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 2011. 08. 01. 정확히 10년전 오늘2021.08.01 AM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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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저런 사정으로 기존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기존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기로 했다. 기존에 하던 일은 남들에게 떳떳하게 말하기도, 평생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만두고 나서도 한 달 급여를 더 받기로 했으나,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사는 나로서는 일을 쉬고 느긋하게 직장을 구하기 어려웠다. 앞으로 뭘 먹고살아야 하나 하는 미래에 대한 고민을 그리 길게 하지 못하고 바로 다음 일을 구해야 한다. 그럴 금전적인 여유가 없다. 이쪽일을 다시 할 생각은 없으나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앞으로 일은 전혀 다른 필드에서 하게 되겠지만, 기존에 하던 업무들로 키워진 내 능력을 살릴 수 있는 일로 알아봐야 한다. 신입사원 시장에서는 많다고 할 수 있는 나이 29세. 그동안 4대보험이 전혀 적용되지 않은 일자리들 만을 전전했기 때문에, 사회생활한지는 꽤 됐지만 새로 취직을 하면 신입사원이다. 그동안 돈만 쫓아 일을 해 왔는데, 결과적으로 돈도 커리어도 모두 쫓지 못하고 그들을 쫓아 내기만 했다.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세울 만한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신입사원이라고 하기엔 조금 많은 나이이지만 어떤 일을 하든 잘 할 근거 없는 자신감은 충만하다. 뭘 하든 간에 잘 할 거다. 나는 똘똘하니까.


 그러나 어떤 일을 하며 먹고살아야 할까. 혼자 나와서 산지 이미 몇 년째. 하지만 다시 집에 들어간다는 선택지는 아예 없다. 집에 들어가면 당장 몸은 편하겠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을 거다. 여자친구도 보기 불편해질 것이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혼자 살고, 머지않은 미래에 결혼도 해야 한다. 적어도 내년엔 결혼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훌륭한 직장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생각하는 금액 이상의 월급은 주는 곳, 망하지 않을 것 같은 곳으로 직장을 잡아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앞으로의 전망도 나쁘지 않아야 한다. 월급도 이백 이상은 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무슨 일을 해야 앞으로 쭈욱 그 일을 하며 먹고 살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직업을 여러 번 바꿨다. 나와는 맞지 않는 일들이었고, 같이 일한 분들은 모두 본인의 성취는 훌륭했으나 나를 키우는 것에는 큰마음이 없으셨던 것인지, 나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런 케어를 받진 못했다. 일을 할 때마다 그 필드에서의 1등인 분들만 만났고, 정말 대단한 분들과 일을 했었는데, 그분들과 함께 할 때의 그리 또이또이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 안락한 생활에 젖은 것일 지도. 그분들에게 더 많이, 더 잘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 이제서야 든다. 아쉽다. 구직 사이트를 들여다보며, 올라온 구인 광고 중에 나를 뽑을만한 곳이 어떤 곳이 있을까 생각을 하며 천천히 들여다본다.


 사실 하고 싶은 일은 몇 가지가 있으나 전부 나 정도의 교육 수준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하고 싶은 것을 쫓기엔 여러 가지 상황이 여의치 않다. 배울 수 있던 그 시기에 배울 수 있는 상황이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밀려온다. 핑계로 삼기에 참으로 적절한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렇게 핑계를 대고 남 탓을 해 봐야 현실에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당연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이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나의 그런 상황에서 남 탓을 하는 것은 너무나 쉽고 편리한 일이다. 이런저런 외부 영향이 있었지만 그런 상황에서 공부를 하지 않은 건 결국 나인데도, 결국 화살을 부모님께 돌린다. 이 나이를 처먹고도,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혼자 생활한지 10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기의 부모를 탓한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도, 나약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런 핑계를 만듦으로써 내 자존감을 조금이나마 회복하려 한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흙수저도 안될 만큼의 형편이었지만 부모님도 사람이고, 나름 열심히 나를 양육하셨던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29살의 못난 아들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또 부모님을 탓하고 원망한다. 자신을 탓하지 않으려, 미워하지 않으려 화살을 그들에게 돌린다. 사실은 내가 나태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나의 외면이 어쨌든 간에 나의 내면은 그렇게도, 참 많이도 못났다.



 평생이라고 해 봐야 경제활동을 한 지는 몇 년 되지 않지만, 돈을 벌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24살 즈음부터 계속 사람 상대하는 일을 했었고, 그것이 싫지 않았다. 꽤 잘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고 즐겁다. 상대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맞장구치고 상대의 기분에 맞출 수 있고, 대화하는 상대의 말투, 표정 분위기도 얼추 읽을 수 있을 만큼 눈치도 빠르고 선을 넘지 않는 농담도, 조금 지저분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농담도 잘 하는 편이다. 이쪽 일, 사람 상대하는 일을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전화나 인바운드 쪽 일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그쪽은 성과에 대한 스트레스도 심하고, 감정노동자는 내 성격상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사람 상대하는 일은 분야가 너무나 넓다. 하는 일이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잡 인 일은 애초에 대상에서 제외한다. 그렇다면 영업이다. 나는 그쪽 일이 잘 맞는다.


 어떤 영업을 해야 할까하는 구체적인 생각이 든다. 영업 자체는 분야가 너무나 넓다. 영업이 필요하지 않은 회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들어오는 발주를 처리하는 데에도 영업은 필요하다. 자동차, 보험영업도 영업이고, 반도체 파는 것도 영업이다. 그러나 반도체 회사 같은 큰 회사에 들어갈 생각은 이미 없다. 큰 회사에 들어갈 시간… 공채시즌까지 먹고 살 수도 없고, 만약 실패하게 되면 그 이후의 삶이 너무도 팍팍해진다. 오늘 벌지 않으면, 내일은 굶어야 할 형편. 자…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먼저 소거해본다. 사회적으로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일은 하지 않고 싶었다. 이미 그런 일은 너무 오래 해왔다. 자동차, 핸드폰, 금융, 학원 등이 제외됐다. 밤에도 일을 안 하고 싶었다. 호프집과 밤에 하는 여가, 유흥 관련한 일들이 다시 제외된다. 해본 일도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부동산, 술장사를 제외했다. 이 정도 뺐으면 하기 싫은 일들은 많이 뺐다. 그러나 너무 많이 뺐을까. 눈에 잘 보이게 노출이 많이 되는 광고 중에는 특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보이지 않는다. 친구가 본인이 잘 하고 있던 가구 영업을 해보는 건 어떠냐 물어봤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곧 죽어도 쫀심은 남아있어서 친구 밑에서 일하기는 싫었다.

‘마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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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컴퓨터 쪽에 재능이라고 해야 할까 사용하는 데에 장점이 있었다. 컴퓨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부터 뚝딱뚝딱 거리며 이런저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즐겁기도 했다. 컴퓨터는 앞으로 작아지지 않을 시장이라 생각했다. 그전 직장에서 업무에 필요해서 서버와 네트워크 관련한 학원을 다닌 게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 쪽 일을 찾아보니 꽤 많이 나온다. 그러나 조건이 눈에 차진 않는다. 대부분 연봉 2천 선, 나는 2400은 받아야겠다. 그 이하면 일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희망연봉을 포함하고 있는 정성스럽게 쓴 이력서를 보낸다. 이력서 양식엔 적을 것이 많지 않았으나, 자소서 등은 알차게 꽉꽉 채워서 쓴다. 중간중간 구직 사이트의 이력서 양식이 아닌, 자사의 이력서 양식을 요구하는 회사에도 이력서를 수정하고 다시 쓰는 수고를 들여가며 지원해본다. 이런 회사에서는 사람을 뽑을 때 스펙을 볼 테니, 전졸에 지금까지 경력이랄 것도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나를 뽑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을 당연히 했었으나, 그런 수고를 들이는 게 싫지 않았다. 내 시급은 현재 0이니까. 내가 무엇을 하든 그냥 있는 것보다는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생활이, 구직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차 있었다. 대책 없이 긍정적이었다. 당장 얼마 되지 않는 모아놓은 돈이 떨어지면 굶어야 하는데, 뭐 굶기야 하겠어? 하는 대책 없이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았었다. 눈에 보이는 업체 모든 곳에, 출퇴근 한 시간 이내 업체에는 이력서를 넣었다. 다행히 넣을 곳은 충분했고, 매일 검색할 때마다 늘어났다. 왜 취업난이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사람 구하는 곳이 이렇게 많은데.


 이력서를 넣기 시작한 지 그리 오래지 않아 첫 번째 업체에 면접을 봤다. 그때 내가 역삼동 원룸에 살았었는데, 면접 본 곳이 송파 쪽, 경찰병원 언저리였다. 서버를 납품하는 영세업체였다. 그러나 회사 문 앞에 섰을 때 받은 느낌은 회사 같지가 않았다. 오피스텔의 한 호수를 쓰고 있는 작은 업체. 지원할 때에도 작은 회사인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작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거의 내 방보다 조금 클 정도의 작은 사무실에 사람이 세명이나 앉아 있다. 내 방이 혼자 살기엔 굉장히 크긴 하지만, 어쨌든 첫 번째 업체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열약했다. 면접 보시는 분이 의욕에 차 계신 것도, 어떤 자신감에 차 있는 것도 굉장히 좋아 보이긴 했으나 당황스러운 감정을 숨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가 당황스러워하는 것을 읽었는지 면접 진행하던 와중에 지금 쌓아놓은 돈 만으로도 10년 동안 여기 직원들 급여는 충분히 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사람은 참 좋아 보였다. 어차피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에 입사할 스펙도, 공채를 기다릴 상황도 되지 않는다. 모아놓은 돈으로는 한 달 사는 것도 빠듯하다. 가능한 한 빨리 취업을 해야 한다. 어떻게 면접을 봤는지도 모르겠는데 다음날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급여가 내가 바라는 것과 차이가 있었다. 그놈에 회사 내규에 따름. 그런 작은 회사에 내규가 어디 있나… 면접 보기 전에 전화로 면접 보러 오라고 할 때 그런 것도 이야기해 주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튼 첫 면접을 보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조건이 맞지 않아 출근은 하지 않았지만 합격 전화를 받아서 그런 것 같다. 일을 구하는 내가 마냥 을은 아니라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됐었다.


 이주… 삼주 정도 동안 면접을 참 많이도 보고 다녔다. 요즘만큼은 아니지만 참 더운 여름이라고 생각했다. 대낮에 그렇게 돌아다니니 더울 수밖에. 하루에도 면접을 두 개 본 적도, 삼일 연속으로 본 적도 있었다. 이력서는 몇 개를 넣었을까 헤아릴 수 없지만 대충 느낌상은 이백여 개 이상 넣지 않았을까 싶다. 확실히 구직자에 비해 구인자가 적은 시장이었다. 의자는 적고, 서있는 사람은 많았다. 작은 회사 면접을 볼 때도 다른 지원자와 마주치는 경우도 잦았다. 매우 뻘쭘한 상황. 그러나 나는 어쨌든, 서류만 통과하면 면접은 문제도 아니라는 그런 마음으로 면접을 보고 다녔다. 나를 뽑지 않는 건 너희들의 실수고 잠재적인 손해라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너희들이 고작 몇백때문에 날 일 시키지 못해서, 그 돈 아끼려고 나를 일하게 할 수 없었지만  나는 고작 그 몇백의 몇 배를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이라며, 브랄두쪽말곤 가진 게 없는 놈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다녔다. 실제로 면접을 봤을 때 떨어질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대충 반 정도? 면접 합격 전화는 참 많이 받았다. 몸값이 내가 바라는 것과, 그들이 정한 것이 맞지 않아 출근을 하진 않았지만. 실제로 아마 나보다 훨씬 낮은 금액에 취업한 사람들이 훨씬 많았을거다. 나는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리 많지 않은 금액인 월 2백에 목을 매고 있었다. 그 이하에 출발한 사람들이 월급을 올리기 얼마나 힘든지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2백에서 시작한 사람은 연 10%씩 오른다고 가정해도 2400이 되는 데에 2년이나 걸린다. 그러나 연 10% 올리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나는 이름만 대면 아는 회사에 취업하는 게 아닌 이상 작은 회사에서는 내 상황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 금액이 연 2400, 월 200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꼭 받아낼 생각이었다. 이제 정말 굶어야 하는 상황이 되기 전까진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4대보험을 뗀 적이 없어 몰랐으나 2400은 실수령이 아닌 것을 합격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럴 줄 알았으면 2600 불러볼걸.


 면접을 보고 다닌 지 한 2주? 한 회사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한다. 외견상 보이는 회사 분위기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정도. 면접을 본 분이 조금 나이가 많아 보였다는 점이 특징일까. 면접은 그리 길지 않았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걸렸지만 면접은 10분 내외로 끝났다. 서로 질문할 것이 많지 않았다. 날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 하셨는지 그전에 하던 일들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물어 보고,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대략적으로 설명을 해 주셨다. 희망 연봉에 대해서도 특별한 말씀 없이 이 정도면 적당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도 딱히 물어볼 것이 없었다. 다만 나는 면접 다니면서 꼭 물어보는 질문이 있었는데, ‘밥을 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점심을 제공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연봉 백만 원 이상은 차이 난다고 보는 게 맞다. 그때 당시보다 지금은 물가가 훨씬 올라 지금 차이는 그때보다 훨씬 크다. 그때 당시엔 5천 원으로도 먹을 것이 많았으나, 지금은 체감상 평균 8천 원 정도의 점심을 먹는다고 치면, 1달 21일 근무일로잡고 한 달 16만 8천 원. 일 년으로 잡으면 2백만 원이 차이가 난다. 나는 꼭 밥을 주는 회사에 다니고 싶었다. 돈 아끼려 삼각김밥에 컵라면을 먹는 일은 없고 싶었다. ‘밥은 주시나요?’ 하니 호탕하게 웃으시며 ‘그럼요 주죠 밥 먹자고 하는 일인데’ 라는 시원한 답이 돌아온다. ‘필요하면 저녁도 줍니다’ 라는 말도 덤. 면접을 많이 보러 다녔지만 오버타임 근무에 대해 걱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야근 좀 하면 되지 까이꺼. 이 전에 하던 일은 주 6.5일 근무에 하루 평균 근무시간이 16시간이었는데. 군대에서도 행정병이었는데 야근은 밥 먹듯이 했어서 근무시간에 대한 불만이나 걱정은 전혀 없다. 일 시킨만큼 돈만 준다면 문제없지 않은가. 식대를, 심지어 퇴직금을 월급에 포함한다는 회사도 있었는데, 면접 볼때 그걸 알고 나서는 그런 회사에서 오는 전화는 받지도 않았다. 


 내가 바라는 수준대로 돈도 맞춰주고, 점심밥도 준다. 필요하면 저녁밥도. 내 입장에서는 더 이상 따질 게 없었다. 애초에 회사에 대해서는 면접 보러 가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서 회사에 대한 궁금증은 없다. 구체적인 업무에 대해서는 무슨 일을 하든 일이야 내가 배워서 하는 것이고, 잘 할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뭔 깡으로 나를 뽑았는지 알 수가 없다. 회사에 궁금한 거 있어요? 하는 질문에 ‘밥은 주시나요?’ 하는 놈을. 여튼 오가는 길이 무색할 만큼 면접은 짧게 끝났다. 그리고 미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에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할까 면접 보는 위치가 강남 쪽은 서초동에서 송파동까지 굉장히 넓게 퍼져 있었는데, 가산 구로 쪽엔 점이 굉장히 좁게 찍혀있었다. 면접 보고 다닐 때에 그때 당시 여자친구(지금 와이프)는 왠지 가산에서 일하게 될 것 같다고 했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다. 가산동 마리오아울렛 옆에 있는 큰 빌딩의 한구석을 사용하는 업체. 그 업체에 이제 다음 달부터 출근이다. 7월의 초중순 즈음에 면접을 봤었는데 출근일은 8월 1일부터. 그전에 담당자가 휴가라고 좀 여유 있게 출근일을 잡았다. 본인이 휴가를 가면 어차피 일을 할 것이 없다며. 조금 시간이 멀긴 했지만 밥도 주고 돈도 맞춰준다는데 조금 늦게 일하는 게 뭐가 문제냐. 20일 남짓 동안은 마음 편하게 놀면 됐었다. 마음 한켠에 출근일이 너무 멀다는 그런 불안한 생각이 있었지만, 일단 정해지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혹시 뭐 안돼도 다른 회사 가면 되지 하는 자신감도 역시 있었다. 그 뒤로도 취업하셨느냐 혹은 출근하라는 전화를 두어 군데에서 받았으나 전부 가지 않았다. 면접은 이미 넉넉히 봤다. 출근이 결정된 이곳보다 좋은 곳은 많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합격 통보를 받고 얼추 2주가 지나고, 슬슬 불안한 마음이 커져가고 있을 때 즈음, 불안해서 확인해 보고 싶으나 전화해서 물어보는 건 넘나 없어 보이기 때무네… 전화를 먼저 해보진 못 하고 있었는데, 감사하게도 그런 걱정을 할 때 즈음, 친구네 커플이랑 커플끼리 놀러 갔을 때 전화를 받은 기억이 난다. 출근 일정에 변경이 없느냐고.


 그게 벌써 10년 전이다. 정확히 10년 전 오늘 2011년 08년 01 자로 입사해서 어제까지 만으로 10년을 채웠고, 오늘로 11년째가 시작이다. 1일이 일요일이라 감흥은 조금 덜 하지만 벌써 10년째 한 회사에서 주는 월급으로 밥 먹고, 저금하고, 아이도 키우고 있다. 말 그대로 인생의 1/4를 한 회사에 다녔다. 회사 안에서의 나의 위치는 매우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바뀌었다. 지금은 나름 회사에서 인정도 받고, 있는 위치도 많이 달라졌다. 그동안 몇 사람이 들어왔고, 몇 사람이 나가기도 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구관이 명관이었다. 회사에 대해 할 말도, 아쉬운 것도 많으나 기본적으로는 애사심을 갖고 일하고 있다. 이래저래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회사 뭐 같아서 때려쳐야겠다 말하면 이구동성으로 타의로 나오게 되기 전까진 그냥 다니라고 말을 하며 본인의 이야기를 해 주는데, 그럴 때마다 고맙기도 위안이 되기도 한다. 10년 동안 개인적으로도, 회사에서도, 국가적으로도, 전 세계적으로도 참 많은 일이 있었지만 나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생각해 보면 자답하기 퍽(fuck 아님… 어… 그런데 의미가 통하기도 하네…?)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최근 들어 종종 생각하지만 이상적인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도 멀리 있고 그 간극은 좁혀지지 않고 있다. 회사 면접 볼 시절 쓰던 자소서엔 당시에 10년 후에 나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질문이 어떤 양식에든 항상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질문의 답인, 10년 후의 나는 이렇다. 여전히 이쪽 일을 하고 있고, 조금 더 잘 하게는 되었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일적으로도 그렇거니와 개인적으로도 이렇게 부족하고 이렇게 성숙하지 못했다. 나아지긴커녕 되려 훨씬 좋지 않게 된 부분도 있다. 내가 나갈 때도 구관이 명관이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고 그렇게 되겠지만 불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앞으로 또 다른 10년 후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살아있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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