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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시작] 판타지 소설 좀 봐주실분!2015.10.19 PM 11:18
꿈을 넘어,
겹겹이 쌓인 세월의 층을 넘은,
그곳에선 파문이 일었다. 웅웅대던 메아리들은 얽히고 설킨 기억을 메이머에게 보여 주었다. 창공에서 흐드러지는 반사광이 금빛 비늘처럼 쏟아졌다. 눈을 뜨기 힘든 빛무리, 이글거리는 광휘에 메이머는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불타는 날개 뒤로 태양을 등진 황금 갑주의 사내가 있었다. 그의 표정은 지독한 염세와 애증이 담겨 복잡미묘했다. 사내는 알몸으로 부유하는 여인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계적인 성교, 사랑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애처롭게 떨어지는 붉은 꽃 사이로 그녀의 눈물이 보였다.
메이머가 본 환상들은 거미줄처럼 갈라지더니 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단풍 씨처럼 사즈분히 날리던 찌꺼기들은 심상에 다른 장면을 보여 주었다.
빠르게 다가오는 점. 빛줄기의 진로에는 가슴팍이 있었다. 푸슉- 살을 헤집는 검날의 마찰음이 들렸다. 끔찍한 고통, 메이머는 떨어지면서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맹수 같은 눈으로 쳐다봤다. 무엇에 화난 걸까? 그의 날개는 이전보다 더 맹렬히 타올랐다. 그리고 보았다. 자신의 몸이 찢겨 나가는 것을, 갈래갈래 흩어진 금색의 신체 파편들은 나비처럼 비산했다.
먼지가 되어 추락한 곳은 붉은 바다였다. 양수처럼 포근한 온기에 얼마나 쉬었는지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여명의 눈, 황혼의 눈동자였다.
추방당한 메이머의 의식은 빠르게 복귀하고 있었다. 여느 꿈이 그러듯 여행의 말미는 항상 흐렸다. 그것을 저어라도 하듯 귓가에 속삭이던 메아리가 뚜렷했다.
"미안하구나. 아이들아. 너희가 깨어나는 날 신비와 환상은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네가 바라던 세상을 다시 되돌려주마."
"시스티나."
메이머 스스로는 몰랐지만 중얼거렸다. 땀에 흠뻑 젖어 깬 그 날 그 아침에...
1
입이 쓴 아침이다. 메이머는 콧잔등을 간질이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간밤의 꿈을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불이 축축한 걸 보면 유쾌한 꿈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지 않기를 바라던 날이 와서일까. 쩝- 메이머는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전날 떠놓은 물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답답한 가슴이 조금은 풀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멍하기만 했다.
메이머는 이불을 박차며 일어났다. 실내의 텅 빈 침대는 며칠째지만 낯설기만 했다. 아침마다 왁자지껄하던 동료들은 오팟나즈가 되기 위해 숙소를 떠났다. 메이머도 오늘 긴 수행자 생활을 뒤로하고 메티스교의 정식 일원이 되는 날이다.
메이머는 그저께 받은 나랏나즈복을 펼쳐 보았다. 푸른 원피스였는데 아랫단은 무릎 위까지 오는 길이었다. 날렵한 상의와는 달리 하의는 헐렁했다. 잦은 전쟁 때문일까? 군복이 유행이라더니 가슴에는 가죽 덧대(Leather Pad)가 달려 있었다. 덧대는 분리도 가능했다. 이는 가죽 갑옷을 합친 실용적인 복장이었다. 메이머는 허리띠를 매고는 거울을 보았다.
후우- 메이머는 옷에 새겨진 문장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문장에는 노란색 바탕에 검을 움켜쥔 독수리가 있었다. 이것은 일곱 신 중 수장인 메이나드의 상징이었다. 메이머는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수장 파가 된 것이다.
메이머가 근무지로 가는 길은 활기가 넘쳤다. 많은 이들이 행사 준비로 바빴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동에는 경건함이 묻어 나왔다. 옷도 새것인지 다들 단정했다. 외부에 개방되는 교내의 가장 큰 축제일이기 때문이다. 수행자들이 여러 개를 이어 만든 사다리를 타고 신전의 기둥을 닦았다. 그걸로 모자라 걸레를 긴 장대에 묶기까지 했다. 메이머는 슥 지나가며 기둥을 문질렀다. 뭘 발랐는지 광도나고 맨들맨들했다. 곡선의 대로를 돌자 색바랜 조각상에 끈끈한 액을 바르는 수행자들이 있었다. 얼마나 열성적인지 옆을 지나가는 사람도 보지를 못했다. 메이머는 옷에 튈까 멀찍이 떨어져서 걸었다.
옹기종기 모인 어린 수행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메이나드의 문장을 보고 헤 하고 입을 벌렸다. 메이머는 속도 모르는 밤톨이 들에게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밤톨이 들은 그걸 보고 또 배시시- 웃었다. 앞서가던 어른이 재촉하자 그들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메이머는 발길을 멈추었다. '맹세의 언덕'의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행사의 사전 준비로 열어 놓은 것 같았다. 메이머는 맹세의 언덕이 근무지로 가는 지름길임을 떠올리고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이봐. 식전에 맹세의 언덕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귓가에 희끄무레한 머리털이 난 중년의 오팟나즈가 창을 비스듬히 눕히며 길을 막았다.
"어차피 지날 길인데 가게 해주죠. 잠을 설쳤더니 근무지까지 걷는 게 피곤한데."
오팟나즈는 광대를 타고 솟구친 수염의 끝을 매만졌다.
"좋아. 같은 혈맹이라서 봐주는 거야."
오팟나즈는 오른팔을 들어 주먹으로 원형을 그렸다. '우리는 형제다'라는 혈맹의 손짓이었다. 그의 손목에는 둥근 나뭇조각이 달린 붉은 팔찌가 있었는데 메이머도 같은 것이 있었다.
"그냥 보내주지. 부끄럽게..."
오팟나즈의 힘찬 동작과는 달리 메이머는 대충 움직였다. 메이머는 얼굴을 가리고는 서둘러 입구를 통과했다. 오십여 걸음을 떼었을까?
"출세하면 언덕의 하인즈를 잊지 말라구!"
오팟나즈는 크게 소리쳤다. 메이머는 그를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맹세의 언덕은 원형으로 배치된 신전을 가로지르는 대로였다. 이름은 신화에서 따 온 것이다. 신화에서는 숲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바닥을 녹장석으로 깔아 은은한 청록색을 띠는 길이었다. 녹장석은 대륙의 험한 산맥 '거인의 요람'에서만 채광이 되었다. 이걸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돈을 처발랐는지 알만했다.
메이머는 볕을 머금을 때마다 색이 변하는 대로를 걸었다. 길의 양쪽에는 신들의 거대한 조각과 신화를 재현한 작품들로 가득했다. 곳곳의 분수대에서 물이 흠뻑 나와 새싹들 위로 무지개를 씌워 주었다. 사각형의 정원은 길가에서 본 밤톨이 들이 손질 중이었다. 그런 정원이 수십 개에 달했다. 중앙의 전망대에서 본다면 거대한 체스판처럼 보일 것이다.
메이머는 출구에 왔다. 그제야 희미하게 보이던 외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벽에는 석공들이 망치와 징을 들고 이름을 새기고 있었다. 벽에 빽빽하게 새겨진 이름 중에 메이머가 아는 사람의 것도 있었다. 메이머는 자신의 이름을 찾았지만, 아직 보이지 않았다. 내심 기대를 했는지 킁- 콧바람을 내고 자리를 떴다.
메이머는 근무지에 도착했다. 성지 외곽에서도 한참을 더 벗어난 곳이었다. 보이는 건 쓰러진 건물 그루터기와 살이 빠진 풍차가 다였다. 메이머는 익숙하게 폐허의 구석에 난 검은 구멍으로 들어갔다. 눅눅한 습기에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메이머는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불빛을 이정표 삼아 캄캄한 계단을 내려갔다.
헝클어진 머리의 벤와가 졸고 있었다.
"저 왔어요!"
"후아암 벌써 그렇게 되었나."
벤와는 궁둥짝 맞은 오리처럼 일어나더니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좋은 거 먹었나 봐요. 입에서 달콤한 냄새가 진동하는데."
"미안해. 입을 헹군다는 게. 헤헤. 시금털털한 오줌만 주던 놈들이 벌꿀 맥주며 라임 맥주까지 주더라구. 손님이 오신다니깐 이제야 사람 먹을만한 걸 내놓은 거지. 더러운 놈들 맛있는 건 자기들끼리 처먹고. 오늘처럼만 나오면 이 짓도 할만한데."
벤와는 입맛을 다시며 잔뜩 구겨진 옷을 추슬렀다.
"넌 대단해. 이 감방에서 나랏나즈가 나올 거라고 누가 생각이라도 했을까. 우릴 시궁창 쥐라고 부르는 귀족 놈들에게 쓴맛을 보여줘."
벤와는 술기운이 덜 가신 듯 흥분하며 말했다.
"나랏나즈가 된다고 해서 성공하는 건 아니에요. 3년을 못 채우고 영광의 지평선에서 사라지는 이름이 얼마나 많은데. 전 아직도 얼떨떨해요."
"높으신 분들의 생각을 우리가 어찌 알겠어. 주면 주는 데로 받아먹어야지. 헤헤 나한테는 그런 거 안 떨어지나 몰라."
"할 수 있으면 벤와한테 이 옷을 벗어주고 싶어요."
"어이구!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마. 그 옷을 입으려고 돈이며 인맥이며 가진 걸 퍼붓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벤와도 언제나 수행자라는 법은 없잖아요."
"그렇지. 수행자들은 언젠가는 신의 부름을 받는다고 하지. 하지만 너도 알고 있잖아. 5년 내에 혈맹에 가입하지 못하면 별 볼 일 없는 놈이 되고, 교인에서 멀어지는 거."
벤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체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는 나보다 뒤에 들어온 놈들이 오팟나즈며 사제며 하물며 성지 내 기술자가 될 때도 난 게네들이 참 미웠었다. 욕하는 걸 아침 기도보다 더 열심히 했으니깐. 그래도 20년이 지나니 말이야. 난 내 분수를 알겠어. 여기가 딱 내 자리야. 난 검술 같은 걸 못하잖아. 사제는 더 가망이 없지. 배운 건 눈치 보는 게 다인데."
벤와가 몸을 들썩이며 신세 한탄을 하자 그를 닮은 초라한 의자가 삐걱대며 구슬픈 소리를 냈다.
"이거 내가 헛소리를 해버렸네. 어쨌든 고마웠다. 사람 취급을 해줘서. 길에서 마주치면 아는 척 정도는 해줘."
"당연하..."
"그럼 수고해. 내일은 다른 녀석이 오겠지. 똘똘한 녀석이면 좋겠는데."
벤와는 메이머가 말을 다하기도 전에 어깨를 툭툭 치고는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크크 대단한 비극이야."
벤와가 완전히 사라지자 귀를 긁는 소리가 철창 사이로 흘러나왔다.
"오늘은 피곤해. 그냥 닥치는 게 어때."
"이거 사람 차별하는 거 아냐. 술주정뱅이 녀석은 다 받아주면서. 내가 얼마나 불쌍한 줄 알아. 너희가 주는 풀 쪼가리만 먹는데. 해를 본 게 언제인지는 기억도 안 나."
메이머는 간이침대에 몸을 눕히더니 담요를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바보 같은 놈. 넌 냄새나는 머저리보다 더 멍청한 녀석이야. 수장 파가 되면 귀족처럼 살 수 있을 거 같아? 그래서 위선자들이 말하면 곧이곧대로 믿는 허수아비가 된 거냐."
"제발 좀 닥쳐. 넌 죄를 지어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야."
"그래 맞아. 난 큰 죄를 지었지. 내 결정으로 날 믿고 따르던 자들은 모두 죽었으니깐."
쾅-쾅- 쇠사슬이 긁히며 난폭하게 벽을 찍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은 권력에 미치면 가족이라도 팔아 쳐먹을 짐승이더군. 목숨을 구걸하면서도 속에선 시커먼 속내가 타오르는 벌레들이야."
괴인이 풀썩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재미있을 거야. 성지 지하에 수천 개의 지하 감옥이 있다는걸. 죽이긴 꺼려지지만 사라져야 할 자들을 가둬주고 금덩이를 챙기는 게 밝혀지면 어떻게 될까."
괴인의 발악이 다른 날보다 심했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는 것일까. 메이머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건 네놈 장단에 맞춰주는 게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니 대답은 안 해도 돼."
"얼마든지."
"시체처럼 조용하던 놈이 왜 갑자기 말을 거는 거지? 그리고 벤와가 있을 땐 가만히 있다면서."
"크크크. 난 한때 세상을 굽어보던 자였다. 눈에 달린 게 단추 구멍이 아니란 소리지. 그런 미련한 놈에게 희망을 품을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그럼 나는 만만해 보이냐."
"너에 대해서는 네가 매일 머저리와 벌이는 신파극으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방패 혈맹에 들어간 것은 비범하다는 증거일 테지. 멍청이가 잡소리를 할 때도 말을 바꾸는 걸 보고 머리 회전도 빠르고, 순발력도 있는 편이라 생각했다. 넌 분명히 뛰어나겠지. 하지만 그 정도에 내 마지막을 걸 수는 없었다. 너의 능력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지만."
"그 잠깐 해본 걸 봤다고?"
"무엇인가에 대해서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네가 날 시체라고 생각했을 때 나는 너에게서 특별함을 찾으려고 했다."
"특별함이라니. 내 능력을 말하는 거냐.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투로 이야기하는군."
"시대를 움직이는 힘을 말한 거다. 한 나라의 귀족을 갈아치울 수 있는 지략, 말 한마디로 백 명의 남자를 죽일 수 있는 미, 천명의 적에 홀로 맞서 물러서지 않는 패도. 천재를 뛰어넘는 치명적인 무엇인가가 있어야 최소한의 가능성이라도 보이거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네."
"소문으로만 들었다. 신화 시대에 사라진 신비와 마법의 흔적을 몸에 두르고 태어나는 자들이 있다는 걸. 그게 눈 앞에 있는데 당연히 가져야지."
"넌 덜 떨어진 망상 주의자일 뿐이다."
메이머는 뒤척이며 품 안에 넣어둔 귀마개를 꺼냈다.
"잠깐! 마지막이다. 평민이 기사가 되고 나아가 왕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개소리다. 그런데 그 일이 네게 일어났지. 덜떨어진 놈들은 꼬리를 흔들 테지만 현명한 자라면 그 속에 숨겨진 진의를 파악한다. 네게 드리워진 음모는 너무 고약해 코가 썩을 지경이다. 휩쓸리면 목을 지키기 힘들 거야."
메이머는 결국 귀를 막았다.
2
메이머는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광의 지평선 넘어에는 신자들로 가득 찼는지 소란스러웠다. 루멘일지라도 맹세의 언덕은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라 사제와 수행자들만 보였다. 모두 들뜬 분위기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교황들은 자신의 종파에 속할 수행자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은 흰 바탕에 금실이 수놓아진 의복을 입었는데 가슴의 문장만 달랐다. '아직 절반도 안 되었나' 메이머는 지루해져 딴청을 피웠다.
"그러지 마. 우리는 성스러운 임무를 받는 자리에 있다구."
리리스가 메이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메이머는 그런 리리스가 귀여워 꿀밤을 먹이고. 새앙쥐 같은 뺨에 얼굴을 부비고 싶었다. 하지만 리리스는 자신이 평생 지켜야 할 사제이며 엄연한 상관이었다. 자신의 반 토막이 겨우 되더라도 말이다.
"알겠어요. 땅콩 사제님."
메이머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느슨해진 틈을 타 리리스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놀리지 말랬잖아."
리리스는 메이머의 허리에 매달려 솜방망이 질을 마구 해댔다.
"...일곱 신의 수장이자 이 세상을 비추는 태양 그 자체이신 메이나드께서 오늘 그 은혜의 빛을 볼 수 있게 수행자들을 부르십니다. 그 고귀한 임무를 짊어지게 될 자들은 이곳으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신께 경배를 드리며 찬양하십시오."
메이머와 리리스가 장난을 치는 사이 조브리가, 고노, 칼렌드, 마야, 케인, 에르사믹의 여섯 교황이 나왔고, 드디어 그들의 주신 차례가 되었다. 메이머는 긴장한 체 교황의 목소리에 집중했고, 리리스는 두 손을 다소곳하게 모은 체 눈을 빛냈다.
"리리스 펠리시아 12세 그레온 제국령 에리 선셋 출신. 새벽바람 혈맹. 불모지에 가르침을 전파하는 여사제로 임명한다."
리리스는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치마를 살짝 펼치며 허리를 굽히는 요조숙녀식-리리스의 주장대로라면- 인사를 하고는 호명된 수행자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메이머 비브리시오 18세 키르카스 연합 지아르 출신. 방패 혈맹. 여사제 리리스를 수호하는 나랏나즈에 임명한다."
메이머 또한 네 방향으로 반 무릎 인사를 하고는 리리스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무희들은 꽃을 뿌리며 팔랑거리는 날갯짓을 하며 춤을 추었다. 여사제들의 경건한 노랫소리가 퍼지고 다른 수행자들은 축하했다. 잠시 후 대교황이 나타나 손을 들자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는 신의 임무를 받은 자들의 이름을 공표하고 축복의 기도를 올렸다. 모든 수행자가 대교황의 말을 따라 기도했다.
"이제 성지를 찾아온 신자들과 교인들의 축제입니다. 오늘만큼은 무거운 짐을 털어버리고 즐거움을 누리십시오."
대교황의 말이 끝나자마자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우와아- 영광의 지평선 밖에서 함성이 들렸다. 맹세의 언덕에 있던 사람들도 박수를 치며 답답한 의전복을 벗었다. 흥겨운 무리가 된 그들은 녹장석 대로를 따라 행진을 시작했다. 메이머도 리리스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거대한 신들의 조각상에 받쳐진 향유 때문에 아로마 향이 그윽했다. 볕은 훈훈했고, 바람 또한 애써 꾸민 머리를 망치지 않을 정도로 잔잔했다.
에메랄드 파도 위의 돌고래 떼가 된 그들은 대로의 반 정도를 막 지나는 참이었다. 출구로 나가 신자들에게 모습을 보이면 그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그때 흠뻑 취한 분위기를 깨는 뾰족한 비명이 들렸다.
끼야아아- 뒤쪽에 있던 어린 여사제가 배를 움켜쥐며 쓰러졌다. 그녀의 흰색 옷은 급속도로 붉게 물들었고 청록색 바닥은 와인을 부은 것처럼 검게 변했다.
"더러운 제국 놈들에게 복수다!"
다른 이들보다 조금 떨어져서 이동하던 수행자들이 깊게 눌러쓴 후드와 망토를 벗어 던졌다. 경무장을 갖춘 그들의 가슴에는 초록색 바탕에 울창한 숲과 더불어 올리브, 검은 황금이 그려진 키르카스 연합의 문장이 박혀 있었다.
막 수행자에서 오팟나즈가 된 그들은 무기를 들었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팟나즈여. 교인들을 보호해라!"
그래도 상황을 빠르게 판단한 그들의 기수(Bannerman)가 소리를 외치자 어린 오팟나즈는 방패벽 대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절대로 내 뒤에서 떨어지지 마."
리리스는 울먹거리며 메이머의 벨트를 꼬옥 잡았다.
"눈을 감아. 어서!"
"알았어."
메이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에게 무엇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도끼에 직격당했는지 절단면이 흉측한 사람의 머리였다. 시체의 부릅뜬 눈에서 공포가 보였다. 메이머는 퉤 하고 침을 뱉더니 머리통을 멀리 차버렸다. 메이머는 죽어 나가는 동기들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리리스의 곁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나랏나즈의 사명감이라기보다 여동생을 지키겠다는 가족애 같은 것이었다. 메이머는 최악의 사태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메이머의 바램과는 달리 상황은 좋지 않았다.
키르카스군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장창으로 포위를 빠져나가려는 방패벽의 이동을 저지했다. 조그만 틈이라도 보이면 화살을 마구 퍼부었다. 그들은 끈적한 대치 상황에서 야금야금 갉아먹는 전법을 구사했다. 긴장감이 고조된 상황에서 아군의 사상자만 발생하자 참지 못한 신입 오팟나즈는 방패를 던지고 무모한 돌격을 감행했다.
"비겁한 남부 종자 놈들아! 당장 목을 쳐주마."
"안돼! 방패를 버리면 그 즉시 죽는다."
몇 명이 대검을 양손으로 쥐고 뛰쳐나갔다. 슈슉- 대여섯 발의 화살이 날아와 그들에게 박혔다. 크아아-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몸뚱아리에 수많은 창이 날아와 그 흔적을 남겼다. 피구멍에서 진득한 액체가 흘러나왔는데 거기에서 미지근한 김이 올라왔다. 근처의 오팟나즈에게서 공포라는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오팟나즈는 자신들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물러서지마. 이러다 전멸이야! 멍청한 놈들아. 얼른 얇은데를 메워."
누군가의 외침에도 오팟나즈는 본능을 이길 수 없었다. 게다가 아무도 벌집이 된 시체가 있는 곳으로는 가지 않으려고 했다. 따그닥- 추위와 싸우는 듯 떨고 있는 오팟나즈에게 장송곡과도 같은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설마..."
촘촘한 그물같이 얽혀있던 키르카스군이 길을 트자 거대한 군마가 보였다. 눈 양쪽의 붉은 점은 말의 고향이라는 얼스에서도 최고로 쳐주는 전투마 '피눈망울'이 분명했다. 으아아- 오팟나즈에게서 절망어린 비명이 퍼졌다. 기병은 다섯 기에 불과했다. 마갑을 씌우지도 않았고 기수(Rider)가 중무장하지 않은 경기병이었다. 하지만 반쯤 전의를 상실한 오팟나즈에게 보이는 것은 그들에게 겨누어진 거대한 돌격창 뿐이었다.
오팟나즈의 방패 대형은 급격히 흔들렸다. 특히 기병 5기가 횡대로 돌격하는 곳은 소꼬리에 붙은 날파리처럼 도망가기 바빴다. 그중에서 머리가 큰 몇 놈이 방패를 들고 버티었지만, 다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성난 말의 투레 소리가 코 앞이었고, 발굽 소리는 천둥소리처럼 커졌다. 결국, 악을 쓰던 오팟나즈는 방패 아래로 머리를 숙인 체 눈을 감아버렸다.
빠각- 무엇인가가 박살 나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까지 방패를 들고 있던 녀석들은 파도에 휩쓸린 모래처럼 힘없이 쓸려나갔다. 사람의 몸이 순식간에 고깃덩이가 된 것이다. 큰 덩치로 대장질 좋아하던 한스는 돌격창에 목이 꿰뚫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피를 게워냈다. 출세를 위해 오팟나즈가 된 상인 집안의 톨리는 말과 부닥치며 가슴이 함몰돼 토마토소스 범벅이 된 체 즉사했다. 나머지 아이들도 말발굽에 깔려 으깨지거나 머리가 터져 토사물 같은 뇌수를 사방으로 뿌렸다.
팽팽한 실 위에서 버티던 오팟나즈는 몇 가닥이 끊어지자 빠르게 무너졌다. 그들에게 키르카스군은 이제 막을 수 없는 재앙이 된 것이다. 으아아- 비명이 사방에서 들렸고 승자는 학살을 즐길 뿐이었다. 메이머는 처음 겪는 살인의 현장에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순간 뒤쪽에 리리스의 떨림이 배는 심해졌다. 메이머는 자신의 뺨을 찰싹 때리며 긴 호흡을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방법뿐이야.'
우선 자신에게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는 저 기수부터.
메이머는 꿈속에서 메아리치던 마법의 문자 리테라를 떠올렸다.
"칼립스 코무니오(Ch?lybs Comm?n?o)."
메이머에게 미증류의 힘이 모여들더니 그를 중심으로 회오리쳤다. 메이머의 옷과 머리칼은 폭풍을 만난 듯 마구 요동쳤다. 타타탁- 메이머에게서 콩 튀기는 소리가 나더니 주위로 푸른색의 리테라가 날아다녔다. 메이머는 허리춤에 찬 칼집에 손을 얹고 돌진해오는 기수를 바라보았다.
돌격창이 아래로 눕혀지면서 메이머의 심장을 조준했다. 큰 바람구멍이 생기려는 찰나에 메이머는 검을 꺼내어 눈부시게 아름다운 은빛 호선을 그려냈다. 궤적이 보이고 뒤따라 공기를 찢어발기는 파열음. 슈우욱- 선의 동선에 있는 모든 것은 갈라졌다.
소리도 없었다. 허공으로 피 분수가 치솟고 기수는 말과 함께 그대로 반으로 절단되었다. 상체의 단면으로 피떡이 된 내장 기관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된 거지?' 기수는 세상이 빙글 도는 것이 어리둥절했다. 툭- 잘리고도 눈을 깜빡이던 기수는 갈라진 몸뚱이를 보고 거품을 물고는 그대로 사망했다.
떠다니던 리테라는 어느새 검면에 붙어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쩌겅- 하지만 세찬 진동을 몇 번 하더니 유리처럼 깨졌다. 메이머는 눈이 캄캄해지며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쓰러지려는 몸은 검집을 지팡이 삼아 겨우 버텨냈다.
"아티..아티팩트다. 우리 편에 소서러가 있다!"
"이길 수 있다. 검을 들어라. 형제들이여."
오팟나즈에게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혹시나 싶어 뒤를 돌아본 그들은 반 토막이 된 기수와 말의 사체를 보았다. 탁탁 누군가가 방패를 검면으로 때려 소리를 냈다. 하나둘 들리던 소리는 점차 퍼지더니 행진수의 북처럼 그들을 고무시켰다. 오팟나즈는 차갑게 식은 몸에서 기이한 열기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반대로 키르카스군은 생각하지 못한 변수에 당황했다.
'소서러가 왜 일개 병사로 있는 거지.', '분명 얼빠진 신입만 있다고 했는데.' 뭉게구름처럼 떠오른 의혹은 그들의 손발을 더디게 만들었다. 키르카스군은 눈을 껌뻑이며 지휘관만 쳐다보았다.
3
"장창병 전방에 최대한 밀집해서 대열을 짠다. 검이 성한 놈들은 뒤에서 벽을 뚫고 들어오는 놈들을 상대해라. 뭐하나. 아티팩트를 쓰는 놈도 결국 사람이다."
키르카스군의 옷을 입었지만, 지휘관은 메시앙 백작가의 노련한 기사였다. 상대할 적이 뜨내기 신입이라는 정보에 부하들에게 둔기를 준비하라고 했다. 성지에 미리 들여놓은 장창 끝에는 거친 날을 달아 시체가 최대한 훼손되게 했다. 터지고 찢겨 나간 사체로 경험이 없는 피래미들을 묶어 놓고, 소수의 기병으로 쐐기를 박는 전술이었다. 모든 건 순조로웠고 남은 건 일방적인 섬멸전뿐이었다.
근데 허여멀건 한 놈이 이상한 문자가 새겨진 검을 휘두르자 자신의 기수가 반 쪼가리가 되었다. 자신이 고안한 '충격과 공포'가 부메랑이 돼서 날아온 것이다. 남작이라는 작위까지 한 번의 성공만 남았는데 갈론드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게다가 우두커니 서서 갈기 같은 금발을 휘날리는 저 꼴이란.
"저놈 면상에 화살을 날려!"
갈론드는 핏대를 세운 체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슈슉- 한 무리의 화살이 날아왔지만 메이머의 주위에 있던 오팟나즈는 방패를 들어 보호했다. 타다다다닥- 방패에 화살촉이 박히며 시끄러운 매타작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메이머는 정신이 들었다. 되돌아온 시야로 견고하게 붙은 방패들이 지붕처럼 있었다. 바람이 불자 훅 올라오는 열기와 땀 냄새가 가득했다. 거친 그들의 숨소리에 메이머는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뒤를 돌아보자 리리스가 허리를 안고 있었다. 휘청거리는 자신을 죽으라 지탱해주었나 보다. 메이머는 땀투성이의 리리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이제 그만 해도 돼."
메이머는 리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휴우."
리리스는 바람 빠진 공처럼 스르륵 무너졌다.
오팟나즈는 키르카스군에게서 장창을 빼앗았다. 그러자 틈을 노리던 기병들은 섣불리 돌격할 수 없었다. 지루한 대치전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메이머는 처음으로 능력을 사용한 것이었다. 감옥에서 시험 삼아 해 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못을 강화해 돌에다가 스윽 밀어 넣은 게 다였다. 검을 강화해 사용하는 것은 전혀 달랐다. 검날이 힘을 버텨내지를 못했다. 무엇보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힘의 소모가 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금씩 회복되는 것이다.
"다친 데는 없나. 애송이."
로브를 깊게 쓴 사내가 다가왔다. 그는 행사에 쓰던 말을 타고 있었다. 말은 화려한 마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갑은 얇은 철판에 장식만 그럴싸하게 한 것이라 갑옷으로의 효과는 전혀 없었다. 그런 말이 대장마인양 타고 오니 우스워 보였다.
"그냥 꺼지라고 했잖아."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널 가질 거라고."
"나 같은 고아 출신을 나랏나즈에 임명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바로 키르카스 군복을 입은 놈들이 쳐들어오다니 미칠 노릇이군."
"음모의 중심에 서 계신 기분은 어떠신가요? 나랏나즈님."
괴인의 말투에는 조소 끼가 다분했다.
"행진을 시작할 때 교황들과 귀족들은 모두 자리를 뜨더군. 네 주위를 봐."
"모두...평민들이군."
"애초에 장창 같은 중기(Heavy Weapon)를 가지고, 내륙 깊은 켄트포까지 오면서 발각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아. 게다가 지원군이 아직도 오지 않는다?"
"모두 한 패거리라는 소리냐."
"네가 알던 세상은 잊어라. 넌 힘이 있는 자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설마 그렇게 까지...이런 무른 생각도 버려라. 전에 말했듯이 권력에 미친 자는 무엇이든지 가능하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메이머는 죽은 오팟나즈의 검을 세세하게 돌리며 균형을 살폈다.
"안타깝게도 갇혀 있던 6년간의 정세는 모른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예상해보자면...그레온과 키르카스의 관계를 악화시켜 이득을 보려는 수작이겠지."
"흥- 대단하게 이야길 하더니 결국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럼 넌 머저리라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거'에 당해준 거냐."
슈욱- 메이머는 괴인에게 눈을 흘기며 살피던 검을 휘둘렀다.
서쪽 출구에서 나팔 소리가 들렸다. 굳게 닫힌 문이 열리며 한 기병이 거대한 문장 깃발을 들고 나타났다. 태양을 감싼 도넛 모양의 팔찌, 팔찌는 13등분으로 나뉘었으며 영역마다 혈맹을 상징하는 물건과 색이 칠해져 있었다. 우아한 동작으로 기수(Bannerman)가 중앙에 자리를 잡자 뒤이어 기사들이 들어와 횡대로 줄을 맞추어 대형을 이루었다. 13개의 열, 13개의 문장, 13개의 팔찌는 혈맹의 연합인 13 형제회의 참회 기사단이었다. 무리 중의 한 명이 나와 대치 중인 전장으로 왔다.
"들어라. 이교도들아. 13 성인의 추종자들이자 켄트포에 봉사하는 방랑 기사들인 참회 기사단은 루멘의 성스러운 자리를 피로 더럽힌 배덕의 무리에게 징벌을 내리고자한다. 교를 이용해 전쟁을 획책하려던 나랏나즈 메이머 비브리시오 외 오팟나즈, 사제 182명, 키르카스 레인저 220명은 즉결 처형이다."
무심하게 쪽지를 읽던 기사는 빠르게 본진으로 달려갔다. 키르카스군에게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오팟나즈도 마찬가지. 싸운 기억은 잊었는지 멍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갈론드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성난 곰'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험악한 얼굴이 된 갈론드는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오를렌스 이 개자식아. 네가 날 이렇게 찍어낼 수 있을 거 같아? 젖도 못 뗀 승냥이 새끼. 반드시 목을 썰어주마아앗! "
"아하하하하하하하."
메이머는 눈물까지 보이며 웃었다.
"이런 이런 누군지는 몰라도 대단히 실행성 있는 자로군. 판이 마음대로 안 되니 그냥 쓸어버리시겠다?"
"전우들아. 너희가 못난 대장을 둬서 우리는 산화할 위기에 처했다. 아니지. 신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 전멸할 거다. 귀족으로 제대로 살게 해주겠다는 약속은 못 지킬 거 같다. 그래도 그냥 죽어주면 보햄의 용사들이 아니지. 검을 들어라! 한 놈이라도 더 데리고 간다. 죽으면서도 저주의 말을 퍼부어라. 우리는 죽지만 자식들이 꿈을 대신 이뤄줄 거다."
메이머는 훌쩍거리며 울고 있는 리리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리리스 넌 왜 사제가 되고 싶어?"
"세상에는 도와줄 사람들이 많잖아. 나도 사제님이 아니었으면 큰일을 당했을걸."
리리스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아쉽지만, 사제는 못 될 거 같아."
"왜에! 이 거짓말쟁이."
리리스는 주먹으로 메이머의 가슴팍을 두들겼다.
"미안해. 우리는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지만, 그냥 이렇게도 휘말리나 봐."
메이머는 리리스를 안으며 작은 등을 보듬어 주었다.
"그래도 사람들을 도울 방법은 많이 있어. 켄트포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가자."
"긴 무기는 다 들어라. 측면에 엄폐물을 두고 기병 저지용 대형을 이룬다."
바쁘게 움직이는 갈론드 무리와는 달리 오팟나즈는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렇게 된 거 너희 오팟나즈도 싸우다 죽어라. 개죽음당하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냐."
"이봐 거기 곰같이 생긴 멍청이. 그 얇은 기형창으로 중기병들을 막을 수 있을 거 같아. 1선도 못 넘어뜨릴걸."
"너야말로 꽁꽁 싸맨 유령 꼴을 하고선 그 광대 같은 말을 타고 뭐하는 짓이냐. 제길. 다른 데였으면 두들겨 패주는 건데."
오팟나즈도 살고싶다는 생각에 방패벽을 만들었지만 불신의 눈초리를 한 체 갈론드 무리와는 거리를 두었다.
"결국, 네가 예상한 것 중에서 가장 최악이 와 버렸네."
"할 수 있겠냐."
"반드시 해내야지."
메이머는 리리스를 자신의 품에 가죽끈으로 싸맸다. 그리고 괴인의 말에 올랐다.
부우우웅- 나팔 소리가 길게 이어지더니 참회 기사단이 말의 고삐를 당기며 서서히 달리기 시작했다. 서로 갑주나 무기가 달라 통일성은 없었지만, 이교도를 향한 맹렬한 신앙심은 하나였다.
"기사단. 준비."
모두 각자의 무기를 적들에게 겨누었다. 세워져 있던 창이며 도끼며 장검이 바짝 엎드린 기사들을 따라 몸을 눕혔다. 우뚝 솟은 선으로 위용을 뽐내던 흉기들은 점으로 변하여 필살의 의지를 담았다.
"기사단. 돌격!"
기사단에서 서로 다른 고함이 터져 나왔다. 기사들은 안장을 미친 듯이 차며 달아오른 말들을 가속시켰다. 최고조에 이른 그들은 은빛 해일이 되어 불경한 것들을 덮쳐갔다.
두두두두- 심상치 않은 진동이 전해졌다. 모두 방어 대형을 짰지만 거대한 벽처럼 보이는 기사단을 상대로 가망이 없어 보였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이들이 나왔다. 메이머도 대륙 최강의 전력이라고 평가받는 중기병의 돌격에 '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이 들었다.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보이는 장면이 마치 털어낼 수 있는 먼지라도 되는 듯.
"레기오 코무니오(L?g?o Comm?n?o)."
메이머는 기사단에 맞서는 모든 이들을 시야에 담았다. 끄아악- 메이머의 코와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왜 그래."
품에 있던 리리스는 눈물을 흘리며 흘러넘치는 피를 닦았다. 메이머에게서 어마어마한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곧이어 작게 쪼개진 빛덩이들은 무수히 많은 리테라 문자가 되어 메이머의 영역에 있던 모든 쇠붙이에 달라붙었다.
그들은 갑옷과 무기에 푸른 문자가 빛나자 놀랐다. 하지만 메이머가 같은 검으로 기병을 반 토막 낸 걸 기억하고는 '한번 해보자'란 생각에 무기를 다시 고쳐 잡았다.
리테라 문자는 메이머와 괴인이 탄 말의 마갑에 틈도 없이 빽빽하게 붙었다. 그리고 마갑은 팽창하더니 일행을 뒤덮어 광대마를 강철로 빚어진 말로 재탄생시켰다.
"무조건 달려. 얼마 버티지 못해."
"크크.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넌 보물이야."
괴인은 고삐를 당겨 기사단을 향해 돌격했다.
"뮈..뮈네급의 아티팩트다!"
기사들은 변변한 장비도 없던 말이 기수마저 뒤덮여 틈 하나 보이지 않게 되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하나뿐이야. 뭉개버려."
선두의 기사들은 뒤따르는 혈맹의 든든한 39명이 있다는 걸 깨닫고는 그대로 무기를 휘둘렀다.
요즘 읽을 게 업어서 제가 직접 하이 판타지 소설을 쓰고 있는데요. 취미삼아;;; 글 퇴고할때 참고할려고 합니다. 어느 부분이 이상한가요? 그리고 제 기준에서는 살을 많이 뺀 글인데 더 빼야 할까요?
댓글 : 3 개
- 햇살 따스한
- 2015/10/19 PM 11:26
글이 전반적으로 무겁습니다. 자기만족적인 소설을 쓰시겠다면 작품성이 있겠지만, 상업용 소설을 쓰신다면 안팔릴 것 같네요. 보통 문피아나 조아라 등지에서 상위권에 랭크되는 소설들은 문체가 가볍고 템포가 빠릅니다.
- 별을 향해가는..
- 2015/10/19 PM 11:40
읽는사람을 조금 고려하시면서 쓰시는게 어떨까요?
- 락커룸의제왕
- 2015/10/20 AM 03:50
프롤로그 정도의 분량인데 정보량이 너무 많습니다. 설정을 나타내고자 하셨겠지만 너무 산만해진 감이 있어요.
1. 고유명사는 작품에 천천히 녹아들게끔 등장시기와 설명방법을 조절하세요. 뮈네니 리테라니 오팟나즈니 나랏나즈니, 설정을 만든 작가는 재미있겠지만 보는 독자는 답답합니다.
2. 등장인물 역시 분량에 비해 너무 많이 등장합니다. 각 인물에게 할당된 분량이 적다 보니 얘네들이 왜 이러는지에 대해 공감이 안 가요. 뭔가 음모도 있어보이고, 캐릭터들이 이를 예측했다는 식의 대사, 비장미 넘치는 대사들을 읊지만 딱히 와닿지 않습니다.
1. 고유명사는 작품에 천천히 녹아들게끔 등장시기와 설명방법을 조절하세요. 뮈네니 리테라니 오팟나즈니 나랏나즈니, 설정을 만든 작가는 재미있겠지만 보는 독자는 답답합니다.
2. 등장인물 역시 분량에 비해 너무 많이 등장합니다. 각 인물에게 할당된 분량이 적다 보니 얘네들이 왜 이러는지에 대해 공감이 안 가요. 뭔가 음모도 있어보이고, 캐릭터들이 이를 예측했다는 식의 대사, 비장미 넘치는 대사들을 읊지만 딱히 와닿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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