반대가 많았는데도 국민들이 이 유신헌법을 91%라는 찬성으로 통과시켜 주었느냐는 것 때문이다.

이 문제를 당시 독재적 공포에 국민들이 굴복한 것으로 보기에는 설명이 잘 안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박정희의 연임 출마를 가능케한 69년 3선개헌 투표에서는 총유권자의 77.1% 참여에 65.1% 만이 찬성을 했고,

71년 4월 대선에서는 박정희 53.2%, 김대중 45.2%의 득표율로 100만표가 채 차이나지 않는 결과로 박정희가 간신히 김대중을 이겼기 때문이다.

이런 국민들의 지지율이 왜 72년 10월 유신헌법개정에는 97%투표율에 91%지지율을 보냈느냐 하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69년에 있었던 '닉슨 독트린'을 알아야 한다.

닉슨은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의 손에'라는 신고립주의를 천명하며 월남과 동남아에서 철군을 계획한다.

이 선언과 함께 동남아 일대에서는 공산주의 통일전선이 급속히 팽창해지면서 인도차이나의 공산화 도미노가 기정사실화 됐다.

이때 주한미군의 철군문제가 한-일간에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워싱턴의 메세지는 혼란스러웠다. 분명한 것은 어떤 형태로든 철군은 피할 수 없다였다.

가장 흥분한 것은 북한이었다. 70년중반에 들자 북한은 전시체제로 바꾸기 시작했다. 전 북한 주민이 전투조로 편성되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71년에 닉슨이 중공을 방문하기로 발표한 것이다.

미-중간의 데탕트라는 확실한 기조가 잡히자 생각지도 못한 국지전이 발생했다.

바로 71년 10월 5일에 터진 인도-파키스탄 전쟁이었다.

여기에서 중공은 파키스탄을, 소련은 인도를 지지했다.

당시 박정희-김종필라인은 북한이 미-중데탕트 과정에서 휴전선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휴전선 부근에 북한 진지가 과거 50개 였는데 불과 몇개월 사이에 500개로 늘어났고, 이때 북한은 '전투교리'를 바꿨다.

이른바 '20일 전투'라는 속결전이 그것이었다.

만주군관 학교에서 전쟁교리를 배웠던 박정희는 북한이 미-중데탕트와 인도-파키스탄의 중-소갈등을 이용해

전면 남침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박정희는 71년 선거와중에도 끊임없이 워싱턴에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늦출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미 의회의 입장은 요지부동이었다.

당시 미 하원외교위는 북한이 남침을 하더라도 한국군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그건 한마디로 어처구니 없는 판단이었다.

당시 한국군의 무기라는 건 2차대전때 쓰던 고물들이 대부분이었다.

북한은 닉슨의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의 손에'라는 독트린에 힘입어 71년초반에 전 병력을 전투태세로 바꾸었고,

해상에서 우리 어선에 무차별 포격을 가해 수십명의 사상자를 냈다.

동시에 휴전선 일대에서 수백발의 기관포 사격을 가해왔다.

20여명의 남파 간첩단이 그 사이에 적발됐다.

한마디로 북한은 도발의 수준을 확대시키는 중이었다는 이야기다. 한판 붙기 위해서..

여기에 중동사태가 터지면서 오일가격이 급등했다. 20%이상의 유가인상은 피할 수 없었고 생필품 가격도 급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신민당 김대중은 선거에서 무어라고 주장했던가..

"예비군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한국의 안보는 주변 4대강국의 질서에 맡겨야 한다"

이랬던 김대중은 45%의 득표율을 바탕으로 연일 박정희체제를 '독재'라고 공격했다.

학원가에 침투한 간첩단의 통일전선전술은 교련반대데모를 조직해 냈다. 매일 수천명의 학생들이 데모를 했다.

박정희는 대통령에 당선된 71년 10월 '국가 비상조치'를 선언한다. 동시에 국가 보위법 제정안을 국회에 냈다.

여기에는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인정하는 안이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 드골체제에서도 있었던 것이었다.

한마디로 준전시체제를 예비한 방안이었다.

그렇기에 당시 언론인연합회는 이 비상조치에 대해 조건부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신민당은 농성으로 거부했다.

이때 박정희는 "국민의 기본권 제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이 보위법을 통과시켜 달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중대한 결심'을 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이번엔 신민당과 김대중은 거리로 뛰어 나가 데모대를 조직했다.

72년 비상계엄은 그렇게 선언됐고, 국회는 그렇게 해산됐다.

그리고 10월 유신헌법은 국민투표에 붙여졌고 97%투표율에 91%찬성율로 통과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설명하는 내용은 인터넷 어디에도 없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댓글 : 15 개
이뭐 진실인가
내용만 보면 그럴싸하긴한데
님 랩이 11이라 글에 신뢰가 안가네요
혹시 다른싸이트에서 글퍼오신건가요?
일베라고 애국보수들 모여있는 싸이트있는데
애새끼들 모여서
국가에대해 글싸지르는
보수가고 칭하는
수꼴통들
글 읽다보면 갈수록 박정희를 옹호하는 내용이네
지랄 똥 싸지 마라
극프님/
애국보수가 눈에 확 뜨길래 세로드립인줄 알았는데 아니네요ㅋㅋㅋㅋ
허위사실 유포하고 있네 ㅋㅋㅋㅋ
네 다음일베
어제 점심부터 저녁까지 박원순 시장에 매달리더니만..
하일!간베스트!!
하일! 간베스트!
아.. 역사공부 일베로 하지 마라. 전문에 민족의 평화통일이념을 규정한게
유신헌법이여. 뭐? 준전시체제를 예비한 방안? 뇌수막염이라도 걸렸나.
-_-;;;
집중으로 뭘 들여다 봤는데?
니똥꼬?
ㅋㅋㅋ 내용이 재미있어서 몇가지 질문 드림.

1. 애초에 박정희 자체가 남로당 가입전력이 있었고,
쿠테타 일으킨 이후, 북한에서 박정희에게 밀사를 보냈던 사건은 기억하는지.
그 밀사를 간첩으로 몰아서 죽인 사건은 어떻게 설명할건지?

2. 박정희가 쿠테타를 일으킬 당시 몇번의 쿠테타 일정을 조율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민주운동이 나올것을 예상하고 그것을 진압한다는 핑계로 쿠테타를
일으키려다 정작 나라가 너무 조용하자 그냥 쿠테타를 일으킴)
이건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애초에 쿠테타의 최 상위 지휘층은 박정희가 아니었고
박정희는 몇번의 연기끝에 순번이 돌아와 쿠테타의 주체가 되었었음.

즉 애초에 박정희가 쿠테타를 일으킨 목적자체가 설명이 안되고
맨처음의 주체자도 아니었으니 본인이 처음부터 만든 쿠테타도 아니란 소리임
그거 설명쫌.

3. 적은 표 차이로 김대중 전대통령한테 밀릴뻔한 사건은 진실맞음.
그래서 그 이후에 김대중 전대통령이 일본에 방문했을 당시 사람을 보내 납치
감금한 후, 그 사실을 전해들은 미국의 압박에 의해 풀어준 사건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쓰자면.
박정희가 쿠테타로 집권하고 얼마 되지 않아 저지른 통화개혁. 이거 어떻게 생각함?
삼권분립을 무시하고 국회 해산후 계엄령 상태의 투표가 과연 민주주의에 기초한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가? 답은 아니오. 다까끼 마사오
마이피더럽히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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