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화 리뷰] [영화리뷰] 노예 12년 (스포無)2013.12.30 AM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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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원래 이 영화는 나중에 DVD로 보려고 했는데, 제 전공인 카리브해 역사학 교수님이 무조건 추천을 하신지라(...) 해가 지나기 전에 극장에서 봤습니다. 10월 중반에 개봉되었지만 2013년이 지나가는 12월 말에도 극장은 사람들로 꽉 차있더라고요. 그리고 전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개봉한지 2달이 넘은 영화가 끝나자 극장에 있는 모든 관객이 박수를 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사회도 아니고, 마지막 상영도 아니고, 특별상영도 아니고, 그냥 나온지 오래되서 이젠 극장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작품의 어느 평범한 상영이였습니다만, 그럼에도 <노예 12년>은 작품성 하나만으로 박수 갈채를 받았습니다. 오프닝 성적이 백만불도 안됐던 작품이지만 이젠 롱런하여 오로지 입소문만으로 3700만불의 성적을 기록한 영화에 걸맞는 박수 갈채였습니다.

<노예 12년>은 <헝거>와 <셰임>의 스티브 맥퀸 감독의 3번째 영화입니다. 미국 남북전쟁 전, 워싱턴 D.C.를 방문했다 납치당해 12년간 노예생활을 하게되는 자유 흑인인 솔로먼 노섭의 수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미국 남부의 잔인했던 노예제를 낱낱이 고발하는 영화입니다. 흔히 일반인들이 "노예제"를 생각한다면 간단히 "'나쁜' 백인들이 '착한' 흑인들을 괴롭혔다"라고 인식하는 게 전부입니다만, <노예 12년>은 아메리카 노예제 역사 교수가 극찬을 할 정도로 철저한 고증을 거쳐 "노예제"라는 시스템 그 자체를 솔로먼 노섭의 지극히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연구합니다.

"노예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백인이 흑인을 괴롭혔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노예제"라는 시스템이 백인으로 하여금 합법적으로 다른 종족(흑인)의 인격을 말살 시켰는지 입니다. <노예 12년>은 2시간 동안 지루하게 백인이 흑인을 괴롭히는 장면으로만 가득찬 영화가 아닙니다. "노예제"라는 시스템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군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예제"라는 시스템 자체가 어떻게 한 인간의 인격을 말살시키는지를 세심히 관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예 12년>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와 같이 인공적인 감정적 호소를 극단적으로 절제하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 관객에게 감동을 전하는 영화입니다. 개인적으로 보고나서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대신 영혼이 움켜쥐어진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스티브 맥퀸 감독은 끝까지 관객들을 몰입 시키기 보단 한걸음 떨어져서 모든 것을 보게 만듭니다. 어느 한 인물이 린칭을 당해 나무에 교수형 밧줄로 목이 매달려 까치발을 해서 땅에 발이 겨우 닿아 살아있는 장면이 나옵니다만, 이 장면은 아무 음악도 없고, 자극적인 카메라 워크도 없고, 그저 배우가 린치당해 겨우겨우 숨을 쉬고 있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보여주기만 합니다. 이런 류의 충격적이지만 전혀 자극적이지 않은 연출은 관객들로 하여금 "만들어진" 분노와 슬픔보단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음악 작곡가는 한스 지머이지만, 지머가 자주 작곡하는 웅장한 음악은 없고,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사운드, 혹은 잔잔하고 우울한 곡이 나올 뿐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한 씬에선 노예주가 자신의 노예 앞에서 일요일 미사를 진행하면서 성경을 낭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만, 그 전 씬에서 노예 관리인이 부르던 인종차별 노래가 그대로 이어져 오버랩이 되면서 당시 "노예제"와 기독교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관계는 많은 역사가들이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기독교가 노예제를 허용한게 아니라 노예주들이 기독교을 악용한거에 더 가깝긴 하지만). 이 전혀 맞지 않는 두 사운드트랙은 따로 들으면 다른 느낌이지만, 둘이 같은 볼륨으로 오버랩이 되어 들려지니 불안하고 이질적인 느낌을 전달합니다. 그리고 주인공인 솔로먼 노섭이 자유인 시절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 적절한 사운드 연출입니다.

배우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솔로몬 역의 츄에텔 에지오포는 작년 앤 해서웨이처럼 올해 주연상을 휩쓸 정도의 연기를 보여주고, 여자 노예 역의 루피타 뇽고의 연기는 무명 배우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그리고 악덕 노예주로 분한 마이클 패스벤더는 완전히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여 히스테릭하고 소름끼치는 연기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브래드 피트의 캐릭터는 예고편이나 포스터에서 주는 인상과는 달리, 진짜 "내가 제작한 영화니깐 일단 카메오로는 나와야지"라는 느낌이라 스크린 타임이 적으니, 오로지 빵형을 보려고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비추입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영화가 존재함으로 인해 <그래비티>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 가능성이 정말 적다는 겁니다. SF영화가 처음으로 작품상을 탈 가장 큰 기회였는데 말이죠. 그래도 이 영화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네요.

한줄평: "90년대엔 <쉰들러 리스트>, 00년대엔 <피아니스트>. 10년대엔 <노예 12년>이다."
댓글 : 5 개
오오 좋은 리뷰네요. 평이 워낙 좋은 영화라 꼭 보고 싶었는데 더욱 간절해지네요.
그래피티는 뭐라도 받지 않을까요 그리고 어차피 그래피티가 작품상급이라고 생각은 안드는데...
촬영상은 받을 것 같네요.
산드라 블록도 그렇고...

전 개인적으로 다른 년도였다면 그래비티는 작품상 받을만한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제 리뷰:
http://mypi.ruliweb.daum.net/mypi.htm?id=tqbds_da&num=2830
쉰들러리스트, 피아니스트 둘다 지금까지도 정말 좋아하는 영화들인데 이것도 꼭 봐야겠네요!
국내 개봉일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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