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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풍자쇼] 당신의 노예력을 보여주세요2019.12.01 PM 10:27
당신의 노예력을 보여주세요
와우. 일요일 같지 않은 주말 밤을 보내고 있어. 비를 사랑하지만, 겨울에 이렇게 내리는 비는 좀 그래. 허이허이, 지구온난화야 물러나라!
이 울적한 기분에 충격파를 더 하는 건 바로 일 때문이지. 하하하. 하루종일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어야 하는 걸! 왜? 엄마 일 때문에! 엄마가 성당에서 분과장을 맡고 있걸랑. 코호호. 이에 따른 문서업무는 제가 다 하고 있습니다. 끄아악!
도와드리고 좋네. 이 불효자식, 효도 하거라! ...맞아. 아들이 어머니 도와드리는 것이 인지상정. 그런데 말입니다... 보고서를 쓸 수록 마음이 불편해. 내용은 주먹구구에, 계산 안 맞는 회계에. 엄마가 하필 복지분과장을 맡았거든. 복지가 뭡니까? 매달 50만 원 이상 쓰는 민감한 곳! 이런데 보고서가 허술해서야 되겠어?
처음엔 나도 고집 좀 부렸지. 엄마, 이거 계산이 안 맞다.. 엄마, 12일 토요일 아니다. 21일 잘못 쓴 거 아니가? .. 엄마, 성탄기념 상품권 지급 몇 장 됐는데? 대충 적어라 마...아니 이걸 어떻게 대충 적는데! 니가 계산해서 적으라매! 엄마가 알지, 내가 어떻게 아노! ...난 포기했어. 집안 최하위 서열 처지에 어떻게 최강자님과 싸우겠어. 다만 미안할 따름이야. 이런 보고서 받는 사무장에게.
여기서 잠깐. 사태가 이렇게까지 된 이유는 누구 때문일까? 흐음...보고서 같지 않은 보고서 작성한 엄마? 아니면 엄마가 얼마나 회계, 보고서작성에 서툰지 간파하지 못한 사무장? ...평범한 제 3자가 봤다면 분명 엄마 탓을 했겠지만, 전 다르죠. 예! 가족 아이가! 핫. 끈끈한 혈연정신으로 봐주기는 계속 됩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엄마보고 뭐라 할 순 없잖아. 지금 저보고 패드립 하라는 겁니까? 너 퇴장! ...사무장이 잘못했죠. 왜 적합하지 않은 사람 뽑아서 자기가 고생해! ...하긴 사무장이 어떻게 알았겠어. 엄마가 이렇게까지 손 놓을 줄이야.
올 초만 하더라도 장밋빛 미래만 기다리고 있었지. 그땐 엄마도 한 의욕 했었거든. 평소에 성당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자기주장 강하고. 리더로서의 카리스마랄까, 그런 게 있었어. 그래서 분과장 낙점! 결과는요! 하....분명 사무장이 보고서 처음부터 다시 고쳐 쓰고 있을 거야. 예산에 맞추느라.
다 끝나서 하는 얘긴데, 엄마도 이번 달을 끝으로 짤렸어! 브라보! 더 이상 수준미달 보고서 안 써도 된다! 집안싸움 안 해도 된다! 양심의 가책 안 느껴도 된다! 난 이렇게 기쁜데, 엄마는 좀.. 그런가봐. 본인의 한계를 체험했으니. 다른 해고당한 구역장하고 6시간을 이 주제로 수다 떨더라. 오 마이 갓.
아무튼, 이번 일로 선택에 대한 문제에 대해 다시 보게 됐어. 그렇게 사악하게 보이던 면접관들이 이해가 되더라고. 왜 그렇게 1차, 2차, 3차, 심지어 어떤 곳은 4차 간부면접까지 있는지. 거르고 걸러야만 한다! 잘못 뽑으면 고생은 우리가 다 한다! 물론 이 기대가 너무 커져서 최근엔 중고 같은 신입만 찾게 됐지만.
어쩌면 뽑는 쪽, 그 분들이 더 떨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입이면 그런 위험 감수 다 하고 배팅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정자부터 난자까지 깡그리 새로 가르치겠다! 일본 기업은 이런 마인드로 신입 뽑는다며? 이거만큼은 그 쪽이 부럽군.
그랬어. 우리나라 인력시장은 마치 산업용 전기 같아. 대기업에서 쪽쪽 빨아먹기엔 최적화 되어 있는데, 그 비용은 국민전체가 부담하는, 가정용 전기는 비싸서 쓰지도 못하는 이런 상황. 이걸로도 모자라서 열정까지 묻죠. 왜 지원하셨나요, 우리 회사의 비전과 지원자의 장점을 연결해서 장래 포부를 밝히세요. 헐.
내가 인사담당자라면 능력도, 열정도 보지 않을 거야. 핫. 자고로 능력 좋은 캐릭 치고 유지비 적게 드는 경우가 없어. 그렇다고 열정으로만 뽑으면? 열정페이의 잘못된 케이스가 바로 우리 엄마지. 죄책감 느끼며 3달 만에 해고시켜야 하는 상황! 열정만으론 보고서를 쓸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떤 기준으로 뽑아야 하나? 바로 노예력! ...찰싹! 죄송합니다. 말이 헛나왔네요. 크흠. .. 어떤 명령이든 받아들이는 순수함과, 야근에도 군말 않는 끈기! 절대 나대지 않는 조용함! 이 모든 것을 합쳐서 ...어....노.... 인성이라고 하자. 그래 인성!
착한 사람 치고 일 못하는 사람 못 봤어. 쥐어 짜내고 쥐어 짜내도 덤덤하게 받아들이죠. 게다가 조직생활에서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있잖아. 인간군상! 이렇게 착한 분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내 정치질 안 해, 뒤에서 호박씨 안 까, 얼마나 좋아.
같이 일하면 즐거운 사람. 성실한 직장인으로서 말이 통하는 사람! 조용하면서도 자기 할 일 다 하는 사람! 물론 그 와중에 본인 속은 다 타들어 갔을지도 모르지만 상관할 바 있나! 히히! ....아....이래서 내가 취업에 실패했구나. 전형적인 방구석 찐따랑 누가 일하고 싶겠어. ...그래도 인성이 나쁜 건 아닌데. 누구보다도 노예력 높...이 아니라 성실한데.
잠깐만.....앗! 내가 면접에서 계속 떨어진 이유는 찐따력 때문이 아니었어! 진짜 원인은 진정으로 노예력을 전달하지 못했을 뿐! ... NCS를 바탕으로 경험을 말하라? 적극적이고 웃는 모습으로 임해라? ...아니. 아니야! 이제 면접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할 때입니다. 당신의 노예력을 보여주세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합격 열쇠입니다.
야근이 제일 좋아요! 시키는 일은 목숨 걸고 반드시 달성합니다! 이래도 안 통한다? 여자친구가 애 뱄다고 해. 여친 없다고요? 상상으로 만드세요. ..모셔야 할 노부모,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다고 해. 없으면 주인집 아줌마라도 불러. ..난 사슬에 얽힐 준비가 돼 있습니다! 완벽히...
그리고 면접장을 나서며 속삭이는 거야.. 나는 노예가 되지 않는다! 세상에 정규직이 될 것이다. 둠칫둠칫. 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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