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린풍자쇼] 뇌조의 길2019.01.15 PM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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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조의 길

 

 

동물의 세계는 정말 재밌지. 먹고 먹히는 추격전, 영역을 둘러 싼 결투, 그리고 10살 꼬맹이에게도 보여줄 수 있는 짝짓기 신으로 가득 채워지잖아. 최근에 본 영상은 그 중에서도 아카데미상을 받을 만한 멋진 작품이었어.

 

큰 뇌조라 불리는 닭과 꿩을 뒤섞은 듯한 새의 이야기였지. 앵그리버드의 모델이라고 하네. 이 녀석이 화가 나면 드라마틱한 신체 변화가 일어나. 평범했던 목은 두툼해 져. 카학. 그리고 뒤꽁무니를 바짝 세워서 수풀처럼 펼쳐. 이걸 뭐라 표현해야 할까...그래! 딱 풀발기한 거시기의 모습! 시커먼 터래기를 배경으로 크고 굵고 거대한 것이 곧추 서 있지.

 

이 녀석이 괜히 화가 났겠어? 여러 마리의 암컷들과 뜨거운 날들을 보내기 위해선 자기의 영역을 지켜야지. 절대 발기력이 떨어져선 안 된다고. 자기 자릴 노리는 다른 남정네와 결투에 들어가는 거야. 꽉꽉꽉꽉.

 

그냥 둘이 싸우는 걸로 끝났다면 평범한 동물다큐였을 거야. 그러나 이 작품은 달랐지. 둘이 치고 박고하는 가운데 하늘에서 등장하는 검은 독수리. 순식간에 침입자에게 내리꽂히고 적막이 찾아오지. 주인공은 완전 행운아야. 독수리께서 친히 자기 경쟁자를 제거해 주셨으니.

 

근데 우리 주인공은 멈추지 않아! 상대가 독수리건 뭐건 내 영역에 들어온 이상 싸워야 하는 상대지. 당당하고 경건한 큰 뇌조의 모습, 그리고 황당해 하는 독수리의 표정은 이 작품을 극한으로 승화시키지. 결말은 비극으로 치달아. 독수리 발톱에 주인공은 구멍이 나고 1+1 호식이 두 마리 치킨 엔딩을 맞지.

 

뇌조가 뇌절한 걸까? 진정한 분노조절장애? 목숨보다 가오가 더 중요한 딸쟁이? 한 편의 코미디지. 자기 주제 생각 못하는 띨띨한 바보가 어떤 결말을 맞는지 우리에게 확실히 전달해 주잖아.

 

그런데 뭔가 불편한 것이 내 불알을 걷어차고 있어. 뇌조 잘 봤지? 너는 높으신 분들 넙죽넙죽 잘 모셔야 돼. 아니면 재처럼 되는 거야. 어구어구 말 잘 듣는다. 평생 고분고분 착하게 살렴. ....빌어먹을!

 

큰 뇌조는 적어도 일생일대 짝짓기 숙원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잖아! 근데 머리 좀 찬 인간이라는 나는 대체 뭐야? 목숨 바칠 꿈이 있던가? 없어! 사랑하는 사람이 있던가? 없어! 불의에 분노로 들끓는 용기가 있던가? 없어! 아무 것도 없어! 그저 숨어서 눈치만 보고 있지.

 

일본군 총칼과 고문 앞에서도 맞선 유관순누나. 자기는 그렇게 부끄럽다고 말했지만 후쿠오카 수용소에서 죽어간 부끄럽지 않은 윤동주. 천안문 탱크를 막아선 이름 모를 분, 그리고 십자가와 창끝에도 끝까지 사람으로 죽었던 예수까지. 그 밖에 내가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뇌조들의 삶이 정말 멋있다고!..........

 

나는 큰 뇌조가 될 수 있을까? 뭔가를 정말 미치도록 사랑한다면 될 수 있을 거야. 근데 평생 방구석 모쏠이 그럴 가능성은 적거든. 빌빌 대며 살아가는 나 자신이 싫은 건 아니야. 이런 나라도 사랑스럽다고. 뺄 때 꼽을 때를 알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지 않았겠어?

 

그래도 조금은 폼 나고 싶어. 큰 뇌조는 못되더라도 울트라 스몰 뇌조 정도는 되고 싶다고. 깐죽대는 건 할 수 있지 않을까? 앞에선 눼에눼에 하더라도 뒤에선 궁시렁 거리는 거. 만원이라도 손에 쥐어주면 어이쿠 몸과 마음을 받쳐 모시겠습니다 라고 해도 양심에 찔리면 도로 토해낼 수 있는 정도.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거 같다고!

 

뇌조의 길은 멀고 험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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