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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임진왜란에 대한 잘못된 편견에 대한 소론(小論)2013.07.03 PM 10:34
1. 문약의 조선정부와 숭무의 일본?
당시 조선정부 구조는 문민이 군을 통솔하는 것으로 정상적인 국가 구조라면 일본은 봉건식 중세체제에 머무른 국가였죠
카미가이토 겐이치 교수의 '文祿慶長の役'에서 조선정부를 이상적이고 체계적인 구조이고
일본은 미숙한 구조라고 평하였습니다 또한 당파란게 사상적 다툼에 불과며 조선의 문관우위의 시스템만 해도
전후 일본의 정부체제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알아야 하는게 문이 통제한다고 해서 숭무가 아니라고 볼수가 없는것입니다 오늘날의 국방체제만 보아도 알수 있는데요
미국 국방장관이 문관이라해서 미군이 약하지 않는것과 같죠
더군다나 조선초에 세종대왕이 화차,신기전,화포등 개량및 발명을 하였으며 문종때는 경연에 병법을 다룰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세조의 찬탈과 중종반정등, 무력으로 정권을 교체하고 훈구파가 되었음을 주지해야하죠
2.유학은 실리가 없다?
우선적으로 유감은 사람들이 이해하지도 않고 그냥 비판하려는 잘못된 습관을 지적해야겠다
애초에 논어에 사농공상이란 소리를 지껄인적도 없거니와 당시 선비란 원래 칼도쓰고 책도 쓰는
멀티적 학자를 의미했다
특히 성리학을 까는 사람이 많은데 성리학은 맹자를 부각하고 대학중용을 내세워 궁구한다는 학문이다
맹자는 백성을 핍박하는 무도한 잡부인 걸주를 주살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신하가 왕을 주살했다는 말이 없다느니
왕이 귀중품에만 부를 낭비하는것은 그것을 앞세워 사람을 잡아먹는 짓이라 말하였고
왕이 백성을 돌보지 않아 백성이 힘드면 그건 왕의 책임이라 주장하여 심지어 예를 다했는데도 사직이 풍년을 주지 않는다면
그 사직신도 갈아버리라고 일갈하던 사람입니다
성리학 이전에 이러한 맹자의 혁명적 사고에 황제들은 경계하여 찬밥취급을 하였는바
송대 주자가 이를 다시 부각하여 나타난게 바로 성리학입니다
더군다나 사물에 나아가 궁구한다고 주자가 말하였기에 어떤 현상에 대해 탐구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초에 집현전 학자들은 정교하게 세금을 거두는 구조란든 수많은 수학,기술등을 개발하거나
주도할수 있었던 것이고 실학이란것도 사실 유학의 성리학에서 파생된것에 불과합니다
또한 실학은 일본의 미토학파에게 붙히던 명칭이었고 현대에 특정집단 사람들에게 실학이라고 붙혀준것에 불과하죠
더군다나 그 미토학파란것도 일본에 건너간 퇴계학에 영향권 아래에 파생된것입니다
그리고 소위 실학자라는 사람들이 평양의 옛고구려가 나눈 격자방식의 도시계획가지고 여기가 기자가 만든 정전이라느니
발해는 말갈오랑캐것이니 송의 희종과 흠종을 고려때 구출했으면 좋지 않았을까니 운운거렸습니다
동시대에 소위 성리학으로 분류된 학자가 이것을 까며 평양성 그 구조는 고구려가 만든것이고 발해는 말갈의 나라가
아닌데 요즘 것들은 역사책도 안읽고 주장만 한다고 한탄하였으니 딱히 실학과 유학으로 분류하면 위험합니다
문제는 세조즉위 이후 집현전 박살내버렸고 이징옥의 난이니 이시애의 난이니 남옥의 옥이니 무장과 국방체제를
붕괴시키는 사건이 여러번 발생하였으며 계유정난, 이시애 난,중종반정에 걸쳐 공신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되었습니다
반면 사림이란게 이러한것에 반발로 생긴것인데 애초에 집현전등 세종계통의 학자들은 주살당한 뒤라
이 사림은 그러한 학풍을 이는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념적으로 강해질수밖에 없었죠
3. 조선은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았다?
조선이 전쟁준비를 전혀 안했다는 것은 통념입니다 그리고 선조가 성군은 결코 아니지만 무능했던 왕도 아니고요;;
예를 들면 선조는 모든 신하들이 격렬히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충무공 이순신을 무려 10계급 특진이라는
파격적인 인사를 감행했으니까요 선조가 그렇게 무능했다면 이순신은 군수생활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또 선조는 방군수포의 폐단시정을 명령했습니다
또한 동인 서인간에 의견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대비는 해야한다는 의견은 같았기에
급히 비상사태를 대비할것을 명령했습니다
해자를 파고 성을 쌓고 무기와 군량미를 준비하는게 워낙 급하고 강력하게 시행하기에
민폐가 심하다고 각지에서 상소가 빗발치는며 민심이 급격히 흉흉해졌습니다.
경상감사 김수와 전라감사 이광은 성곽을 전면적으로 보수하고 군비를 적잖이 확충하는 과정에
오히려 백성들의 쓸데없는 공사라고 불만을 가져 탁핵받았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결과로 진주성 전투라든가 거북선이라든가 등등 모두 전쟁 준비의 산물이었고
전쟁이 터지자 그 값을 톡톡히 치루었던겁니다
4. 조선이 개전초에 붕괴된 이유
당시 임진전쟁 이전에는 조선의 방위체제는 제승방략체제였습니다.
제승방략체제는 각지의 예비대를 두었다가 개전시에 각도 혹은 각 군에서 선정된 전략거점으로 집결하고
이렇게 집결된 병력은 사령관이 지휘하는 형태라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이 반발하면 급격히 규모가 커지는 형태였습니다
(더군다나 평시에는 예산도 적게 먹습니다 왜 예산이 중요하냐고요? 세조와 연산군 덕분에 공신들이 많다보니
정부에 가야하는 돈들이 공신들의 권리로 들어갔다는 상황을 고려하세요)
문제는 예비대가 집결되기 전에 적이 돌파해버리면 엉망 진창이 됩니다만, 조선으로써는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진관체제도 적절히 응용했습니다 문제는 그게 다 북방이고 남방은 해군으로만 구성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왜군이 동래를 돌파해도 바로 한양으로 올리가 없다고 판단외 될수밖에 없죠
조선은 국가간의 전쟁을 고려했기에 크게 단점을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누르하치가 나타나 만주강역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이라 조선은 북방기마민족과 싸우기에 유리한
오위진법을 전법으로 삼아 왜군같은 세력의 전쟁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무능? 임진전 초기에도 도요토미는 일본을 통일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분열된 상태에서
침공해 올거라 누가 생각하나? 문제는 도요토미는 정신이 좀 이상했다는게 문제다)
또한 기병, 즉 갑사라는 군인들도 질적 저하를 생각해야합니다
신립의 경우 약 5천에서 1만정도로 기병을 투입했다고 하는데 이당시 갑사는 전부 궁장 경기병이었습니다-_-;;
(몽골도 5분의 2는 중기병이었다) 조선의 군사편제상 창기병등 타격병기 및 충격병기를 갖춘 갑사를
반드시 편제하도록 되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조때 시험을 궁시 중심으로 바꾸어 버려 이런 체제가 무력화됬죠
이러니 일본의 창병과 철포대의 조합앞에 붕괴되지 않을수가 있겟습니까;;
조선의 상황은 이랬고요 일본의 전략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히데요시나 왜군장이나 번국전쟁, 즉 조선이란 다이묘간의 전쟁으로만 인식했다는 문제입니다
일본의 전략개념으로 다이묘 거점성을 점령하고 사로잡으면 전쟁끝이었고 주민들은 새로운 영주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즉 국가간의 전쟁개념이 없었습니다
이러니 전략거점임 호남지방(그당시 호남이 가장 중요하고 발전된 동네였고 영남은 황해도 수준이었음)을
제패하고 경기도 지역으로 진출하는게 국가간의 전쟁이라면 상식인데 일본은 오직 한양으로만 내달린겁니다
덕분에 제승방략체제의 약점을 틀어쥐어 순싯간에 붕괴시킨거죠
문제는 이거 초반에는 몰라도 중후반에 들어서면 오히려 독이 된다는 점입니다
5. 명나라의 역활
애초에 당시 명나라는 동아시아 최강이었습니다 그리고 철강생산과 제조는 당연 세계최고였으며
분명히 열강의 반열에 오른나라입니다 조선은 개전하자마자 명을 동맹으로 끼고 전쟁을 개시했다면
일본은 동아시아 초강대국까지 적으로 돌려놓고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켄이치 교수는 2차대전당시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끼고있던 중국을 침공함으로써
패망이 이미 결정된것 처럼 임진전쟁에서도 똑같은 상황이었다고 말합니다
즉 외교적으로 이미 조선이 이기고 들어갔다는 거죠
뭐 명나라가 군대를 파병했는데요 명군이 패악질이야 유명하고 당나라 같은 모습을 보인전투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것 처럼 완전히 무능한 애들은 아니었습니다
이여송을 위시한 명군의 평양탄활 전투에서 엄청한 화력과 우월한 전략을 통해 무너트리고 도주하는 왜군가지 주살했습니다
덕분에 조선은 큰 기회를 얻었고요 반면 일본은 오히려 명군이 상대라는 말에 도망치거나 도주하는게 허다했습니다
6. 조선군은 전쟁내내 무능?
조선군이 전쟁내내 무능 특히 육군이 그랬다고 보는데 실제로는 아닙니다
의병은 초기에 활약했지만 조선의 반격으로 회복하면서 급격히 의병들은 관군으로 편제되었고요
특히 행주 대첩 이후 의병, 수군 제외하고 13만을 바로 편제하여 투입하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또한 전시에도 불구하고 전 비격진천뢰를 발명하고 조총을 급격히 확충시켜 편제한것이 조선정부입니다
즉, 기술력이나 공업력이 대단했기에 조총을 바로 똑같이 복제하고 그것을 수천정씩 찍어내고
병장기, 화약무기등을 개량하거나 발명하여 그것들을 전선으로 찍어냈습니다
말그되로 조선판 쇼미더머니엿죠
더군다나 붕괴됬던 조선군은 짦은 기간안에 10만명 이상 부활하는 기염을 토하였는데
조선판 러시아물량공세로 보아도 됩니다 다만 병장기,화약무기를 모두 갖춘체로 말입니다
더군다나 화약무기 사용법이나 조총을 전술적으로 사용하는 방법도 빨리 익혔으며
절강전법이라는 대왜전법도 빨리 적용했습니다
개전초의 일본의 엄청난 성과에 다들 주목하고 패배의식에 사로잡혀서 이상한 통념이 생겨서 그렇지
실제로는 개전초 1~2년을 제외하고는 경상도 남해안에서 벌어진 국지전밖에 없습니다
즉, 조선을 상대로 일본은 반짝하고선 남해안으로 고자되어 밀려버린것입니다
네 7년전쟁인데 말이되냐고요? 사실 말이 7년이지 실제 전투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래를 보면 이를 확실히 알수 있는데요,
1592년 전투:
부산진 전투(4.14), 동래성 전투(4.15), ,상주 전투(4.25), 탄금대 전투(4.28) ,옥포 해전 합포 해전(5.7)
적진포 해전(5.8), 임진강 전투(5.18-27), 사천 해전(5.29), 당포 해전(6.2),당항포 해전(6.5)
용인 전투(6.5-6), 1차 평양성 전투(6.13-14), 이치 전투(7.8), 한산도 대첩(7.8), 2차 평양성 전투(7.17)
3차 평양성 전투(8.1), 금산 전투 (1592.8), 진주 대첩(10.5),다대포진성 전투(.13-4.14 혹4.14-4.15)
1593년 전투:
4차 평양성 전투(1.6-9), 행주 대첩(2.12), 제2차 진주성 전투(6.21-29), 칠천량 해전(1597.7.15)
1597년 전투:
직산 전투(9.7),명량 해전(9.16)
1598년 전투:
울산성 전투(12.23-1598.1.4),사로병진 작전(8-10),노량 해전(11.19)
말 그되로 일본은 국가간의 전쟁을 제되로 치루지 못하고 무리하게 고속진격한 결과 고자가 되버린거죠
-추가: 조선의 일본으로 납치된 자국민 송황이 나중에 소극적으로 변하는데 조선으로 다시 돌아가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본은 조선처럼 법률적으로 통제되는 사회가 아니라 지독히 차별과 억압하는 계급국가였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고전 가부키극중에 연인이 같이 자살하는 사건을 극화한것을 보면 상인은 영주의 명령없이는
해당 도시에 한발자국도 나갈수가 없었습니다 사실상 게토였죠
현실에서 조선양반은 귀족일지 몰라도 법률적으로 양반은 영원히 물려받는게 아니라 3대까지 과거시험에 합격해 관직에 나가
그 실력을 입증하지 않을경우 양반직위가 박탈됬습니다
경국대전 첫머리인 정보위에 꽃을 꺽는것도 아픈데 어떻게 사람을 꺽겠습니까? 라고 운운할 정도로
우리가 생각하는 그렇게 야만적이지 않습니다 아동성폭행의 경우 요참, 허리를 베어버린다든가
성종때 음행사건에도 감을비의 경우 강간당한뒤에 남자들을 수백명씩 거느린것이라 이를 감하여 죄를 주나
어울동의 경우 그런것도 아니고 심지어 왕가의 혈통이 그런짓했다고 해서 참형시키었습니다
더군다나 신하들도 양반이야 과부재가하면 안되고 혼인약속을 어기면 안되지만
서민들에게 유학의 도리를 강요하는건 심하다고 성종에게 질책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조선에 가기 싫었냐고요? 문제는 도공의 경우 조선보다 일본이 신주모시듯 했으며
일본에서 나름 성공한 사람들도 있으며 일본에서 처자식 생긴사람등등 자리잡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거 다 버리고 가기에 부담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정부도 이런 사람들 억지로 대려가면 안된다고 보았기에
냅두는 경우도 상당했습니다
[출처] 임진전쟁에 대한 잘못된 편견에 대한 소론(小論) (<< 마운트앤블레이드 한국 공식 카페 >>) |작성자 seth2
댓글 : 4 개
- 관바
- 2013/07/03 PM 10:55
잘못된 게 조금 보이는데..
<<신립의 경우 약 5천에서 1만정도로 기병을 투입했다고 하는데 이당시 갑사는 전부 궁장 경기병이었습니다-_-;; >>
아마 니탕개의 난을 말하는 거 같은데.. 기병이 5천에서 1만이 아니고.. 정확한 기병 숫자는 2~3천 정도 였을 겁니다. 총병은 5천인가 7천인걸로 기억합니다.. 니탕개의 부족은 1만 4천 정도라고 하더군요.
상당히 재미있는 전투인 것이 있어서 좀 본적이 있는데.. 신립이 사령관. 당시 돌격대장(정확한 직책은 기억이..)으로 기병을 이끌고 원균이.. 화포대에 이순신 장군이 계셨죠..임란에서 좀 활약한다는 무장이 제법 많이 있던 전투였습니다. 장교들이 필수적으로 거쳐야 되는 곳이 북쪽이라는 반증이기도 하지요. 모든 무관들이 다 거쳐가는 곳이 그곳입니다.
조선이 초기에 맥을 못춘건 제가 알기에는 두가지 이유떄문인데요..
가장 큰건 경상 수군이 1만과 판옥선 1백척이 제구실을 못했기 때문이고..
지상으로 올줄 몰라서 엿기 때문입니다. 당시 왜군은 쳐들어오면 의례적으로 조운로를 따라서 올라오기 마련이었지요.. 물론 조선 기술이 달리던 왜군은 조운선이나 훔쳐다가 다니다가 수군에 격멸되기가 일쑤였구요..
정확한 기술은 없지만 이순신 장군이 개전후에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와야될 왜군애들을 기다리고 있었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조선은 수운 국가라서 내륙 운송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거든요.. 지금으로 말하면 경부 고속 도로 버려두고 7번국도 타고 올라가서 영동타고 서울 가는 격이지요..
다들 경상 수군이 무너졌으니 전라 수군이 싸울 거고.. 그뒤에 충청 수군으로 막으면서 한양에서 어찌하면 되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이일이 대구에 집결하던 5만 군사를 놓쳤고..(가토가 접근하자 다 도망감..) 충청도와 전라도 병사가 5만이나 모여있던거죠..
<<신립의 경우 약 5천에서 1만정도로 기병을 투입했다고 하는데 이당시 갑사는 전부 궁장 경기병이었습니다-_-;; >>
아마 니탕개의 난을 말하는 거 같은데.. 기병이 5천에서 1만이 아니고.. 정확한 기병 숫자는 2~3천 정도 였을 겁니다. 총병은 5천인가 7천인걸로 기억합니다.. 니탕개의 부족은 1만 4천 정도라고 하더군요.
상당히 재미있는 전투인 것이 있어서 좀 본적이 있는데.. 신립이 사령관. 당시 돌격대장(정확한 직책은 기억이..)으로 기병을 이끌고 원균이.. 화포대에 이순신 장군이 계셨죠..임란에서 좀 활약한다는 무장이 제법 많이 있던 전투였습니다. 장교들이 필수적으로 거쳐야 되는 곳이 북쪽이라는 반증이기도 하지요. 모든 무관들이 다 거쳐가는 곳이 그곳입니다.
조선이 초기에 맥을 못춘건 제가 알기에는 두가지 이유떄문인데요..
가장 큰건 경상 수군이 1만과 판옥선 1백척이 제구실을 못했기 때문이고..
지상으로 올줄 몰라서 엿기 때문입니다. 당시 왜군은 쳐들어오면 의례적으로 조운로를 따라서 올라오기 마련이었지요.. 물론 조선 기술이 달리던 왜군은 조운선이나 훔쳐다가 다니다가 수군에 격멸되기가 일쑤였구요..
정확한 기술은 없지만 이순신 장군이 개전후에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와야될 왜군애들을 기다리고 있었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조선은 수운 국가라서 내륙 운송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거든요.. 지금으로 말하면 경부 고속 도로 버려두고 7번국도 타고 올라가서 영동타고 서울 가는 격이지요..
다들 경상 수군이 무너졌으니 전라 수군이 싸울 거고.. 그뒤에 충청 수군으로 막으면서 한양에서 어찌하면 되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이일이 대구에 집결하던 5만 군사를 놓쳤고..(가토가 접근하자 다 도망감..) 충청도와 전라도 병사가 5만이나 모여있던거죠..
- 관바
- 2013/07/03 PM 11:04
아.. 그리고 궁장 경기병 아닙니다. 당시 조선 기병은 중장기병입니다. 찰갑을 입고.. 궁을 두개 들고 다니며 도리깨로 싸웁니다. 간간히 개마를 썻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건 예전 그림에 있는 것도 아닌 것도 있어서.. 상황에 따라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철포에 대비해 솜옷을 입고 그위에 물을 붓는 방식으로 방탄을 강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철포에 대비해 솜옷을 입고 그위에 물을 붓는 방식으로 방탄을 강화시키기도 합니다.
- 스큐즈수
- 2013/07/03 PM 11:07
가장 큰 전쟁 대비 :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임명
실수: 이순신을 경상우수사로 조금 일찍 안내려 보낸거
그랬다면.......................임진왜변
실수: 이순신을 경상우수사로 조금 일찍 안내려 보낸거
그랬다면.......................임진왜변
- 최강팔라
- 2013/07/03 PM 11:33
군포 납부로 인해 임진왜란 직전 바로 투입될수 있는 전투병은 8천 정도에 불과했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선조가 어찌해볼 수준이 아니었죠. 조선이 전쟁이 일어날 줄 몰랐을까요? 나고야성 축조나 군사훈련 상황만 봐도 충분히 짐작가능하죠. 당시 조선이 이를 무시했던 것은 전시체제 돌입으로인한 사회체제 변화를 지배층이었던 사림세력이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기득권 지키기죠. 경상도에 왜군들이 거의 무혈입성한 것만 봐도 당시 조선은 헛점투성이 국가였습니다. 겐소의 협박을 듣고 나서야 부랴부랴 뭘 해보려 하지만 너무나 늦은 대응일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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