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 조선왕조실록 내 단군(檀君) 기록2013.07.20 PM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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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檀君朝鮮)



단군의 휘(諱)는 왕검(王儉)이니, 《구사(舊史)》 단군기(檀君記)에,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지금의 영변(寧邊)묘향산(妙香山)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오시니,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때는 당요(唐堯) 무진년이었다. 상(商) 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산(阿斯達山)지금의 문화(文化)구월산(九月山). 본 이름은 궐산(闕山)이니, 궁궐 터가 있기 때문이다. 뒤에 발음이 늦추어져 구월산으로 잘못 불려졌다. 일설에는, ‘아사(阿斯)’란 방언(方言)으로 구(九)이고, 달(達)은 방언으로 월(月)이니 ‘아사달’이란 9월의 방언이라고도 한다. 으로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고 하였다.



삼한고기(三韓古記)






○ 원년(元年)에 백성에게 머리를 땋고 관(冠) 쓰는 법을 가르쳤다. 군신ㆍ남녀ㆍ음식ㆍ주거의 제도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 《동사(東史)》에는, “단군이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국내의 산천을 다스려 백성이 살 터전을 정해 주었다.” 하였고, 《본기통람(本記通覽)》에는, “우수주(牛首州)지금의 춘천(春川) 에 팽우의 비(碑)가 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에, “팽우가 예맥 조선(濊貊朝鮮)을 뚫었다.” 하였으니, 팽우는 바로 중국 사람이지 단군의 신하가 아니다.




○ 강화현(江華縣) 서쪽 마리산(摩利山) 꼭대기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낸 단(壇)이다.” 한다. 전등산(傳燈山)에는 삼랑성(三郞城)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세 아들에게 명하여 쌓았다.”고 한다. 《고려지리지(高麗地理志)》


○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니, 처음으로 국호(國號)를 가지게 되었다. 여지승람(輿地勝覽)》




○ 조선의 음(音)은 조선(潮仙)이니, 강에서 온 이름이다. 또 “선(鮮)은 밝다는 말이니, 땅이 동쪽에 있어 해가 먼저 밝아오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고 한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은 열양(列陽)에 있다.’고 하였는데, 주(註)에 “열(列)은 물 이름이다.” 하였고, 양웅(楊雄)의 《방언(方言)》에, “조선 열수(洌水)의 사이”라는 말이 있다. 장화(張華)가 말하기를, “조선에는 천수(泉水)ㆍ열수(洌水)ㆍ선수(汕水)가 있는데, 세 물이 합하여 열수(洌水)가 된다.” 하였으니, 아마 낙랑 조선(樂浪朝鮮)이 여기에서 이름을 딴 것인 듯하다.




○ 아들 부루(扶婁)를 낳았으니, 이가 동부여왕(東扶餘王)이 되었다. 우(禹) 임금이 제후(諸侯)를 도산(塗山)에 모을 때에 이르러 단군이 부루를 보내어 조회(朝會)하게 하였다. 《삼한고기(三韓古記)》 하(夏) 나라 우 임금 18년 갑술의 일이다.

일설에는, “부루가 기자(箕子)를 피하여 부여에 나라를 세우고 북부여(北扶餘)라고 일컫다가, 뒤에 가섭원(迦葉院)으로 옮겨 동부여(東扶餘)라고 이름하였다.” 한다.




○ 문화 구월산에 삼성사(三聖祠)가 있는데, 환인(桓因)ㆍ환군(桓君)ㆍ단군 세 분을 제사지낸다.

《구사》에, “단군이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왔다.”고 하였는데, 이제 살펴보건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고기(古記)》의 말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 제석(桓因帝釋)의 서자(庶子)환웅(桓雄)이 있어,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일컬었으니, 이를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이른다.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세상에 머물면서 다스려 화(化)하게 하였는데, 그때 곰[熊] 한 마리가 있어서 항상 신웅(神雄)께 기도하여 사람이 되고 싶어하니, 신웅이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었다. 곰이 먹은 지 37일 만에 여자가 되어 늘 단수(檀樹) 아래에서 주문을 외우며 임신하기를 비니, 신웅이 사람으로 화하여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단군이다. 당요 경인년에 평양(平壤)에 도읍하고 1천 5백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 나라 무왕(武王)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이 당장경(唐臟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산에 숨어 신(神)이 되었는데, 수(壽)가 1천 9백 8세이다.” 하였다. 이로써 말한다면, 태백산 단목 아래에 내려온 분은 단군이 아니다. 다만 그 설이 괴이하고 허황하고 비루하고 과장되어 애당초 거리의 아이들조차 속이기 부족한데, 역사를 저술하는 사람이 이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당요(唐堯) 이후의 역년(歷年)의 수는 중국의 사서(史書)와 《소씨 경세서(邵氏經世書)》를 상고해서 알 수 있으니, 당요 경인년에서 무왕(武王) 기묘년까지가 겨우 1천 2백 20년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나라 다스린 것이 1천 5백 년이고, 수가 1천 9백 8세”라는 것은 그 거짓됨이 심하지 않은가.




○ 단군의 묘는 강동현(江東縣)에서 서쪽으로 3리 되는 곳에 있는데, 주위가 4백 10척이다. 일설에는 현 북쪽 도료산(刀了山)에 있다 한다.

《고기(古記)》에, “단군은 요와 같은 날 즉위하여 우(虞)ㆍ하(夏)를 지나 상(商) 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향년 1천 48세이다.” 하였는데, 당시의 문적(文籍)이 전해지지 않아서 그 진위(眞僞)를 고찰할 수가 없으므로 이제까지 《고기(古記)》를 그대로 따라서 기술해 왔다. 서거정(徐居正)이 말하기를, “요 임금 때는 인류의 문화가 밝았고, 하ㆍ상에 이르러 세상이 점차 경쇠해져 오랫동안 재위한 임금이 4,50년에 불과하고 사람의 수도 상수(上壽)가 1백 년인데, 어찌 단군만 유독 천백 년을 수하여 한 나라를 누릴 수 있었겠는가. 그 설이 거짓임을 알 수 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 ‘단군이 아들 부루(扶婁)를 보내어 도산(塗山)에서 우 임금께 조회했다.’ 하나 그 설이 근거가 없다. 만약 단군이 나라를 장구하게 향유하고 부루가 도산에 가서 조회하였다면, 비록 우리 나라 문적이 갖춰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중국의 문서에 어찌 한 마디도 언급이 없겠는가. 단군이 혼자 누린 것이 아니라 자손 대대로 서로 전해 가면서 나라를 향유한 햇수가 1천 48년인 것이 의심할 것 없다.” 하였다. 《필원잡기(筆苑雜記)》 ○ 《역대아람(歷代兒覽)》에 “무정 8년은 마땅히 갑자년이 되어야지 을미년이 아니며, 수도 마땅히 1천 17년이 되야지 1천 48년이 아니다. 을미와 1천 48년을 가지고 비교하여 참작해 상고해 보면 마땅히 39년이 되어야 한다” 하였다.
홍무(洪武) 병자년(1396)에 길창군(吉昌君)권근(權近)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명 나라 태조(太祖)가 단군을 제목으로 시(詩)를 짓기를 명하니, 권근이 짓기를,
“듣건대 태고적에 / 聞說鴻荒日
단군이 나무 곁에 내려 오셨네 / 檀君降樹邊
대 물리길 몇 대인가 / 傳世下知幾
햇수는 천 년을 지났다오 / 歷年曾過千
하였는데, 대개 전한 세대와 햇수의 장구함을 말한 것이다.




○ 혹 말하기를, “해부루(解夫婁)의 어머니는 비서갑(非西岬)하백(河伯)의 딸이다.” 한다. 《풍암집화(楓岩輯話)》

《유사(遺事)》에, “단군이 하백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아 부루라고 하였다.” 하였는데, 그 말이 더욱더 괴이하다. 그 후에 해모수(解慕漱)가 또 하백의 딸과 사통(私通)하여 주몽(朱蒙)을 낳았다 하였는데, 설령 하백의 딸이 과연 신귀(神鬼)이고 사람이 아닐지라도, 또 어떻게 앞서 단군에게 시집간 터에 뒤에 해모수와 사통했겠는가. 《풍암집화》
단군의 증손 동부여왕(東扶餘王)대소(帶素)가 고구려의 대무왕(大武王)에게 살해당했는데, 대무왕은 곧 한(漢) 나라 광무제(光武帝) 때에 해당되는 만큼, 단군의 아들 해부루로부터 대소까지는 3세에 불과하고 무정(武丁)으로부터 광무까지는 꼭 1천 3백 39년이 되니, 이럴 리는 없는 듯하다. 《역대아람(歷代兒覽)》




○ 단군씨의 후손에 해부루라고 하는 이가 있어 곤연(鯤淵)에 기도하여 금와(金蛙)를 얻었는데, 얼굴이 금개구리와 흡사했으므로 이름을 금와라 하였다. 금와가 우발수(優?水)의 여자에게 반하였는데, 햇빛이 몸에 비치니 감응되어 주몽(朱蒙)을 낳았다. 주몽의 작은 아들이 온조(溫祚)인데, 주몽과 온조는 고구려와 백제의 시조가 되었으니, 모두 단군씨에서 나왔다. 《미수기언(眉?記言)》




○ 평양에 숭령전(崇靈殿)이 있는데, 단군을 제사지낸다. 사향전(祀享典)의 제사(諸祠) 조에 상세하다.




○ 단군의 영토를 상고할 수는 없지만 기자가 단군을 대신하였을 때 그 지역의 반이 요동 땅이니, 단군 때에도 그러했을 것이다. 북부여는 요동 북쪽 1천여 리에 있는데, 대개 단씨가 쇠하자 자손이 북으로 옮겨 가고 옛 강토는 그대로 기자의 영토로 들어간 것이다. 안정복의 《강목(綱目)》



숭인전(崇仁殿) 주C-001을 뵘



단군의 전을 배알하고 공자의 궁을 쳐다보니/檀君殿謁孔宮瞻
신성한 이웃에 사당 모습 더욱 엄숙하네/神聖之隣廟更嚴
도는 희서에 붙여 왕도의 탕탕함을 진술했고주D-001/道寄姬書陳蕩蕩
시는 선아를 열어 맥수(麥秀)의 점점을 읊었네주D-002/時開鮮雅詠??
위태한 자취는 옛날 거짓 미쳐 머리털을 풀어뜨렸고주D-003/危踪昔被佯狂髮
후손은 누가 능히 같은 수염을 나부꼈는가주D-004/遺裔誰飄克肖髥
주 나라 봉함을 받지 않고 스스로 온 것이라/不受周封元自到
맹견이 지를 써서 본 마음을 집어냈네주D-005/孟堅爲志本心拈



[주C-001]숭인전(崇仁殿) : 평양에 있는 기자의 사당으로 단군(檀君)의 사당인 숭령전(崇靈殿)과 공자의 사당 사이에 있다.




[주D-001]도는……진술했고 : 희(姬)는 주(周) 나라 성이므로 희서(姬書)는 주서(周書)를 말하는데, 즉 《서경(書經)》 홍범(洪範)을 가리킨다. 홍범은 기자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도를 말한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리킨다. 이 글에 "편당(偏黨)이 없으면 왕도(王道)가 탕탕(蕩蕩)해진다." 하였는데, 탕탕은 집전(集傳)에 광원(廣遠)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주D-002]시는……읊었네 : 아(雅)는 시의 한 체(體)이니 선아(鮮雅)는 조선(朝鮮)의 아(雅)란 뜻이며, 맥수(麥秀)는 보리 이삭이고 점점(??)은 무성하다는 뜻으로 점점(漸漸)으로 쓰기도 한다. 기자는 뒤에 주 나라에 가서 멸망한 은(殷) 나라의 옛 도읍터에 벼와 보리가 무성함을 보고 슬퍼하여 맥수가(麥秀歌)를 지었는데, 여기에 "맥수가 점점함이여! 벼와 기장이 성하네." 하였다.《史記 卷三十八 宋微子世家》이 노래가 우리나라의 아(雅)가 됨을 말한 것이다.




[주D-003]위태한……풀어뜨렸고 : 은(殷) 나라의 임금인 주(紂)가 무도(無道)하자 기자는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니, 이에 거짓 미쳐 머리털을 풀어뜨리고 종이 되었다.《史記 卷三十八 宋微子世家》




[주D-004]후손은……나부꼈는가 : 기자는 수염이 많았는데 그의 후손인 선우씨(鮮于氏)는 그를 닮아 수염이 많았다 한다.




[주D-005]주 나라……집어냈네 : 맹견(孟堅)은 《한서(漢書)》를 지은 반고(班固)의 자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는 "주 무왕(周武王)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하였으며, 《한서》에는 "기자가 무리를 거느리고 동으로 왔다." 하였는데 기자는 은 나라의 종친이었으므로 의리상 무왕의 봉함을 받지 않았을 것이니, 반고가 기자의 마음을 참으로 알았다는 뜻이다.



단군전(檀君殿)



신성한 이 백성들의 임금이 됨에 / 神聖爲民主
하늘 사람 하늘에서 내려를 왔네 / 天人降紫?
동방 땅에 군장 처음 있게 됐으니 / 東方始君長
중국 나라 요 임금과 시대 같았네 / 中國幷唐堯
태백산의 용은 멀리 날아를 가고 / 太白龍飛遠
아사달의 학 아득히 떠나를 갔네 / 阿斯鶴去遙
황량하게 전각만이 남아 있음에 / 荒凉遺殿在
제기에다 제수 갖춰 전을 올리네 / 俎豆奠黃蕉



삼성사(三聖祠)주C-001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고기(古記)를 끌어대어 이르기를, “천신(天神)환인(桓因)이 서자(庶子) 환웅(桓雄)으로 하여금 천부(天符)의 인(印) 3개와 졸도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상봉에 내려오게 하였는데, 이때에 곰이 변화하여 여신(女神)이 되니, 환인이 혼인을 하여 단군(檀君)을 낳았다. 단군이 비서갑(非西岬)하백(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부루(夫婁)를 낳아서 그가 북부여왕(北扶餘王)이 되었는데, 늙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아들 낳기를 기도한 나머지 금와(金蛙)를 얻어 길렀다. 부루가 죽자 금와가 대를 계승하였는데, 대소(帶素)에 이르러는 고구려(高句麗) 대신무왕(大神武王)에게 멸망을 당했다.” 하였다. 그렇다면 단군의 세대는 단지 한 대를 전하고 끊어진 셈이다.
위에는, “부루가 북부여 왕이 되었다.” 하였고, 아래는 “부루가 도읍을 옮겼다.” 하였다. 《삼국사(三國史)》에 이르기를, “동부여 왕이 되었다.” 했으니, 구도(舊都)는 북부여이고 가섭(迦葉)은 동부여가 되는 모양이다. 또 “그 구도에 천제(天帝)의 아들이라 자칭하는 해모수(解慕漱)란 사람이 와서 도읍했다.” 하였은즉 구도란 것은 곧 태백산인데 해모수가 도읍한 곳이며 부루는 태백산의 동쪽에 있었는데, 대소에 이르러 나라가 망하자 그 아우가 쫓겨나서 압록곡(鴨綠谷)에 이르러 해두왕(海頭王)을 죽이고 도읍하니 이를 갈사왕(曷思王)이라 하는데, 또 고구려에 항복하였은즉 금와의 세대가 끊어진 것이다.
환인이 곰과 더불어 결혼했다면 환웅만 내려온 것이 아니라 환인도 함께 내려온 것이며, 단군이 바로 웅신(熊神)의 소생이라면 곰이 적처(嫡妻)가 아니니, 유독 환웅만이 서자가 아니라 단군도 역시 서자인데 다시 무슨 적자가 있겠는가? 또 혹시 환웅이 죽자 단군이 형을 계승하여 임금이 된 것인가? 단군이 아들 부루에게 전하여 가섭으로 옮겼는데 해모수가 와서 구도에 살았다면 단군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사(史)에 또, “단군이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하였는데, 아사(阿斯)를 언어(諺語)로 새기면 아홉[九]이요, 달(達)을 언어로 새기면 달[月]이니, 이것이 곧 지금의 구월산(九月山)이다. 문화현(文化縣)에 당장경(唐莊京)이 있어, 기자(箕子)가 수봉된 곳인데 단군이 바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구월산에 삼성사(三聖祠)가 있어, 환인ㆍ환웅ㆍ단군 세 사람을 제사하는데, 봄ㆍ가을로 향(香)을 내려 제를 올린다. 그렇다면 단군이 이렇게도 많은 해를 머물러 있다가 주 무왕(周武王) 때에 이르러 비로소 당장(唐莊)으로 옮겼단 말인가?
또 혹시 단군은 아사달로 들어가 신이 되고 부루가 도읍을 옮겼는데, 구도에 머무른 자는 해모수의 후예인가? 해모수가 구도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는데 그 아들 주몽(朱蒙)이 동부여로 난리를 도피했다면 어찌 그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다른 곳으로 갔단 말인가?기자가 봉을 받았다면 바로 해모수를 대신한 것이요, 단군을 대신한 것은 아니다. 기자는 성인인데 어찌 그 주군을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 될 리가 있겠는가?
단군이 천신의 아들이고 해모수도 천제의 아들이라 한다면 하늘에 두 신(神)이 있단 말인가? 단군이 하백(河伯)의 사위가 되고, 해모수도 또한 하백의 사위가 되었으니 동일한 하백이란 말인가? 그 황당무계하여 믿지 못할 것이 이와 같다.
대저 동사(東史)로서도 김관의(金寬毅)의 편년(編年) 같은 따위는 이속(夷俗)을 뒤섞어 채집하여 더욱더 맹랑한 데도 역사를 저작하는 자가 취해 쓰고 있으니 그 견식의 비루함이 이와 같다.



[주C-001]삼성사(三聖祠) : 세 성인을 제사하는 사당. 세 성인은 환인(桓因)ㆍ환웅(桓雄)ㆍ단군(檀君)을 말함. 《類選》 卷九上 經史篇七 論史門.



단기(檀箕)주C-001



우리나라 역사는 단군(檀君)ㆍ기자(箕子) 이상은 상고할 데가 없다. 단군은 요(堯)와 같은 시대에 나라를 세웠다 하였으니, 역시 순(舜)과 같은 시대이다. 순이 맨 처음으로 12주(州)를 설치했는데, 유주(幽州)ㆍ병주(幷州)ㆍ영주(營州)는 모두 동북 지대이다. 이를, “순이 맨 처음으로 설치했다.”주D-001 하였으니, 요의 시대에는 이런 명칭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순은 저풍(諸馮)주D-002에서 탄생했는데, 동이(東夷) 사람이다.” 하였으니, 저풍이란 지대는 요심(遼瀋)과 서로 가깝게 닿았던 모양이다. 《주례(周禮)》 직방씨(職方氏)주D-003에 상고하면, “유주에는 의무려(醫巫閭)라는 산이 있고 소산물로는 어염(魚鹽)이 있다.” 하였다. 지금 연경(燕京)으로 가는 길 오른편에 의무려산이 보이고 어염 역시 요동(遼東) 바다에서 생산되므로, 유주란 지대가 우리나라와 서로 연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맨 처음에는 요동과 심양(瀋陽)이 모두 조선의 소유였으니 반드시 저풍과 서로 멀지 않았을 것이며, “순은 1년 만에 부락을 이루고 2년 만에 고을을 이루고 3년 만에 도읍을 이루었다.”주D-004 하였으니, 단군도 순에게 따르게 되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공(禹貢 《서경(書經)》의 한편명)에 유ㆍ병ㆍ영(幽幷營) 세 고을이 탈락된 것은 무슨 이유였는지 알 수 없으나, 대개 중국과 거리가 좀 멀고 풍속에 큰 차이가 있었던가 보다. 세 고을에서 한때에 조회(朝會)는 온다 해도 내복(內服 왕성(王城)과 가까운 지역을 이름)과 같이 인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중국에만 부ㆍ세를 정한다[成賦中邦].”주D-005 하였다. 이로 본다면 이 세 고을은 직공(職貢 물건을 바침) 중에만 편입시켜 중국과 통하도록 했던 것인 듯하다. 나중에 부루(夫婁)주D-006가 하(夏) 나라에 조회한 것으로 보아 증명할 수 있다. 또한 은(殷) 나라가 지나고 주(周) 나라에 이르러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았다고 했는데, 어찌 미개한 호맥(胡貊) 지대로 그냥 버려 두었다 할 수 있겠는가?
《좌전(左傳)》 희공(僖公) 12년에, 진 목공(秦稷公)이, “당숙(唐叔)을 봉할 때 기자가, ‘그의 자손은 반드시 크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였는데, 그때 당숙의 사실을 절역(絶域 먼 지방. 조선을 가리킴) 밖에서 어떻게 알 수 있었단 말인가? 비록 그런 말이 있었다 할지라도 우리나라에서는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소손(小孫) 구환(九煥)이, “ 백구(白駒)주D-007란 시는 유객(有客)주D-008과 서로 흡사하므로 이는 기자가 주 나라에 조회갔을 때 지은 것인 듯하다.” 하니, 이 말이 근사하다 하겠다.
또한 이십팔수(二十八宿)라는 이름도 어느 시대에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기성(箕星)은 동북 중간에 있어서 바로 우리나라 석목(析木) 분야에 닿으므로, 기(箕)로써 나라 이름을 만든 것도 그만한 의의가 있었던 듯하다.



[주C-001]단기(檀箕) :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五州》 卷三十四 檀箕爲國號辨證說.




[주D-001]순이 맨 처음으로 설치했다 : 이 말은 《서경》순전(舜典)에, “肇十有二州”라고 보임.




[주D-002]저풍(諸馮) : 지명. 이 말은 《맹자》 이루(離婁) 편에 있음.




[주D-003]직방씨(職方氏) : 《주례》 하관(夏官)의 편명.


[주D-004]순은 1년 …… 도읍을 이루었다 : 이 말은 《사기(史記)》 오제기(五帝記)에 보임.


[주D-005]중국에만 …… [成賦中邦] : 이 말은 《서경》 우공(禹貢) 편에 있는 구절.




[주D-006]부루(夫婁) : 단군(檀君)의 태자.



[주D-007]백구(白駒) : 《시경》소아(小雅)의 편명. 어진 이를 머물도록 잡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 시.




[주D-008]유객(有客) : 《시경》주송(周頌)의 편명. 은(殷) 나라 미자(微子)가 주(周) 나라에 조회한 것을 기린 시.



요계시말(遼界始末)주C-001



단군(檀君)ㆍ 기자(箕子)주D-001 시대의 강역[疆場]은 상고할 데가 없다. 고구려에 이르러 온 요동(遼東)의 땅을 다 차지하여, 동쪽은 바다까지 이르고, 서쪽은 장령(長嶺)까지 이르러서 요하(遼河)로 경계를 삼았다. 신라 말기에 발해(渤海)에 통합된바 되었는데, 지방은 5천 리이고, 햇수는 수백 년이었다. 글안(契丹)이 발해를 멸하기에 이르러 국호를 요(遼)라고 했으며, 요가 쇠하고서 금(金)이 일어났다. 금은 흑수말갈(黑水靺鞨)이니 이른바, 생여진(生女眞)이 이것이다. 서희(徐熙)가 소손녕(蕭遜寧)을 대해서 한 말에, “ 신사(信使)가 통래하지 못한 것은 생여진의 웅거한 바가 되었기 때문이다.주D-002” 하였다. 그렇다면 흑수말갈이 이미 와서 압록강의 길독에 웅거했던 것이다.
그 뒤 금(金)의 포선만노(蒲鮮滿奴)가 요동에 웅거하여 천왕(天王)을 자칭하고, 국호를 대진(大眞)이라 했으니. 역사에서 일컫는 동진제(東眞帝)주D-003가 바로 이것이다. 원(元)이 중국으로 들어가 주인이 되기에 이르러는 또 온 요동을 차지했다. 원이 일어나자 우리 북도(北道)의 주군(州君)이 원 나라에 몰입(沒入)되었으니, 원 나라가 장령(長嶺)도 차지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청(淸) 나라는 본디 흥경(興京)에서 일어났으니, 장령의 서쪽에 있었던 것이다. 폭원(幅員)이 가장 넓어서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한다. 이것이 요계(遼界)의 시말이다.



[주C-001]요계시말(遼界始末) : 요동에 있어서의 우리나라 경계의 변동에 대해서 논했음. 단군ㆍ기자의 시대는 뚜렷한 기록이 없어서 이를 고증할 방법이 없고, 고구려가 했던 것은 사실이나 발해에게 통합된 뒤로 번갈아 가면서 이민족(異民族)에게 빼앗겨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말았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발해를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것으로 인정하지만 과거에는 흔히 여진족의 나라로 보았음. 성호의 견해도 마찬가지임.




[주D-001]기자(箕子) : 과거에는 《사기》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의, “무왕(武王)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는 기록을 근거로 해서 단군조선 다음에 기자조선을 넣었으나 오늘에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주D-002]신사(信使)가 통래하지 …… 되었기 때문이다 : 이 말은 《고려사》 서희전(徐熙傳)에 보임.



[주D-003]동진제(東眞帝) : 《고려사》 고종(高宗) 3년 조에, “금 나라 선무사포선만노가 요동에 웅거하여 천왕을 참칭하고 국호를 대진이라 했다[金宜撫蒲鮮萬奴 據遼東僭稱天王 國號大眞].”는 기록이 보임. 뒤에 동진국(東眞國)으로 일컬어졌음.



구월산(九月山) 단군사(檀君祠)



당요 시대 한 나라 임금이 되어/立極唐堯際
신공으로 해우(海隅)를 안정시켰네/神功靖海堧
사궁이 구월산에 의거를 하여/祠宮依九月
향화가 몇천 년을 내리었다오/香火逮千年
우 임금은 도산에서 제후(諸侯) 모으고/禹會塗山罷
기자(箕子)는 옥마로써 봉지(封地)에 왔네/箕封玉馬旋
동쪽 백성 끼친 은택 보답하자니/東民報遺澤
노래 춤 산마루에 드설레누나/歌舞鬧曾顚



단군강역고(檀君疆域考)


단군의 강역은 상고할 수 없지만, 기자(箕子)가 단씨(檀氏)를 대신하여 왕 노릇하였는데 그 제봉(提封 제후(諸侯)의 봉지(封地))의 반이 곧 요지(遼地)였으니, 단군의 시대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
《고기(古記)》주D-001에,
“북부여(北夫餘)는 단군의 후손이다.” 라고 하였다.
상고하건대 부여는 요동 북쪽 1천여 리에 있으니, 아마 단씨 세대가 쇠하자 자손이 북으로 옮기고 옛 강역이 이내 기자의 봉지에 흡수된 것이리라.
《고려사》 지리지(地理志)에,
“마니산(摩尼山)의 참성단(塹城壇)은 세속에서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단이다.’ 하고, 전등산(傳燈山)은 일명 삼랑성(三郞城)인데, 세속에서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은 것이다.’ 고 전한다.”
하였다. 그렇다면 그 남쪽은 또한 한수(漢水)로 한계를 해야 할 것이다.



[주D-001]《고기(古記)》 : 《단군고기(檀君古記)》를 약한 것이다. 단군의 사적을 기록한 문헌인 듯하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에는 《단군본기(檀君本紀)》로 되어 있다.

단군이 기자(箕子)를 피하여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기다


《삼국유사》에,
“단군(檀君)이 나라를 다스린 지 1천 5백 년 되는 주 무왕(周武王)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므로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숨어 신이 되고 수(壽) 1천 9백 8세를 누렸다.”
하였는데, 지금 《경세서(經世書)》를 상고하니, 요(堯)의 무진으로부터 무왕(武王) 기묘년까지 1천 2백 12년이라, 1천 5백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는 말은 허황하여 분별할 수 없다. 또 기자는 어진 성인이시라 어찌 남의 나라를 모점(冒占)할 리 있겠는가? 성인을 모독함이 너무 심하다. 대개 저들이 이미 쇠망하였기 때문에 기자가 와서 풀밭을 헤치고 개창(開創)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
“문화현(文化縣)장장평(庄庄坪)은 단군이 도읍한 곳이라고 전해지는데, 곧 당장경(唐莊京)《삼국유사》에는 장당경(藏堂京)으로 되어 있다. 의 오전(誤傳)이다.”
하였고, 《여지승람》에,
“기지(基址)가 아직 남아 있다.”
하였으나, 이는 세속의 전설에서 나왔기에 모두 취하지 않는다.



단군의 무덤


《여지승람(輿地勝覽)》 강동현 고적(江東縣古迹) 조에,
“고을 서쪽 3리(里)에 큰 무덤이 있으니 그 주위가 4백 10척으로 속설에 단군총이라 전해진다.”
하였다. 이는 언설(諺說)에서 나왔기 때문에 따르지 않는다.

단군(檀君)이 훙(薨)하다


《고기(古記)에,
“단군(檀君)은 무진(戊辰)에 요(堯)와 병립(?立)하여 우(虞)ㆍ하(夏)를 거쳐 상(商)의 무정(武丁) 8년 을미(乙末)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고 1천 48세의 수(壽)를 누렸다.”
하였는데, 지금 《경세서(經世書)》 및 여러 역사를 상고하건대, 무정 8년은 갑자(甲子)가 되고 39년이 을미다. 요(堯)의 무진부터 무정 8년 갑자까지는 1천 17년이 되고 을미까지는 1천 48년이 되니, 《고기(古記)》의 말과 같이 본다면 이 어찌 향국(享國) 1천 17년에 향수(享壽)가 1천 48세란 뜻이 아니겠는가? 이제 《경세서》에 의거하여 무정 8년 갑자로 기록한다.
대개 상고 시대 신성(神聖)의 나이가 혹 범인과 특이한 것이 있으니, 광성자(廣成子)는 1천 2백 세요, 팽조(彭祖)는 8백 세다. 이것이 비록 패가(稗家)의 잡설에서 나왔으나 중국 사람들의 전설이 이미 오랬고, 또 일본사(日本史)를 보면 왜황(倭皇) 수인(垂仁) 때 왜희(倭姬)의 나이 5백여 세였으니 이때는 서한(西漢) 원성(元成) 무렵이요, 대신(大臣) 무내(武內)의 나이 3백 40여세였으니 이때는 서진(西晋) 말엽이다. 이런 것으로 본다면 단군의 향년 1천여 세가 또한 괴이할 것이 없다. 권근(權近)의 응제시(應製詩)에,


역대는 얼마인지 모르겠으나 / 傳世不知幾
역년은 일천년이 지났도다 / 歷年曾過千


하였으니, 그 의도가 1천 48년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 역대와 역년의 수가 자못 이치에 가깝기 때문에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 그 논을 취하였다. 나도 그 논을 받아들인다.

단군(檀君)의 이칭(異稱)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렸기 때문에 단군(檀君)이라 칭한다.”
하였고, 《동국통감(東國通鑑)》 및 《고려사》 지리지에도,
“단목(檀木) 아래에 내렸기 때문에 단군이라 칭한다.”
하였기에, 《동국통감》 및 《고려사》 지리지를 따른다.

단군(檀君) 원년 무진은 당요(唐堯) 이십 오년에 해당한다


《위서(魏書)》를 상고하면,
“2천 년 전에 단군 왕검(檀君王儉)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고 나라를 열어 그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으니 요(堯)와 동시이다.”
하여, 중국사(中國史)의 기록이 동사(東史)와 대략 같다. 단 동사에는 지나치게 과장하고 허황하게 썼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모호하게 기연미연한 것으로 돌림은 옳지 못하다.
또 상고하건대, 고려의 중 무극(無極)일연(一然)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찬술(撰述)하면서 《고기(古記)》 《단군고기(檀君古記》 를 인용하여,
“단군(檀君)은 당요(唐堯) 50년 경인(庚寅)에 즉위하였다.”
하고, 그 자주(自註)에,
“요(堯)의 원년은 무진(戊辰)이므로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이 아니다.”
하여, 《경세서(經世書)》와 다르니 필시 다른 일종의 책일 것이다. 《동국통감(東國通鑑)》과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 모두,
“당요 무진년에 단군이 평양(平壤)에 도읍하였다.”
하였는데, 요(堯)의 즉위가 상원갑자(上元甲子) 갑진(甲辰)에 있었으니 무진(戊辰)은 곧 25년이다. 신익성(申翊聖)이 지은 《경세서보편(經世書補編)》에도 요(堯)의 25년 무진으로 단군의 원년을 삼았기 때문에 그것을 따른다.



- 조선의 단군(檀君)은 동방(東方)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箕子)는 처음으로 교화(敎化)를 일으킨 임금이오니, 평양부(平壤府)로 하여금 때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 고려의 혜왕(惠王)·현왕(顯王)·충경왕(忠敬王)·충렬왕(忠烈王)은 모두 백성에게 공이 있으니, 또한 마전군(麻田郡)의 태조묘(太祖廟)에 붙여 제사지내게 할 것입니다.”
임금이 도당(都堂)에 교지를 내렸다.
“봄·가을의 장경(藏經) 백고좌(百高座)의 법석(法席)과 7소(所)의 도량(道場)에 대하여, 그것의 처음 설치한 근원을 상고하여 아뢰라.”



- 우리 나라는 단군 이래로 혹은 합하고 혹은 나누어져서 각각 도읍을 정했으나, 전조 왕씨가 통일한 이후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자손이 서로 계승해 온 지 거의 5백 년에 천운이 끝이 나서 자연히 망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큰 덕과 신성한 공으로 천명을 받아 의젓하게 한 나라를 두시고, 또 제도를 고쳐서 만대의 국통(國統)을 세웠으니, 마땅히 도읍을 정하여 만세의 기초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윽이 한양을 보건대, 안팎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 옛날부터 이름난 것이요,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
왕이 분부하였다.
“상신한 대로 하라.”


“압록강 맑고 지경은 옛 정한 대로,
강했어도 거짓 없이 시대의 영웅이라 즐겨한다.
도망친 죄인을 들이지 않는 1천 년의 복지,
예절과 의리 모두 백세의 공적 이루었네.
한나라의 정벌은 분명히 책에 있어 상고하겠고,
요나라의 정벌한 것 남긴 자취 살펴야 할 것일세.
정회(情懷)는 하늘 중심에 성취된 듯,
물에는 파도 없고 수자리도 변동 없다.”【위는 압록강(鴨綠江).】
“우물과 동네 옮겨 가서 저자가 황량하여,

우거진 풀 눈에 가득 길손이 상심한다.
비원[園苑]에는 꽃이 있어 벌이 꿀 모아가고,
궁전과 누대(樓臺)에는 주인 없어 토끼의 고장 되었네.
행상(行商)은 길을 돌아서 새 성으로 가고,
앉은 장사 옮겨 살며 옛 동네 그리워한다.
이것이 옛날 왕씨의 기업(基業),
단군(檀君)이 가신 지 오래이니 몇 번이나 경장(更張)하였노.”【위는 고려(高麗)의 고경(古京).】
“지경에 들어서면 들에 가득 농사하는 노래 들린다.
군사를 파하고 김매고 심은 지 몇 춘추(春秋)인가.
수루(戍樓)에 달린 변탁(邊鐸)이 녹슬고,
망보(望堡)에는 재와 낙엽 몰려서 흙더미 되었네.
역리(驛吏)는 먼 길 편히 온 것 기쁘게 마중하고,
일부(馹夫)들 기쁘게 놀라고 좋아서 전송한다.
하늘 끝 땅 끝까지 닿은 중화(中華)의 경계,
벼와 기장 밭에 가득하여 해마다 거둔다.”




- 우리 동방(東方)은 단군(檀君)·기자(箕子)가 모두 그 역년(歷年)이 1천 년이나 되었으나, 당시에 또한 불법(佛法)이 있지 않았습니다.

“1. 평양(平壤)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가 도읍을 세운 뒤로 서북 지방(西北地方)의 본영(本營)이 되었고, 또 토관(土官)을 설치하고 ‘서도(西都)’라 이름하여,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습니다.



- 예조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하윤(河崙)이 또한 일찍이 건의하여 조선(朝鮮)의 단군(檀君)을 제사하도록 청하였다. 예조에서 참상(參詳)하기를,
“기자의 제사는 마땅히 사전(祀典)에 싣고, 춘추(春秋)에 제사를 드리어 숭덕(崇德)의 의를 밝혀야 합니다. 또 단군(檀君)은 실로 우리 동방의 시조이니, 마땅히 기자와 더불어 함께 한 사당[廟]에 제사지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예조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춘추(春秋)로 사신을 보내어 단군(檀君)·기자(箕子)의 묘에 제사드리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1. 삼가 교서관(校書館) 축판식(祝板式)을 보니,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에게는 ‘국왕(國王)’이라 칭하고 전조(前朝) 태조는 ‘조선 국왕(朝鮮國王)’이라 칭하니, 의리에 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단군과 기자에게는 ‘조선 국왕’이라고 칭하도록 허락하소서. 경내 산천(境內山川)은 ‘국왕’이라 칭하고 망제 북교(望祭北郊)는 ‘조선 국왕’이라 칭하니, 또한 의리에 합하지 않습니다. 북교(北郊)에도 또한 ‘국왕’이라 칭하도록 허락하소서. 마조(馬祖)의 축(祝)은 ‘조선 국왕’이라 칭하고, 선목(先牧)의 축(祝)은 ‘국왕’이라 칭하는데, 선목은 또한 경내(境內)의 신이 아니니, 마조의 예에 의하도록 허락하소서.”


- 예조에서 제사의(諸祀儀)를 올렸다. 단군(檀君)·기자(箕子)·고려 시조(高麗始祖)에게 제사하는 의주(儀註)와 영성(靈星)·마조(馬祖)·사한(司寒)·산천(山川)에 제사하는 의주(儀註)와 오랫동안 비가 와서 국문(國門)에 영제(혦祭)하는 의주(儀註)를 상정(詳定)하여서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의 무진년(戊辰年)에 있었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이 됩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러나 또한 1천여 년이 되도록 이를 혹은 고친 적이 아직 없습니다.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憲大王)이 또한 이를 따라 더욱 공근(恭謹)하였으니, 신은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폐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말하기를, ‘단군은 해외에 나라를 세워 박략(朴略)하고 글이 적고 중국과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찍이 군신(君臣)의 예를 차리지 않았다.



- 옛날 단군 조선(檀君朝鮮)과 기자 조선(箕子朝鮮)에는 모두 불씨의 축리가 없었으나, 그 지난 연수(年數)가 모두 1천에 이르렀으니, 일찍이 성조(盛朝)에서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리라고 이르겠습니까.



- 그런데 기자 신위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있고, 단군(檀君) 신위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있었습니다. 신이 평양부의 교수관(敎授官) 이간(李簡)에게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예전에 중국 사신이 평양에 와서 기자의 사당과 후손의 있고 없음을 묻고 기자의 묘소(墓所)에 가서 배알하였는데, 그 뒤에 나라에서 기자 사당을 문묘(文廟) 동편에 세우라고 명하였고, 또 단군으로 배향하라는 영이 있었으므로, 지금까지 이와 같이 하여 제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단군은 당(唐)나라 요(堯) 임금과 같은 시대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신 분이고, 기자는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명을 받아 조선에 봉(封)하게 된 분이니, 역사의 횃수를 따지면 요임금에서 무왕까지가 무려 1천 2백 30여 년입니다. 그러니 기자의 신위를 북쪽에 모시고, 단군의 신위를 동쪽에 배향하게 한 것도, 실로 나라를 세워 후세에 전한 일의 선후에 어긋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위에 아뢰고자 하였으나, 마침 아비의 상을 만나 미처 말씀을 올리지 못하였삽더니, 이제 신을 사온서 주부로 제수하시고 이어 의례 상정 별감(儀禮詳定別監)으로 임명하시었기에, 신이 이에 공경히 삼가 본조의 여러 제사 의식을 상고하오니, 향단군 진설도(享檀君陳說圖)에 ‘신위는 방의 중앙에서 남쪽을 향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전일에 뵈온 서향 좌차(坐次)는 이 도식(圖式)과 합치되지 않사오니, 만약 단군과 기자가 같은 남향으로서, 단군이 위가 되고, 기자가 다음이 되게 한다면, 나라를 세운 선후가 어긋나지 않을 듯하오나, 기자는 무왕을 위해서 홍범(洪範)을 진술하고 조선에 와서 여덟 조목을 만들어서 정치와 교화가 성행하고 풍속이 아름다워져서 조선이라는 명칭이 천하 후세에 드러나게 되었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 태조 강헌 대왕(康獻大王)께서 명나라 태조 고황제에게 국호를 정하는 일을 청했을때, 태조 고황제는 조선이라는 명칭을 이어받기를 명하였던 것이고, 그 뒤로 중국 사신으로서 평양을 지나는 자가 혹 사당에 가서 배알하게도 된 것이니, 그런즉 명칭은 기자 사당으로 되어 있는데, 단군 신위를 모시는 것은 진실로 미편한 일입니다. 신이 또 들으니, 기자 사당에는 제전(祭田)이 있고 단군을 위해서는 없기 때문에, 기자에게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마다 제물을 올리되, 단군에게는 봄 가을에만 제사한다 하옵니다. 현재 단군 신위를 기자 사당에 배향하게 되어서 한 방에 함께 계신데 홀로 단군에게는 초하루·보름 제물을 올리지 아니한다는 것은 또한 미안하지 않을까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단군의 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하도록 하여 제사를 받들면 거의 제사 의식에 합당할까 합니다.”
하니, 이 글을 예조에 내리어 그대로 이행하도록 명하였다.




- 예조에 전지하기를,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묘제(廟制)를 다시 의논하고,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始祖)에게 묘를 세워 치제(致祭)하는 일을 모두 고제(古制)에 상고하여 상세하게 정하여 아뢰라.”
하였다.


- “나누어서 제사지내는 것도 옳으며, 합하여 제사지내는 것도 또한 옳으니, 음(陰)과 양(陽)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중국에서는 하늘과 땅을 한 단에 합하여 제사지내니 지금 단군(檀君)과 삼국(三國)의 시조도 함께 한 단에 두고 제사지내는 것도 또한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의 시조를 단군(檀君)과 합하여 제사지낸다면 이는 본국(本國)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이니 옳지 못하다.”
하였다. 변계량이 아뢰기를,
“단군은 우리 동방에서 모두 합하여 제사지내는 것이 무방(無妨)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단군이 삼국(三國)을 통일했는가를 내가 듣지 못한 바이니, 그렇다면 서울에 모아서 한 제실(祭室)에 같이 두어 제사지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하였다.


- 우의정으로 그대로 치사(致仕)한 유관(柳寬)이 상서(上書)하기를,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은 신의 본향(本鄕)입니다.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본향에 내려온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여러 부로(父老)들의 말을 듣고 비로소 <이 고을이> 사적(事迹)이 오래인 것을 알았습니다. 구월산(九月山)은 이 현의 주산(主山)입니다. 단군 조선 때에 있어서는 이름을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하였고, 신라 때에 이르러 궐산(闕山)이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그때에 문화현을 처음으로 궐구현(闕口縣)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전조(前朝)에 이르러서는 유주 감무(儒州監務)로 승격시켰으며, 고종 때에 이르러 또 문화 현령(文化縣令)으로 승격하였고, 산의 이름의 「궐」자를 느린 소리로 발음하여 구월산(九月山)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산의 동쪽 재[嶺]는 높고 크고 길어서 일식 정도 가야 안악군(安岳郡)에 이르러 끝납니다. 재의 중허리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처음 세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북쪽 벽에는 단웅천왕(檀雄天王), 동쪽 벽에는 단인천왕(檀因天王), 서쪽 벽에는 단군 천왕(檀君天王)을 문화현 사람들은 삼성당(三聖堂)이라고 항상 부르며, 그 산 아래에 있는 동리를 또한 성당리(聖堂里)라고 일컫습니다. 신당(神堂)의 안팎에는 까마귀와 참새들이 깃들이지 아니하며, 고라니와 사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날씨가 가물 때를 당하여 비를 빌면 다소 응보를 얻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으니, 아마도 단군의 도읍이 이 산 아래에 있었을 것이다.’고 합니다. 삼성당은 지금도 아직 있어서 그 자취를 볼 수가 있으나, 지금은 땅 모양을 살펴보건대, 문화현의 동쪽에 이름을 장장(藏壯)이라고 하는 땅이 있는데, 부로들이 전하는 말에 단군의 도읍터라고 합니다. 지금은 증험(證驗)이 될 만한 것은 다만 동서 난산(東西卵山)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이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였으니, 지금 기자묘(箕子廟)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라고 합니다. 신이 살펴본 바로는, 단군은 요(堯)임금과 같은 때에 임금이 되었으니, 그 때부터 기자에 이르기까지는 천여 년이 넘습니다. 어찌 아래로 내려와 기자묘와 합치하여야 한단 말입니까.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단목(檀木) 곁에 내려와서 태어났다 하니, 지금의 삼성(三聖)설은 진실로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또 살펴보건대, 태고(太古)의 맨처음에 혼돈(混沌)이 개벽(開闢)하게 되어, 먼저 하늘이 생기고 뒤에 땅이 생겼으며, 이미 천지(天地)가 있게 된 뒤에는 기(氣)가 화(化)하여 사람이 생기었습니다. 그 뒤로 사람이 생겨나서 모두 형상을 서로 잇게 되었으니, 어찌 <사람이 생긴 지> 수십만 년 뒤의 요임금 때에 다시 기가 화하여 사람이 생겨나는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그 나무 곁에서 생겼다는 설은 진실로 황당무계한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감(聖鑑)으로 헤아려 결정하시고, 유사(攸司)에 명하여 도읍한 곳을 찾아내어 그 의혹을 없애게 하소서.”
하니, 보류(保留)하여 두라고 명하였다.




- 1. 단군(檀君)의 신위판에 ‘조선후 단군지위(朝鮮侯檀君之位)’라 쓰고, 고려 시조(高麗始祖)의 신위판에 ‘고구려 시조지위(高句麗始祖之位)’ 라 쓴 것은 본조의 모든 사전의 의식에 따라 ‘조선 단군’이라 고쳐 쓰고, ‘후(侯)’와 ‘지위(之位)’의 두 글자는 삭제하게 하자고 한 6개 조항은 아뢴 대로 시행하소서.


-호조에서 아뢰기를,
“사전(祀典)에 실려 있는 각도의 산천(山川)·성황(城隍)의 신사 위전(神祠位田)을, 중사(中祀)는 2결(結), 소사(小祀)는 1결 50부(負)을 급여하되, 평양(平壤)의 단군(檀君)·기자(箕子) 등의 중사 위전(中祀位殿)은 각각 3결을 급여하고, 마전현(麻田縣)에 있는 고려(高麗)의 시조(始祖) 이하 4위(位)의 위전(位田)도 역시 삼국 시조(三國始祖)의 예(例)에 따라 1위(位)마다 3결을 급여하고, 그 나머지의 전답은 모두 군자전(軍資田)에 귀속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예조에서 평안도 감사의 관문(關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단군(檀君)·기자(箕子)·고구려(高句麗) 삼전(三殿)의 제기(祭器)를 처음에는 도화체제(圖턛體制)를 모방하여 만들었으나, 모두 법과 같지 않으니, 청하건대 삼위(三位)의 제기 중에서 보(?)·궤(?) 등을 주기(鑄器)로서 고치고, 변(쮹)·비(?)는 봉상시(奉常寺)로 하여금 만들어 보내고, 와등(瓦솋)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겨냥하여 구워 만들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유사눌(柳思訥)이 상서하기를,
“신이 삼가 세년가(世年歌)를 보건대, 단군은 조선의 시조입니다. 그가 날 때는 사람들보다 달랐으며, 그가 죽어서는 화하여 신이 되었으며, 그가 나라를 누린 역년(歷年)의 많음은 이와 같은 것이 있지 않았습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유사에 명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문을 짓게 했는데, 그 때에는 유사가 그 사실을 살피지도 아니하고 평양에다 사당을 세우기를 청하니, 신의 숙부 유관(柳寬)이 그 그릇된 점을 변론하여 일이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신이 세년가로 상고해 보건대, 단군이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했다가 후에는 백악(白岳)에 도읍했으며, 은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서 신이 되었는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1천 48년 동안 나라를 누리고, 지금도 사당이 아사달에 있네.’ 했으니, 어찌 그 근거가 없겠습니까. 또 더군다나 고려에서는 구월산(九月山) 밑에 사당을 세워 그 당우(堂宇)와 위판(位版)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세년가와 합치하니,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서는 이 곳을 버리고 다시 사당을 다른 곳에다 세운다면 아마 그 장소가 잘못된 듯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성상께서 재결(裁決)하시옵소서.”
하니, 명하여 예조에 내리게 하였다.




- 평안도. 나라에서 행하는 평양부의 평양강은 중사이고, 단의 위판은 평양강지신이라 쓰고, 기자는 중사이고, 전의 위판은 조선 시조 기자(朝鮮始祖箕子)라 쓰고, 단군은 중사이고, 고구려 시조는 중사이며, 전의 단군 위판은 조선 단군이라 쓰고, 고구려 위판은 고구려 시조라 쓸 것. 구진 익수(九津溺水)는 소사(小祀)이고, 단위 위판에는 구진 익수지신(九津溺水之神)이라 쓸 것.



- 우리 동방(東方)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이 당요(唐堯) 때에 시작하였고, 기자(箕子) 조선은 주 무왕(周武王) 때에 봉하였사오니, 군신 상하(君臣上下)와 예악 문물(禮樂文物)을 유지하여 서로 전한 것이 오래였사옵니다.



○ 대사(大祀)
사직(社稷)과 종묘(宗廟)이다.


○ 중사(中祀)
풍운뢰우(風雲雷雨)와【산천(山川)과 성황(城隍)도 붙여 제사한다.】 악·해·독(嶽海瀆)【지리산(智異山)은 전라도 남원(南原)의 남쪽에 있고, 삼각산(三角山)은 한성부(漢城府)의 중앙에 있고, 송악산(松嶽山)은 개성부(開城府)의 서쪽에 있고, 비백산(鼻白山)은 영길도(永吉道) 정평(定平)의 북쪽에 있고, 동해(東海)는 강원도(江原道) 양주(襄州)의 동쪽에 있고, 남해(南海)는 전라도 나주(羅州)의 남쪽에 있고, 서해(西海)는 풍해도(?海道) 풍천(?川)의 서쪽에 있다. 웅진(熊津)은 충청도의 연기(燕岐)에 있고, 가야진(伽倻津)은 경상도의 양산(梁山)에 있으니, 이상은 남쪽이요, 한강(漢江)은 한성부 안에 있고, 덕진(德津)은 경기(京畿) 임진(臨津)에 있고, 평양강(平壤江)은 평안도 평양부(平壤府)에 있고, 압록강(鴨綠江)은 평안도 의주(義州)에 있으니, 이상은 서쪽이다. 두만강(豆滿江)은 함길도(咸吉道) 경원(慶源)에 있다.】 선농(先農)·선잠(先蠶)·우사(雩祀)와【구망(勾芒)은 목정(木正)이요, 축융(祝融)은 화정(火正)이요, 후토(后土)는 토정(土正)이요, 욕수(?收)는 금정(金正)이요, 현명(玄冥)은 수정(水正)이요, 후직(后稷)이다.】 문선왕(文宣王)·조선 단군(朝鮮檀君)·후조선 시조(後朝鮮始祖) 기자(箕子)·고려 시조(高麗始祖)이다.


- 중춘과 중추에 조선 단군(朝鮮檀君)과 후조선 시조(後朝鮮始祖) 기자(箕子)와 고려 시조(高麗始祖)에게 제사하고



- 단군(檀君)은 신위(神位)를 설치하되, 중앙에 위치하여 남쪽을 향하게 하고,【《위서(魏書)》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 하였으니, 요제(堯帝)와 같은 시기이다.” 하였다.】 기자(箕子)는 신위(神位)를 설치하되, 중앙에 위치하여 남쪽을 향하게 하고, 고려 시조(高麗始祖)는 신위를 설치하되, 중앙에 위치하여 남쪽을 향하게 하고,



- 단군(檀君)·기자(箕子)·고려 시조(高麗始祖)에게는 모두
“조선국왕 성 서명 감소고”



- ◎ 단군(檀君)·기자(箕子)·고려 시조(高麗始祖)

단군(檀君)·기자(箕子)·고려 시조(高麗始祖)의 찬실도(饌實圖)와 준뢰도(尊쬆圖)는 풍운뢰우(風雲雷雨)와 같다.




- 단군(檀君)·기자(箕子)·고려 시조(高麗始祖)에게는 각위(各位)에 양·돼지 각기 한 마리를 쓰고,


◎ 조선 단군의 집사관

조선 단군(朝鮮檀君)의 행사(行事) 집사관(執事官)은 악·해·독(嶽海瀆)의 정제(正祭)와 같다.


◎ 시일(時日)

향조선 단군의(享朝鮮檀君儀)【기자(箕子)에게 제향하는 의식도 같다.】
서운관(書雲觀)에서 한 달[一月] 전에 중춘(仲春) 상순(上旬)으로 택일(擇日)하여 예조(禮曹)에 보고하고,【중추(仲秋)도 이에 준한다.】 예조에서 계문(啓聞)하고 중외 유사(中外攸司)에 산고(散告)하여, 직무에 따라서 준비[供辦]하게 한다.


-【부(府) 남쪽에 있다. 꼭대기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는데, 돌로 쌓아서 단의 높이가 10척이며, 위로는 모지고 아래는 궁글며, 단 위의 사면(四面)이 각기 6척 6촌이고, 아래의 너비가 각기 15척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석단(石壇)이라.” 한다. 산기슭에 재궁(齋宮)이 있는데, 예로부터 매년 봄·가을에 대언(代言)을 보내어 초제(醮祭)를 지내었다. 금상(今上) 12년 경술에 비로소 2품 이상의 관원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재궁 벽 위에 ‘동(東)’자 운(韻)의 시(詩)가 있으니, 태종(太宗)이 잠룡(潛龍) 때에, 일찍이 대언(代言)이 되어서 이곳에서 재숙(齋宿)할 때 이 시를 지은 것인데, 지금 널에 새기고 금으로 메웠다.】 전등산(傳燈山)【일명(一名)은 삼랑성(三郞城)이니, 참성(塹城) 동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았다.”고 한다.】



- 장장평(庄庄坪)이 현의 동쪽에 있고,【세속에서 전하기를, “조선 단군(朝鮮檀君)이 도읍한 곳이라.” 하나 곧 당장경(唐莊京)의 잘못 이름이다.】 삼성사(三聖祠)가 구월산(九月山) 성당리(聖堂里) 소증산(小甑山)에 있으며,【단인(檀因)·단웅(檀雄)·단군(檀君)의 사당이 있다.】



-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구도(舊都)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그의 41대 손(孫) 준(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滿)이 망명(亡命)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가지고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검성(王儉城)【곧 평양부(平壤府)이다.】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 조선(?滿朝鮮)이었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나라의> 조명(詔命)을 잘 받들지 아니하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이를 쳐서, 진번(眞蕃)·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쪂)의 4군(郡)으로 정하여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에 이르기를, “현토와 낙랑은 본래 기자(箕子)를 봉한 곳인데, 소제(昭帝) 시원(始元) 원년에 임둔·낙랑으로써 동부 도호(東府都護)를 설치하였다.



- 지난 날에 문화현(文化縣) 단군(檀君)의 사당을 평양에 옮긴 뒤에, 괴이한 기운이 뭉치어 마치 귀신 모양 같은 것이 있어 밤에 다니며 검은 기운이 진(陣)을 이루고 행동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바라보고 놀라고 괴이하여 숨어 피하고, 이것으로 전파하여 고하였습니다.’ 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병의 발생이 실로 단군의 사당을 옮긴 까닭이다. 여기(쪸氣)가 먼저 구월산의 산간 민호에서 일어나 점점 문화·장연·재령·신천 등지에 번지어 전염되어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으니, 민생이 불쌍하다.’ 하였습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세종께서 마음에 극히 아프게 여기어 전의 부정(典醫副正) 김여생(金麗生)을 보내어 그 도의 의원 5인을 거느리고 마을에 돌아다니며 여러 방법으로 구료(救療)하고 또 감사에게 전지(傳旨)하기를, ‘문화·장연·황주·재령·신천 등지 주현(州縣)에 모두 여제단(쪸祭壇)을 설치하고 전물(奠物)을 풍성하게 갖추어, 여러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지성으로 재계하고 제사를 행하여 여기(쪸氣)를 사라지게 하라.’ 하였으니, 그 구제하는 법이 사책에 펴서 있으므로 성려(聖慮)가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오랠수록 병은 더욱 치성하여 다른 지방에 파급되고 남김없이 전염하여 죽으니, 만연하는 해(害)가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마음에 이리저리 생각한 지가 오랩니다. 지금 사초(史草)를 편수하는데 무신년에 이르러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한 유관(柳觀)이 상서하기를, ‘문화현(文化縣)은 신의 본향입니다. 부로(父老)들이 말하기를, 「구월산(九月山)은 이 고을의 주산(主山)인데 단군 때에는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 이름하였다.」 하였습니다. 산의 동쪽 재[嶺]가 높고 커서 연접하였는데 그 산 허리에는 신당(神堂)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 창건하였는지 알지 못하나, 북쪽 벽에 단인 천왕(檀因天王)이 있고 동쪽 벽에는 단웅 천왕(檀雄天王)이 있고 서쪽 벽에는 단군 부왕(檀君父王)이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삼성당(三聖堂)이라고 칭하고 그 산 아래에 사람이 사는 곳도 또한 성당리(聖堂里)라 칭합니다. 당의 안팎에는 까막까치가 깃들이지 않고 고라니와 사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단군이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는데 이 산 아래에 삼성당이 지금도 남아 있으니, 그 자취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고을의 동쪽에 장당경(藏唐京)이라고 이름하는 땅이 있는데, 부로들이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하였던 곳이라 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단군이 처음 왕검성에 도읍하였으니 지금 마땅히 기자(箕子) 사당에 합하여 있어야 한다.」 고 합니다. 대개 단군이 요(堯)와 더불어 아울러 섰는데 기자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이니, 어찌 아래로 기자 사당에 합하겠습니까?’ 했습니다.
신 이선제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상고하니 이에 이르기를,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인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있어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탐구(貪求)하므로 아비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弘益人間] 만하였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니, 환웅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에 내렸으니, 곧 지금의 묘향산이다.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를 거느리고 곡식을 주장[主穀]하고, 명을 주장[主命]하고, 병을 주장[主病]하고, 형벌을 주장[主刑]하며, 선악을 주장[主善惡]하니, 무릇 인간의 3백 60여 가지 일을 주장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게 하였다. 그때에 한 곰[熊]과 한 호랑이[虎]가 있어 같은 굴에서 사는데 항상 신(神)인 환웅에게 기도하여 화하여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다. 환웅이 영애(靈艾) 1주(炷)와 마늘 20(枚)매를 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을 얻으리라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이것을 얻어 먹고 삼칠일(三七日)을 기하였더니,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으나 호랑이는 사람의 몸을 얻지 못하였다. 웅녀(熊女)가 혼인을 할 데가 없어서 매양 단수(檀樹) 아래에서 잉태가 있기를 주언(呪言)하였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화하여 혼인하자,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호를 단군 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당요(唐堯)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에 평양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칭하였다. 또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에 옮기어 어국(御國)한 지 1천 5백 년에 주나라 무왕이 즉위하여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이 또 장당경(藏唐京)에 옮기었다가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는데, 1천 9백 8세를 수하였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단군이 평양을 떠난 지 4백여 세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신이 되었으니, 여기에서 임금 노릇을 하였고 여기에서 신이 되었으니 이 땅을 싫어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기자가 40대(代)를 전하고, 연나라 사람 위만이 왕검성에 도읍하여 2세(世)를 전하였고, 고구려는 7백 5년을 전하였으며, 신라는 병합한 지 2백여 년이고, 고려 왕씨는 4백여 년을 전하였으니, 단군이 평양을 떠난 것은 아득하게 먼데, 평양을 돌아보고 연연하겠습니까? 또 산신이 되어 토인(土人)의 높이고 제사하는 것을 받았으니 어찌 평양에 즐겁게 옮기어 동명왕(東明王)과 사당을 함께 하려고 하겠습니까? 《삼국유사》의 주(註)에서 이른, 환인 천제(桓因天帝)는 곧 유관(柳觀)의 상서에서 말한 단인(檀因)이고, 환웅(桓雄)은 천제의 서자(庶子)이니, 곧 이른바 단웅(檀雄)이라 하겠습니다. 상고 사람들이 그 근본을 잊지 못하여 사우(寺宇)를 창립하고 환(桓)을 고쳐 단(檀)으로 하였으며, 삼성이라 호칭하였으니, 과연 어느 시대에 창건하였는지 알지 못합니다. 지난번에 단군을 평양으로 옮기었는데 이성(二聖)은 어느 땅에 두었겠습니까? 이것은 단군이 토인(土人)에게 원망을 일으킬 뿐 아니라 이성(二聖)도 반드시 괴이한 것을 마음대로 하고 여역을 지어 백성에게 해를 끼칠 것입니다. 신이 처음에 오성우(吳成祐)의 말을 듣고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었는데, 지금 유관의 소(疏)를 보니 말 뜻이 서로 모순되지 않으니, 어찌 다시 의논하여 신의 뜻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예전 당(堂)을 수리하고 새로 신상(神像)을 만들기를 엄연히 중국 조천궁(朝天宮)에 있는 열수(列宿)의 상과 같이 하거나 또 삼차하(三叉河) 해신(海神)의 모양과 같이 하여 좌우에 나누어 앉히어서 존경하기를 예전과 같이 하며, 조관(朝官)을 명하여 보내어 성당(聖堂)에 고해서 가만히 돕도록 빌면 어찌 밝게 이르러[昭格] 복을 내리는 것이 없겠습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천제가 단수(壇樹) 아래에 내려와 단군을 낳았다는 것은 일이 괴탄(怪誕)한 데에 가까와서 족히 믿을 것이 못 된다 합니다. 그러나 신인(神人)의 출생은 상민(常民)과 다릅니다. 간적(簡狄)은 현조(玄鳥)의 알[卵]을 삼키고 설(契)을 낳았고, 강원(姜嫄)은 천제의 발자국을 밟고 후직(后稷)을 낳았으니, 이것은 중국의 상고의 일입니다. 어찌 용이하게 의논하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일로 말하면 신라 처음에 양산(陽山) 기슭에 말이 있어 꿇어 울므로 사람이 가서 보니 말은 홀연히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大卵]이 있었습니다. 깨뜨리니 어린 아이가 껍질 속에서 나왔는데, 나이 10여 세가 되니 대단히 숙성하였습니다. 육부(六部) 사람들이 신이(神異) 하게 여기어 추존하여 세워서 임금을 삼았으니, 곧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입니다. 북부여(北扶餘)의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여기에 나라를 세우겠으니 너는 피하라.’ 하였으니, 이것은 동명왕이 장차 일어날 조짐입니다. 한 남자가 있어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 하고, 하백(河伯)의 딸을 압록강 강변의 실중(室中)에서 사통하였습니다. 왕이 실중에 가두어 두었는데, 해가 비추므로 몸을 이끌고 피하니 해의 그림자가 또 좇아서 비추었습니다. 인하여 잉태하여 큰 알 하나를 낳으니 왕이 버려서 개와 돼지를 주니 먹지 않고, 길 가운데에 두니 소와 말이 피하고 들새들이 날개로 덮어 주었습니다. 어미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남자 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는데 이가 고구려 시조 고주몽(高朱蒙) 곧 동명왕입니다. 이것이 모두 상류(常類)와 달라서 혹자들이 함께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적(古籍)에 써서 사람들이 다른 말이 없는데 어찌 홀로 단군을 괴이하다 하여 강구하지 않겠습니까?



- 전대(前代)에서 민심을 얻어 긴 역년(曆年)을 누리게 된 효험을 가지고 반복해 생각하시고 순전히 생민의 산업을 기르고 민간의 숨은 고통을 구휼(救恤)하는 것을 일삼아 하신다면 본조의 성업이 곧장 단군(檀君)·기자(箕子)와 삼국(三國), 그리고 전조(前朝)와 더불어 함께 아름다울 것입니다.



- 묘향산(妙香山)에 이르러서는 단군(檀君)이 일어난 곳이며, 구월산(九月山)에는 단군사(檀君祠)가 있고, 태백산(太白山)은 신사(神祠)가 있는 곳이며,



- 승정원(承政院)에서 전지(傳旨)를 받들어 평안도 관찰사에게 치서(馳書)하기를,
“평양(平壤)의 단군(檀君)·기자(箕子)와 고구려(高句麗) 시조(始祖)의 사우(祠宇)는 장벽(墻壁)이 무너지고, 단청(丹靑)이 더러워져서 보기에 딱하니, 중국 사신이 회환(回還)하기 전에 수치(修治)하되 폐단이 없도록 힘쓰라”
하였다.


- 조선 단군 신주(朝鮮檀君神主)를 조선 시조 단군지위(朝鮮始祖檀君之位)로, 후조선 시조 기자(後朝鮮始祖箕子)를 후조선 시조 기자지위(後朝鮮始祖箕子之位)로, 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를 고구려 시조 동명왕지위(高句麗東明王之位)로 고쳐 정하였다.



- 예조(禮曹)에서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의 관문(關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평양부(平壤府)에서 단군전(檀君殿)·고구려 시조전(高句麗始祖殿)·기자전(箕子殿)·구진 익수(九津溺水)·평양강(平壤江)의 제사와 문선왕(文宣王)의 석전제(釋奠祭)를 항상 지낼 때 모두 시복(時服)을 착용(着用)하니, 성복(盛服)하여 제사를 받든다는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또 영숭전(永崇殿)의 제복(祭服)도 또한 부족하니, 청컨대 봉상시(奉常寺)로 하여금 제복(祭服)을 만들어 보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임금이 친히 영숭전(永崇殿)에 제사하고, 마침내 단군(檀君)·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기자전(箕子殿)에 나아가 제사를 행하였다. 승지(承旨) 홍응(洪應)에게 묻기를,
“고구려 시조가 누구인가?”
하니, 홍은이 대답하기를,
“고주몽(高朱蒙)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三國) 중에서 고구려가 막강하였다.”
하였다.



- 조선 시조(朝鮮始祖) 단군(檀君)과 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 동명왕(東明王)의 신위(神位)의 사이에 설치하고



- 우리 나라의 문적(文籍)은 단군(檀君) 시대로부터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역력히 상고할 수가 있으니, 다른 번국(蕃國) 요(遼)·금(金)·서하(西夏)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 우리 나라에서는 단군(檀君)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겨우 7대(代)뿐입니다.



- 단군(檀君)의 신사(神祠)는 전에 어느 곳에 있었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이전하였느냐?



- ‘단군(檀君)의 천왕당(天王堂)은 본래 구월산(九月山)의 상봉(上峯)에 있었는데, 뒤에 패엽사(貝葉寺)가 그 아래에 있다 하여, 당(堂)이 불찰(佛刹)의 위에 있음은 마땅하지 아니하여, 절[寺]의 앞 봉우리에 옮겼다가 뒤에 또 산기슭에 옮겨, 천왕(天王) 3위(三位)를 설치하였으며,



- ‘단군(檀君)의 천왕당(天王堂)은 본래 구월산(九月山)의 상봉(上峯)에 있었는데, 뒤에 패엽사(貝葉寺)가 그 아래에 있다 하여, 당(堂)이 불찰(佛刹)의 위에 있음은 마땅하지 아니하여, 절[寺]의 앞 봉우리에 옮겼다가 뒤에 또 산기슭에 옮겨, 천왕(天王) 3위(三位)를 설치하였으며,



-《관서승람(關西勝覽)》에 문화현(文化縣) 고적(古跡)을 기재하기를, ‘구월산(九月山) 아래 성당리(聖堂里)에 소증산(小甑山)이 있는데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의 삼성사(三聖祠)가 있고, 구월산(九月山) 마루[頂]에는 사왕사(四王寺)가 있는데, 옛적에 성수[星宿]에 초례(醮禮)하던 곳이다.’



- “백성이 모두 삼성당(三聖堂)을 평양부(平壤府)에 옮기고 치제(致祭)하지 않자 그 뒤로부터 악병이 일어났다고 하니, 이는 비록 괴탄(怪誕) 무계(無稽)한 말이나, 그러나 옛 기록에, ‘단군(檀君)이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화하여 신이 되었다.’ 하였고, 지금 본도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에 그 묘당(廟堂)이 있으며, 또 전에는 향(香)을 내려 치제하였으니, 청컨대 백성의 원하는 바에 따라 평양의 단군묘(檀君廟)의 예(例)에 의하여 해마다 봄·가을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제사를 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단군(檀君)이 요(堯)와 함께 즉위한 때부터 기자 조선(箕子朝鮮)·신라(新羅)가 모두 1천 년을 누렸고 전조(前朝)의 왕씨(王氏) 또한 5백 년을 누렸습니다.



하늘이 신조(神祖)에게 단군을 계승케 하여
성군의 다스림 기주(箕疇)에 근본했네.
창덕궁 안에는 요일(堯日)이 밝았고
흥인문 밖에는 순풍(舜風)이 훈훈해라.
씩씩한 우림군(羽林軍)은 슬기롭고 용감하여
영특한 한림원(翰林苑)은 성리학을 베풀었네.
외로운 마음엔 연기 일고 바다는 잠잠한데
천고의 화산은 상서 구름 안고 있네.


- ‘기자(箕子)의 분묘[墳]와 사당[廟]이 있습니까? 우리가 배알하려고 합니다.’ 하므로, 대답하기를, ‘분묘는 멀리 성밖에 있어 지금 도달할 수는 없으나, 사당은 성안에 있습니다.’ 하니, 말하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알묘(謁廟)하겠습니다.’ 하고, 즉시 기자묘(箕子廟)에 나아가 배례(拜禮)를 행하였습니다. 묘문(廟門)을 나와 단군묘(檀君廟)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는 무슨 사당입니까?’ 하므로 말하기를, ‘단군묘(檀君廟)입니다.’ 하니, 말하기를, ‘단군(檀君)이란 누구입니까?’ 하기에 ‘동국(東國)에 세전(世傳)하기를, 「당요(唐堯)가 즉위(卽位)한 해인 갑진세(甲辰歲)에 신인(神人)이 있어 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오니, 중인(衆人)이 추대하여 임금으로 삼았는데 그 뒤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죽은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니, 말하기를, ‘내 알고 있습니다.’ 하고, 드디어 걸어서 사당에 이르러 배례(拜禮)를 행하였습니다. 사당 안에 들어가 동명왕(東明王)의 신주(神主)를 보고 이르기를, ‘이 분은 또 누구입니까?’고 하기에, 말하기를, ‘이 분은 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 고주몽(高朱蒙)입니다.’고 하니, 이르기를, ‘단군(檀君) 뒤에 어떤 사람이 대(代)를 이어 섰습니까?’ 하기에, 말하기를, ‘단군의 뒤는 바로 기자(箕子)인데, 전(傳)하여 기준(箕準)에 이르러 한(漢)나라 때를 당하여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준(準)을 쫓아내고 대신 섰으며, 기준(箕準)은 도망하여 마한(馬韓) 땅에 들어가 다시 나라를 세웠는데 도읍(都邑)하던 터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단군(檀君)·기자(箕子)·위만(衛滿)을 삼조선(三朝鮮)이라고 이릅니다.’ 하니, 이르기를, ‘위만(衛滿)의 후(後)는 한(漢) 무제(武帝)가 장수를 보내어 멸망시킨 것이 한사(漢史)에 있습니다.’

-“중국 사신이 평양(平壤)에 도착하여 기자묘(箕子廟)를 배알하여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또 단군묘(檀君廟)를 배알하여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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