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보며 나를본다] 냉정과 열정 사이 2021.08.23 PM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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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인 일본어 제목도, 영어 제목도 동일하다. 냉정과 열정 사이. Between calm and passion. 굉장히 또렷하고 강렬한 제목이지만 제목의 냉정과 열정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는 책을 보기 전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읽고 난 후에도 냉정과 열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각각의 상상과 생각에 끼워 맞춰야 한다. 냉정과 열정이 남주와 여주의 뜨거웠다가 차자워지는 그런 둘의 관계를 말하는 것인지, 여주는 냉정 남주는 열정 같은 방식으로 각각의 개인을 말하는 것인지, 혹은 그들이 서로에게 닿아있을 때와 닿지 않아있는 때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한권 한권을 냉정 혹은 열정으로 불러야 할지. 어쨌든, 제목도 참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


 기획부터 매우 남다르게 기획된 책이다. 하나의 이야기지만 두 권으로 구성된 이야기. 두 권이 합쳐 하나로 완전해진다. 마치 남자와 여자같다. 굳이 이렇게 하지 않고 다른 책들처럼 한 챕터 한 챕터 화자를 다르게 하더라도 이렇게 구성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두 권으로 나누는 비용을, 제본의 수고를 들였다. 한 명의 이야기에, 시간과 감정의 흐름에 집중하라는 의미인 듯하다. 흔하지 않은 방식이지만, 이 이야기에 정말 어울린다. 한 챕터씩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봤다면 이렇게 재미있게, 즐겁게 보진 못했을 듯. 이런 책을 언젠가 쓸 수 있다면 좋겠다.


 남자의 시점에서의 이야기는 남자 작가가, 여자 시점에서의 이야기는 여자 작가가 썼다. 집필에 2년이나 걸렸다고 하는데 나는 이틀 만에 다 읽었다. 외국 책 볼 때마다 번역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이 책은 번역을… 정말 잘 해놨다. 번역한 문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될만한 수준. 근래 거의 잘 쓰이지 않는 단어이지만 그 상황에 맞는 그런 단어들을 적절하게 사용해 가독성과 몰입도를 더욱더 높인다. 여자 이야기 Rosso는 여자 작가가, 남자 이야기인 Blue는 남자 작가가 쓴 것처럼, Rosso는 여자 번역가(김난주 님)가, Blue는 남자 번역가(양억관님)가 번역했다. Rosso의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책은 거의 모두 김난주 님이 번역한다고 하는데, 이쯤 되면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를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김난주 님의 문체를 좋아한다고 봐도 될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번역에 대해 이야기가 많지만, 원문을 읽지 못해 원문을 얼마나 잘 살리는지는 모르겠으나, 매우 읽기 편하게, 가독성 좋게 번역이 잘 됐다. 두 권의 책 전체에 걸쳐 읽다가 읭? 하며 번역이 문제가 된 부분을 의식한 적은 한 번뿐이다. 그리고, 작품이랑 큰 상관은 없지만, 김난주 님과 양억관님은 실제 부부 사이다.


 이 책을 처음 본건 군대 훈련소에서였다(본인…. 04군번… 곧 04년생이 군대에 갈 텐데… 본인… 04군번…). 훈련받다가 왼쪽 무릎이 나가서 의무대에서 외부 병원을 들락거리며 거의 한 달 정도 시간을 보냈던 적이 있다. 거기 있는 환자 중엔 훈련병도 있었고, 기간병도 있었는데 다들 환자니 뭐 딱히 군기를 잡는다거나 청소 같은 내무 생활을 시킨다거나 하는 것도 굉장히 한정된 상황에서만 진행했다. 나는 무릎이 맛이 가서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아프고 불편해서 오만상을 쓰니 그나마도 거의 없는 그런 일도 거의 열외. 거기 있는 다른 사람들도 그랬겠지만, 정말 너무 심심했다. 얼마나 심심했냐면, 기독교를 싫어하는 무신론자인 내가 성경을 다 읽을 만큼 심심했다. 성경을 읽은 이유는 딴 게 없다. 나는 너무 심심했고 시간은 대책 없이 많이 남았었다. 그리고 성경은 거기 있는 몇 권 안 되는 책 중 하나였다. 거기에 있는 책은 모두 다 읽었다. 어차피 책 읽는것 말고는 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 책도 거기에 있었다.


 그때 이 책을 읽기에 나는 너무 어렸었던 것 같다. 나에게 너무 일찍 온 책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때 당시엔 그리 기억에 남는 부분은 없었지만, 책의 두 부분만은 머리에 강하게 박혀 있었다. (텍스트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마빈과의 섹스는 만족스러웠다.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라는 부분과 ‘피렌체의 두오모’. 섹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데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 같아서 기억에 남았다. 만족한 사람이 이렇게 건조하게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은데. 아니면 단순히 책에서 섹스가 처음 언급되는 부분이라 기억에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땐 그럴 나이었다. 혈기 왕성하지만 풀 수는 없는, 갇혀있던 시절. 그때엔 별 감흥 없던 문장들이, 등장인물의 상황들이, 그들이 느끼는 모든 감정들이 그때와는 다르게 매우 크게 내게 다가온다. 20년 전에도 물론 재미있게 읽었지만 지금과는 느끼는 감정이 완전히 다르다. 그땐 그냥 재미있네 정도였다면 지금은 몇 번이나 손에서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며 한숨을 쉬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런 사랑 이야기는 읽는 사람에게 어떤 공감을 이끌어내기 그리 어렵지 않은 장르기도 하지만 이 책은… 나와는 공통점이란 게 없는 이야기인데도 많은 공감을 하게 만든다. 느껴지는 감정이 벅차다.


 책의 대략적인 내용과 진행이 어떤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15년… 거의 20년 전에 읽은 책이라 새세한 이야기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야기의 큰 줄기는 기억이 난다. 남녀가 헤어지고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만나게 되는 이야기. 만남보다는 헤어진 시간 안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이야기. 이 책이 워낙 센세이셔널하게 많이 팔려. 책(영화 이후엔 더욱 더) 이후 피렌체의 두오모 방문자가 많이 늘었다고 한다. 방문자가 늘어난 만큼 낙서도 많이 늘었다고 하고… 한국어 낙서도 많아졌다고… 주인공들의 20대 후반의 이야기로, 처음 읽을 때엔 주인공들이 나보다 훨씬 연상이었지만, 지금은 나보다 열 살 이상 어리다. 세월아…


 무엇을 먼저 읽으라 어디에 쓰여있진 않지만, 왠지 여자 시점에서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 로쏘부터 읽었다. 이야기 전체로 보면 잘 한 선택인 것 같다. 로쏘의 전반부 문체 자체가… 글 쓴 사람이 걱정될 만큼 굉장히 건조한데, 그랬던 문체가 갑자기 따뜻하게 극적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부터 진짜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 몇 줄, 한 문단 사이로 글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많이 달라진다. 앞뒤로 다시 훑어봐도 달라진 것들은 많지 않은데, 주인공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인지 같은 울림을 느끼는 것인지 문장들이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이 썼다고 생각해도 믿을 만큼.


 블루와 로소는 쓴 사람이 다른 만큼 많이 다른 톤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야기 하나가 냉정, 하나가 열정이라면 이쪽이 열정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을 만큼 주인공의 감정은 초반부터 확실히 전달된다. 여주인공 아오이에 대한 열정뿐만이 아니라 일에 대한 열정도. 남주인공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곳에만 머물러있다. 5월 25일. 피렌체의 두오모에. 어느 남자나 모두 그렇겠지만 어느 정도 나를 투영할 수 있는 캐릭터여서일까. 그의 인생을 훔쳐보는 것이 즐겁다. 그가 느끼는 감정에 공감하고, 그에게 나를 투영하고, 다음 페이지를, 책에는 없는 그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즐겁다.

 

 조연들도 조연이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감정을 내게 던져 준다. 아오이의 현재 남친인 마빈도, 준세이의 현재 여친인 메미도. 특히 마빈이 아오이를 잃고 나서 걸려온 전화에 ‘아오이, 없어’라고 말하는 부분은 정말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개인적으로 꼽을 가장 많은 감정을 일으킨 부분…


 뭔가 시간 여행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정말 즐겁게, 재미있게 읽었다. 한 권 한 권을 읽는데 시간도 두어 시간 정도로 그리 길게 걸리지도 않고… 시간이 또 얼만큼 지난 언젠가 다시 꺼내 읽을 듯하다. 그렇게 머지않을 지도.




댓글 : 8 개
에쿠니 가오리 섬세하죠
한창 때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오래 되어서 사건 하나하나 다 기억 나진 않지만.. 아련하게 재밌었어요.

츠지 히토나리는 후속타가 없어서 아쉽네요.
로쏘의 결말부분이 남겨준 아쉬움이 블루의 결말부분에서 감동으로 왔었던거로 기억이 있네요.
그쵸 그래서 로쏘부터 읽어야 함미다! ㅎㅎㅎ
이거 대히트치고나서 츠지 히토나리가 비슷한걸 한번 더 썼습니다.
츠지 히토나리가 일본 남자 파트를, 공지영이 한국 여자 파트를 쓴 연애소설이었죠.
큰 기대를 가지고 구입했지만...
냉정과 열정사이가 데빌메이크라이3라면, 저 소설은 데빌메이크라이2 였어요.
영화도 괜찮았고 OST도 좋아하는데 영화는 블루레이, OST는 LP로 내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남자라서 그런지 '남자'쪽 시선은 이해하기가 쉬웠는데, '여자'쪽 시선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저랑 같은 군번에 저도 군대서 사서 봄..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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